6회

스위트 홈

샴푸의 요정을 가진 가족들이 사는 이층짜리 단독주택은 지하철 노선의 끄트머리에 있는 역에서 내려 이십 분 넘게 걸어가야 하는 곳에 위치했다. 이심은 교통 입지에 합격점을 주기는 힘들겠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깨진 곳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인도의 보도블록을 밟으며 띄엄띄엄이나마 자리한 가로수를 보자 살 만한 동네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낡았지만 비교적 깨끗하게 관리된 다세대주택과 저층 빌라가 이어지던 길을 십 분쯤 걷다가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꺾자 시야에 공공 의료 센터가 들어왔다. 건물의 규모는 이심이 근무하는 센터의 세 배는 됨 직했다. 그러니 최소한 공공의의 수도 두 배는 넘을 것이다. 이비인후과 전문의도 확보하고 있을 터였다. 센터의 입구에는 경총의 취임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으므로 센터장이 어떤 성향을 가졌을지는 짐작이 갔다. 이심은 습관적으로 한숨을 쉬었지만 이내 선거 결과에 관해 언급하던 팀장의 태도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느 센터에서 일한들 마찬가지겠지. 이심은 소리에게 곧 도착할 거라고 메시지를 보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잠시 후에 길쭉한 쇼핑백을 든 정장 차림의 남성이 잰걸음으로 이심을 스쳐지나갔는데, 그의 모습을 보자 퍼뜩 이런 동네의 가정에 초대받아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가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수중에 체면을 차리기 위해 낭비할 수 있는 돈은 없었다. 자신과 가족이 되려는 사람이라면 지갑 사정에 관해서도 알아두는 게 맞겠다고 여기며 이심은 창피해하지 않기로 했다.

암청색 대문은 이미 한 뼘쯤 열려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 일층 현관문의 초인종을 누르자 로아의 대답이 가장 먼저 들렸다. 문을 열어준 것은 자매 중 언니 쪽인 소리였다. 소리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얼른 숙여 인사하고는 자기 엄마와 동생 사이에 섰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어르신까지 네 여성과 인사를 나누고 신발을 벗는 동안, 이심은 가히 집안을 점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포근하고 달착지근한 냄새에 취해가고 있었다. 계란과 설탕이 든 반죽이 부풀고 익어가는 냄새가 분명했다. 엄마가 늦게 출근하는 날이면 곧잘 갓 구운 빵을 사먹곤 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누군가 당시의 사진을 눈앞에서 흔들어대는 것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 집에 들어온 것 같은데요.”

애월씨가 조금 전에 카스텔라를 구웠거든요.”

그렇게 말한 이는 이심 또래의 여성으로 연노랑 스웨터 위에 세진 / 교사라고 적힌 명찰을 달고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소리와 소리의 동생 로아도 명찰을 지니고 있었다. 지난 무도회에서 받은 명찰을 버리지 않고 모아둔 게 오늘을 위해서였던 것 같다면서 세진은 이심에게 실내화를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애월씨가 베이킹을 마무리할 동안 우선 집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우선 저희 집의 자랑부터요.”

세진이 현관에서 왼편에 있는 욕실의 문을 열자 샴푸의 요정이 보였다. 반신욕 전용 욕조에 앉아서 고개를 젖히면 머리를 담글 수 있는 반구형 세면대가 달려 있고, 그 위로 투명한 덮개를 씌워 물이 튀는 것을 막는 모델이었다. 욕조 안에 몸을 푹 담은 채 덮개의 바깥쪽 실리콘 패킹을 이마와 귀 라인에 잘 맞춰서 쓰기만 하면 그곳이 극락이라며 세진은 웃었다.

간혹 자동으로 등 밀어주는 기능이 있는 샤워실 있잖아요. 과장이 아니라 그거보다 한 스무 배는 개운해요. 삼 분짜리 두피 마사지 코스도 있는데 한번 써보실래요? 와주신 김에요!”

세진이 재차 권하자 못 이기는 척 두피 마사지를 받아보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분한 판단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어서 이심은 기계 안에 몸만 뉘어보기로 했다. 욕조 안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전원 스위치를 누르자 등이 닿는 부분의 각도를 조절하는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등을 쭉 펴고 기대앉은 이심은 이대로 하반신을 따끈한 물에 담근 채 두피 마사지를 받는 상상만으로도 몸이 노곤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훈민씨가 있었으면 또 가끔밖에 못 쓴다고 초 치겠지만요.” 세진은 싱긋 웃으며 욕조의 턱에 걸터앉았다. “그래도 죽도록 지치는 날에 그 가끔이 있는 게 어딘데요. 서로서로 배려하고 아껴가며 쓰니까 설치한 지 십 년이 넘도록 고장 한번 없이 쓰고 있기도 하고요.”

이심은 그 말을 듣고서야 쌍둥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동시에 그들과 한 욕조를 공유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욕조에서 일어나는 이심에게 세진이 손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이심이 말했다. “쌍둥이 분들은 오늘 안 계시나요?”

오고 있어요. 자세한 얘기는 본인들이 와서 할 테니까, 선생님께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급히 처리할 일이 생겨서 나갔다는 말씀만 드릴게요.”

어느새 욕실 문 앞으로 온 소리는 가만 세진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이제 드시러 오시래요.” 하고 말했다.

한 달밖에 안 지났지만 그새 키가 좀 큰 거 같다, 맞니?”

이심은 소리를 바라보며 물었지만 소리는 눈을 깜빡거리더니 도움을 청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 엄마를 바라보았다.

맞아요. 선생님 눈썰미가 정말 좋으시네요. 아유, 키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인데 아직 속은 이렇게 애기라니까요.”

소리의 어깨를 끌어안은 세진은 뭐가 또 그렇게 부끄럽니. 너 선생님한테 물어볼 것도 있다고 해놓고!” 하며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그러자 아름드리나무의 푸른 잎이 만든 그늘 사이로 살그머니 침투한 햇살이 반짝거리듯 수줍음과 긴장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소리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이심은 소리의 뽀얀 볼을 간질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수줍음에 어쩔 줄 몰라 할 게 빤한 아이를 고려해서 잠자코 모녀를 따라 식탁 앞으로 향했다.

식탁의 한가운데에 놓인 것은 단순한 카스텔라가 아니었다. 그 위에 생크림을 바르고 앙증맞은 딸기 장식을 더한 케이크였다. 애월씨가 걷었던 소매를 풀며 신선한 크림으로 직접 친 생크림이라고 말하자 이심의 입 밖으로 감탄사가 비어져나왔다. 지난 십 년 동안 케이크를 먹은 일은 손에 꼽았다. 하물며 누군가 자신을 위해 직접 만든 생크림 케이크를 먹을 기회는 전혀 없었다.

밀가루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만한 양의 신선한 크림에다 생딸기라니. 과일이란 계절에 한 번쯤 스스로에게 주는 상으로 작은 팩에 담긴 냉동 베리류를 골라 아껴 먹는 정도였으므로 이심은 생딸기의 가격이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다만 지난 한 주 동안 이 가족이 식비 절감을 위해 갖은 애를 다 썼을 것이라는 사실만 짐작할 뿐이었다. 애월씨가 잘라준 케이크에서는 여섯 가족의 간절한 기대와 바람이 응축된 맛이 났다. 이심은 살짝 목이 메어서 세진이 건넨 홍차로 입술을 축였다. 차는 은은한 꽃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식사 준비는 아무래도 부담되실 것 같아서 차를 마시자고 말씀드렸던 건데, 이렇게까지 준비해주셔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맛있게 드셔주시면 그게 제일이죠. 아무래도 계란을 못 넣다보니까 맛이 좀 덜할 텐데 입맛에 맞으세요?” 애월씨가 물었다.

. 제가 조금만 더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으면 아마 지금쯤 오열하고 있었을 거예요.”

이심의 대답에 외려 애월씨가 눈가를 훔쳤다. 그러자 입가에 크림을 잔뜩 묻힌 채 오물거리던 로아가 할머니, 할머니 하고 부르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 손을 뻗었다. 바둥거리는 로아의 몸짓에 웃음을 되찾은 애월씨가 아이의 손에 다시 포크를 쥐여주며 옛날 생각이 나서 그렇다고 말했다.

우리 로아가 태어나기 전에, 소리가 아직 세진이 뱃속에 있었을 때 생각이 나서 말이야. 그때는 겨울부터 봄까지 딸기를 듬뿍 넣은 케이크를 정말 원 없이 만들었었거든.”

너무 좋았겠다고 로아가 박수를 쳤다. 이미 자기 몫의 케이크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로아는 소리에게 한 입만 나눠달라며 조그만 입을 벙긋거렸는데 세진에게서 자꾸 언니 거 뺏어 먹으면 못써.” 하고 한소리 듣더니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처음에는 살짝 토라진 것에 불과했지만 어른들의 시선을 한데 받자 밀려드는 서러움을 표현해버리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듯, 로아는 돌연 턱을 움찔움찔 떨면서 울음을 터뜨리려는 자세에 돌입했다. 조그마한 얼굴 위로 드러나는 감정의 격랑이 어찌나 깜찍한지 이심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그럼 이모가 나눠줄게, 로아야.” 하는 말이 나왔다.

아니에요, 선생님. 제가 나눠줄게요.” 소리가 얼른 자기 몫의 케이크 중 한 입을 로아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러고 남은 케이크를 먹더니 이제 어른들 얘기하세요.” 하고 깍듯이 인사까지 한 후에 동생을 데리고서 소파 쪽으로 향했다.

우리 소리는 참 의젓하기도 하지.” 애월씨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포크를 들었다. “우리 집에 오시거든 아무튼 식사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이런 특별식이야 힘들어도 끼니는 제가 책임을 지니까요.”

애월씨는 프로거든요.” 세진이 거들었다. “예전에는 이 집에서 쿠킹 스튜디오도 하셨어요.”

세진은 애월씨와 처음에 이웃으로 만났다고 했다. 소리를 가졌을 때 세진은 지독한 입덧에 시달렸고 만삭에 이를 때까지 따듯한 음식은 입에 대지도 못했다. 쿠킹 클래스에서 제철 과일로 디저트를 만드는 반도 운영하던 애월씨가 수시로 챙겨준 큼직한 딸기와 청포도,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멜론, 오렌지 같은 것들을 먹고 겨우 버텼다.

뱃속에 있을 때 그렇게 향긋하고 예쁜 것들을 많이 먹고 커서 우리 소리가 이렇게 착한 거 같아요.” 세진은 거실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는 소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애월씨 덕분에 저희 모녀가 산 거죠.”

그때야 나도 제주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사람이 고팠거든. 거기다 경총이 시민 수당 나눠주면서 한 일 년 반짝 호황이었을 때였어. 그때야 요즘 같지 않고 어디나 인심 좋았지 뭐. 안 그래요, 선생님?”

이심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저는 별로 실감을 못했던 것 같아요. 수업 듣기 바빴고, 게임 규제가 갑자기 심해지면서 유일하게 스트레스 풀어주던 게임은 하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고 그래서요.”

애월씨는 의사가 되기까지 얼마나 고된 이십대를 보냈겠느냐며 이심의 어깨를 쓰다듬더니 지옥 같던 팬데믹이 남긴 유산을 악착같이 누려야 한다고, 어서 집합가족을 이루자고 권했다.

샴푸의 요정도 써보고 말이에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수당 받자마자 그거 설치한 게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그랬나봐요. 종일 환자 보시는 선생님 피로 풀어드리라고.”

애월씨의 말을 들은 세진은 웃음을 참으려는 듯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왜 그러느냐는 애월씨의 질문에 결국 움찔거리던 입을 열고 말았다.

포장을 너무 잘하셔서요. 처음에 샴푸의 요정 설치할 때만 해도 중년의 로맨스를 꿈꾸셨다고 했잖아요. 서울 남자도 한 번은 만나보고 싶었다면서요.”

하이고 정말.” 애월씨가 세진을 흘겨보며 말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에 굳이 선생님 앞에서 그 얘기는 뭣하러……

이심은 친 모녀처럼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접시에 남아 있는 케이크의 작은 덩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언제 다시 먹을 수 있을지 모르는 크림의 감미로운 풍미와 딸기 씨가 톡톡 씹히는 느낌을, 과육의 신선하고 새콤달콤한 맛을 음미했다. 입을 닦으면서는 케이크의 탐스러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두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그랬다면 집합가족으로 편입하겠다고 처음 밝혔을 때 가족은 애완동물처럼 고를 수 없는 거라고 역정을 내던 아빠 앞에서 흔들어 보일 수 있었을 텐데. 일로니를 돈 주고 데려와서 돌보는 일은 나 몰라라 했던 사람은 잠자코 구경이나 하라고, 나는 이런 가족을 선택할 거라고.

세진이 얘기 신경쓰지 마세요.” 애월씨가 말했다. “괜히 긴장되니까 얘가 별 얘기를 다 해 정말.”

세진은 키득거리며 빈 그릇을 걷어갔고, 둘은 이번에는 서로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다. 기분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가족 편입을 결정해버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밀려들었으므로 이심은 버릇대로 물 한 잔을 마신 후에 거실 소파의 어린이들 사이로 자리를 피했다.

삼 인용 패브릭 소파는 앉는 순간 엉덩이에 닿는 쿠션이 쑥 꺼진 게 느껴질 만큼 낡은 것이었다. 로아는 텔레비전에서 어린이 퀴즈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이심이 재미있느냐고 질문하기에 앞서 먼저 이모, 우리집에는 롤러블 티비도 있어요!” 하고 외쳤다.

삼촌들이 가져왔지만 다 같이 봐요. 저기 금간 거는 금방 고칠 거래요!”

이심은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갈래머리 꼬마는 집안 어른들의 지시에 성실하게 따르는 것을 넘어서 현 상황의 중요성에 관해 누구 못지않은 이해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우리집에는 샴푸의 요정이 있어요, 롤러블 티비가 있어요, 같은 말을 로아는 낯모르는 사람에게 몇 번이나 반복해야 했을까. 후에 지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는 무슨 생각을 할까 싶어 입안이 썼다.

그 사이에 소리는 읽던 책의 책장을 덮더니 티 테이블 위에 올려진 노트에서 편지지를 꺼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심이 장난스레 편지의 내용을 훔쳐보려는 듯 상체를 기울이자 소리는 반사적으로 동작을 멈췄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한쪽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로아가 언니를 부르며 품에 안기자 소리는 한 팔로 동생을 꼭 안으며 이심에게 물었다.

선생님, 악성 천식도 고칠 수 있어요?”

요즘에는 천식이라고 불리는 범위가 전보다 굉장히 넓어졌지만, 잘 관리하면서 지내는 방법이 있지. 누가 악성 천식에 걸렸니?”

제 짝궁이요.”

소리는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눈치였지만 무슨 얘기인지 알려달라고 떼를 쓰는 로아를 달랜 후에는 다시 편지를 쓰는 일로 돌아갔다. 소리가 적고 있던 편지는 존경하는 원장님께로 시작하고 있었다. 아마 같은 반 아이들이 합심하여 영리 병원의 원장에게 읍소하는 편지를 쓰기로 한 모양이었다. 때로는 이심이 일하는 센터에도 그런 편지 묶음이 배달되었는데, 팀장은 심드렁한 어조로 정성을 표현하는 일에는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방법이 동원된다는 점이 흥미롭지 않느냐고 되물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어김없이 공공 의료의 방침과 원칙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훈시가 이어졌다.

소리에게 뭔가 힘을 내도록 해줄 말이 없을까. 이심은 이마를 긁적이며 고민하다가 펜을 쥔 소리의 작은 손등을 가로지르는 화상 자국을 발견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데었느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현관문이 열리고 훈민과 정훈이 들어오더니 이심을 향해 나란히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무도회에서 만났을 때처럼 세트로 구매한 양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오늘은 정장에 코트 차림이었다. 손부터 씻고 온 정훈은 늦은 것을 사과하며 다시 식탁 앞으로 가서 좀더 이야기를 나누기를 청했다. 훈민은 코트를 벗고 오더니 역시 선생님 오시는 날이라 그런지 오늘은 집안이 따듯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애월씨와 세진, 정훈까지 그의 눈치 없는 발언을 무마하려고 미소를 지었지만 정작 이심의 신경을 거스른 일은 따로 있었다.

훈민씨, 죄송한데요. 그 잔은 제가 차를 마시던 잔이었는데……

아이쿠, 그렇습니까?”

훈민은 입을 대고 있던 잔을 물로만 헹궈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잔을 이심 앞에 놓고서 그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자기가 원래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고, 꼼꼼한 것 하나는 타고난 사람인데 요 며칠 다리가 불편해서 정신이 산만하다는 것이었다.

이것 좀 보세요. 오른쪽만 부어서 이렇게 딱 봐도 양쪽이 차이가……

훈민이 양쪽 바짓단을 걷어올려 종아리의 맨살을 내보이자 다른 가족들의 입에서 일제히 그를 제지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훈은 얼른 앉기나 하라며 면박을 주었지만 공격적인 어투는 아니었다.

선생님, 형이 조금 전에 한 말 중에는 꼼꼼하다는 것만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형이 일할 때 특히 그 면이 빛을 발하죠. 저희가 둘 다 공무원인데 실은 형이 세무 쪽이거든요. 저는 도저히 못할 일이에요.”

그 순간 훈민의 입이 헤벌쭉 벌어지더니 오늘도 공적인 업무가 아니었다면 결코 늦지 않았으리라고 말했다. 그의 얼굴에 더없이 여유롭고 흐뭇한 미소가 번졌고 이심은 한 인간의 존재를 지탱하는 자부심이 피부 밖으로 비어져나오는 순간을 목도하는 기분이 들었다. 파티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의 모습에도 납득이 갔다. 아마 그 역시 직업을 공개할 수 있었더라면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테니까. 이심에게도 이 집이 샴푸의 요정이 설치된 집이 아니라 세대원으로 세무 공무원을 보유한 집으로 기억에 남았을 터였다.

무도회에서 입이 근질근질하지 않으셨어요?” 이심이 묻자 훈민은 득의만만한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 규정을 지키는 것도 공무의 일부니까요. 세무직이 유독 빡빡한 게 한두 가지도 아니라 몸에 익었어요.”

아유, 입만 열면 규정, 규정.” 세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또 시작이라는 듯 정훈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규정에 대한 입장이라면 사실 저도 지키는 게 편하다는 쪽이에요.” 이심이 끼어들었다. “누가 뭐래도 위법한 일은 만들지 말자는 주의고요.”

이번에는 훈민이 이심을 향해 역시 말이 통한다는 것처럼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이심이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자 정훈은 본인이 나설 때라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이층도 살펴보셨나요?”

그래, 정훈이가 안내 좀 해드려.” 애월씨가 맞장구치며 훈민의 어깨를 짚었다. “너는 다리도 불편하다고 했으니까 좀 쉬고.”

 

이층에는 총 세 개의 방이 있었다. 가장 큰 방은 세진과 소리, 로아가 썼고, 나머지 둘은 엇비슷한 넓이로 현재는 훈민과 정훈이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정훈은 새 가족을 맞이하게 되면 훈민의 방을 비울 것이라고 설명하며 방문을 열었다.

슈퍼 싱글 침대와 옷장, 서랍장 그리고 작은 책상이 놓인 방을 보고 이심은 가볍게 안도했다. 집합가족을 꾸려 세금 걱정을 더는 대신 이층 침대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므로 기본적인 가구를 갖춘 방을 혼자 쓸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할 만한 일이었다.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다면 비에 젖은 축축한 땅을 연상시키는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정훈 역시 그 점이 신경 쓰였는지 방의 창문을 열더니 옥상까지 보고 가자며 앞장섰다.

달리 근사할 거는 없는 곳이지만, 월급을 타는 날이면 벤치에 앉아서 형이랑 맥주도 한 잔씩 하고 그러거든요.” 정훈은 옥상에 들어서자마자 낡은 철제 벤치에 걸터앉더니 여기서는 속마음도 편하게 터놓을 수 있고요.” 하고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방금 보여주신 훈민씨 방은 환기를 제대로 해두시는 게 좋겠다는 말씀을 해둘게요.” 이심이 벤치의 다른 쪽 끄트머리에 앉으며 대꾸했다.

, 저도 아차 했어요.” 정훈이 이마를 짚었다. “저나 형이나 깔끔을 떠는 편인데도 그 모양이에요. 언제쯤이면 인류가 홀아비 냄새를 정복할까요?”

글쎄요. 그건 호르몬 문제라. 아마 자산가 구역 사람들도 아직 답이 없을걸요?”

정훈은 팔짱을 끼고 잠시 구름이 이동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자기 아버지가 독한 향수를 즐겨 뿌리던 게 이제야 이해가 간다고 했다. 다만 여전히 의아한 것은 평생에 걸쳐 각종 유럽 브랜드의 향수와 골프채, 시계를 모으는 게 삶의 거의 유일한 기쁨인 것만 같았던 사람이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는 돌연 민족적 자긍심에 기댔다는 사실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처음에는 세종대왕에서 따서 형은 세종, 제 이름은 대왕이 될 뻔했대요.”

세상에, 세종은 그렇다 쳐도……

. 그나마 훈민정음을 떠올린 게 천만다행이죠.”

어떤 부모들은 자식 이름을 지을 때 전에 없던 실험 정신이 샘솟나봐요. 저희 엄마도 제 이름이 다를 이에 마음 심 자로 지은 거라고 그러시거든요. 서류에 올라 있는 한자는 그게 아니지만, 어찌됐든 엄마는 남들의 마음에 휩쓸려서 살지 말라는 뜻을 담은 거라면서요.” 이심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다행이었네요. 형제 둘 다 이라는 글자를 넣기로 하셨나봐요. 정음씨가 아니라 정훈씨로 지으신 걸 보면요.”

아뇨. 성인이 되고 제가 직접 개명을 한 거죠.”

그러셨군요.”

보탤 말이 마땅치 않아서 이심은 정훈 너머로 보이는 작은 화분에 시선을 던졌다. 적황색 화분 위로 바싹 마른 이름 모를 식물의 줄기가 늘어져 있었다. 정훈은 말없이 양쪽 소매를 걷어올린 다음 셔츠 밖으로 뻗어나와 있는 게 자신의 손이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듯 손을 쫙 펼쳤다가 이내 양손이 부들부들 떨리도록 세게 주먹을 쥐었다.

. 정음이라는 여자 같은 이름을 쓰고 있었을 때는 집안에서건 밖에서건 맞은 기억밖에 없거든요.” 텅 빈 눈빛으로 이심을 바라보며 정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소리 손에 난 상처, 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