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여기 찾기 어렵지는 않으셨어요? 종종 찾다가 포기했다는 분들도 계셨거든요.”

바텐더가 차고 있는 은빛 명찰에는 모영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초로의 바텐더와 달리 두 글자만 적혀 있는 것을 보아 닉네임이거나 이름이 외자라는 얘기였는데, 어쩐지 후자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을 헤맸을까 진심으로 염려하는 듯한 표정 때문에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가 더욱 천진스럽게 들려서 이심은 웃음이 나왔다.

저야 하는 일 때문에 항상 길을 찾아버릇해서 괜찮았지만, 약도 상태를 파악하고 계시면 수정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대표님 영업 방침이라서 어쩔 수가 없어요.”

그 말을 들은 이심의 시선이 바 반대편 끝에서 셰이커를 흔들고 있는 바텐더 쪽으로 향하자 모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점장님이고 대표는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대표는 이 빌딩뿐 아니라 빌딩이 속한 골목의 건물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모영도 직접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곧잘 음성 메시지로 영업 방침에 관한 지시를 내리기 때문에 목소리만큼은 익숙하다고 했다. 특히 이곳이 처음 생기던 시점에 남긴 메시지는 대중 앞에서 하는 연설로 들릴 만큼 열정적이었다며 모영은 웃었다.

그걸 굳이 찾아 듣다니, 세상에 이런 변태가 다 있나 싶으시죠?”

약간은?”

모영은 윽, 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그 메시지를 두 차례 반복하여 듣는 것으로 연수 과정이 대체되었기 때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들을 만했느냐고 묻자 눈을 가늘게 뜨고 어깨를 늘어뜨리는 몸짓으로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면서도 마치 누군가 숨죽여 듣고 있기라도 한 듯이 목소리만큼은 한껏 밝은 톤으로 은근히 재미있던데요라고 대답했다.

모영은 대표가 이곳의 콘셉트에 관해 설명하면서 영조 시대에 내려진 금주령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부터 던졌다고 말했다. 당시에 밀주를 즐기다 발각되면 엄벌에 처했으며, 참형을 했다는 기록마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대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금주법에 대한 끈질기고도 광범위한 저항의 발자취와, 공권력의 단속을 피해 밀주를 공급하던 스피크 이지 바의 역사를 논했다. 그러면서 에르데 역시 은밀하게 숨겨진 곳에서 불온을 감각하는 분위기를 맞볼 수 있도록 운영한다고 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분명히 웃는 사람이 나오겠지만.” 하고 시작하는 메시지에서 주장하는 바는 그보다 좀더 거창했다. 칵테일 제조에 능통해지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대표는 마티니의 레시피를 논했다.

칵테일의 왕으로 거론되는 마티니는 통상 진과 베르무트를 섞어 잔에 따르고 올리브를 더하여 낸다. 그뿐이다. 그럼에도 바텐더의 솜씨를 가늠하기 좋은 술로 알려져 있다. 완벽한 한 잔의 마티니는 베이스로 어떠한 진을 선택할 것인가, 베르무트는 무엇을 쓰고, 진과의 비율은 어느 선에서 맞출 것인가, 얼음이 든 믹싱 글라스 안에서 몇 번이나 섞어서 얼마만큼 희석할 것인가, 올리브는 어떤 방식으로 낼 것인가 하는 질문과 거듭 마주하는 단련이 필수다. 절묘한 선택과 최적의 비율, 타이밍 그리고 장식. 사실 이런 몇 가지 요소만 가지고도 인간사의 대부분을 논할 수 있다고 대표는 단언했다. 예컨대 지금도 어느 실험실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유전자 조작의 방식부터 경총의 수법까지 무엇이든 명료하게 짚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리 의혹이 제기되면 우선 단호하게 부정하여 시간을 벌고, 사익을 추구하여 벌인 일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공익적 요소가 사건의 본질인 것처럼 호도하며, 적절한 시점에 꼬리를 잘라 책임을 떠넘기고서는 다른 화젯거리를 띄워 관심사를 돌리는 경총의 기술은 가히 예술적이니 한 번쯤 꼼꼼히 살펴보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했다.

예술적이라는 건 칭찬 아닌가요?” 이심이 웃었다. “그럼 저 이제 메뉴판 좀 볼게요.”

모영은 자기가 아직 건네지 않았으냐며 퍼뜩 놀라더니 이심 앞으로 메뉴와 물을 냈다. 시그니처 칵테일은 메뉴판 맨 첫 장에 있었는데, , , , , 열매로 총 다섯 가지였다.

테킬라 베이스로 한 은 어떠세요?” 모영이 눈짓으로 왼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저희 점장님이 직접, 제대로 만들어주시거든요.”

, 안 그래도 그거 고르려던 참이었는데.”

점장에게 메뉴를 전달한 모영은 기본 안주가 제공된다며 이심 앞으로 주먹만한 크기의 두부가 담긴 맑은 옥빛의 사기그릇을 놓았다. 그러고는 두부 위로 고운 소금을 흩뿌리고 투명한 병에 담긴 들기름을 끼얹었다. 바의 문을 열었을 때 나던 고소한 냄새가 다시 한번 이심의 후각을 자극했다.

운이 좋으셨어요. 이거 진짜 콩으로 오늘 아침에 만든 두부랑, 막 짠 신선한 들기름이거든요. 이번주에만 특별히 나가는 서비스에요.”

시그니처 칵테일에다 진짜 콩과 들깨, 게다가 오늘 아침에 만들었다는 호사스러운 단어를 연달아 들은 이심의 입에서는 절로 감탄사가 비어져나왔다. 두부를 한 수저 떠서 머금자 순식간에 입안 전체를 휘감는 들기름의 풍미가 느껴졌고 곧이어 물기를 듬뿍 머금은 산뜻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차례로 퍼졌다.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평생 이렇게 또렷한 맛과 기운으로 가득찬 음식을 먹고 살았겠지. 이심은 질투에 준하는 감정을 느꼈지만, 다음 순간 종합병원의 간호사로 일하던 엄마가 국에 만 밥을 뜰 시간조차 부족해 끼니를 거르기 일쑤라는 푸념을 하던 일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입에 안 맞으세요?” 모영이 물었다.

아니요. 너무 말도 안 되게 맛있어서요.”

모영이 마치 지금껏 이심의 칭찬만을 기다려왔던 사람처럼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했으므로 이심은 다소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며 정말이라고, 이렇게 맛있는 것을 먹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고 한번 더 강조했다.

오늘 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다음주에는 또 뭘 할지 모르거든요. 사실 여기는 수익을 내기 위한 곳이 아니래요. 말하자면 일종의 랩실이라고 할까요? 대표가 운영하는 업장이 많은데 나머지는 다 자산가들 구역에 있대요. 좀 튀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싶으면, 시범 삼아 여기서 먼저 해보고 반응을 체크하는가봐요. 자산가들 상대로는 막무가내로 모험을 하는 게 부담되니까요.”

모영은 이런 기본 안주 실험은 퍽 얌전한 편에 속한다며 지난달에는 엄청난 크기의 스피커를 설치하고 난해한 음악을 재생하도록 지시하는 바람에 한동안 귀마개를 착용하고 일했다고 했다.

그럼 제가 정말 운이 좋았네요.” 이심이 말했다. “이 두부는 밥값을 아껴서라도 또 먹고 싶은 맛이거든요.”

모영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에이, 하시는 일을 생각하면 밥값까지 아껴야 된다는 건 좀 과장 아니세요?”

제가 무슨 일을 하는 것 같은데요?”

무도회에서 뵀으니까 알죠. 바텐더를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무도회에서 자리를 양보 받는 분들은 의사나 한의사 아니면 세무사라는 것 정도는 알거든요. 요즘은 세무사들이 바쁜 시기니까, 의사에 걸게요.”

이심은 맞다고 인정했다. 자기 직장을 밝혔으니 모영의 전 직장에 관해서도 물어보려던 차에 칵테일이 나왔다. 한낮의 태양을 모티프로 삼았다는 칵테일은 이름처럼 뜨겁고 화끈한 맛이 났다. 모영은 이심의 물잔을 채워준 후에 모쪼록 이곳에서는 긴장을 내려놓고 편히 즐겨도 된다고 말했다. 이심을 제외하면 바 안쪽 끝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손님의 전부인데 말소리로 눈치챘겠지만 점잖은 외국인 관광객이라면서.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아챈 그들이 대화를 멈추고 쳐다보자 모영은 인형 탈을 쓴 캐릭터처럼 환하게 웃으며 힘차게 두 손을 흔들어서 웃음을 자아냈다. 잠시 뒤에 이심은 이달의 생활비 잔고를 한번 더 떠올린 뒤 메뉴판을 들췄다. 시그니처는 점장이 만든다고 했으므로 이번에는 마티니를 주문했다.

모영은 믹싱 글라스의 절반 이상을 채우는 크기의 얼음을 넣고 길다란 바 스푼을 굴리듯 회전시켰다. 그렇게 모서리를 녹인 얼음 위에 진과 베르무트를 따르는 움직임은 여전히 최근에 익힌 절차를 가까스로 수행하는 이의 어설픔이 배어 있었다. 우아해 보이는 황금빛 칵테일 픽에 올리브를 꽂을 때는 한 알을 놓쳐서 병에서 새 올리브를 꺼내며 못 본 척 해달라는 눈짓을 보내기도 했다. 이심은 어째서인지 바로 이런 모습이 다시 보고 싶었다고 생각했고, 겉으로는 퍽 관대한 손님이 지을 법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올리브 한 알 같은 건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죠, . 저 사실 오늘 처음 만난 가족들한테 우주의 섭리에 대해서 듣고 왔는데, 그분들 얘기가 우주의 질서는 12라는 숫자에 수렴된대요.”

어쩐지.” 모영은 짐짓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12월만 되면 마음이 어수선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네요.”

애초에 1년이 12개월로 나뉜 것만 해도 느낌이 오잖아요.”

그러게요. 마티니도 12도로 맞춰볼걸. 그보다 훨씬 더 독하니까 천천히 드세요.”

모영이 은은한 풀빛 칵테일이 든 잔을 내밀었다. 마티니의 맛에 관해 객관적 평가를 내릴 만큼 마셔보지 않았음에도 이심은 자신이 마신 게 썩 훌륭한 맛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마치 지난 삼 년간의 독신생활의 면면에 특별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 시간 자체는 귀중하게 느끼는 것처럼. 칵테일의 평이한 맛에 대한 소감은 함구한 채 삼 년의 독신 경험에 대해서만 밝히자 모영은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리며 놀라움을 표현했다.

삼 년이나요?”

.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바로 이 구역의 납세왕이에요. 처음 혼자 나가서 산다고 했을 때, 저희 아빠는 정신이 나갔냐면서 당장 뇌 스캔부터 해보라고 그러더라고요.” 금방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거라면서 세무사도 뜯어말렸고요.

아니에요, 선생님.”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인 채 이심의 말을 듣던 모영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건 리스펙트할 일이죠. 진심으로요. 저도 그렇고 제 주변에도 혼자 살아보고 싶다고 꿈꾸는 사람만 많았지, 결국 아무도 시도를 못해봤거든요.”

모영은 서비스라며 두부 한 덩이를 더 가져왔고 이번에는 소금 위로 약간의 산초 가루를 더했다. 들기름의 향이 처음처럼 도드라지지 않는 것을 보니 어느새 취기가 올랐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하자, 모영은 아니라고는 못하겠다며 싱긋 웃었다. 그녀의 어투와 미소는 혀에 닿자마자 매끄러운 식감과 산초의 향만 남기고 허물어지는 두부처럼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이심은 곧장 자신이 술에 취해간다는 사실을 되짚으며, 스스로 모영의 매력적인 요소를 부풀려 느끼고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매혹이 침투하려 할 때면 재빨리 냉정을 되찾는 버릇이 든 것은 엄마와 아빠의 만남에 대해 전해들었던 강렬한 기억과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고통스럽게 지켜보며 자라온 시간 때문일 터였다. 따라서 방어기제의 원인은 사기 결혼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호소하면서도 끝내 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엄마에게 있었고, 근원적으로는 거짓말과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한 아빠에게 있었다. 이심은 따듯하고 부드러운 두부를 한 입 더 떠먹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자신이 또 이렇게 모처럼의 즐거운 시간을 오롯이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는데, 그러나 그런 자신이 싫지 않다고, 밉지 않다고 되뇌었다. 그렇게 십대 때부터 결심한 바를 지켰다.

언제나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었고 팬데믹 동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언쟁을 일삼는 부모를 보며 이심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에 진력이 났다. 부모가 싸우는 소리에 잠을 설치고 일어난 어느 날 아침에는 반쯤 탄 토스트를 집어들자마자 볼 위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고 묻던 아빠의 태평한 얼굴에 이심은 할말을 잃었다. 눈물을 닦고 묵묵히 토스트를 씹으며 부모의 갈등에 가능한 한 관심을 가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자신은 미움과 원망을 겹겹이 더해갈 사람과는 결코 가족으로 엮이지 않겠다고, 그러기 위해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거라고도 굳게 다짐했다.

“12에 얽힌 얘기는 오늘의 무도회에서 들으신 거죠?” 모영이 이심의 물잔을 채우며 물었다. “또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들으셨어요?”

경총이 왕년에 아역 배우였다던 얘기요.”

그러게요. 저도 들어본 적 있어요. 상상은 잘 안 가지만요.”

역시 아는 사람은 다들 아는 얘기였군요.”

다들 아는지는 모르겠네요. 저는 그 얘기를 엄마한테 들었어요. 저희 엄마가 삼십대까지 연극배우였거든요. 이건 다른 사람한테는 한 적 없는 얘긴데, 실은 그때 엄마가 직접……

때마침 점장이 불러서 모영은 하던 얘기를 멈췄다. 점장은 상체를 모영 쪽으로 틀더니 혹시 이런 노래 나오는 옛날 영화 기억 나?” 하며 허밍을 했다. 그 앞에 앉은 외국인 손님 중 한 명도 콧노래를 보탰지만 두 사람 모두 음치인지 힌트로서의 가치는 없었다. 모영은 고개를 갸웃했고, 이심은 웃음을 참기 위해 급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야 했다.

이건 도저히 도움이 안 되네요.” 점장이 자기도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심을 향해 말했다. “이 두 분은 브리즈번에서 오셨는데 원래는 홍콩 분들이세요. 그러니까 그 영화라는 게 옛 홍콩 영화 중에 하나인데 말입니다……

그럼 무협 영화인가요?” 이심이 물었다.

그쪽은 아니라고 합니다. 음악을 굉장히 잘 쓰는 감독으로 유명했는데, 하긴 손님의 부모님 세대나 알까. 너무 옛날 영화라 들어도 모르시겠네요.”

아마 그럴 것 같아요. 확실히 저희 엄마는 옛날 홍콩 배우들을 좋아하셨거든요.”

점장이 그 말은 직접 전하는 게 좋겠다고 권해서 이심은 메이드의 통역 기능을 켜고 홀로그램 프레임을 띄웠다. 이심이 한번 더 똑같이 말하자 프레임 위로 한자로 된 문장이 생성되며 음성이 흘러나왔다. 왼편의 두 여성 중 연장자인 쪽이 벙긋 웃더니 다소 잠긴 음성으로 대답했다.

반갑네요. 우리 딸도 어릴 때 한국 가요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해요. 홍콩에서 열린 한국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에 간 적도 있고요.

그렇게 말한 어머니 쪽은 육십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은은한 올리브빛이 감도는 쇼트커트의 머리 모양, 우윳빛 카디건 안에 칼라가 짧고 둥근 블라우스를 받쳐 입은 모습이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딸 쪽은 새까만 단발에 정장 차림이었다. 서로 옷차림은 거리가 멀었지만 눈매는 하나의 틀에서 찍어 나온 듯 닮아 있었다. 두 사람의 눈만 보아도 모녀 사이인 줄 알았다고 이심이 말하자 딸이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는 입술을 축이더니 자신들은 서로를 모녀로 여기지만 딸에게 실제로 유전자를 물려주지는 않았다고 했다.

내 딸은 원래 내 친구의 딸이었거든요. 그 친구를 잃고, 타국에 우리 둘이 남아 서로 유일한 가족이 되어주기로 했답니다.

이심과 모영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심의 말에 덧붙여 모영은 눈뿐만 아니라 눈썹과 이마 라인까지 꼭 닮았다고, 원래부터 인연이었던 것만 같다고 말했다.

정말 그렇죠? / 그러게 말이에요!

모녀가 동시에 맞장구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두 눈이 감기는 듯한 웃는 얼굴도 영락없이 닮아 보였다. 어머니는 삽십여 년 전에 자신이 먼저 홍콩을 떠나왔으며 미용 기술을 배워 조금씩 자리를 잡을 때쯤 망명에 준하는 절차를 거친 친구와 어린 딸이 호주로 건너왔다고 했다. 곧장 한집에 살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셋이었을 때부터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었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실은, 저도 집합가족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물론 제 경우는 개인적인 동기가 크지만요.”

이심이 말하자 딸이 행운을 빈다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잠시 동안 미소만 짓고 있었는데 눈에 서글픈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눈가를 찍어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군요. 우리들의 나라와 마찬가지로요. 내 고향 홍콩도, 이곳 한국도 한때는 꽤나 멀리까지 나아갔던 시기가 있었지요.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세계의 언론을 장식하던 때가 바로 어제 같군요. 하지만 이제는 그런 기억이 나처럼 나이든 사람들의 추억 속에나 또렷하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네요. 여기는 곧 선거가 있다죠? 어떤가요,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고 있나요?

이심은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또한 어떤 식으로든 위로가 될 만한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자신이 위로를 건넬 처지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점장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오래전에 끊었던 담배 생각이 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해요. 우리 엄마는 취하면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시절을 떠올리는 버릇이 있답니다.

딸이 그렇게 말하자 이심은 자기 엄마도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팔을 쭉 뻗어 잔을 부딪쳤고, 모녀는 이심에게 브리즈번에 올 일이 있거든 연락을 달라고 했다. 꼭 봄에 오라고, 여름이면 폭우 걱정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아직 봄다운 봄을 즐길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곳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씁쓸하게 대화를 끝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이심은 해외에 관광을 떠날 여유가 평생 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이 바를 떠나자 모영은 이심에게 다시 메뉴판을 건넸다. 딸이 이심 몫으로 한 잔값을 더 계산하고 갔다는 것이었다.

그래요? 아직 봄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인심이 좋네요.” 이심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내뱉은 뒤에 미간을 긁적이며 덧붙였다. “, 쪼들리는 만큼 심성이 꼬인 사람 티가 났네요.”

그러자 모영은 딴생각을 하다가 이심의 말을 못 들었다는 듯 이 초쯤 멍한 표정을 짓고는 어색한 팔동작을 곁들이며 어머,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 하고 물었다. 이심은 웃음이 나왔다. 칵테일을 만드는 안드로이드에게 모든 기술을 완벽하게 습득시키더라도 이런 어설픈 연기만큼은 따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모영에게 연기력이 출중하다고 말했다.

좀 그런 편이죠.” 모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엄마가 한때 배우였으니까 물려받은 게 있는 거 같아요.”

그래요, 아까 어머니께 경총 얘기도 들으셨다고 그랬죠. 그 얘기 하다 끊어졌잖아요.”

모영은 살짝 목소리를 낮추고는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개인적인 자리에서 하는 게 더 좋겠다고 말했다. 다시금 장난인 줄 알았던 이심은 모영이 점장의 눈치를 살피면서 자신의 연락처를 건네자 잠자코 메이드에 그녀의 연락처를 저장했고, 마지막에 마실 술로 이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골랐다. 투명한 잔에 담긴 맑은 술에서는 이름 모를 약초 향이 났으므로 물약을 삼키는 기분으로 잔을 비웠다.

집에 돌아왔을 때, 이심은 온수기가 예열되기를 기다리며 불을 켜지 않은 채 어두운 방안에 앉아 십 분쯤 화살표 게임을 했다. 입안에서 희미한 풀 내음이 감돌았다. 씻으러 들어가기 전에 모영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샤워를 하면서는 욕조가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오늘밤에 모영에게 느낀 친밀감은 결코 뜨겁지 않고 겨우 미지근하기만 한 온수처럼 흘려보내야 한다고 여겼지만 잠시 뒤 모영에게 답이 왔을 때는 들고 있던 드라이어를 내려놓고 곧장 대꾸했다.

그날 밤 잠들 때까지 메시지를 주고받은 후 이튿날부터 두 사람은 틈틈이 대화를 나눴다. 모영은 아침 겸 점심 메뉴가 무엇인지 알리는 것을 즐겼으며 이심은 자신이 시간을 낭비한다는 느낌에 시달리면서도 끊지 못하는 화살표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몇 주가 흐르자 모영은 자신이 어떤 요일에 쉬는지 전하며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심은 마치 모영과 함께 보내는 휴일을 항상 기다려왔던 사람처럼, 다가올 휴일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모영은 그 낭랑한 목소리로 유쾌한 화제를 이어나갈 것이다. 설령 그다지 흥미를 끌지 않을 이야기일지라도 특유의 어딘지 모르게 허술한 모습을 보다보면 웃음이 날 것이다. 자꾸 웃다가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심은 목이 마르지 않았지만 찬물 한 잔을 따라서 천천히 들이켰다. 그런 다음 모영과의 대화창을 닫았다.

게임 프레임을 열어 화살표 게임을 몇 분쯤 플레이하고서 이심은 샴푸의 요정이 있는 집에 사는 아이, 소리와 나누었던 대화 창을 열었다. 본가에 달려가느라 급작스럽게 약속을 취소한 뒤 이미 한 달이나 지나 있었다. 그 점을 사과하며 운을 떼자 소리는 선생님과 또 만나고 싶다고,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고 대답했다. 답을 적는 와중에 이번에는 전화가 걸려왔다. 소리네 가족들은 언제든 이심이 방문해줄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