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에르데

이어진 한 주는 추위가 다소 누그러든 반면 대기의 질은 유독 나빴다. 월요일 조례에서 팀장은 고기능 마스크를 나누어주며 각자의 호흡기 건강에 만전을 기하라고 일렀다. “우리 팀에도 이비인후과 전문의가 있어야 돼요, 팀장님.” 최선생이 운을 띄우자 팀장은 물론이죠. 윗선에서도 납득하는 눈치였으니까 이제 곧 될 겁니다.” 하고 응수했다. 그는 지난달에도, 지지난 달에도 그렇게 대답했지만 최선생은 마치 이런 대화를 처음 나누기라도 하는 것처럼 싹싹한 어투로 잘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목요일 밤에 퇴근을 앞두고 사무실에 들렀을 때 남아 있는 사람은 최선생뿐이었다. 팔짱을 끼고 모니터를 쏘아보는 폼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이심은 모니터 앞을 살핀 후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노안 약 바꿔야겠어.” 최선생이 말했다. “글자가 흩어져서 일이 안 끝나.”

잠깐 쉬세요, 제가 빠진 데 있나 한번 볼게요.”

대강 다 했어.”

대강이요? 임종 건은 한 칸도 빠트리면 안 돼요, 선생님.” 이심이 모니터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살폈다. “게다가 이거 어제 못 가서 오늘 방문한 건이잖아요. 그러면 이 아래로 한참 남았다고요.”

공기가 이 모양이면, 신청자 늘고 진료 밀리는 게 당연한 건데. 이럴 시간에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보는 게 낫지.”

괜히 규정에 저촉될 일 만들 필요 없잖아요.” 이심은 최선생을 자리에서 일으켜세웠다.

최선생이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는 사망자는 91세였다. 그가 앓고 있던 천식에 관해서는 아내와 아들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어제 오후에 왕진을 신청한 사실은 둘 다 모르고 있었다. 간밤에 기침이 심해졌거나 혈색이 나빴었냐는 질문에 답하지도 못했다.

그들 가족은 과거에 안방과 아들 방, 옷방으로 쓰던 방을 십여 년 전부터 각각 쓰기 시작한 이래 최근 몇 년간은 식사도 따로 해결한 모양이었다. 올해 초에 환갑을 맞았다는 사망자의 아들은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시점이 몇 달 전인지조차 가물가물 하다고 했다. 경찰은 사망자의 발치에서 발견된 메이드가 이미 며칠 전부터 방전된 상태였다며 이른바 가정 내 고독사로 보인다는 의견을 냈다. 최선생도 이견이 없었다.

층간 소음만 보면 천장이고 벽이고 얇은 거 같잖아.” 최선생이 가방에서 근시 교정용 안약을 꺼내다 말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한 집 안에서 문 닫고 떨어져 있으면 기침을 하고 앓는 소리를 해도 잘 안 들리는 게 신기하지 않니.”

안약을 넣은 최선생은 잠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지난해에 보험금을 노리고 가정 내 고독사를 위장한 살인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지 않았다면 서류 작업이 몇 배나 늘지도 않았을 거라고 혀를 차던 그녀는 이심이 빈칸을 메우는 사이에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사가지고 왔다.

안 돼요, 선생님. 사무실 안에서 쓸 수 있는 알코올은 소독용밖에 없어요.”

가는 길에 마시자고. 딱 한 정류장만 걸어가자.”

이심은 마스크를 흔들며 미친 짓이라고 말했지만 그럼 혼자서 두 캔을 마실 때까지 걸어가겠다는 최선생의 고집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녀는 공공 의료 센터를 나서자마자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켜고 요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기 상태는 종일 변함이 없어서 달이 겨우 형체를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흐릿하게 보였다. 공기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몇 년쯤 방치해 둔 이불 안에 파묻혀 있는 기분이라고 이심이 말하자 최선생은 과연 그렇다며 히죽거렸다.

그러니까 얼른 마셔버려. 그래야 다시 마스크 쓰지.” 최선생이 캔을 마저 비웠다. “어떤 의사들은 매일 사체를 보면서 살잖아. 어떻게 버틸까?”

그러게 말이에요.”

사실 그건 우리 아버지가 잘 알 텐데.”

아버님이 법의학자라고 하셨죠?”

.”

이번 기회에 한번 연락해보세요. 선민이 사진도 보여주시고요.”

소꿉놀이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소리지르는 사람한테?”

아니, 요즘 세상에 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신다고요?”

그래서 난 가족 고를 때 되게 신났었다?” 최선생이 손에 쥔 캔을 우그러뜨리며 말했다. “이선생은 나보다 꼼꼼하잖아. 그러니까 눈 크게 뜨고 더 잘 찾아보라고.”

 

*

 

고된 한 주를 보낸 이심은 토요일 정오에 겨우 잠에서 깼다. 자는 동안 두드려 맞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가 결렸다. 최선생이 보내준 링크를 통해 남다른 콘셉트를 가진 가족이 모인다는 무도회를 신청하면서 부풀었던 궁금함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럼에도 나갈 준비를 서두른 까닭은 다만 당일 취소에 부과되는 위약금을 내는 게 아까워서였다.

지난번에 참여한 것보다 작은 규모의 무도회는 구립 체육관 건물 내 강당에서 열렸다. 앓는 소리를 내며 어깨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 이심은 접수처의 스태프들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선생님, 이렇게 또 뵙네요!” 리키가 쾌활하게 외쳤다. “저희를 벌써 잊으신 건 아니겠죠?”

, 이렇게 금방 또 뵐 줄 알았으면 메시지에 답을 할 걸 그랬네요.”

리키는 오른쪽 눈썹을 찡긋거리며 저희 가족은 쭉 활짝 열려 있으니까 언제든 선생님 내키실 때 답장해주세요.” 하더니 옆에 선 청명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었다. “여기는 내가 지킬 테니까 선생님 안내 좀 해드리고 와.”

이심은 리키와 청명이 나란히 선 모습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고, 이내 그게 청명의 변화 때문임을 알아챘다. 처음 보았을 때는 분명 리키보다 키가 작았던 청명이 지금은 한 뼘쯤은 커 보였던 것이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이심의 귓가에 닿을 듯 고개를 기울여 리키가 불쑥 연락드린 제가 한번 더 사과드릴게요.” 하고 속삭이고는 왼팔을 내밀었다. “이제 제 팔짱 끼시면 돼요. 이 무도회는 그렇게 입장하는 게 원칙이거든요.”

설마.”

맞아요. 안 속으실 줄은 알았는데 혹시나 해서.”

청명은 싱긋 웃더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심의 시선이 뜻하는 바를 알겠다는 듯 오른다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바짓단을 살짝 들어올리자 로즈 골드 빛깔의 의족이 드러났다.

가끔 이렇게 옛날 식으로 메탈 느낌 나는 거 하면 기분 전환이 되거든요.”

리키 씨도 내려다볼 수 있고요.”

, 물론이죠.”

청명은 오른쪽 눈썹을 찡긋거리는 리키 특유의 표정을 따라하더니 오늘 열리는 행사의 특징을 설명했다. 우선 일반적인 무도회와 달리 신상 공개를 꺼리는 사람들이 있는 터라 이름표를 달지 않는다는 것, 또한 입식이 아니라 가족 별로 테이블이 배당돼 있다는 것이었다.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간단한 소개와 충원을 바라는 숫자가 적혀 있으므로 홀로 참가한 사람은 자유롭게 빈자리를 옮겨다니면 된다고 했다.

어디나 흥미로운 분들로 가득해요.” 흥미롭다는 단어를 말할 때 청명은 검지와 중지를 구부려 따옴표 모양을 만들며 웃었고, 반 발짝 가까이 다가와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바 카운터 앞에 길쭉한 테이블 보이시죠? 거기 있는 분들은 음모론에 밝은데, 그분들 앞에서 음모론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지 않기를 바랄게요. 가운데 붉은 카디건을 입으신 어르신 댁은 자가 발전으로 전기를 충당한다고 하고요, 그 옆 가족은 이민을 준비한다고 들었어요. 선생님이라면 어느 가족이나 환영할 거예요. 출구 쪽에서 제일 가까운 두 테이블만 제외하면요.”

그 사람들은 어떤 가족인데요?”

청명은 이심의 직업이 힌트라고 말하며 윙크를 날리더니 바로 정면 테이블에 빈자리가 나자 의자를 빼주고 갔다.

테이블 한가운데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방공호 획득을 목표로라고 적혀 있었다. 가족은 어린 아이를 포함해 총 일곱 명인데 추가로 다섯 명을 모집하는 중이었다. 많은 인원수 하며 방공호를 목표로 둔다는 게 선뜻 와닿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는 이심에게 옆자리에 앉은 남성이 악수를 청해왔다. 정작 설명을 시작한 것은 그의 옆에 앉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을 대비해야 한다고, 자산가들의 거주지에서는 이미 보편적으로 방공호를 마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자산가들이 하니까 따라가자는 건 아니니까요.” 유달리 검은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가 끼어들더니 오른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사실 그들이야말로 실험실 쥐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통제 안에 있는 거, 아는 사람들은 다 알잖아요? 나라에서 변기 안까지 들여다본다니까 말 다했죠.”

때마침 이심 옆으로 난 빈자리에 앉은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무슨 말이냐고 되묻자 여자는 자산가 구역의 건물에는 선택의 여지 없이 일괄적으로 스마트 변기가 설치돼 있다며 변기가 스마트해질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소곤거렸다. 만일 환자가 그런 말을 했다면 이심은 별도의 검사 없이도 장내 미생물층을 추적·분석하는 데이터를 얻어 체질과 건강 상태를 점검하는 데 쓸 테니 괜히 오해할 필요는 없다고 대답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입바른 말을 해서 주목받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잠자코 있었다.

백발의 노인은 자산가들은 그런 일상적 통제를 감내하는 대신 집집마다 방공호를 마련해두고 산다고 강조했다. 자신들이 목표하고 있는 것 역시 심판의 날이 왔을 때 열두 명이 함께 오를 수 있는 방공호를 손에 넣는 것이라고 했다. ‘심판의 날이라는 표현 때문에 종교적 행위를 연상시킬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핵폭발에서 기후 위기까지 다양한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방공호만한 전략이 없다는 게 그들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그렇군요.” 이심은 맞은편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구성원 모두 세후 소득의 12프로를 모으면서 목표에 다가가고 있어요.” 긴 머리칼의 여자가 미소 지었다.

“12라는 숫자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보네요?” 이심이 물었다.

그 점을 알아봐주셨군요!”

긴 머리칼의 여자가 두 손을 모으며 이심을 바라보았고, 나머지 가족들도 모두 이심에게 시선을 모았다. 십대 소녀부터 백발의 노인까지 일제히 희색을 띠고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우주의 질서는 공히 12라는 숫자로 수렴되었다. 이심은 일 년을 구성하는 열두 달과 성서 속의 열두 사도에 이어서 12간지가 나란히 언급되는 교리가 품는 시공간적 배경의 폭이 상당하다고 느꼈으며, 동시에 이 무도회에서 서로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유를 체감했다. 근방에서 빈자리를 찾는 청년을 발견한 이심은 속히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바 카운터 쪽으로 가서 줄을 섰다.

 

직업이 명시된 이름표가 없으니 긴 줄 끝에서 자리를 양보받는 일도 없었다. 하품을 삼키다 말고 무도회를 즐기고 있느냐는 최선생의 메시지를 받은 이심은 자기 뒤에 선 남자들의 수다를 귀동냥하며 지루함을 견디고 있다고 답했다. 쇳소리가 섞인 비음을 가진 남자는 곧 다시 돌아올 경규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경총이 TV에 처음 나온 게 아나운서 데뷔했을 때가 아니래. 꼬마 때, 아역 배우를 했다는 거야. 주인공은 아니고. 있잖아, 엑스트라나 주인공 괴롭히는 단역 같은 거.”

아나운서 때랑 롤이 비슷하네. 어쨌든 카메라 앞에 세울 수 있는 수준으로는 생겼다는 얘기잖아. 경총이랑 우총은 결국 거기서 갈리는 거 같아. 클레오파트라랑 우숙원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공통점? 뭔데?”

역사의 변수가 되는 코.” 남자가 키득댔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세계사가 바뀌었을 거고, 우총 코가 조금만 덜 펑퍼짐했어도 경총이 이렇게 오래 해먹지는 못했을 거래.”

숙연하다 숙연해. 아니, 그 아줌마는 코보다 다이어트가 시급할 텐데?”

둘이 함께 웃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엄마가 있었더라면 우총이 미덥지는 못하더라도 경총보다 어떻게 더 나은지 토로하며 열을 냈을 터였다. 이심은 뒤로 돌아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비록 엄마처럼 우숙원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으나 이런 방식으로 농담하며 낄낄대는 이들과 한집에서 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오른편에 선 남자가 눈인사를 건넸지만 못 본 척하고 바텐더 앞으로 향했다.

오늘의 바텐더는 안드로이드였다. 키에 비해 다소 지나치다 싶게 긴 팔의 놀랍도록 빠른 움직임을 보면서 이심은 그가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군더더기 없이 시원시원하게 술을 섞었고 칵테일이 완성되는 시간도 짧았다. 이심은 첫 무도회에서 보았던 바텐더를 떠올리고 있었다.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정작 손놀림에서 허둥지둥 초짜 티가 나던 그녀가 만든 것보다는 필시 오늘의 칵테일이 더 맛있을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면서도 이심은 문득 예의 어설픈 바텐더에게 받았던 쿠폰의 유효기간을 확인했다.

바 에르데의 시그니처 칵테일 제공권의 기한은 이제 단 이틀이 남아 있었다. 이심은 새삼 시그니처 칵테일이라는 말의 울림이 근사하다고 느꼈다. 이런 친절을 받아본 경험이 없었으므로 쿠폰을 가지고도 쓰지 않는 것과, 쿠폰을 핑계로 돈을 쓰는 것 중 어느 쪽이 낭비인지 모호하게 느껴졌는데, 그 점에 관해서는 최선생에게 물어도 시원한 대답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심은 칵테일을 받아들고 한 모금을 삼켰다. 입안 가득 쌉쌀한 허브 향이 감돌았고, 음모론에 밝다는 타원형 테이블과 정체에 관한 힌트를 얻지 못한 출구 쪽 테이블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이내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출구 쪽의 한 가족은 대체 의학을 신봉하는 가족이었다. 귀띔해준 청명이야 몰랐겠지만, 주로 고령자를 만날 일이 많은 이심에게는 가히 낯설지 않은 풍경이기도 했다. 문제는 다른 한쪽이었다. 이심은 그들의 가족 소개를 보자마자 남은 칵테일을 단숨에 비워버리고 싶어졌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어 잔을 비울 동안만 그들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결국은 시간 낭비일 게 빤했지만 어쩌면 흥미로운시각이나 화제를 하나쯤 접할 수도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통성명한 지 삼 분을 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되었다.

화장실에 가서 손까지 씻고 온 이심은 빈 의자를 찾지 못한 다섯 명이 감싸듯 서 있는 테이블로 향했고, 그곳은 음모론에 관심을 둔 가족의 자리였다.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알림판에는 무지無知에서 깨어난 사람들이라고 적혀 있었다. 현재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가족은 최대 네 명까지 충원을 예정하고 있었다. 뻣뻣해 보이는 카멜빛 코트를 걸친 여자가 뭔가를 설명하는 중이었는데, 양손을 휘젓듯 움직여 사뭇 산만해 보이는 커다란 제스처가 가늘고 힘없는 목소리와 대조를 이뤘다.

바로 그게 다음 타자가 될 분야의 힌트예요. 군사 시설이 아닌데도 지도상에는 공식적으로 표기하지 않는 시설,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여자가 이심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방금 오신 분은 뭔가 알고 계시는 눈치인데요?”

아니요. 방금 전에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가족들을 만나고 와서 좀 정신이 없는 것뿐이에요.” 이심은 잠시 망설인 후에 덧붙였다. “실은 제가 의료계 종사자라서 그런지 충격이 더 크네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질문을 던진 여자와 이심의 바로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동시에 일어나며 자기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 이심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지만 호의를 마다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심이 자리에 앉자 여자가 가는 목소리로 지도에서 숨기는 시설이란 바로 교도소라고 밝혔다. 전쟁 같은 분쟁 상황이 일어나면 적군이 사회 혼란의 기폭제로 활용하기 위해 교도소의 출입구부터 공격하여 죄수들을 탈출시키는 경우가 있으므로 교도소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지도에 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잠깐만요. 그럼 다음 타자로 민영화시키는 게 교도소라고요?”

조금 전까지 지루한 얼굴로 하품을 하던 남자가 묻자 가족들 여럿이 한목소리로 그렇다고, 이미 준비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교도소뿐만은 아니에요. 소년원이나, 폐쇄형 정신병원 같은 곳도 마찬가지예요.” 가느다란 목소리의 여자가 다시 주의를 집중시켰다. “앞으로 격리 시설이 얼마나 늘어나고 거기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무시무시한 얘기를 하기 전에 잔이 빈 분들은 먼저 좀 채우고 오실까요?”

마침 이심도 목이 탔는데, 이번에는 대신 줄을 서주겠다는 사람이 여럿 나섰으므로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새 칵테일을 받은 뒤에 예의상 두 모금을 더 마실 때까지는 자리를 지켰다. 그런 다음 자연스레 일어날 구실을 찾던 이심은 테이블 너머에서 서성이는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선생님!”

이심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최선생이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낡은 청바지 위에 도톰한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티셔츠의 왼쪽 가슴께에 달린 주머니에는 가느다란 녹색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어쩐지 꼭 어디서 보고 있는 사람처럼 메시지를 보내시더라.” 이심이 최선생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선생님 가족 테이블은 어디에요?”

테이블 안 잡았어. 그것도 다 돈이잖아. 가볍게 선민이랑 둘이 온 거야.”

최선생이 손을 흔들어 선민을 불렀다. 그러자 선민이 뛰다시피 가벼운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풍성한 곱슬머리를 양갈래로 땋아내린 선민의 피부는 짙은 꿀빛이었다. 고개를 살짝 쳐들고 자신을 응시하는 차분한 시선이 나이에 비해 성숙한 인상을 풍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고 이심은 생각했다. 최선생과 마찬가지로 선민의 옷에도 화살표 무늬가 있었다. 선민이 입은 티셔츠의 네크라인 바로 아래에 왼쪽을 가리키는 길쭉한 화살표가 자리한 것이었다.

테이블은 없어도 모녀가 맞춘 게 하나 있네요? 이렇게 보면 선생님네는 화살표가 핵심 같아요.”

이심의 말에 모녀는 그런 셈이라며 웃었다. 선민은 앳된 목소리로 조금의 장난기도 없이 저희 가족은 일종의 신념 공동체예요라고 말했다.

, 그렇구나.” 이심이 최선생을 향해 소근거렸다. “혹시 지금 제가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신다면 그건 선생님 기분 탓이에요.”

선민은 깔깔대며 웃었다. “역시 무도회처럼 재미있는 데가 없어요.”

우리 선민이, 지난번 무도회에서는 라이파이Li-fi 개념을 처음 듣고 홀딱 빠졌지.” 최선생이 거들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이심에게 선민은 무선 통신을 위해 전파를 사용하는 와이파이와 달리 LED 전구의 가시광선으로 정보를 전한다는 라이파이의 개념에 관해 알려주었다.

빛을 사용하는 거니까 당연히 와이파이보다 훨씬 빠르고요. LED 등을 끄면 못 써요. 벽이나 문 너머에는 빛이 안 닿으니까 연결도 끊기고요.”

이심은 한번 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되게 불편할 것 같은데?”

불편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어요. 와이파이는 건물의 같은 층이나 가까운 다른 층에서도 잡히잖아요? 그래서 해킹하기 쉽고요. 라이파이는 빛 전달이라 문만 넘어가도 잡을 수가 없으니까 딱 그 집만 쓰는 거예요. 해킹을 시도할 수가 없는 거죠. 보안을 생각하면 엄청난 장점이에요.”

그래서 부자들은 다들 라이파이 쓴대.” 최선생이 덧붙였다.

오늘 들은 얘기도 엄청났어요.” 선민이 동의를 구하는 듯 최선생과 눈을 맞춘 뒤 입을 열었다. “한 이십 년 전에는 전 세계적으로 이런 음모론이 돌았다면서요? 백신을 맞으면 인간의 몸이 바로 와이파이에 접속할 수 있는 상태로 바뀐다고요.”

아휴, 안티 백서들.” 이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쪽 끝 테이블에 아까 다녀왔거든? 요즘 안티 백서들이 하는 얘기도 스케일이 그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더라.”

정말요?” 선민이 싱긋 웃었다. “저쪽 어디요?”

출구에서 가까운 테이블 중에 오른쪽. 보이지?”

선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뿐히 뛰듯이 걸어 출구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최선생이 이심의 얼굴 앞으로 자기 얼굴을 쑤욱 들이밀며 표정이 왜 그렇게 심각하느냐고 물었다.

영 재미가 없어? 아니면 여기 와서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었어?”

이심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이 아니라 지난해 엄마의 부탁을 받고 다녀온 서안의 집, 그곳에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비밀 유지 각서를 작성했으므로 최선생에게조차 털어놓을 수 없었다. 취하고 싶어졌지만 공공장소인 이상 안드로이드 바텐더에게 간곡히 부탁한다고 해도 낮은 도수의 칵테일만 만들어줄 게 빤했다. 그리하여 이심은 이달의 생활비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본 후에 무도회장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다음 지난 무도회에서 받은 칵테일 제공권 링크 아래로 보이는 불친절한 약도에 의지해 걸음을 옮겼다.

바 에르데는 마주 오는 사람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어깨를 움츠려야 할 만큼 좁은 골목 끝의 빌딩에 자리했다. 난간이 겨우 보이는 어둑한 계단을 내려와 지층에 이르자 우측의 새까만 문 위로 라고 적힌 간판이 어슴푸레한 네온빛을 밝히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맞게 찾아온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던 이심은 문고리에 음각으로 표기된 ‘Erde’를 보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바의 내부에 들어섰을 때 감각을 압도한 것은 짙고 고소한 향이었다. 베스트를 갖춰 입은 초로의 바텐더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셰이커를 흔들고, 밑변이 긴 ㄴ 자 모양의 바 카운터 위로 따스한 질감의 로파이lo-fi 사운드가 흐르는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어째서인지 짙은 들기름 냄새였던 것이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입맛을 다시며 출입구와 가까운 자리에 앉자 바텐더가 물잔을 가져다주었다.

쿠폰을 사용하겠다는 말과, 자신에게 쿠폰을 주었던 바텐더는 오늘 근무하지 않느냐는 질문 중 어느 쪽을 먼저 하는 게 좋을까. 이심이 메뉴판을 펼치며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카운터 안쪽의 주방을 가린 벨벳 커튼을 밀어젖히며 예의 어설픈 바텐더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