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지, 그럼 심이 여름방학
되면 우리도 가족 여행을 가는 거야.”
“진짜?”
“아빠만 믿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약속할 때 아빠는 득실을 따지지도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토록 산뜻할 수가 없었다. 주말마다 아빠가 캠핑을 데려간다고 자랑하는
친구에게 우리집도 여행을 갈 거라고 말해줄 생각에 이심은 신이 났다. 일곱번째 생일에 한 외식 약속을
잊은 일도 더이상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때까지 아빠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국에 만 밥만 떠먹고 있던
엄마가 탁 소리나게 수저를 놓은 것은 그 시점이었다.
“심이한테 지키지도 못할 약속 하지 말라고 했지.”
“지키면 되잖아. 어디
가고 싶은지 둘이 정해만 놔. 자기 듀티 맞춰서.”
“퍽이나 지키겠다.”
식탁에서 일어선 엄마의 눈치를 보는 이심에게 아빠는 걱정할 것 하나도 없으니,
어서 마저 아침을 먹으라고 말했다. 그렇게 호언했지만 그해 여름방학이 되자 가족 여행은
겨울방학으로 미뤄졌다. 막연히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해보라던 아빠가 겨울방학을 언급하면서는 아무래도 하룻밤은
짧으니 두 밤은 자고 오자는 둥, 제주도 애월 쪽에 봐둔 숙소가 있다는 둥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했으므로
이심은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겨울방학이 되었을 때, 여행은
다시 봄방학으로 미루어졌다.
그해 봄에 아빠는 하룻밤 새 두 배가 되었다가 반토막이 나기도 하는 가파른 그래프에 엄마 몰래 삼 년 치 연봉을
건 모험을 감행하고 있었다. 이심이 그 사실을 전해들은 것은 성인이 된 후였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며 푸념하던 엄마는 한 번 발설한 뒤로는 잊을 만하면 그해 봄에 아빠가 잃은 돈이 전부 합해
얼마였는지, 당시 종합병원에서 삼교대 근무를 하던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되뇌며 기막혀했다. 그렇게 괴로웠으면서 아빠와 헤어질 생각은 해본 적 없느냐는 질문에는 “그때
너 아빠 없이는 못 살았을걸?” 하고 반문했다. 그럼 나
때문에 참은 거냐고 되묻자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빚이라고 다 같은 빚이 아니야. 남편이 저지른 거지 나는 모르는 일이에요 하고 내뺄 수 있는 빚이 있고, 지저분하게
얽혀서 도망을 못 가는 빚도 있고. 너희 아빠는 아주 종류별로 다 만들어놨었어.”
결국 봄방학이 시작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일정표는 짜두었냐던 아빠는 여행 이틀 전날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 여행을 아빠 없이 떠나게 된 일, 엄마의
오랜 친구인 서안이 합류하게 된 일은 결코 처음부터 의도된 결과는 아니었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 이심이
잘 알고 있었다.
근무를 마치자마자 공항으로 달려왔다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서안을 보고 진짜로 달려올 줄은 몰랐다며 벙 찐 표정을
짓던 엄마의 반응, “제주도는 차 없으면 불편하니까, 아저씨가
같이 가서 운전해줄게. 그래도 될까?” 하고 조심스레 묻던
서안의 모습을 이심은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이심은 백반증에 관해 알지 못했으므로 그의 얼굴과 손에
군데군데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백도를 닮은 흰 자국이 있는 게 신기했지만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결국
아빠와 함께 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낙담하여 대답을 할 마음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제주도에서의 이박 삼일은 순조로웠다. 서안은 아빠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운전했고, 제주 곳곳의 관광지를 꿰뚫고 있었다. 무엇보다
엄마와 말다툼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곧잘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엄마가 그토록 크게 웃는 모습을 본
것은 이심이 기억하기로 그때가 처음이었다. 여행의 마지막날 호텔의 온수 풀에서 큼직한 홍학 모양 튜브를
타고 떠 있던 이심의 입에서는 서안도 우리 가족이면 좋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심아! 삼촌 꿈도 그거야!”
화색이 돈 얼굴로 서안이 선베드에서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엄마가 그의 어깨를 쥐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심은 엄마와 아빠가 그러듯 두 사람도 이제부터 다투기 시작할까봐 겁을 먹고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엄마는 한 차례 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이심에게
이제 삼십 분만 더 놀라고 하더니 다시 선베드에 다리를 뻗고 누워서 눈을 감았다.
“그럼 우리 심이 꿈도 들어볼까?”
서안이 풀장 안으로 들어와서 홍학 튜브의 목을 쥐고 끌어주었다. 이심은 자신의 두 다리가
온수 풀의 미지근한 물살을 부드럽게 가르는 데 정신을 뺏겨 대답할 수 없었는데 서안이 다시 물었을 때는 부끄러움을 참고 말하느라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엄마처럼 간호사 선생님이 될 거예요.”
“정말?”
“네. 저는 간호사가 되고
싶어요.”
“영주야 들었어? 심이는
엄마처럼 훌륭한 간호사 선생님이 되고 싶대!”
엄마는 두 눈을 감은 채 잠시 그대로 있더니 이윽고 풀장 안으로 들어와서는 이심의 얼굴에 물을 흩뿌렸다.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공중에 흩어지던 순간, 이심은 한번 더 이렇게
셋이 가족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후로 내내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집에 돌아왔을 때 아빠가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며 내민 조그만 잿빛
강아지를 본 이심은 누군가 자신의 소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심이 동생이야. 안아봐, 이름은 일로니라고 부르고.”
“일로니?”
“머스크 형한테 따온 거야. 너
얘 가지고 싶어했잖아! 펫숍 앞에서 넋을 잃고 보던 거, 아빠가
다 알고 있었지.”
*
본가의 현관문을 열자마자 진동하는 들척지근한 탄내에 이심은 거푸 재채기를 했다.
엄마는 “환기를 시킨다고 시켰는데……” 하고
겸연쩍어하며 창문을 열었다. “뉴스가 심란해서, 점심거리
올려놓고는 타는 줄도 몰랐다.”
“통화도 안 되니까 놀랐잖아.”
“메이드 풀어놔서 온 줄도 몰랐어.
나 그냥 좀 넘어진 거라니까. 말짱해.”
“그래도 스캔 한번 떠보게 누워봐.
메이드는 나한테 주고.”
엄마는 메이드 안에 그런 기능까지 있느냐며 딴청이었다. 정말 세게
넘어진 게 아니라며 벌떡 일어나 안방 쪽을 향해 발을 차 보이기도 했다. 이심은 가볍게 눈을 흘기고는
의례적으로 아빠의 안부를 물었다. 엄마는 반대편 다리를 들어 한번 더 안방 쪽을 차는 듯한 포즈를 취한
후에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약 먹고 자. 요새는
줄창 누워 있어. 그건 그렇고. 아니, 스마트 케어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니? 골절이 된 것도 아니고 좀
넘어진 거 가지고 딸한테 긴급 알림까지 보낼 건 뭐야.”
공과금을 내듯 매달 만만치 않은 금액을 지불하는 서비스가 제풀에 ‘오버’하여 작동할 리가. 지난해 종합 검진 결과에서 골밀도 수치를 체크한
이심이 긴급 알림을 받는 항목에 골절과 타박상 민감도를 높였다는 사실을 엄마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엄마도 보기보다 허술한 데가 있다는 생각에 이심은 웃음을 삼켰다.
육십대 중반에 접어든 엄마는 이심이 왕진하며 상대하는 어르신들처럼 원격 의료를 이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메이드는 최소한의 기능만 활용했고, 이심이
새로운 서비스를 권하면 골치 아프다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이번주에 뵌 어르신 한 분은 발목 삐끗해서 한 달간 누워 계신
여파가 회복이 안 되더라. 엄마도 건강에 문제가 없을 때 미리 신경을……”
“얘가 정말,” 엄마가
이심의 말을 자르며 어깨를 툭 쳤다. “환자 본 시간은 내가 너보다 훨씬 길거든.”
“요즘은 환경이 다르고, 치료랑
예방을 할 수 있는 차원도 다르다고.”
“그만 좀 해. 신찬석
때문에 안 그래도 골 아픈데.”
“왜, 자꾸 기성세대 싸잡아
공격하니까 거슬려?” 이심이 놀리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 “하긴, 엄마는 삼교대 하는 와중에 쓰레기 많이 나온다고 배달 음식도 잘 안 시켜 먹었던 사람이니까. 같은 MZ세대라고 경규철이랑 묶여서 까이면 억울하기는 하겠네.”
“아이고, 나는 80년생이라 MZ에 껴주지도 않거든.”
엄마가 코웃음을 치더니 메이드의 홀로그램 프레임을 열어 공영 뉴스의 정치 섹션을 재생시켰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경규철과 같은 기성세대에게 철퇴를 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신찬석은 창백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띈 채 경규철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들이 이끄는 두 당이 오늘 전격적으로 합당을 결정했다는
보도가 이어지자 이심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얼마 전에 경총 옛날 보좌관 중에 한 명이 자살‘당한’ 거 같더라. 듣기로는
철도 민영화 때 경총네가 얼마나 해먹었는지 제일 빠삭하게 알고 있던 사람이었대.”
“공영 뉴스에서는 그런 얘기 하나도 안 나오던데.”
“어차피 이제 합당했다는 뉴스만 나오겠지, 뭐. 염색하고 나온 것 좀 봐라.
이제 둘이 컬러 톤까지 딱 맞잖아.”
엄마 말대로 영상 속의 경규철은 일부러 머리칼의 색소를 남김없이 제거한 듯 인위적일 만큼 새하얀 백발을 하고
있었다. 이제 총선 결과는 불 보듯 뻔했고, 다시 경총의
시대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선거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게 피로감이나마 줄이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가 합당 후 양당이 최우선으로 추구할 공통 과제가 무엇인지 묻자 경규철의 입에서는
단박에 ‘민생 안정’이라는 말이 나왔다. “알래스카 모델을 완성하겠습니다. 인공지능으로 이윤을 극대화한 기업들에
부가지능세를 도입하여 재원을 확충하겠습니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모녀는 거의 동시에 신음을 흘리며
진저리쳤다.
“저놈의 알래스카 모델 타령을 십 년 넘게 들을 줄이야. 아니지, 내각제 전부터 광을 팔았으니까 십 년이 다 뭐야. 이제 십오 년도 넘었네.”
“맞아. 내가 막 대학교
들어갔을 때 나온 얘기니까.”
이심은 유년기 동안 두 번의 팬데믹을 거쳤다. 첫번째는 초등학교 시절의
대부분을 좀먹었으며 다음은 이심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삼 년 내내 이어졌다. 바로 그 삼 년 사이에 학교
급식이 유료로 바뀌었고, 대면 수업을 하는 시기에는 반마다 점심값이 없어서 굶는 아이들이 나왔다. 이심의 짝은 자기 아빠가 결국 차를 팔았다는 사실을 말할 때까지는 키득거렸지만, 초심자도 고용해주는 생산직 일자리를 얻었다며 학교를 그만둔다는 말을 하면서는 눈물을 보였다. 난방비가 깜짝 놀랄 만큼 올라서 이심도 겨울이면 집에서 장갑을 낀 손으로 수학 문제를 풀었다. 사람들은 늘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 절박하게 입시에만 집중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이심은 생각했다. 시민 전체에게 배당금을 지급하는 알래스카를 모델 삼아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넘어 평상시에도 전 국민에게
수당을 주겠다는 경규철의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물론 당시에도 몇몇 매체는 알래스카의 모델의 허점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 애썼다.
알래스카에는 북미 최대 규모의 유전인 프루도만 유전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리고, 그곳에서
난 수입의 일부로 조성한 알래스카 영구 펀드의 수익금을 시민들에게 배당한 것이라는 맥락도 소개했다. 이처럼
지속 가능한 재원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전 국민에게 통상적으로 수당을 지급하는 방식은 세금과 물가의 폭등을 초래하리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더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기대감으로 가득찬 청사진이었다. 경규철은
가뿐히 내각제로 전환하고 초대 총리라는 자리를 거머쥔 다음 취임 석 달 후부터 ‘시민 수당’을 지급했다. 다만 그해 이심네 앞으로 지급된 시민 수당의 일 년
치를 모아도 한 학기 등록금의 절반밖에는 되지 않았다. 주권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민 수당을
통해 서민들의 숨통이 트였다는 뉴스가 쏟아지는 상황이 이심은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그나마 짧은 호황기가 지나고 올라가는 금리와 폭등하는 세금, 거의
두 배로 뛴 등록금으로 인해 이심은 전보다 더 필사적으로 학업에 매달려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쪽지
시험을 몇 번 치르고 나면 그사이에 전에는 예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국가 기반 산업은 조용히 민간에 팔려나갔고, 일명 ‘과시 금지법’으로 불리는 ‘사회
갈등 조장 방지법’이 등장했다. 서민들이 느끼는 박탈감을
경감시키기 위한 가장 빠른 해결책이라는 명목으로 부자들의 화려한 삶을 전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괴상한 법이었다. 일정
소득 이상인 사람은 SNS 계정의 공개 범위를 제한하거나 아예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별도의 SNS를 사용해야 했으며, 유명인의 부유한 삶이 드러나는 관찰 예능
프로그램은 단숨에 폐지되었다. SNS와 슈퍼리치, 슈퍼스타에
대해 특히 제재가 커서 일명 ‘신 3S 정책’이라고 불리기도 한 그 법은 부자를 없앤 게 아니라 눈앞에서 치운 것뿐이었지만 당시에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높은 지지율을 등에 업은 경총이 심혈을 기울인 사업 중 하나는 가짜 뉴스의 발본색원을 구실로 정부 공영 미디어
그룹을 새로 출범시킨 것이었다. “여의도 B 타워에서 전해드렸습니다”라는 마무리 멘트를 트레이드마크로 가진 공영 채널의 뉴스가 등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 채널의 뉴스는 별도의 요금을 부담해야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도 대부분의 언론사가
도산하거나 가짜 뉴스 제공처로 지목돼 폐업하면서 선택지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그쯤 되자 확실히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목소리, 다시 촛불을 들어야 한다는 외침이 산발적으로 터져나왔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때마침 세상에 첫선을 보인 메이드의 활약 때문이었다. 무한한 기능을
가진데다 어디에든 또렷한 홀로그램을 띄울 수 있는 메이드가 빠르게 보급되면서 당시의 모든 화제를 집어삼킨 것이다.
“이러다가 앞으로 십오 년이 지나도 경총일 것 같아.” 이심이 홀로그램 프레임을 닫으며 말했다.
엄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언제나처럼 몇몇 정치인의 이름을 말하며 그 사람들이나마 지켰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우총, 그러니까 현재의 총리인 우숙원의 정책은 살피지 않고
엉뚱한 트집만 잡는다며 답답해했다. 경총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하느냐며 주먹 쥔 손으로 명치께를 어찌나
세게 두드리는지 멍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므로 이심은 엄마의 오른손을 부여잡고 뭐라도 먹자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 딸이 왔는데 굶겨
보낼 수는 없지.”
냉장고 문을 여는 엄마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심은
엄마가 느끼는 갑갑한 마음을 잘 알았지만, 한편으로는 나아질 기대가 되지 않는 일에 매번 열렬하게 분노하는
모습이 얼마간 별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는 이심이 선거권을 가졌을 때 이미 대통령제가 사라진 후였으므로
체감하는 막막함이 다른 것이라고 했지만 그 말은 절반만 맞았다.
스펙은 화려하지만 인기 없는 아나운서로, 예능 PD로, 논객으로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어가며 미디어에 모습을 드러내어
‘관종’의 대명사로 불리던 경규철 같은 인간, 알래스카 모델처럼 허황한 정책을 남발하여 그의 성씨인 ‘경’은 가벼울 경일 거라는 비아냥을 받는 사람이 장수 총리로 군림하는 일에는 이심 역시 한숨이 나왔다. 다만 이심이 엄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최악이라고 잘라 말하는 데 저항감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심은 십대 때부터 기후 위기에 관해 배웠다. 한 세대 후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닥친 일이며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인류의 안위를 지킬 수 없으리라는 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자란 것이다. 어릴 적에 가장 자주 꿨던 악몽도 폐허가 된 지구에 남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대체로 이심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심에게 있어 최악은 나라가 망해간다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절멸이었다. 그 심정은 역으로 살아남아 있는 일에 대한 감사로 이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와 먹을 수 있는 것은 고작 레토르트 파스타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엄마와 함께 식탁에 마주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을 이심은 가질 수 있었다.
“토마토고 크림이고 둘 다 싱겁다.
그치?” 엄마가 물었다. “십 년 전에 비하면
가격은 몇십 배가 뛰었는데 죄 맹탕이야. 안 그러니?”
“그렇긴 한데, 난 웬만하면
옛날 생각은 안 하려고 해.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엄마랑
먹는 건 엄마랑 같이 먹는 맛에 먹을 만한 거고.”
“아주 내가 보살님을 낳았다니까.”
엄마가 남은 면을 이심의 그릇에 덜어주며 말했다. “너는 이럴 때 보면 득도한 사람 같아.”
“그렇지도 않아. 누가
샴푸의 요정이 있는 집에서 같이 살자고 하니까 혹하던데? 수도세 걱정 안 하고 매일 쓸 수 있었으면, 나 벌써 거기 들어가서 살고 있었을지도 몰라.”
엄마는 입안에 든 것을 씹어 삼킨 후에 천천히 입을 닦았다. 식사를
마친 것은 아니었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던 듯 “골절이 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수선이다
싶더니만 그 얘기 하려고 왔구나.” 하고 다시 수저를 들었다. 이왕
온 김에 집합가족 편입에 관해 말을 꺼내두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지금 갑자기 들었던 것뿐이지만 이심은 잠자코 있었다. 잠시 후 식탁 위의 정적을 깨듯 초인종 벨이 울렸다.
엄마가 식탁 위로 홀로그램 프레임을 띄우자 현관 앞에 비스듬히 선 한 여성의 모습이 비쳤다. 엄마는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듯 잠시 아무 말 하지 말고 있으라고 입술 앞에 검지를 세워 보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집 사람 아니야?”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이심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 저분이랑 엘리베이터 같이 타고 올라온 것 같은데.”
“그랬어?”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집에 사람 없는 척 해봤자 소용없겠네.”
초인종은 한번 더 울렸고, 다음번에는 가볍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영주씨, 영주씨” 하고
엄마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엄마가 이심의 어깨를 짚으며 여기 가만 있으라고 한 다음
현관 밖으로 나갔다. 화면 중앙으로 엄마의 손을 덥석 잡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심은 여자가 호소하는 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엄마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여자의 옆얼굴이 흔들렸다.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이심이 현관 밖으로 나가자 여자는
냉큼 이심의 손을 붙잡으며 자기 딸을 잠깐만 봐줄 수 없겠느냐고 사정했다.
“너는 굳이 왜 나왔어.” 엄마가
나무라듯 말했다.
“내가 말씀드리는 게 빠를 것 같아서.” 이심은 말했다. “어르신, 따님이
편찮으신가보군요. 12월이라 올해 바우처는 이제 다 쓰셨고요?”
“네, 선생님, 건강하던 애가 어깨에 담이 오도록 기침을 하느라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는데 이상이 없대요. 원격진료상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하고, 메이드로 DNA 스캔을 떠봐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뿐이에요. 선생님을 바꿔달라고도, 최소한 약이라도 바꿔달라고 그렇게 신청을 했는데 진단 결과에는 문제가 없다고만 하더라고요. 영리 병원에서는, 세상에 입원이나 해야 제대로 봐준다는데 그거 감당하려면
저희 집을 팔아도 될까 말까……”
“무슨 말씀인지 알죠, 어르신. 많이 답답하시겠어요.” 이심은 이럴 때마다 그러듯 지극히 차분한
어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제가 사적으로 의료 행위를 한 일이 발각되면 규정 위반으로 그달
수입을 넘어가는 벌금을 물게 돼요. 벌금은 자동으로 어르신 댁에 청구가 되고요. 벌금만 물고 끝나는 게 아니라 이후에 의료보험 비용 자체가 상당히 오를 거예요. 그러니까 어르신을 생각해서라도 제가 봐드릴 수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이심은 옆집 여자와 일별하고 식탁 앞으로 돌아와서 식은 크림소스가 엉긴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엄마는 도대체 네가 의사라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원래 막무가내인
사람들은 아니야. 올해 초에는 귤도 나눠줬었고. 딸이 아픈지
몇 년 되다보니까 속이, 속이 아닌가봐.”
“엄마, 우리 팀장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는 말이, 공공의료에는 예외가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야.”
“그래. 이게 다 의료보험
건드릴 때 못 막은 업보지 뭐.”
집안에서는 여전히 은근한 탄내가 났고 아빠가 누워 있다는 방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식탁을 치운 엄마가 “그럼 너도 요즘 무도회 같은 데 나가고 그러는
거야?” 하고 물었을 때 이심은 샴푸의 소리네 가족들을 떠올렸다. 좀더
일찍부터 마음을 굳혔더라면 바로 오늘 같은 날이야말로, 집에 돌아가자마자 샴푸의 요정을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이번에 처음으로
가봤어.”
“그래, 나는 뭐 눈치도
없니? 우리 딸이 사치하고 그런 애가 아닌데 요즘 같은 세상에 전문의 되자마자 혼자 살겠다지를 않나, 심상치 않다 싶었지. 전에 옆집 여자도 그러더라. 뉴스 보면 모르냐고, 요즘 애들은 모르는 사람이랑 부대끼고 살았으면
살았지, 부모 집으로는 안 온다고. 뭐, 저 집처럼 몇 년씩 아프면 또 모를까. 원래 그 딸이 애가 그렇게
착한 애였다던데.”
“엄마, 나 진짜 못 도와줘.”
“알아. 그냥, 전에 들은 얘기가 생각이 나서. 그뿐이야.” 엄마가 말했다. 그러더니 오랜만에 일로니 영상이라도 함께 보자며
다시 홀로그램 프레임을 띄웠다.
화면 한가운데에는 맨 먼저 새벽 두시를 가리키는 시계가, 다음으로
책상에 앉아 공부하다가 졸고 있는 이심의 뒷모습과 이심 발치에서 곤히 잠든 일로니의 모습이 나왔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일로니는 시력을 잃고, 청력도 약해졌지만 냄새만으로 늘 이심이 있는 곳을 찾아왔다. 영상은 노견이었던 일로니가 조금씩 어리고 활발했던 모습으로 시간을 역행했다.
한동안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던 이심은 엄마에게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최소한 이삼 일은 기다렸다가 전해야 한다고 다짐을 받았다.
“응, 그럴게.” 엄마는 뭘 말하는 것이냐고 묻지 않고 대답부터 했다.
“작년부터 바우처 없이도 긴급 환자로 신청할 수 있는 기준에 몇 가지
새로 들어온 게 있어. 그중 하나가 급성 이명이야. 바우처를
한두 장 더 주더라도, 난청으로 커지기 전에 막는 게 의료 비용을 덜 쓴다는 계산인 거야.”
“이명은 갑자기 들리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본인 말고는 알 도리가 없는 거고. 응, 그러니까 전에는 그런 적 없었는데 갑자기 고주파로 이명이 몇 분이나 들렸다고 신청하면, 이비인후과 전문의가 올 확률이 높겠네.”
“이비인후과 전문의는 어디나 항상 부족하니까 운이 없으면 또 같은
의사가 올지도 모른다고,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해. 아무튼
이거, 나는 모르는 일인 거야.”
“당연하지. 옆집 딸 딱하다고, 우리 딸 피해 갈 일 만들겠니? 걱정 마. 다음주에나 전할 거야. 이 얘기는 주말쯤 우연히 길에서 들었다고
하고.”
이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에는 일로니가 막 집에 왔을 즈음의 영상이
나왔다. 아빠의 부름에 아빠 쪽으로 움직이던 일로니는 반대편에서 엄마가 부르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엄마
쪽으로 달려갔다. 널 누가 데리고 왔는지 아느냐며 아빠가 아무리 불러도 일로니는 엄마 품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일로니 쟤가 지금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가 말했다. “세금을 그렇게 물면서 이 년이고 삼 년이고 버티는
거 보고 안 돌아올지도 모른다 싶기는 했어. 실은, 너희
아빠가 먼저 그러더라. 포기하라고, 자기랑 같이 살기 싫어서라도
안 올 거라고.”
“아빠는 참 그럴 때 보면 뭐랄까.”
이번에는 이심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동물적 감각 같은 게 있어. 그게 투자할 때 맞았으면 우리집도 자산가들 동네에 있었을걸.”
“누가 아니래.” 엄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확실히 어떤 면에서는 촉이 좋았어.
우리끼리 제주도 여행 다녀왔을 때도 그랬잖아.”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아빠는 나한테 그 여행이 어땠느냐고 그때도, 나중에도 한 번도 안 물어봤어.”
“그 얘기는 됐다니까.”
“그래도 불안해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던 거야. 그러니까 우리 돌아오는 날 맞춰서 일로니를 데려왔겠지.”
말은 새 가족이라고, 동생이라고 했지만 아빠는 인형을 골라오듯 펫숍에
돈을 내고 불쑥 일로니를 데려왔다.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이심에게 일로니를 내밀던 아빠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심이 동생 생겼어, 그랬던
거 기억해? 이름은 머스크 형한테 따왔지, 하면서 웃는 얼굴이
끔찍하게 해맑았는데.”
엄마는 고개를 절래절래 젓더니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해 봄방학이
지난 후 찾아온 팬데믹으로 인해 그로부터 두 해가 넘도록 다시 여행을 떠날 상황이 되지 못했으므로 어찌됐든 그 여행은 가기 잘한 거라는 말에도
대꾸가 없었다. 뉴스를 보며 분통을 터트리는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양 이럴 때 엄마는 포기하고
함구하는 일에 능숙한 사람처럼 굴었다.
지난해, 엄마의 거듭된 부탁에 이심이 서안을 만나고 온 후에도 엄마는
딱 한마디를 물었을 뿐이다. “아예 가망이 없는 상태야?”라고. 그렇지 않다고 하자 표정을 담지 않은 얼굴로 가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모르는 게 있어. 이심은 속으로 생각했다. 엄마의 옛사랑은 단순히 소수의 자산가 그룹에 속한 사람 중 한 명에 불과한 게 아니라고. 이십여 년 만에 만난 그 사람에게 내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아마 엄마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