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심은 수영을 할 줄 몰랐지만 그 바다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등을
대고 눕듯이 몸을 늘어뜨려 수면 위에 떠 있는 일은 아주 쉬웠다. 한여름 밤. 나른한 온기를 머금은 바닷물이 전신을 감쌌다. 문득 이심은 이게
정말 나의 몸이 맞는 것일까, 하는 낯선 감각에 사로잡혔다. 생전
처음으로 벌거벗은 채 밤바다에 뛰어든 탓일까. 어쩌면 달빛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밝아서인지도 몰랐다. “아직도 이런 바다가 남아 있다는 게 놀랍지 않아? 그러니까 여기서
나랑 같이 살자.” 먼저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린 다음, 그보다
더 부드러운 손길이 허리에 닿았다. 무릎을 건드리는 것은 입술과 혀끝의 따스한 촉감이었다.
무릎에 혀가 닿으면 여전히 간지럽다고 생각하며 키득대다가 이심은 번쩍 눈을 떴다. 그러고는 꿈속의 상황이 실제의 경험보다 고요하고 여유 있게 각색된 게 어이없어서 웃음을 지었다.
두 손으로 허리를 받쳐줄 테니 안심하라는 말만 믿고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던 그 밤에 이심은 맥없이 발버둥친
다음에야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이후에는 제법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지만 짠물을 들이켜 내내 코 안쪽이
얼얼했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했다. 사람이 살면서 섹스에 사용할 에너지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아마 이번
여름에 절반이 넘게 소진했을 거라는 대화를 나누었던 해변도, 그 도시에서 함께 살자는 얘기를 들었을
때 망설임 없이 거절했던 일도 기억났다.
이심에게는 오랜 원칙이 있었다. 로맨틱한 끌림이나 성적인 자극에 열렬히
사로잡힌 상태에서 호르몬을 촉매 삼아 타오르는 불안정한 감정에 기반하여 배우자나 가족을 정하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상대는 등을 돌리고 앉은 채 잠시 말이 없더니 “같이
살자는 말을 한 다음에 그렇게 골치 아픈 대답을 들을 줄이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을 이루는 선은 아름드리나무처럼 늠름하게 뻗어 매혹적이었지만 목소리와 어투는 이심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인지 꿈에서 함께 살자고 권한 목소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무릎에 닿은 입술의 주인은 또다른 사람이었다. 학교 선배였던 그녀는 오랜 시간 이심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헤집어놓았는데 몇 가지 추억은 지금도 소중하게 곱씹을 만큼 달콤했다. 지난 인연이 총출동한 꿈을 꾸다니. 나는 가족을 꾸리기에 앞서 연애를 더 하고 싶은 것일까. 이심은
연신 하품하면서 자문해보았다.
곧이어 왼쪽 손목에 착용한 메이드가 부드러운 진동을 전했고, 팔을
흔들어 알람을 끄면서 이심은 자신이 연애를 열망하는 것은 아니라고 정리했다. 첫 무도회에서 받은 자극이
꿈에 반영된 것뿐이다. 그 덕으로 오랜만에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깼지만 곧장 일어날 마음은 들지 않았으므로
이불 밖으로 양팔만 꺼냈다.
기상 시각 6시 42분입니다.
부드러운 안내 음성과 동시에 메이드 위로 돋아난 잔디가 맑은 녹색으로 일렁였다.
홀로그램 이미지 어디에도 시든 구석이 보이지 않는 것은 몇 주 만의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생체 데이터상 수면의 질이 좋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도 바로 날씨나 뉴스 화면으로 넘어가지 말고 혈압과 호흡수,
심장박동 그래프의 변화 양상을 확인해보라는 이야기를 이심은 왕진을 돌면서 늘 입에 올린다. 어떠한
통증이나 증상이 돌연히 나타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조금씩 악화되다가 임계점을 넘었을 때 도드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변화의 양상과 방향성을 늘 지켜보며 돌봐야만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습관을 들이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은 이심도 내심 잘 알고 있었다. 자신 또한 잔디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누렇지만 않으면 그럭저럭 잘 잤구나 안심하며 곧장 잔디의 끝을 건드려 게임용
사각 프레임으로 전환해버렸기 때문이다. 홀로그램 프레임은 메이드를 착용한 팔에서 반경 1m 내의 공간에 띄울 수 있고 크기는 네 단계로 정할 수 있었는데, 이심은
손바닥 두 개 정도 되는 너비의 프레임을 얼굴에서 두 뼘 앞으로 띄우는 것을 선호했다.
메이드가 막 출시되었던 십여 년 전에, 한번은 엄마가 이심에게 화살표
게임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게임의 진행 방식을 묻는 것으로 착각한 이심은 신나서
총 다섯 가지 색의 화살표는 위↑, 아래↓, ←좌, 우→, 네 방향과 그 사이의 45도를
↖↗↙↘ 합쳐 총 여덟 방향을 띈다는 점부터 설명했다.
화살표는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프레임 안을 누빈다. 그중에 같은 색과
크기라는 두 가지 조건이 맞는 화살표를 손끝으로 끌어다가 하나로 겹쳐놓으면 폭죽이 터지는 홀로그램이 일렁이면서 자신이 직접 고른 목소리로 감탄사가
나온다. 색과 크기뿐만 아니라 방향까지 세 가지 조건이 같은 화살표를 겹쳐놓으면 점수를 두 배로 획득할
수 있고, 이 점수를 포인트로 환산해 취약 계층에 기부도 가능하다. 이심은
허공에서 반짝이는 홀로그램을 직접 건드려 움직이는 행위 자체를 즐겼다. 흠모하던 선배의 음성으로 칭찬받는
경험도 짜릿함을 더했다. 직접 해보겠느냐며 메이드를 건네려 하자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설명은 고마운데 안 할래. 나는
우선 메이드, 그거 이름부터가 너무 찝찝해.”
그 점에는 이심도 이견이 없었다. 메이드 개발사의 공식 입장은 어디까지나
‘웰 메이드’에서 따온 명칭이라는 것이었으나 석연치 않았다. 스마트폰과 워치,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를 더하고 인공지능 가상 비서
시스템까지 삽입한 ‘메이드’가 출시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이
맨 먼저 떠올린 것은 하녀라는 의미였다. 이심 모녀는 분명 남성 개발자들에게서 나온 아이디어일 거라며
혀를 찼는데, 알고 보니 개발팀의 최고 책임자는 여성이라는 소식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그러나 착용을 잊을 정도로 가볍게 손목에 감기는 밀착력 하며 스마트폰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요금으로 인해 갈아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십 분쯤 게임을 한 후 잠자리에서 일어나 오트밀 우유 한 잔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칫솔질하는 동안, 이심은 메이드를 통해 공영 뉴스를 청취했다. 대개 그렇듯 첫 뉴스는
‘사회 갈등 조장 방지법’ 관련 보도였다. 자산가들의 삶을 여과 없이 담았다는 다큐멘터리가 극심한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공개
불가 조치를 받은 일에 감독이 항의하며 성명을 발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뉴스는 성명서의 내용은 다루지
않았다.
오십대 남성인 어느 자산가는 이사 과정을 담은 짧은 영상을 SNS에
전체 공개로 게시했다가 벌금형을 받았다. 이심은 자산가 그룹 내에서만 공개하지 않은 실수를 벌인 그가
처벌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영상을 시청한 사람까지 전부 벌금을 물리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라고
여기며 치실을 집어들었다.
진료 바우처 부정 사용 뉴스가 흘러나와 건너뛰자 곧이어 첫 직장에서 작성한 비밀 유지 각서를 어긴 탓에 오 년이
지난 시점에 당시 연봉 삼 년치를 벌금으로 물게 된 이십대 회사원의 사연이 전해졌다.
누군가 제도를 어기고 벌금형에 처해졌다는 뉴스를 이토록 매일 들을 필요가 있을까. 이심은 최선생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권하는 유료 뉴스 채널을 떠올렸고, 다음
순간 4/4분기의 물가 상승률을 전하는 뉴스를 들으며 어째서 자신이 돈을 주고 뉴스를 구독할 여유가
없는지 재확인했다.
뉴스에 따르면 놀랍게도 한국의 물가 상승률은 세계 평균에 한참 밑도는 것이었다.
서유럽의 식자재값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었고, 미국 남부 지역 아홉 주의 가정이 부담한다는
전기세는 오싹함을 느낄 수준으로 폭등했다. 이심은 미지근한 온도에조차 미치지 못하지만 최소한 얼음장처럼
차갑지는 않은 물을 받아 불만 없이 입안을 헹궜다.
이어서 들려온 뉴스의 주인공은 국회의원 경규철이었다. 앵커는 두 해
전에 사학 재단과의 유착설이 제기돼 총리직에서 물러난 경규철이 총리 재직 당시 철도 민영화 과정에서 참여 기업 선정에 직접 관여한 정황이 드러났다며, 이 사실이 다가올 선거에 미칠 영향이 주목된다고 전했다. 이심은
자신의 투표와는 상관없이 경총이 총리 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대부분 그렇게 여길 터였다. 따라서 굳이 한 표를 행사할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세간에
떠돌던 경총의 철도 민영화 개입 건을 공영 뉴스에서 다뤘다는 사실만큼은 신선했다. 그때까지 대강 흘려듣던
뉴스를 영상으로 전환해서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앵커는 어느새 다음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이십여 분 후에 이심은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며 지하철 문 위로 자리한 화면에 흐르는 공영 뉴스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물한 살에 최연소로 국회에 입성한 사실로 주목받더니 어느새 제2야당의 대표 자리에 오른 신찬석. 그의 낯빛은 그새 더욱 파리해진
것 같았다. 왼눈 옆으로는 눈물 자국 같은 반점이 번져 있었다. 그는
반쯤 하얗게 센 속눈썹을 깜빡이며 자신은 이제 고작 이십대 초반이지만 유년기부터 앓아온 두 가지의 자가 면역 질환과 만성이 된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며
늘 죽음을 가까이 느낀다고 했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는 육체는 두려움보다 간절함으로 가득차
있다고도 말했다. 그러니 무분별하게 자원을 낭비하며 환경을 파괴한 기성세대들로 인해 병들고 죽어가는
자신에게 한 표를 행사해달라고, 청년들을 위한 새로운 정치에 힘을 보태달라고 호소했다.
“눈빛이 절절한데.” 언제
열차에 올랐는지 최선생이 이심의 얼굴 앞으로 손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 “신찬석 밀어주게?”
“모르겠어요. 신찬석 얘기
들으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기는 한데. 전에 최선생님이 얘기하신 거 듣고 보니까 정말 좀 그렇더라고요. 기성세대 얘기할 때는 패기 있어 보이는데, 자산가들이나 경총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 하는 게 영…… 결국 본인이 어떤 법을 만들고 뭘 하겠다는 알맹이는 빠진 얘기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니까.”
“그래도 신찬석이 좀 치고 나가면 표가 갈려서 경규철이 다시 돌아오는
꼴은 안 볼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오늘 아침에는 경총 비리 뉴스도 나오던데, 뭔가 분위기가 좀 바뀌는가봐요.”
“아이고, 신찬석 너무
믿지 마.”
최선생은 말을 마치자마자 새로 난 빈자리를 향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아침에 근시 교정용 안약을 깜빡했다며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운좋게 다음 역에서 옆자리가 비어서
나란히 앉자 최선생은 공영 뉴스에서는 다루지 않는 일들, 그러니까 부자들의 실제 삶의 형태나 신찬석의
미덥지 못한 행적, 경총 일가 비리의 본질 같은 일을 더 알고 싶으면 한 달에 하루치 생활비만 투자하라고
말했다. 그녀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유료 뉴스를 권하면서도 늘 처음 소개하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말했고, 이심은 이제 귀찮다기보다 웃음이 났다.
“생각해봤는데요, 일 때문에
보는 서류도 아닌 텍스트를 시간을 들여서 읽는 사람은 정말 뭐가 돼도 될 것 같아요.”
“여기에도 영상 있다니까, 텍스트
기사는 음성으로 들어도 되고.”
“알았어요. 고민해볼게요.” 이심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가족 늘어서 여유 생기면 또
모르죠. 어린애 두 명 있는 집이랑 합칠지도 모르거든요.”
“정말? 몇 명이 어떻게
꾸린 가족인데?”
이심은 샴푸의 요정을 가진 집의 구성원을 떠올려보았다. 토끼 옷을
입은 꼬마와 초등학생 여자아이, 그 둘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십대 가량의 성인 여성은 꼭 빼닮은 얼굴만
보아도 본래 혈연으로 맺어진 모녀 관계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거기에 육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
한 명과 삼십대의 쌍둥이 남성 둘이 더해져 한 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쌍둥이란 말이지……”
최선생이 상체를 등받이에 바짝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속옷 위에
붙인 핫팩의 열기가 더 잘 느껴진다고 했다. 지하철 내부의 난방 가동을 멈춘 게 몇 년 전 겨울부터였더라. 이심은 시린 발끝을 내려다보며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러고는 체온을
나눠주겠다며 최선생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녀는 “오늘밤은
더 춥대. 왕진 가는 게 질려, 공공의 팔자 탈출하고 싶다.” 하고 중얼거렸고, 이심은 절대 못 놔준다면서 더 세게 끌어안았다.
시월 말부터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패딩 점퍼로 무장하고 출근하는 최선생은 가을이 저물어갈 때면 입버릇처럼
왕진의 고달픔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혹한기나 폭설이 내리는 날조차 변함없이 가장 오랜 시간 일하며 많은
수의 환자를 상대했다.
이심이 그 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 일하는 공공 의료 센터의 왕진 2팀에
배속되었던 이튿날이었다. 그날 조례 시간에 팀장은 왕진 업무를 보는 의사가 크게 세 가지 타입으로 나뉜다고
강조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유형이 일신의 안녕에만 골몰하는 타입이라며, 왕진에 나서는 공공의 업무를 한때의 추가 수당 벌이로만 여기며 건성건성 진료하는 의사들이 태반이라고 혀를 찼다. “사실 그런 분들은 더 늦기 전에 자산가들 주치의에 도전하시거나, 영리
병원으로 넘어가서 슈퍼컴퓨터 보조로 일하는 게 낫죠. 아니 뭐, 이제
2020년대생이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나와서 설치는 판에 자기 능력만 되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는 겁니다.” 빈정거림이 잔뜩 묻은 어투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심은 팀장이
으레 신입인 자신을 단속하기 위해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리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두번째 타입은 짭짤한 수당이라는 직업인으로서의 혜택과 더불어, 원격 의료 체계를 활용하지 못하는 디지털 문맹 노인네들, 아, 제 말이 심했군요. 고령층으로 바꾸죠. 고령층을 위한 공공 의료로서의 가치. 그 두 가지를 조화롭게 도모하는
의사겠죠. 바로 이런 유형이 우리 팀에서 추구하는 인재상이라는 데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스템의 허점을 비집고 과도하게 정의감을 실천하시는
분들이 아주 간혹 나타난다는 겁니다. 뭐,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저도 개인적으로는 존경심을 느껴요, 암요.” 팀장은
미소 띤 얼굴로 최선생을 응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엄연히 공공 의료 기관에 소속되어 일하는
공직인 만큼, 정부 방침에 따라야만 한다는 사실, 제발 좀
기억해주세요.”
모두 잘 아시다시피, 하고 이어지는 내용은 이심이 파견되기 전부터
신물나게 들었던 원칙이었다. 기본적으로 국민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연간 4회의 진료 바우처가 부정 사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공공 의료 종사자 모두의 의무라는 것. 왕진은 어디까지나 원격 진료에 어려움을 토로하는 칠십 세 이상을 위한 보완적 조치로만 한정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개인적 진료 행위는 규정 위반이라는 것까지.
최선생은 노골적으로 그녀를 응시하는 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팀장님. 아시잖아요, 앞으로 걸릴 병을 구십 프로 이상 예상해서 예방 조치가 나갔다고 해도 사람들은 아무튼 여기저기 아프다고 난리인
거. 그래서 저는 동네에 의사라는 소문 안 나게 우리 딸래미 입단속까지 시킨다니까요?” 하고 소리내 웃더니 스스로 얌체처럼 느껴진다면서 아랫입술을 날름 핥았다. 그러자
개인적인 의료 상담을 피하기 위해 직업을 속였던 경험을 얘기하며 김선생과 박선생이 그녀와 장단을 맞춰주었다.
“사실 나도 자식 키우는 사람으로 팀장님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에요.” 조례가 끝나고 사무실을 나서며 그렇게 말문을 연 것은 적극적으로 최선생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던
김선생이었다. “팀장님이 작년에 늦둥이를 봤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서 오래 버티려면 최선생 단속을 안 할 수가 있겠냐는 겁니다.”
김선생은 최선생이 방문한 가정의 사정에 따라 한 장의 바우처로 두 명, 때로는
세 명씩 진료를 봐주는 모양이라고 귀띔해주었다. 물론 왕진의 특성상 본인과 환자들만 비밀을 지킨다면
진실을 알 도리가 없지만 일하는 시간 대비 진료하는 환자의 수는 적은데 처방되는 약이 더 많은 것만 봐도 빤한 것 아니냐면서. 대신 진료 시간 자체를 늘려서 실적을 충당하다보니 엄연한 규정 위반에 대해 팀장도 주기적으로 주의를 주는 선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사가 실제로도 있군요. 진작
멸종된 줄 알았는데.”
놀란 이심이 대꾸하자 김선생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검지를 세로로 들어 입술에 가져다댔다.
몇 해 동안 가까이에서 살핀 최선생은 얽히면 피곤한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강렬한 첫인상이 무색하리만큼 어울리기
편한 사람이었다. 공공 의료 센터 안에서 누군가 무도회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놓치지 않고 소감을 말해보라며
두 눈을 빛내는 모습에는 천진함마저 보였다.
“그럼 리키네는 바로 탈락이야? 걔
키가 백구십은 된다고 했지?” 지하철역 출구를 나서며 최선생이 물었다.
“리키 얘기를 그렇게 원하셨구나. 하긴
그 가족도 뭘 원하느냐는 질문을 정말 엄청 강조하더라고요.”
“그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섹시하지 않니?” 최선생이 헤벌쭉 웃으며 이심의 어깨를 슬쩍 밀었다. “젊은 다자
연애 그룹이야 뭐, 진짜 가족이라고 볼 수 없다고 경계하는 사람도 많지만 아무래도 외모 되는 애들이
많으니까 주목되잖아?”
“튀긴 튀더라고요.”
“그러니까 최소한 대놓고 어필하는 거는 막아보려고 사람들이 무도회에서
노골적으로 섹스 라이프 얘기는 못하게 규정을 만든 거래. 그런데 나는 막 길쭉길쭉한 애들이 눈웃음치면서
은근히 암시적으로 얘기하니까 그게 더 야하더라. 왜 웃어?”
“최선생님도 생각보다 규정 같은 데 관심이 있으셨구나 싶어서요.” 이심은 얼른 말을 돌렸다. “농담이에요. 아니 이렇게 마음이 펄펄 끓는 분인데, 본인 가족 정할 때는 그
점을 너무 등한시하신 거 아니에요?”
“사는 게 그거의 반복이잖아.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거.” 최선생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일평생
원했지만 뭘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해하던 일이 있다고 쳐봐. 그걸 이렇게 풀면 되지 않겠느냐고
밑그림을 보여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손을 덥석 잡지, 안 잡고 배기겠니?”
“그 밑그림이라는 게 뭔지는 지금도 비밀이고요?”
“때가 되면 다 얘기해줄게. 우리
선민이가 아주 전심전력으로 연구하고 있어.”
“선민이는 참 대단하네요. 이제
중학생인데 그런 연구도 하고. 그럼 하는 김에 지구는 못 구해준대요?”
선민이는 보통 중학생이 아니라며 최선생이 미소 지었다. 집합가족을
이루며 얻은 딸 선민의 존재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만일 직접 낳은 아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토록
믿고 사랑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문득 그게 어떤 기분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스쳤고, 그 점에 이심은 상당히 놀랐다. 무도회에
참석한 날 토끼 옷을 입은 꼬마를 따라 그들의 가족과 대면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운명적인 만남이나 관계를 떠올려본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도시 괴담을 마주한 기분이네요. 있잖아요, 왜. 쌍둥이인 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실은……” 이심은 거기까지 듣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가족들의 얼굴에 난감해져서 신경쓸 것 없다고
오른손을 휘저었다. “아무튼, 쌍둥이이신 두 분은 아까도
뵌 적이 있어요. 이렇게 또 뵙네요.”
이심은 칵테일을 기다릴 때처럼 쭈뼛대며 눈치를 보는 훈민의 모습에 차마 반갑다는 말까지 덧붙이지는 못했다. 고개를 까딱이는 훈민과 달리 그의 형제는 허리를 숙여가며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름표에는 ‘정훈’이라고
적혀 있었다. 훈민과 정훈이라니.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하마터면 ‘훈민정음’이 되었을 둘은 옷 취향까지 비슷해서 웬만큼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한 명으로 착각할 만했다. 겉으로 보이는 차이가 있다면 정훈의 머리카락이 조금 더 긴 것 정도였다. 정훈은
이런 자리가 껄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초등학교 고학년쯤으로 보이는 소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소리’라는 이름의 소녀는
베이지색 면바지와 그보다 조금 더 짙은 빛깔의 코르덴 셔츠를 입고 머리는 하나로 묶은 모습이었다. 이심이
소리를 향해 한 발 앞으로 다가가자, 토끼 옷을 입은 꼬마가 한번 더 샴푸의 요정을 자랑했다.
“로아야, 이모, 하고 불러보렴.”
꼬마의 어깨를 감싸안고 있던 할머니의 이름은 ‘애월’이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채근에 로아는 방긋 웃으며 “이모! 우리집에는 샴푸의 요정이 있어요!” 하고 지치지도 않고 말해주었다. 오늘 이 가족이 내세우는 카드는
토끼 옷을 입은 로아와 욕실 시스템이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샴푸의 요정을 설치할 만한 공간이
확보되는 집이라면 비좁지는 않을 것이나 거주 공간에 욕실 시스템 외에는 강점이 없을 수도 있다고 이심은 판단을 유보했다.
“물론 샴푸의 요정이 있다고 자주는 못 쓰지만요. 아시다시피 전기세나 수도세가 워낙……”
훈민이 초 치듯 끼어들자 가족들 사이에서 그를 나무라는 소리가 동시에 날아들었다. 정훈은 가족들을 진정시키더니 “죄송해요, 선생님. 저희 형은 거짓말을 하면 잡혀가기라도 하는 줄 아는 사람이거든요.” 하고 변명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유쾌함을 연출하는
어투였다. “어쨌든, 아까는 미남 미녀들이 경계하는 통에
인사도 건네지 못했는데 이렇게 말씀을 나눌 기회가 닿아서 기쁩니다.”
“네. 저도 반가워요.”
이심이 다소 의례적으로 대꾸하자 훈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정훈에게 미남 미녀라는 것은 어떤 가족을 말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이심이 ‘원하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들이라고 힌트를 줘도 알아채지 못했는지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냐고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애월씨, 로아 귀 좀
막아주실래요?”
이심은 그렇게 부탁하고는 여전히 정훈의 손을 잡고 있는 소리의 귀를 양손으로 가볍게 막았다. 그러고는 훈민에게 화려한 다자 연애 그룹이 섹스어필을 에둘러 하는 표현이라고 말했다. 그제야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멍한 얼굴은 이심으로 하여금
칵테일 대기 줄 뒤에 섰던 커플이 나누던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다음 순간, 이심이 소리의 귀에서 손을 떼었을 때였다. 소리가 가볍게 이심의 팔을 잡았다. 그러더니 “저도 의사가 되고 싶어요.” 하고 말했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였지만 이심은 그 작고 앳된 음성에서 결연하고 단단한 기색을 느꼈다.
“우와, 소리는 벌써 꿈을
정했구나.” 이심이 대꾸했다.
“네. 저도 꼭 선생님처럼
의사가 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소리의 눈빛, 팔을 쥐던
작은 손과 간절함이 배어 있던 목소리가 이심의 마음 속 어딘가를 건드렸다. 그 감정을 들여다보고 싶었으므로
다음 주말에 그들 가족이 사는 집에 놀러오라는 청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약속을 하고
나자 다소 성급하게 내린 결정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월요일 조례 시간에도 마음은 무도회의
잔상에 잠겨 있었다. 흔쾌히 자기 앞에 서라며 양보하던 사람들의 미소,
공짜 술을 마시러 오라며 쿠폰을 건네던 바텐더의 낭랑한 음성, 자기 집에 방문해달라고 부탁하던
소리의 모습이 거듭하여 떠올랐다.
“위조한 진료 바우처 적발 사건, 공영
뉴스에서 다들 봤죠? 바우처 확인에 만전을 기합시다. 늘
말씀드리지만 공공 의료의 생명은 공정함에 있어요. 모두를 구하려다가는 아무도 못 구한다는 사실을 명심, 또 명심하시면서……”
팀장의 잔소리가 유난히 길게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날의 업무를 시작하고
왕진 가방을 멘 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진료를 이어가는 동안에도 이심은 불현듯 소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윽고
그날의 마지막 진료를 위해 방문한 가정의 노인에게는 되레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 게 아니냐는 질문마저 들었다. 올봄에
봤을 때와는 영 다른 사람 같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기억은 곧장 떠오르지 않았지만 진료 차트에 휘갈겨 적어둔 몇 가지 단어로, 노인이 작년에 남편과 사별했으며 발목 골절로 한 달간 와식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때 감소한 근육의 양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식사는
비건식만 취하고 있었는데 간편식 비중이 높아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다.
“비건식 하시는 어르신은 더 부지런하셔야 된다는 얘기는 전에 온 의사들한테도
많이 들으셨죠? 여기 콜레스테롤 수치 좀 보세요. 이러다가
지금 드시는 약을 두 배로 처방받으시는 거 순식간이에요, 어르신.”
싱크대 한쪽에 쌓여 있는 라면 봉지를 가리키며 채식 라면이 주식인 거냐고 묻자 노인은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더니
라면 옆에 둔 두유를 가지고 와서 건넸다.
“선생님, 여기 옆 단지도
가시죠? 거기서 지난달에 아흔둘 된 양반이 살인으로 잡혀 들어간 거 알아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안 놀라시네. 하기야
그런 일이 처음도 아니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요, 선생님. 독신세 안 물고 혼자 살려면 사별밖에는 수가 없어요. 그 할머니가
기다리다, 기다리다 헤까닥 한 거, 난 백번 이해해. 일흔넷부터는 혼자 살아보게 됐으니까 나는 그나마 운이 좋다는 것도 알고요. 사람이
이렇게 간편하게도 살 수가 있더구만. 그러니까 제발 약이나 좀 세게 처방해줘요. 발목 욱신거리던 게 무릎 위까지 번졌으니까.”
방 두 개에 거실 겸 부엌이 달린 노인의 집은 북향이라 바닥이 냉골이었다. 비고란
마지막에 고독사 위험군을 의미하는 코드가 적힌 데에는 이심 역시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스산함이 배어
있는 노인의 삶이 홀가분해 보이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이심은 노인의 집을 등지고 나오면서 그간
자신이 차트에 고독사 위험군이라는 표기를 적어넣었던 몇몇 노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깨를 떨며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는 무척 허기가 졌다. 오직 따듯한
국물을 먹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편의점에 들어서자 들리는 뉴스에서는 이천 년대 이전에 태어난 기성세대, 탐욕스럽게 소비에 몰두하여 자원을 고갈시키고 환경을 망쳐놓은 그들에게 철퇴를 가하겠다는 신찬식의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이심은 ‘나는 아직 철퇴를 맞는 쪽으로 분류되지는 않는가보다’ 하는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라면을 집었다.
집에 돌아와 조금 싱겁지만 그만큼 덜 자극적인 라면 국물을 떠먹으면서 이심은 무도회에 참석한 일의 위력을 느꼈다. 진료중에 꺼두었던 메이드의 개인 메시지 창을 열자 주말에 참여했던 무도회와 엇비슷한 콘셉트의 무도회 등록을
유도하는 메시지가 열 통 넘게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대충 읽고 지우기를 반복하던 이심이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것은 식사를 막 끝마쳤을 때였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자신을 리키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심이 기억하지
못할까봐 염려됐던지 얇은 셔츠를 걸치고 침대 헤드에 나른하게 기대앉은 사진 한 장도 첨부해놓았다. 이심은
홀로그램 프레임 위로 선명하게 떠오른 그의 모습을 감상하면서 도대체 자신이 언제 그에게 연락처를 주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기억에 없었다. 실제로 연락처를 건넨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사진 아래의 메시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리키는 사실 자신과 은혜, 청명이 그 무도회를 주최하는 스타트업 이벤트
기업 소속이라고 밝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참석자의 연락처를 개인적으로 찾아본 것은 처음이며, 드디어 자기 가족의 마지막 조각을 찾은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릅썼다고 적고 있었다. 이심은 문득 그가 규정을 어기고 임의로 자신의 연락처를 알아본 만큼, 의사를
확인하지도 않고 보내온 사진을 누군가에게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가책을 가질 필요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최선생에게 보이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궁금해졌다. 대화창을 열어 최선생에게 뭘 하느냐고 묻자 잠시
뒤에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썸네일이 연달아 메시지 창 위로 떠올랐다.
진짜 흥미진진한 무도회에도 가볼래?
최선생은 링크 아래에 그렇게 적었다. 하나하나 썸네일을 클릭하며 시간을
죽이던 와중에 드디어 무도회에서 이심이 유일하게 연락처를 건넨 사람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소리예요. 주말에 저희 집에 와주시는 거죠?
이심은 물론이라고 답장하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냄비를 치웠다. 라면
한 봉지에서 피어오른 냄새가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싱글 침대도 겨우 놓은 이 작은 방과도 곧
작별을 고할 터였다. 주말에 소리네 집에 가면 그토록 자랑하던 샴푸의 요정을 써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심은 무도회 참여자의 후속 만남을 위한 안내 절차에 따라 자신의 건강 상태와 체질적 특성을 묻는 설문지를
작성하여 소리네에게 전송했다. 이튿날에는 소리네가 보내온 내용을 꼼꼼히 읽었고, 금요일 밤에는 소리의 동생인 로아와 가족 중 최고 연장자인 애월씨의 건강에 관해 체크해둘 사항까지 표기해두었다.
그랬건만 막상 약속한 시각에 이심은 소리의 집으로 향할 수 없었다.
막 집을 나섰을 때 메이드로 호출이 왔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메이드가 긴급한 사안임을 감지하고 자동으로 발신한 알림은 이심의 엄마가 장애 혹은 장기적 신체 기능 저하를 촉발할 수 있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