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밀려나가는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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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리는 쉬는 시간마다 우리 반으로 찾아와 내 곁을 서성였다. 나는 언제나 그래왔듯 대충 말 상대를 해주다 읽고 있던 책에 시선을 떨구거나, 아니면 다른 아이들 무리에 끼곤 했다. 그럼 태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이 다소 쓸쓸해 보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태리의 반과 우리 반의 배식 시간이 겹칠 때면 태리는 어김없이 내 앞에 앉아 밥을 먹고는 했다. 나는 조잘조잘 떠드는 그의 말에 대답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얼른 밥을 먹었다.

태리의 심상찮음을 느낀 것은 태리 때문이 아닌, 타인의 시선 때문이었다.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갑자기 나를 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떨리는 순간이 있었다. 아이들은 적의 어린, 혹은 공포심에 질린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뿔뿔이 흩어져버렸고, 고개를 돌리면 어김없이 태리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반장이 아닌 ‘태리 베프’라고 불렀을 때, 아이들 사이에 일순 정적이 일었다 와르르 웃음이 흘러나온 적도 있었다.

나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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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가 끝나고 윤도가 학원을 그만뒀다. 모의고사며 중간고사 성적이 영 시원찮게 나와 엄마가 강제로 학원을 그만두게 한 후, 근처 국립대에 다니는 대학생을 과외 선생님으로 붙여주었다고 했다. 어차피 매일 학교에서 볼 수 있음에도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나만 혼자 제자리에 남겨지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길을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가는 듯한, 그렇게 내가 알고 있던 한 시절이 저무는 것만 같은 그런 오묘한 기분. 

무늬 역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그것이 비록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밀려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모의고사도 내신도 꽂아놓고 1등을 수성하고 있는 무늬 덕분에 학원에 우리 학교 학생들이 부쩍 늘었다. 수준별로 새롭게 반이 배정되었음에도 무늬와 나, 혜영은 여전히 같은 반이었다. 혜영의 경우는 나와 엇비슷한 성적이었다. 무늬와 혜영은 모두 뭐에 쫓기는 것처럼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그것은 투지에 가까운 결기처럼 보였다. 심지어 무늬는 그 좋아하던 담배도 하루 한 갑에서 일주일에 한 갑으로 줄였고(?), 학원 수업이 끝난 후에도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자습실에 남아 공부를 하고는 문을 닫고 가는 날이 많았다. 나 역시도 덩달아 함께 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하는 일이 잦았다. 한번은 무늬에게 왜 목마른 사람처럼 다급하게, 또 절실하게 공부를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무늬는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서울에 가야 하니까.”

서울이라니. 아직도 나미에 언니 타령을 끝내지 않은 건가 싶어서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쿠사리를 주려다가 윤도 곁을 빙빙 맴도는 내가 무슨 주제넘는 소리인가 싶어, 대신 나미에 언니와 지금도 연락을 하는지 물어봤다.

“가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언니한테 문자 오면 대답하고. 전화도 가끔 하고.”

그 사달을 겪고 나서도? 일주일에 한두 번이 가끔이라고 할 수 있는 빈도였나. 나미에라는 여자는 도대체 뭘까. 애인을 사귀면서 뒤로는 무늬의 애정을 착취하고, 또 자기가 그만 만나자고 해놓고 뻔히 연락을 주고받는 모습이라니. 하긴 그런 그녀의 장단에 놀아나는 무늬는 또 어떻고. 순정파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결말이 뻔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무늬는 기어이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그런 무늬의 마음은 순도 백 퍼센트에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원을 같이 다니지 않다보니 윤도와 대화하는 시간이 부쩍 줄어들었다. 학기가 끝나갈 때쯤에는 매주 함께 가던 수영장도 한 달에 한 번 갈까 말까였다. 윤도를 볼 수 있는 건 학교에 있을 때가 거의 유일했다. 그래서인지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면 윤도의 뒷모습을 관찰하게 되었다. 윤도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부쩍 가까워진 것 같았다. 쉬는 시간이면 교실이 떠나가라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대부분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긴 애초부터 윤도와 나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둘만이 공유하는 무엇인가가 있었을 뿐. 

혹은 그런 게 있다고 나 혼자 일방적으로 믿었을 뿐. 


*


엄마에게서 미라 아줌마가 좀 이상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6월의 어느 날이었다. 미라 아줌마는 다니던 보험회사를 그만두고 다이어트 식품을 팔기 시작했는데, 아줌마 특유의 수완 덕분인지 혹은 교회의 인적 네트워크를 십분 이용한 덕분인지 단백질 파우더와 다이어트 보조제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줌마는 교회 근처의 망한 우유 배급소를 인수해 가게를 차렸다. 개업을 하는 날 엄마와 함께 서양란을 사들고 가게에 찾아갔다. 간판에는 다이어트 식품 브랜드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쇼윈도에 붙어 있는 설명에 따르면 고객들의 라이프 스타일 전반을 다루는 가게였다. 미라 아줌마는 엄마가 건넨 서양란 화분을 받아들며 환히 웃었다.

“뭐 이런 걸 사왔어. 다 네 덕인 거 알지?”

“무슨 소리야. 네가 이룬 거지.” 

왜 엄마의 덕일까 싶어 집에 돌아가는 길에 물었다. 상가 인수 자금이 모자라 엄마가 소액을 ‘투자’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마음이 철렁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집에 오자마자 미라 아줌마가 취급하는 브랜드를 검색해보았다. 

아니나다를까, 그 브랜드는 네트워크 마케팅, 즉 다단계 사업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