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학생회

입학 후 보름 정도가 지나자 새 학기의 신열이 가시고 슬슬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중학교의 하교시간을 늦춰놓은 것에 불과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고등학교 생활은 아예 다른 종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일단은 공부에 임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아무리 후지기로 유명한 학교이더라도, 만만찮은 학군에 속해 있기는 해서 아이들이 전투적으로 공부에 임했다. 수업시간에 눈치 없이 떠들거나 하는 아이들도 부쩍 줄어들었다. 물론 대놓고 엎드려 잔다든가 의미 없는 반항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아이들도 있기는 했다. 쉬는 시간에도 교실이 조용한 경우가 많았다. 책상 사이를 뛰어다니거나 복도를 질주하는 아이들은 여전했지만,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거나 전날 밤의 과로(?)로 인해 엎드려 자는 아이들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각 학급으로 급식차가 배달되어 오던 중학생 때와는 달리, 점심과 저녁 모두를 전교생을 수용할 수 있는 식당에서 먹게 된 것도 달라진 점이었다. 누구와 함께 급식실로 가서 밥을 먹느냐가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나는 부반장 정도훈과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자의였다기보다는 내가 혼자 급식실에 가서 밥을 먹고 있으면 어느새 그가 내 옆에 앉아 있는 식이었다. 도훈은 내가 무슨 책으로 공부하고 있으며, 어디까지 선행학습을 했는지, 이과를 택할 것인지 문과를 택할 것인지 등 성적에 관련된 모든 것을 꼬치꼬치 캐물어 사람을 질리게 했다. 가끔은 태리가 내 앞에 와 앉는 경우도 있었다. 태리가 속한 4반은 우리 반과는 배식을 받는 시간이 조금 달라 태리와 같이 밥을 먹는 빈도가 많지는 않았다. 태리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약간 변했다. 더이상 아무도 묻지 않는 교회 내의 치정사에 대해 떠들어대지 않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분별없이 아무 얘기나 하는 버릇도 조금은 고쳐진 것 같았다(물론 입학하기 전 태리에게 우리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미리 주의를 주기는 했다. 내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태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강요하는 모습이 뻔뻔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뭐 상관없었다. 단순함의 대명사 태리니까). 태리는 그다지 생기가 없는 표정으로 요즘 보고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며 좋아하는 가수와 같은 일상적인 얘기만 했다. 좋아하는 것들이라며 얘기하는데 그것들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 태란 누나의 질문이 떠올라 태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당연히 길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심드렁함이 꼭 내가 가진 삶의 태도와 비슷한 것 같아 나는 드디어 태리에게 (남들에 비해 한참이나 늦은 시기에) 사춘기가 온 것일까, 여기게 되었다. 

윤도만이 중학교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쉬는 시간마다 책상 사이를 뛰어다녔고, 점심시간이면 미친듯이 빠르게 밥을 먹은 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는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다들 성큼성큼 앞으로 나가는 와중에 윤도만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게 이유 없이 좋았다. 당연히 반에서 윤도와 내가 교류하는 일은 딱히 없었다. 가끔은 윤도가 의식적으로 날 피하나, 싶기도 했지만 토요일에 어김없이 수영장에 가자고 전화가 올 때면 그저 나의 망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월 중순, 처음으로 학생회 월례회의가 열렸다. 1학년과 2학년의 학급 임원들은 모두 본관 이층의 소강당으로 모이라고 했다. 나는 신관 일층에서 무늬와 만나 함께 본관으로 향했다. 무늬 역시 배치고사에서 선전한 덕택에 담임 선생에게 낙점돼 10반의 반장으로 뽑혔기 때문이었다. 공지된 시간에 맞게 소강당에 도착했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소강당은 시청각실로 사용되는 터라 계단형으로 편안한 의자가 마련되어 있음에도 오십 명 가까이 되는 임원들 모두가 무대 근처에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2학년들은 무대 위에 자유롭게 서 있는 반면 1학년들은 아침 조회 때처럼 각 반별로 행과 열에 맞춰 서 있었다. 얼른 제자리에 서라는 2학년 학생회장의 불호령을 듣고 무늬와 나도 부랴부랴 각자의 반의 위치에 섰다. 

“중학교 학생회랑 고등학교 학생회는 완벽히 다르다고 보면 된다.”

안경을 쓰고 교복 조끼와 재킷 단추를 단 하나도 빠지지 않고 채워놓은 학생회 부회장이 말했다. 그러곤 그녀는 노란색 명찰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학생회 선배들이므로 복도나 급식실, 심지어는 학교 밖에서 마주쳐도 무조건 구십 도로 인사를 하라고 했다. 오빠와 누나, 형과 같은 호칭은 엄격히 금지되며 모두 선배님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다음주부터 학생회의 임원들이 돌아가며 정문과 후문의 아침 선도를 맡아 할 거라고 했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일곱시까지 등교해 학생들의 복장 불량을 잡아 벌점을 주는 일을 한다고. 곧 복장규정 조항이 인쇄된 갱지가 우리에게 나눠졌다. 동복의 경우 조끼와 재킷 반드시 착용, 목걸이 형태로 된 학생증 패용, 실외에서 실내화 착용 금지, 남성의 경우 머리가 귀를 덮지 않아야 함, 여성의 경우 모발의 길이 제한은 없으나 펌이나 염색 금지. 더불어 바지는 절대 통을 줄여서는 안 되며, 교복 치마는 무릎을 덮고 있어야 하고, 속이 비치지 않는 검은 스타킹을 신어야만 했다. 거기다 실외화는 무채색의 운동화만 신을 수 있으며 가방은…… 한 번에 외울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고 복잡한 복장규정들을 보며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읽다보니 나 역시 복장규정을 위반하고 있는 게 많았다. 몸에 열이 많고 답답한 걸 싫어해 조끼는커녕 때로는 교복 재킷도 입지 않고 다녔으며 학생증 목걸이는 주머니나 가방에 넣고 다니기 일쑤였다. 나는 조금 긴장이 되었다. 

“모범을 보여야 하는 학생회 임원인데, 이곳에도 복장규정을 어기고 있는 애새끼들이 많네?”

학생회장이 갑자기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1학년 아이들은 모두 굳은 채 무대 중앙에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눈 안 까냐?”

학생회 부회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는 일제히 고개를 내렸다.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여자애들은 커튼 치고.”

애초에 소강당엔 창도 나 있지 않은데 무슨 커튼을 치라는 걸까. 흘끔 옆을 돌아보니 여자아이들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고 있었다. 당황한 나와는 달리 여자아이들은 이런 취급에 조금 익숙한 것 같았다. 

2학년들이 웃으며 뭔가 속삭였는데 우리를 뜯어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긴장이 가시지 않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학생회장이 무늬의 이름을 불렀다. 무늬는 여느 때처럼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고, 학생회장은 그녀에게 무대 위로 올라오라고 했다. 무늬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무대에 올라가 학생회장 앞에 섰다. 부회장이 무늬에게 바짝 다가서 어깨까지 내려오는 무늬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너 파마했냐?”

“아니요. 원래 곱슬인데요.”

“아닌 거 같은데. 너 염색도 한 거지?”

“아뇨. 원래 눈이랑 머리카락이 밝은 편이라서요. 선배님도 제 머리색이랑 비슷하신 거 같은데.”

무늬는 평소처럼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답을 했고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학생회장이 또다시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고개 든 새끼 누구냐?”

우리는 얼른 고개를 내렸다. 부회장이 다시 무늬에게 말했다. 

“너, 내일까지 검은색으로 염색해 와.” 

“일주일이면 또 갈색 뿌리가 자랄 텐데요?”

“너 지금 나한테 개기냐?”

“그럴 리가요. 사실을 말한 건데. 안 믿기시면 저희 집에 와보세요. 엄마도 오빠도 다 갈색 곱슬머리인데.” 

부회장이 “이 미친년은 뭐야”라고 역정을 냈으나, 명백히 그녀가 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선배님’들이 시범 케이스를 잘못 뽑은 것 같았다. 나는 자꾸만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늬. 아, 나의 무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