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캔모아, 절대 끊어지지 않는 그네

무늬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 뜸을 들였다.

“설마 어제 화이트데이였다고 나한테 고백 같은 걸 하려는 건 아니지?”

“대가리에 총 맞았니.”

“그럼 뭔데.” 

“나…… 실은…… 얼마 전에…… 만나던 언니랑 헤어졌어.”

나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가 전에 없는 수줍은 태도로 몇 번이고 주저하다 애써 고백한 그 말이, 지금껏 그녀가 했던 그 어떤 말보다도 놀랍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언니’와 사귀었단 말에 방점을 두든, ‘헤어짐’에 방점을 두든 새로운 사실은 하나도 없었다. 무늬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녀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은 (편견에 입각한 판단일지언정) 누구라도 가능한 일이었고, 그녀가 언니가 아니라 동갑, 혹은 연하와 사귀었다 헤어졌다고 한들 뭐 하나 놀라울 것이 없었다. 나는 실소가 터질 만큼 맥빠지는 비밀에 대한 대답으로 ‘그래, 참 안됐네. 어쩌니’와 같은 형식적인 위로의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무늬가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왕따가 됐어. 완벽히.”

그 말은 꽤 신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여중 여고 안에서 연애를 하는 것은 일종의 유행과도 같았다. 보이시한 차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아무튼 그런 모습)의 여학생들을 추종하는 여자애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고,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은 마치 존재 증명이라도 하듯 칼머리를 하거나 피어싱을 하는 등의 표식(?)을 내보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동성애는커녕 조금의 여성스러움(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아무튼 그 비슷한 것)이라도 내비치면 제물이 되어버리는 남학생 사회와는 상반된 문화였기에 나는 그런 여학생들의 문화를 진심으로 동경하고 부러워해왔다. 심지어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진짜 레즈와 니세 레즈(유행에 따라 잠깐 스쳐가는 식으로 여자와 연애를 하는 가짜 레즈)를 구별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마저 들릴 정도였으니, 단지 여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왕따가 되는 일은 흔치 않았다.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나는 파르페를 떠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물었다. 

“나이 많은 언니랑 연애했다고 왕따까지 될 일이야?”

“아니. 연애했다고 그렇게 되진 않지. 문제는 언니가 보통 언니가 아니라는 점이야.”

“나이가 엄청 많으신가? 한 서른쯤?”

“나랑 세 살 차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냐.”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차원의 문제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시나. 빙빙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 

무늬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텅 빈 눈꽃빙수 그릇을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연애담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무늬가 언니를 처음 만난 곳은 시내의 카페 A. 지하에 위치한 그곳은 흡연이 가능하고 간단한 주류까지 판매하는 데였다. 원칙적으로는 성인 여성만 출입이 가능했지만, 알음알음 미성년자들도 드나들었다. 무늬는 약 삼 개월 전 학교의 이쪽(?) 친구들과 함께 처음으로 그 카페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에 옅은 갈색빛의 긴 생머리를 한쪽 어깨에 늘어뜨리고 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녹색 카디건에 타이트한 저지 튜브톱 원피스를 받쳐 입고, 올 화이트 아디다스 슈퍼스타 스니커즈를 신은 그녀. 무늬는 태어나서 그토록 세련되면서도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아무로 나미에가 모니터에서 걸어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무늬는 친구들과 함께 구석 테이블에 앉아 (알코올 도수가 오 도쯤 되는) 파란 크루저를 마시며 흘끗흘끗 나미에 언니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입술에는 연한 핑크빛 립글로스가 발려 있었고, 술인지 주스인지 모를 노란빛 액체를 들이켜며 담배를 피웠다. 입에 물려 있던 말보로 레드의 갈색 필터에 립글로스가 묻어 있는 것까지 샅샅이 관찰하며 무늬는 침을 삼켰다. 나미에 언니는 바 너머에서 음료를 만들고 있는 종업원과 연신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무늬는 그녀가 왠지 이곳의 단골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친구들이 하는 얘기에는 도통 집중을 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의 문 쪽으로 향하는 순간, 무늬도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에게는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둘러댄 후 나미에 언니의 뒤를 쫓았다. 나미에 언니는 계단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 말보로 레드를 피우고 있었다. 무늬는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그러니까 계단 한 칸 아래에서 까치발을 한 채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언니, 나 번호 주면 안 돼요?”

나미에 언니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소리 내 웃었고, 무늬는 이가 열 개는 드러나도록 환히 웃는 그 미소와 머릿결 사이를 파고드는 그녀의 손짓, 살짝 뒤로 젖혀지는 목의 움직임을 슬로모션으로 느끼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토록 아름다운 존재에게 내가 감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차라리 경외감에 가까운 감정. 나미에 언니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너 몇 살이니?”

중학생이라고 하면 상대도 안 해줄 게 뻔했기에, 무늬는 세 살을 올려 고2라고 말했다.

“어, 나랑 동갑이네? 어디 다녀?”

순간 무늬는 당황하고 말았는데 뻔뻔하게 고2라고 뻥을 치면서도 어떤 학교에 다니는지 생각해놓지 않은 자신의 안일함에 먼저 놀랐고, 당연히 성인인 줄 알았던 나미에 언니가 고작 고등학생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무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나미에 언니가 말했다. 

“그렇게 당황할 거 없어. 나도 자퇴했으니까.”

“아……”

나미에 언니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무늬에게 건넸다. 무늬는 그걸 받아들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뭐하니. 번호 달라며.”

그제야 무늬는 폴더를 열어 번호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뒤이어 자신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나미에 언니는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린 후 발로 비벼 껐다. 그리고 갈색빛 생머리를 왼쪽 어깨 앞으로 빗어내리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심심할 때 문자 해.”

무늬는 나미에 언니의 번호를 저장하며, 이 모든 일들이 꿈처럼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다. 

나미에 언니의 아우라에 잔뜩 주눅이 들었으면서도 무늬는 누구보다도 잽싸게 다음 주말에 데이트 신청을 했다. 나미에 언니는 아름답지만 새침하고 다소 자기본위적으로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사려 깊고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긴 속눈썹을 천천히 올렸다 내리며 가만히 무늬의 말을 듣고는 했는데, 그 눈빛 앞에서 무늬는 자신도 모르게 가정사며, 좋아하는 작가(프랑수아즈 사강과 사르트르, 보부아르)와 영화감독(짐 자무시와 이안) 같은 것들을 시시콜콜 털어놓게 되었다. 나미에 언니는 무늬가 이야기하는 것들 중 아는 것은 안다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했다. 무늬는 그녀의 그런 투명한 태도가 좋았다. 공작새처럼 잔뜩 몸집을 부풀린 채 살아가는 자신과 달리,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성숙한 태도라 여겼다(물론 조금이라도 있어 보이기 위해 안달난 무늬의 취향 목록은 일반인들이 알 필요도 없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나미에 언니에게 더욱더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들어가버린 무늬는 직진밖에 모르는 저돌적인 성격을 살려 세번째 데이트가 끝날 때쯤 자신이 중학생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교육에 절여진 수성구의 중학생이라는 사실까지도. 나미에 언니는 무늬가 처음 고2라고 했을 때 그보다 어린 나이일 거라 짐작은 했지만, 학교를 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무늬는 자신이 왜 학교를 다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물었다. 

“뭐, 이쪽 애들이 곧잘 그러니까. 나도 그렇고.”

언니는 고등학생의 나이였지만, 고등학생은 아니었다. 가족들에게 성적 정체성이 발각된 후 부모님과 심각한 불화를 겪은 뒤 가출(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탈가정)을 한 상태였다. 성적이 좋지 않고 부모님과 불화를 겪는 많은 고등학생들이 그렇듯 미련 없이 학교를 떠나, 자기와 비슷한 처지인 언니와 함께 대구역 뒷골목의 쪽방에서 자취를 했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알바를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무늬와 처음 만났던 카페 A 역시 나미에 언니의 일자리 중 하나였다. 나이를 속인 게 밝혀져 두 달 만에 잘리기는 했지만. 현재는 로데오 거리의 보세 옷 가게에서 주간 알바를 하고 있었다. 무늬는 언니가 파는 옷이라면 (몸이 허락하는 한) 뭐든지 사 입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데이트가 끝날 무렵 무늬는 나미에 언니에게 자신과 사귈 것을 요구했다. 평소처럼 당찬 태도를 유지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나미에 언니는 그런 무늬를 보며 빙긋 웃었다. 무늬는 그것을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저 언니 집에 놀러가도 돼요?”

해가 저무는 시간, 나미에 언니는 속눈썹을 천천히 올렸다 내리며 쳐다보는 특유의 묘한 눈빛으로 석양을 바라보며 그럼, 그러자, 말했다. 그 순간 모노크롬이었던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변하며 아름답게 빛났다. 

시내에서 십오 분 남짓 걷자 인적이 드문 골목이 나타났다. 사람 하나 지나가기도 힘든 골목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그중 가장 허름하고 담벼락이 낮은 집이 언니가 사는 곳이었다. 녹슨 철문을 밀고 들어가니 빛바랜 민트색 나무문 네 개가 보였다. 언니의 집은 맨 왼쪽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노란 장판과 옷이 잔뜩 걸려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왕자행거, 뚱뚱한 골드스타 브라운관 텔레비전과 빨간색 전화기, 키가 작은 미니 냉장고가 차례대로 보였다. 언니는 무늬에게 문 앞에서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집안에 들어가기 무섭게 화장실에서 걸레를 빨고 나와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장판 곳곳에 담뱃불이 떨어진 듯 탄 자국이 보였다. 방이 워낙 좁아 금세 먼지를 다 훔칠 수 있었다. 이 좁은 곳에서 두 명이 산다고? 더러워진 걸레를 한 손에 든 채 이제 앉아도 된다고 말하는 나미에 언니를 보며 무늬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걸레를 빨아 넌 언니는 한쪽 벽에 난 손바닥만한 창문을 열고 말보로 레드를 피우기 시작했다. (아마도 카페에서 훔쳐왔을) 철제 재떨이에 피우다 만 담배를 올려놓은 채 숱이 많은 갈색 머리를 검은 고무줄로 묶는 언니의 뒷모습이 괜히 쓸쓸해 보인다고 느끼며, 무늬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어쩌면 상대를 가엽게 여기는 것과 같은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밤, 무늬는 부모님에게 신세계아파트의 친구 집에서 자고 간다는 허락을 받기 위해 길고 긴 통화를 했다. 나미에 언니가 서랍장에서 트레이닝 반바지와 티셔츠를 꺼내 무늬에게 주었다. 

“이거 언니 옷이에요?”

“아니. 룸메 언니 거.”

“그 언니는 언제 와요?”

“안 와. 지금 서울에 있어.”

그렇다면 그 여자는 언제 돌아오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왠지 물어서는 안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미에 언니가 바닥에 이불 두 장을 깔아주었다. 무늬는 언니와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천장에 손을 뻗었다. 

“가까워 보이는데 엄청 머네요.”

“그러게. 새벽 되면 추워. 손 넣고 자.”

무늬는 천장을 향해 뻗은 손을 슬쩍 나미에 언니의 이불 속에 넣었다. 그리고 이불 안을 더듬어 언니의 손을 찾아 잡았다. 언니도 무늬의 손을 맞잡았다. 무늬는 터질 것같이 심장이 빠르게 뛴다는 사실이, 잡은 손을 통해 언니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긴장하며 숨죽여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애써 잠을 청했다. 

선잠이 들었던 무늬는 이상한 기척에 눈을 떴다. 어디선가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가늘게 눈을 뜨자 방안 한구석에서 검은 그림자 같은 게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람이 아닌 게 확실한.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무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늬의 오른팔부터 오른다리, 왼다리, 왼팔까지 서서히 찬 기운이 스쳤다. 무늬는 두려움에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검은 그림자가 나미에 언니를 지나쳐 방의 다른 쪽으로 가고 있었다. 숨죽여 그것을 지켜보던 무늬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나미에 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언니가 속삭이듯 말했다. 

“가끔 찾아와.”

무늬는 자리에서 일어나 언니 쪽으로 이불을 붙였다. 언니는 손을 들어 무늬의 이마를 천천히 만지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었다. 언니의 손은 차가웠고, 무늬의 이마는 점점 더 뜨거워졌다.

둘은 그렇게 약 두 달 동안 신나게 만났다. 무늬는 둘의 (뭐라고 명확히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아무튼 애정이 깔린) 관계가 영원할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의외의 복병 앞에 모든 것이 무너져내려버렸다. 시내 근처 B상고의 세무회계과에 재학중이던 십구 세의 여성, 김. 김은 무늬보다 육 개월 먼저 나미에 언니를 좋아해왔었다. 그녀와 가까워지기 위해 매일 방과후에 없는 돈을 털어서 뻔질나게 카페 A를 드나들었으며, 그녀가 카페를 그만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러던 중 그녀와 함께 시내를 거니는 무늬를 발견한 김은 무늬가 그녀의 집을 들락날락하는 것까지 보게 되었다. 김은 가눌 길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무늬의 뒷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좁아터진 D시의 ‘이쪽 바닥’에서 무늬의 신상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뒷조사를 끝낸 김은 전화 한 통을 걸었다. 

그리고 다음날 무늬가 다니는 H여중이 발칵 뒤집혔다.

미성년자가 출입해서는 안 되는 업소에, 그것도 동성애자들을 위한 업소에 학생들이 드나든다는 제보가 들어온 것이었다. 김이 학교측에 말한 명단은 무늬와 함께 카페 A를 드나들었던 이쪽 친구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 더불어 김은 칼머리, 피어싱, 칼빵 등 당시 커뮤니티에서 유행한, 동성애자를 판별할 수 있는 지표까지도 낱낱이 고발하여 적발에 도움을 주었다. 무늬를 포함해 카페에 함께 드나들었던 학생들이 모조리 학생부에 소환되었다. 학생부 소속 교사들은 마치 범죄 카르텔을 소탕하듯 아이들을 각각 다른 교실에 집어넣어 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동성연애’를 하는 다른 친구들의 이름을 셋 이상 불면 처벌의 수위를 낮춰주겠다고 구슬렸다. 무늬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모두가 신의를 지키고 사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틀이 지나지 않아 교내에서 이미 레즈비언으로 알려진 아이들이 전부 학생부에 잡혀갔다. 무늬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의 경우 순순히 동지들의 이름을 고백해 정상참작이 됐던 반면, 무늬는 부모님 모두 학교에 소환되었다. 대대로 명망 있는 교수 집안으로 잘 알려져 있던 무늬의 부모님이 교감과 학생주임, 담임교사에게 차례대로 고개를 조아렸다. 정학이나 강제 전학과 같은 징계가 논의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늬의 아버지와 학교 이사장의 인연으로 벌점과 봉사활동 선에서 징계가 내려졌다. 그날 밤 무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체벌을 받았다. 오 대째 단소를 제작해온 집안의 장인이 만든, 초고가의 단소로. 

“단소? 집에 왜 그런 단소가 있어?”

“내가 말 안 했나? 우리 아빠 국악과 교수야.”

무늬의 아버지는 무늬의 종아리와 허벅지를 다섯 대씩 힘껏 때리고 난 후, 무늬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똑바로 말하라고 했다. 무늬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 생각했으므로 입을 꽉 다물었다. 대답하지 않을 때마다 체벌이 한 대씩 추가됐으나 무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종아리와 허벅지에 보라색 피멍이 들었고 무늬는 한동안 속이 비치지 않는 검은 스타킹을 신고 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무늬에 의해서 이 모든 사태가 촉발되었다는 사실에 H여중의 이쪽 사회는 강하게 분노했다. 인생의 모든 것을 나누었다고 생각했던 친구들도 한순간에 무늬에게 등을 돌렸다. 이후 통금 시간이 생겼다. 학원이 끝나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부모님에게 전화가 걸려왔으며, 주말에는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다(오늘은 학원 교재를 사러 간다는 명목으로 외출을 허가받았다고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았던 카페 A도 더이상 갈 수 없었으며, 주말마다 만났던 나미에 언니의 얼굴도 보기가 힘들어졌다. 나미에 언니에게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않았다. 단지 부모님과 트러블이 생겨 나가기가 힘들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언니는 특유의 다정하면서도 물기 어린 목소리로 “미안하기는 무슨. 나중에 편해지면 그때 보면 되지” 대답해주었다. 무늬는 혼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온몸으로 체감했다. 그러나 사랑을 위해서라면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무늬가 그토록 탐닉해왔던 예술작품 속 주인공들이 그랬듯. 모든 걸 다 잃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관계도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얼마 후, B상고의 김이라는 여자가 지속적으로 나미에 언니에게 껄떡대고 있으며, 질투심에 눈이 멀어 H여중에 제보를 했다는 소문이 바람을 타고 무늬의 귀에 들려왔다. 인내를 아는 여자인 무늬는 그러나 누구보다도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무늬는 정년 직전의 교사가 담당해 출석 체크가 느슨한 체육시간에 운동장 대신 교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자신이 가진 구두 중 가장 굽이 높은 워커를 신고 택시를 탔다. 

택시가 멈춰 선 곳은 B상고. 무늬는 잔뜩 줄인 교복을 입은 채, 세무회계과 교실로 걸어들어갔다. 마침 쉬는 시간이었는지 교실 문이 열려 있었고 학생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었다. 무늬는 교단에 서서 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모두가 검은 피어싱을 한 여자 한 명을 쳐다보았다. 무늬는 그녀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아챘다. 그리고 교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복도에 나간 무늬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사과를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김은 무늬의 손을 내리치며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내가 뭘 사과해야 하는데?”

더럽고 치사하게 학교에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을 고발한 것. 

“미성년자들이 술을 마시는데, 언니 된 도리로 차마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그랬던 거지.” 

무늬는 강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이성을 잃고 외쳤다. 나미에 언니와 내 사이를 질투해서 이 모든 일을 벌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언니와 내 관계를 망치기 위해 온갖 난리를 쳐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라고. 당신은 그저 일개 스토커에 불과하다고. 김은 기도 안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내가 스토커라고? 그러는 너는?”

“우리는 특별한 관계야.”

특별한 관계, 라고 말하는 순간 무늬는 자신과 나미에 언니의 관계를 명명할 단어를 찾아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 우리는 특별한 관계야. 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착각하지 말라며 나미에 언니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나미에 언니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은 실은 언니의 애인과 함께 동거하던 곳이었다. 언니와 언니의 애인은 미모와 인기, 남다른 영향력으로 D시의 이쪽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커플이었다. 작년에 애인이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떠나버린 이후로 나미에 언니 홀로 방을 지키고 있었다. 나미에 언니는 가끔씩 D시에 내려오는 애인을 기다리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가련하고 한심한 무늬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제멋대로 나미에 언니에게 휘둘렸던 것이고. 

“알겠니? 너나 나나 다를 게 없는 신세라고.”

무늬는 정수리에 번개가 내리치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웃기지 말라고 악을 쓰다가 무늬는 눈물을 쏟으며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B상고의 이름이 적혀 있는 교문 앞에 서서, 아니야, 아닐 거야, 생각하며 나미에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동안 연결음이 이어지다 언니가 전화를 받았다. 언니는 막 깬 듯, 잠기가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무늬는 자꾸만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지금껏 겪었던 모든 일을 언니에게 털어놓았다. 김이 자신에게 했던 말까지, 전부 다. 그러고 언니에게 물었다.

“아니죠? 언니, 그년이 헛소리한 거죠?” 

한참 동안 정적이 찾아들었다. 핸드폰 너머로 몇 번이고 입을 다시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언니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무늬는 언니가 하는 모든 말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아이가 말한 게 모두 사실이라고. 무늬 너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너무나도 아끼는 동생일 뿐이라고. 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나에게는 오래된 애인이 있으며 그 신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고. 행여나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면 그건 내 잘못이라고. 자신도 서울에 올라가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으니 우리는 더이상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이 모든 일이 나로 인해 벌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정말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울고 있는 무늬를 달래며, 언니는 마침표를 찍듯 말했다. 

“무늬 넌 똑똑하니까 조금만 노력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거야. 그때 또 보자 우리. 그러면 되지.” 

무늬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놓치고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