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소리와 진동(2)

은희를 만난 것은 삼 년 만이었다. 

오 년 전, 수민이 결혼과 함께 경기도 외곽으로 이사를 가면서 차츰 왕래가 뜸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문자 메시지로 새해 안부 정도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수민은 연고가 전혀 없는 낯선 동네에서 이제 막 생성된 자신의 작은 세계에 적응하느라 여유가 없었고, 은희는 일찍 낳은 딸아이 때문에 길게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은희는 수민의 어학연수 시절, 룸메이트의 수많았던 유학생 친구 중 하나였다. 수민이 만나본 유학생 중 가장 생활력이 강했던 은희는 베이비시터 일을 하는 대가로 프랑스인 부부가 같은 아파트 위층에 얻어준 작은 다락방에서 살았다. 우리집은 하녀들이 살던 데라 계단도 따로 쓴다? 쪽문으로 주인집을 드나들었던 은희는 자신이 19세기 프랑스 하녀와 비슷한 처지라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오히려 아이와 회화 연습을 할 수 있어 좋다고 했지만, 아이가 이제 겨우 ‘엄마’ ‘밥’ ‘똥’ 따위의 말을 하는 정도라 은희의 어학 공부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처음 일 년을 제외하고 집에서 한푼도 도움받지 못한 은희는 늘 생활난에 쪼들렸기에, 유학생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며 버리다시피 한 옷과 신발, 가전제품, 가구 들을 얻어다 썼다. 수민과 룸메이트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상하의와 너무 커서 질질 끌고 다니는 남성용 로퍼를 보며 깔깔대고 비웃는 것으로 은희를 맞이하곤 했다. 그래도 그들 중 은희의 처지를 불쌍해하거나 측은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은희의 가난은 감내할 가치가 있는 것, 이루고자 하는 무언가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성격이 느긋한 은희는 한번 놀러오면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기에 수민은 함께 커피를 마시다가도 어느 순간 슬쩍 방으로 들어가버리기 일쑤였는데, 은희가 직접 구운 키슈를 들고 와 언니들에게 상의할 것이 있다며 뜸을 들이던 그해 여름 오후에는, 차마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는 은희의 목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파르르 떨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은희는 겨우 스물두 살이었다. 기껏해야 한두 살이 많았을 뿐인 수민과 룸메이트는 주근깨가 잔뜩 박힌 겁에 질린 은희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수민이 자전거를 짊어지고 칠층짜리 좁은 하녀용 계단을 부지런히 오르내린다던 은희의 남자친구를 떠올리는 사이, 셋 중 가장 연장자였던 룸메이트가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절대 낳으면 안 돼. 그렇게 말하면서도 테이블 위에 펼쳐둔 담뱃잎이 은희와 뱃속의 아이에게 해가 될까 싶었는지 빠르게 구석으로 밀어두던 룸메이트의 손을 수민은 기억하고 있었다.

 은희가 약속 장소로 잡은 곳은 충무로에 위치한 갤러리였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작은 가옥 여러 채를 허물어 만든 곳으로, 집의 외벽 일부와 조금씩 높이가 다른 가옥의 지대를 그대로 활용한 탓에 주변의 주택들과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갤러리에 도착했다는 지도 앱의 안내에도 불구하고 수민은 도무지 입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갤러리에 가는 듯 보이는 무리의 뒤를 따라갔다가 엉뚱한 길을 오르기도 했다. 수민이 골목 사이에 뜬금없이 시작되는 계단과 정체 모를 작은 철문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길을 헤매는 동안, 갤러리에 미리 도착해 있던 은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가 길치인 걸 잊고 있었다. 수민을 데리러 큰길까지 다시 내려온 은희는 특유의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이제 좀 나이든 티가 났다. 은희의 풍성한 오버핏 캐시미어 코트가 건조한 겨울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윤기가 돌았다. 유학 시절과 비교하자면 은희는 마법에서 풀려난 개구리 왕자처럼 극단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자신에게 팔짱을 끼느라 반대쪽 팔로 옮겨 든 고가의 명품 가방을 보면서 수민은 은희가 그 시절 걸치고 다녔던 옷들, 반짝이 실이 섞인 무지개색 니트 티나 주머니가 네 개나 달린 코듀로이 개더스커트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은희의 아버지가 꽤 규모가 있는 사업체의 대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수민이 출판사에 취직한 후의 일이었다. 마케팅팀이 따로 없는 작은 출판사라 편집부 신입인 수민이 대형 서점의 MD를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 시기에,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MD에게 책을 어필하기 위해 대기석에 앉아 메모지에 적어온 문장을 외우고 또 외우며 긴장으로 손을 덜덜 떨던 그때, 수민이 파리에서 알고 지낸 이들 모두는 아직 학생이었다. 수민은 룸메이트와 주고받은 이메일을 통해 수찬에게 중국인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과 은희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혼자 아이를 낳은 뒤 아이를 포대기로 싸 업고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은희의 지도교수와 같은 과 학생들이 은희가 수업을 듣는 동안 돌아가며 아이를 돌봐주더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은희는 아이를 낳자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넉넉해진 주택 보조금 덕택에 낮은 층수의 보다 넓은 집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은희의 부모가 사색이 되어 파리로 날아왔을 때, 룸메이트는 저녁을 차리는 은희를 대신해 아이에게 사과퓌레를 먹이고 있었다. 우리 다 은희가 고아인 줄 알았잖아. 룸메이트는 자상한 은희의 부모를 보며(그리고 그들이 끌고 온 명품 캐리어를 보고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고 했다. 

수민은 외근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룸메이트의 이메일을 읽었다. 광화문에서 종로5가까지 한없이 느리게 움직이는 버스의 맨 뒷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지나가는 금은방들을 바라보았다. Tu me manques. 수민은 룸메이트가 이메일 끝자락에 적어넣은 문장을 속삭이듯 발음해보았다. 그러면서 처음 이 표현을 배웠을 때의 혼란함도 떠올려보았다. 보고 싶다는 의미인 문장은 직역하면 ‘나에게 네가 없어’라는 뜻이었는데, 마치 보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간절한 나머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사람의 넋두리 같았다. 그 간단한 말을 하는 데 왜 이런 사고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의아하기만 했던 수민은 자신에게 그들이 없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 표현을 수긍할 수 있게 되었다.

‘상상 정원’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전시회는 이름 그대로 정원이 테마였지만, 갤러리 어디에도 정원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정원을 대리 체험할 수 있을 만한 것들, 예를 들어 정원용품이나 정원 설계도, 이름난 정원 디자이너가 제작한 정원의 도록과 영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민과 은희는 전시실 하나를 가득 채운 파프리카, 순무, 배추 형상의 거대한 벌룬 옆에 서서 번갈아가며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자신의 키보다 큰 순무 이파리를 살짝 만져본 은희는 수민과 연락이 뜸했던 그동안 압구정동에 만두전골집을 개업했다고 했다. 왜 하필 만두전골이냐고 묻는 자신에게 “나 만두 좋아하잖아”라고 부러 가볍게 대답하는 은희를 바라보면서, 수민은 지금까지 은희가 보여준 인상적인 선택들을 떠올렸다. 아이를 키우며 학업을 이어가던 은희는 졸업을 겨우 한 학기 남겨두고 돌연 완전히 귀국해버렸다. 한동안 동화작가 겸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더니 어느 틈엔가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 잡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즈음을 마지막으로 수민은 은희를 만나지 못했다. 딸이 주인공인 동화를 그리려고 했는데, 애가 너무 빨리 커서 징그러워졌다고 했던가. 그때 수민은 네가 성격이 너무 느긋한 탓이라고 웃으며 대꾸했었는데. 딸이 중학생이 되는 동안, 은희는 무구한 미대생에서 만두전골집 사장이 되어 있었다. 수민은 은희와 감탄사와도 같은 내용 없는 말들을 몇 마디 주고받다가 전시로 눈길을 돌렸다. 대화에서 세월이니 인생이니 하는 것들이 튀어나오면 늘 말문이 막혔다. 

수민과 은희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전시실에서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이층 높이의 벽 가득히 드넓은 정원 풍경이 펼쳐졌다. 길고 가느다란 줄기의 잉글리시 라벤더가 바람에 우아하게 일렁였다. 수민과 은희는 전시실에 놓인 의자에 나란히 앉아, 영상이 한 바퀴 돌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클로즈업된 거대한 디기탈리스 위로 벌이 내려앉는 나른한 장면을 보고 있노라니, 유물처럼 내려오는 지난 세기의 시청각 자료를 통해 꽃과 나무를 학습하는 미래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민의 상황에 대해 내내 말을 아끼던 은희가 입을 연 것은 벌이 이제 막 꽃을 떠나려는 순간에서였다.

언니, 나무를 길러봐. 

그럼 뭐가 달라져?

기대가 생기잖아. 나무가 아름답게 자랄 거라는 기대.


수민은 살면서 늘 무분별한 기대를 경계하려 애썼다. 어린 시절, 자석이 달린 캐릭터 필통이 생일 아침 머리맡에 놓여 있길 바라는 마음, 늦은 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누구라도 어두운 골목 어귀에 마중나와 있었으면 하는 바람, 언젠가는 사회에 꼭 필요한 구성원이 되리라는 소망, 자신이 하는 일이 밥벌이 외에도 의미와 가치를 지닐 것이라는 희망, 애정이 공평하게 되돌아오리라는 착각, 성실히 대화한다면 사소한 갈등쯤은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 기다리면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들. 수민은 반복되는 좌절을 통해 삶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기대를 저버리는 일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기대감은 탁월한 적응력을 지닌 자생식물처럼 가슴 한편에서 끈질기게 싹을 틔우곤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기대로부터 멀어진 지금, 수민은 자주 지나간 일들을 생각했다. 그때 했다면 좋았을 일과 하지 않았다면 일어났을 연쇄 작용을 떠올려보면서, 후회나 회한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상기하기도 했다. 

은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맞은편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머리통 뒤 유리창으로 지하철 역사의 풍경이 끝없이 뒤로 밀려나는 것이 보였다. 이내 차양을 치듯 어두워진 창 너머를 바라보면서, 수민은 문득 지난여름을 떠올렸다. 수찬이 스님이 되겠다는 이유로 이혼을 요구하기 한 달여 전이었다. 여름 초입인데도 한낮의 기온이 삼십 도까지 오르던 그 무렵에 수민은 수찬과 차를 몰고 핫도그를 먹으러 양평에 갔었다. 핫도그 하나에 사십 분이나 차를 몰고 갈 가치가 있을까? 조수석에 앉은 수민의 물음에 수찬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잊을 수 없는 맛이래. 수민이 틈을 두지 않고 수찬의 말을 받았다. 고작 핫도그 하나가? 수민은 맛이 있든 없든 수고를 잊을 수는 없겠구나 싶었다. 차가 팔당대교에 이르자 시야가 넓게 트였다. 어느덧 녹음이 완연했다. 그에 반해 강물은 잔잔하고 색이 연해 아름다웠다. 

길게 이어진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십여 분을 기다려 가까스로 주차에 성공한 수민과 수찬은 안내 표지판을 확인했다. 주차장 한쪽에서는 주말농장에서 길렀다는 상추와 들쑥날쑥 자란 오이 따위를 팔았다. 한 봉지에 이천원. 수민은 주인 없이 팻말과 돈통만 덩그러니 놓인 판매대에 눈길을 주었다가 앞서가는 수찬을 큰 보폭으로 따라잡았다. 개를 데리고 나온 가족과 연인들,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나온 한 무리의 청년들과 수찬이 모두 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비닐 천막 곳곳이 찢겨 바람에 펄럭이는 핫도그 가게는 겉보기에도 조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지대로 쓰인 쇠파이프가 사선으로 누워 있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너덜거리는 천막을 헤치고 들어가 핫도그를 이십 개씩 포장해가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햇볕 아래, 귀밑머리에 땀이 맺힌 어린아이들이 줄 선 사람들 주위를 갈지자로 뛰어다녔다. 모래 먼지가 풀풀 날리는데도 사람들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수민이 연잎이 들어가 핫도그 색이 어둡다는 안내 문구를 읽고 있을 때, 수찬이 수민의 어깨를 툭툭 쳤다. 

뒤돌아봐.

수민이 뒤를 돌자, 그곳에 커다란 느티나무와 강이 있었다. 완만한 산세 너머로 종을 알 수 없는 새 무리가 빠르게 날아갔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의 유래를, 수민은 차 안에서 검색해 알고 있었다. 육안으로는 분간이 되지 않는 두 개의 물이 만나는 자리에 서서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수민과 수찬은 나란히 핫도그를 받아들고 사람들을 따라 좁은 갈대밭 사이에 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핫도그의 맛은 예상대로 수민이 그간 먹었던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연잎이 들어갔다는데, 그보다는 소시지에 들어간 카레향이 더 강했다. 이 정도면 그냥 카레핫도그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수민이 퉁명스레 말하자, 핫도그를 입에 욱여넣던 수찬이 말했다. 자양동에서 자꾸 항의가 들어와. 네가 맡은 아파트 말하는 거야? 응, 참나리가 얼마 전에 개화했는데, 거기 사는 애들이 꽃을 무서워한다는 거야. 꽃잎에 점이 박힌 게 징그럽다고 근처만 가면 자꾸 운대. 수찬은 그런 한편으론 입주민들이 몰래 꽃을 뽑아가는 일도 많아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그러면 누군가가 꽃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는 이유로 또다시 항의를 한다고 했다. 피 같은 관리비가 딴 주머니로 새는 것 아니냐면서, 이딴 부실 업체는 세무조사로 쓴맛을 봐야 한다며 윽박을 지른다고. 그래서 엊그제 ‘CCTV 촬영중’이라고 적은 팻말을 화단 앞에 걸어두었노라고 말을 잇는 수찬의 양볼에는 설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진짜 CCTV가 있어? 수민의 물음에 수찬이 쓰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 한국은 다 이런 식이야. 

수민은 가게 앞 너른 마당에 앉아 핫도그를 먹는 사람들을 보았다. 작은 바위 하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사이좋게 핫도그를 베어 무는 연인들, 다 먹은 막대를 잘근잘근 씹거나 쓰레기통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물티슈로 아이의 입 주변을 닦는 부모들이 수민의 시야에 들어왔다. 수민은 사방이 같은 핫도그를 입에 문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이, 그리고 자신들도 그들 중 하나라는 것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그 가벼운 소속감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수민은 그 순간을 상기하며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려보았다. 그때 수찬이 보내오는 은밀한 신호를 알아챌 수 있었더라면, 조금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오늘 눈이 올 것 같지 않아요? 

어제 전시를 보고 난 뒤, 수민과 은희는 천천히 걸어서 서촌으로 갔다. 한낮이어도 여전히 바람이 매서웠지만, 은희와 팔짱을 끼고 걸어서인지 덜 춥게 느껴졌다. 둘은 한옥을 개조해 만든 수제 햄버거 가게에서 으깬 아보카도와 구운 새우가 들어간 햄버거와 함께 맥주를 마셨다. 언니, 여기서 우리가 제일 늙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은희의 표정에서 도리어 이십대 시절의 모습이 비쳤다. 진짜 늙으면 그런 말도 못해. 수민과 은희는 삼십 분이나 기다려 들어간 근처 위스키 바에서 바텐더에게 추천을 받아 시킨 이름 모를 위스키를 한 잔씩 마시고 헤어졌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말을 걸어온 것은 숙취 때문에 아침 실습을 거른 수민이 이론 수업 직전에 간신히 도착해 교재와 노트를 꺼내들었을 때였다. 조율 이론 수업을 듣는 수강생의 연령대는 중학생에서부터 오십대가량의 중년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었다. 다니는 이유도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은퇴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누군가는 독일로의 조기유학을 목표로 이곳에 왔다고 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직업 안정성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원장이 조율사의 장점으로 긍정적인 직업 전망과 낮은 진입 장벽을 꼽는 것, 특히나 정년이 없기에 환갑이 넘은 자신도 여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동영상에서 익히 본 내용이기도 했다. 물론 원장의 말을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민은 이론 수업 때 늘 가장 먼저 자리를 잡는 남자가 옆 수강생과 나누는 대화를 몇 번 들었었다. 서른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남자는 주로 수민의 맞은편 연습실에서 실습을 했는데, 피아노를 다루는 것이 수민보다 여러모로 능숙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조율사를 예로 들며 가정에 피아노를 들이는 경우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면서, 조율 의뢰 건수 자체가 과거와는 다르다는 녹록지 않은 현실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중고 피아노의 매매, 특히 동남아나 중국으로의 수출로 활동 범위를 확대한다면 그렇게 암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기도 했다. 수민은 조율사가 중고 피아노의 매입과 판매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는 사실을 이곳에 와서 처음 알았다. 이론 수업 첫 시간, 원장은 나중에 하게 될 맥놀이 계산에 공학용 계산기가 필요하니 미리 사두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수민은 지금껏 공학용 계산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보란듯이 계산기를 꺼내놓는 남자의 책상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수민은 옆자리에 앉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세상의 어떤 일도 모두가 동일한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것은 무척 오래간만이었다. 그런 자신과 처지가 다르지 않은 듯 보이는 여자와는 그뒤로 오며가며 눈으로 인사를 주고받게 되었다. 수민과 또래로 보이는 여자는 이론 수업이 끝나면 가장 먼저 학원을 빠져나갔다. 

그런 여자가 은근한 기대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눈이 올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수민은 단단한 쌀알이 물과 열기를 머금고 부드럽게 부풀어오르듯 가슴 한구석이 울렁이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기쁨이나 설렘과는 다른, 기대감도 그리움도 아닌 무언가였다. 이론 수업이 끝나고 조율 실습 때 수민이 현을 끊어버린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그 기분에 대해 생각하느라 집중력이 흐트러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튜닝 핀을 아무리 조여도 음이 맞춰지지 않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즈음, 끝없이 늘어나는 철선의 유연함이 그저 놀랍게만 여겨진 그 기이한 낙관의 순간에, 현은 굉음을 내며 보란듯이 끊어져버렸다. 그다지 고음부도 아니었다. 수민은 자신이 현을 끊어버렸다는 사실보다 예상치 못한 큰 소리에 더욱 놀랐다. 장력이 구십 킬로그램에 이르는 현이 한계에 이르러 찢어지는 소리에는, 조는 아이의 등짝을 후려갈기는 듯한 단호한 폭력성이 깃들어 있었다. 수민이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깜박이고 있을 때, 소리를 들은 원장이 재빠르게 연습실로 달려왔다. 아이고, 저런! 원장과 눈이 마주친 수민은 그제야 미안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이론 수업 때 현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다뤄야 한다고 원장은 여러 차례 주의를 주었었다. 한편으론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하는 일이니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안심시키던 것도 떠올랐다. 끊어진 김에 현 감기 연습이나 하자며 원장이 새 철선을 가지러 간 사이, 손에서 해머를 놓칠까봐 겁이 난 수민은 피아노 위에 공구를 올려두었다. 유리창 너머로 수민의 방을 힐끗대며 지나치는 얼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수민은 주먹을 쥐었다 펴보았다. 귓가의 충격이 서서히 잠잠해져가고 있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두텁게 내려앉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수민은 지하철역 근처 편집 숍 앞에 멈춰 섰다. 쇼윈도 안쪽에 방한 부츠 몇 가지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중 어그부츠도 있었다. 몇 년간 자취를 감추더니 유행이 다시 돌아온 모양이었다. 수민은 어린아이처럼 쇼윈도 앞을 서성였다. 눈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어그부츠가 갖고 싶어졌다. 그러다 사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이유를 꼽아본 뒤 지하철역으로 발을 돌렸다. 양털과 스웨이드는 물에 약해 눈이 올 때는 도리어 신을 수 없었다. 젖으면 얼룩이 지거나 털이 내려앉아 복구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지금은 2월이었다. 조만간 물러갈 겨울을 생각하면, 부츠를 사기에는 너무 늦은 때였다.

이른 저녁을 차려 먹고 무심히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안개처럼 뿌연 배경을 뚫고 유리창에 달라붙는 눈송이가 수민의 눈에 들어왔다. 베란다로 나가 문을 열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린 지 꽤 시간이 지났는지 바닥에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패딩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눈 위를 엉거주춤 걷는 것이 보였다. 수민은 베란다 문을 닫았다. 설거지를 하고 뉴스를 보았다. 보도 자료의 마감 기한을 확인하고 이메일도 체크했다. 조율 일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편집 일을 지속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할 수 있는 한 두 직업을 병행해야 할지도 몰랐다. 갚아야 할 은행 이자와 대출금이 아직 남아 있었다. 기능사 자격증을 언제쯤 딸 수 있을는지도 알 수 없었다. 수민은 실제로 피아노를 만져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악기에 대해서도, 구조물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율은 인문학적 식견이나 예술적 감각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그보다는 경험과 기술적 사고, 운동 능력이 필요했다. 모두 수민이 해보지 않았거나 부족한 것들이었다. 수민은 세상의 대부분의 일들이 기대와 예상을 배반한다는 사실을 매번 경험하면서도 매번 잊어버리고야 마는 자기 자신이 놀랍게 느껴졌다. 당장 눈이 그치지 않을 듯 쏟아지는 것만 보아도 그랬다. 이렇게 눈이 오는데 봄 타령이라니. 어그 살걸.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수민은 다시 베란다로 나갔다. 밤이 깊어지자 아파트 단지에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 있었다. 어린아이의 주먹만한 눈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수민은 잠옷 위에 패딩 점퍼를 걸치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파트 정문에서 동 출입구를 따라 길게 늘어선 주민들이 삽으로 눈을 밀어내고 있었다. 눈은 치우는 족족 빠르게 쌓여갔지만 짜증을 내거나 삽을 내려놓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은 쌓인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었다. 오리 모양 틀로 눈 오리를 찍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눈을 치우다가도 눈사람이나 눈 오리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수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눈송이가 붉게 빛났다. 나뭇가지 위에 쌓였던 눈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꺼번에 후드득 떨어졌다. 눈 폭탄을 맞은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강아지처럼 몸을 털어댔다. 요란한 행동이 무색하게 모자와 어깨 위로 재빨리 눈이 내려앉았다. 수민은 봄이면 저 나뭇가지에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핀다는 사실을 알았다. 꽃이 너무 무거워 가지가 길게 아래로 늘어지면, 스치기만 해도 라일락 향기가 몸에 배었다. 그런 계절을, 수민은 수찬과 함께 다섯 번이나 보냈다. 수찬과 수민은 성을 떼고 부르면 이름이 비슷해 남매인 줄 아는 사람도 있었다. 이목구비가 희미하고 길쭉한 생김새가 닮기도 했다. 수민에게는 그것이 혈육처럼 영원하리라는 징표로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믿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수민은 오늘 아침, 밥알처럼 부풀었던 마음의 정체가 다름 아닌 슬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이 오랫동안 공들여 구성한 세계가 무너지고 난 자리에 생겨난 전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슬픔은 어쩌면 꿈이나 희망의 반대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스레 움직이는 사람들을 눈으로 훑던 수민은 경비실에 들러 여분의 눈삽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쌓인 눈 깊숙이 삽을 찔러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