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누가 우리에게 자연을 암시하는가

읽고 있던 클로드 시몽을 잠시 밀어두고 FM을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FM을 잠시 밀어두고 뒤라스를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뒤라스를 잠시 밀어두고 프랑시스 퐁주를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프랑시스 퐁주를 잠시 밀어두고 한스 헨리 얀을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한스 헨리 얀을 잠시 밀어두고 뒤라스의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뒤라스의 다른 책을 잠시 밀어두고 게르하르트 마이어를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게르하르트 마이어를 잠시 밀어두고 볼프강 힐데스하이머를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볼프강 힐데스하이머를 잠시 밀어두고 클로드 시몽의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클로드 시몽을 잠시 밀어두고 FM의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FM의 다른 책을 잠시 밀어두고 FM의 또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최근 몇 주 사이의 일이다. 이 목록과 순서는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손을 뻗어 임의의 책 한 권을 집어들고, 표지나 작가의 이름은 확인하지 않은 채 한두 페이지를 읽기 시작하고, 그리고 다시 중단하며, 글을 쓰다가, 잠시 뒤에는 내가 읽던 책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또다른 책을 들고, 어디에선가 벤치에 앉아 이 책을 읽게 되리라는 기대로 설레며 산책을 나서기 때문이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지난겨울 한국에 머물 때 게르하르트 마이어를 읽고 있었다. 눈이 내렸다. 나는 글쓰기를 중단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책을 들고 그 홀로 산책을 나갔다. 책이 없는 산책이란 신발이 없는 산책보다도 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온 그는, 산책길 어느 벤치에 앉아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눈의 발라드』 마지막 부분을 끝까지 읽었다고 했다. 남아 있는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슬픔이 그를 채웠다. 그는 책의 마지막 장에 도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 책은 죽음을 앞둔 한 남자가 병원 침상에서 오랜 친구를 향해 예술과 문학의 아름다움을 좇았던 인생의 산발적 기억들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졌다. 그 어떤 극적인 드라마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의 글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성이 그렇듯 모놀로그는 매우 길고 테마는 끊임없이 흩어지며, 중심이나 목적지, 결론을 지향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책에 자주 등장하는 여러 예술가들의 이름과 책, 그리고 장소 들에 잔잔히 열광했다. 둘 다 동시에 게르하르트 마이어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은밀한 눈의 공모자로 만들었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자연의 주관적 관찰과 시적 묘사를 중시하는 ‘네이처 라이팅nature writing’ 장르를 사랑하는데─예를 들자면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와 같은─아마 마이어에게서 그런 유사성을 발견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깃털 이불을 끌어당겨 덮듯이 살그머니 그 책을 집어들었다. 나는 그 책을 좋아하게 될 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걸 좋아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마이어의 글에서 흥분되게 뛰어난 자연의 묘사보다는, 예술에의 열광을 다스리는 청교도적인 수용과 한 발 물러난 전원의 삶과 같은 인상을 더 좋아한 듯하다. 그로 인한 평화의 느낌. 내 자연이 갖지 못한 그것. 그런데 평화는 주관적인 것일까. 중심이나 목적지, 결론을 지향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파편이었다.” 나는 오늘 이 문장을 하나의 글 안에 두 번이나 써 넣었다. “파편을 조심해.”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호수의 물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내게 말했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유리조각과 같은 위험한 파편이 호수 바닥에 박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금속탐지기로 무장한 전문 수색원들이 호수 바닥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수영중에 결혼반지를 잃어버린 한 여자가 그들을 고용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세 살 네 살 다섯 살이 된 사람은 태어날 때 이 생을 위한 지참금처럼 지니고 온 이미지와 생각을 먹고 살게 된다. 그리하여 예순세 살 예순네 살 예순다섯 살이 된 어느 토요일 강가를 산책하던 한 사람은, 이 강이 북아메리카의 강이라고 단정 짓고 흔들리는 수면의 영롱한 색채를 인디언의 색채인 양 받아들인다. 그러자 그의 환각 속에서 강물을 흘러가는 카누 한 대가 보인다. 카누에는 머리에 오색의 깃털 장식을 두세 개 꽂은 최후의 모히칸족이 타고 있다. 그 광경을 마주하며 사람은 시민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보낸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을 회상한다……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또다른 작품 『죽음의 섬』은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예순세 살 예순네 살 예순다섯 살이 된 어느 토요일의 강가와도 같은 글. 그날 우리는 문득 창밖을 보았고, 그제서야 눈이 내리고 있음을 알았다. 습기를 머금은 소리들이 엷은 얼음의 날개처럼 내려앉는다. 눈은 가장 고요한 환각이다. 그날 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자신에게 한국은, 그 무엇보다도 인적 없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눈 속에서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책을 읽었던 눈 내리는 겨울날로 기억될 것이라고.  


며칠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더운 날들이 이어졌다. 어제의 기온은 36도. 오두막의 그늘 아래서는 큰 더위를 느끼지 못하지만 테라스로 나가는 순간 공기는 뜨거운 오븐 속과 같이 덥다. 그리고 정원으로 내려서서 집 앞으로 나가면 그늘 하나 없는 들판 가득 쏟아지는 한여름 햇볕. 무성하게 자라 길을 뒤덮어버린 풀잎들 하나하나가 뜨거운 금속과 같은 열기를 품어낸다. 모자 없이 밖으로 나온 나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 나는 천천히 걷는다. 햇빛에 화상을 입을 것이다. 나는 걸음을 빨리 한다. 현기증에 쓰러질 것이다. 허공에는 반짝이는 흰 곰팡이처럼 온갖 종류의 풀씨들이 부유하고 있다. 한없이 부드러운 솜털들이 살갗을 건드리면서 얼굴 근처를 날아다닌다. 대기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숨결로 가득하다. 지난겨울이 사라졌듯이 여름 또한 지나갈 것이다. 눈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풍요로운 감각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예순세 살 예순네 살 예순다섯 살이 된 어느 토요일의 강가에서……  나는 두 팔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반짝이는 풀씨들을, 살아 있는 빛의 곰팡이를 들이마신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다. 


오래전부터 쓰고 있던 글을 영영 완성하지 못할 것만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글을 완성한다니, 그게 무슨 의미일까. 적어도 나는 단 한 번도 그렇게 해본 일이 없다. 처음에 나는 여행에 관한 글을 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 속에서 여행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글 속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여행을 떠나본 일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쓴다─이것은 여행에 관한 글일까?) 그다음 나는 정원에 관한 글을 쓴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처음 이 정원에 칩거하며 살기로 결정했을 때,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이곳에서 마침내 우리는 각자의 정원에 관한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내가 쓰고 있는 글에 정원은 조금도 나오지 않는다. 글 속의 목소리는 정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나는 쓴다─이것은 정원에 관한 글일까?)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종종 내 글이 어느만큼 진척이 되었는지 묻는다. 그러면 나는 항상 대답한다, 나는 그것을 절반쯤 쓴 것 같고─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전체의 분량이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단 한 문장이든 아니면 백 페이지든 언제나 절반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하지만 자꾸 반복해서 다시 쓰는 바람에, 그 이상으로 넘어가지는 못하고 있다고. 게다가 반복해서 다시 쓸 때마다 모든 것은 미묘하게 달라진 새로운 암시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므로, (그런데 암시라니, 나는 그 단어를 알고 있는 것일까?) 매번 목소리는 글의 처음으로 돌아와 첫번째 문장부터 그것이 다르게 읽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단어나 문장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의 다시-쓰기는 고쳐-쓰기가 아니라고. 나는 마치 나 자신이 쓴 글을, 텍스트가 아니라 목소리를 바꾸어 가며, 끊임없이 나흐디시퉁Nachdichtung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오늘 아침 잠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손을 뻗어 침대 가장자리에 있는 책을 집어들었는데, 펼쳐진 페이지에서 눈에 들어온 단어는 ‘뇌우새Gewittervögel’였다. 그것은 특정 종의 새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뇌우나 폭풍우가 다가오는 것을 울음으로 알리는 새들을 말한다. 내 정원에는 뇌우새가 산다. 그들은 번갈아 끊임없이 불안하게 운다. 그 울음소리와 더불어 비로소 고요해지는 법을 나는 배웠다. 공기 중에 번득이는 이 불안의 기미. 번개가 치기 전 정원의 풀잎들은 떨림을 멈춘다. 수국이 고개를 숙인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두들 알고 있다. 


하지의 저녁, 길고도 느린 구릿빛 그늘이 테라스의 장작더미 위에, 유리구슬에, 거울 조각에, 공작새의 양철 날개 위에 한없이 오래 머문다. 그러다 묽은 어둠이 고이듯이 하지의 밤이 온다. 정원 나무들은 검은 그림자로 우뚝 서 있는데, 하늘에는 빛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의 가장 높은 곳의 구름들은 여전히 선명하게 새파란 빛으로 환하게 반짝인다. 내 잠은 끊임없이 중단된다. 눈을 뜰 때마다 창밖으로 물처럼 흐릿하게 환한 하늘이 보인다. 그때마다 나는 뵈클린의 그림 <죽음의 섬>을 생각한다. 새벽 세시, 뇌우도 없이 새들이 운다. 테라스 앞 화단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수국의 그림자.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영영 완성하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강해진다. 나는 체념하고, 포기하고, 굴복하고, 인정하고, 마침내 울 것이다. 그리고 눈물과 함께 마지막 문장을 쓸 것이다. 아니 눈물이 곧 마지막 문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잘 울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마지막 문장은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 

정원에 관한 글을 쓰려고 했으나, 글에 정원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목소리는 끝내 정원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하지의 밤, 내 잠은 한없이 짧고 간헐적이다. 잠 속에서 나는 읽었고, 그것을 내가 쓴 것이라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서 언어는 의미도 의미 전달을 위한 수단도 아니었다. 언어는 구축과 연속성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언어는 주관적인 촉수, 감각 자체였다. 살아서 퍼덕이는 물고기의 비늘이었다. 그것의 불연속적 광채였다. 나는 잠 속에서 FM을 펼친다. “맥박치는 하나의 단어가 이른 새벽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마치 심장처럼…… 그는 내 입술에 하나의 인장을 찍어눌렀다 내가 그것을 영원히 열(고 싶)지 않도록……” 나는 페이지를 덮고, 다시 잠 속으로 가라앉으며, 잠 속에서, 정원에 관한 내 글을 영원히 완성하지 못하리라고 예감한다. 나의 레인버드, 뇌우새들은 마침내 울 것이다, 눈물 없이.   


산책길에 우리는 음악회 포스터를 보았다. 이웃 마을의 교회에서 서머 음악제가 열린다. 튀링겐 바흐 콜레기움 연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이웃 마을이고 지도상의 거리는 십 킬로미터 정도. 우리는 기분전환 겸 걸어서 음악회에 가보기로 했다. 바흐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보로 편도 약 두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하지 즈음이라 낮은 하염없이 길었고, 저녁 열시가 되어도 어두워지지 않았다. 도중에 지치면 카페에 앉아 쉬면서 커피를 마실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음악회가 끝난 뒤 다시 같은 길을 걸어서 돌아오기로 했다. 시골 마을이라 버스를 이용하면 더 시간이 걸리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넉넉하게 이른 시간에 우리는 출발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뜨거운 날이었다. 마을의 역 건널목을 지나자 숲으로 이어지는 긴 가로수길이 나왔다. 길에는 흰색에 가까운 흙이 깔려 있었다. 어느새 길가의 집들은 사라지고 우리는 환한 너도밤나무 숲을 통과하고 있었다. 빛이 스며드는 숲은 쾌적했다. 그러나 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도로를 건너 반대편 숲으로 들어서자 사정이 달라졌다. 숲은 어두워지고, 나무들은 더욱 울창하면서 길은 점점 좁아지고 걷기 힘들 정도로 풀들이 무성했다. 도중에 카페를 만날 수 있으리란 우리의 기대는 참으로 나이브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가 선택한 경로는 오직 숲을 관통하는 길이었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숲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카페는커녕 단 하나의 벤치도 없었으며, 이곳 건너편의 숲은 깊고 울창한데다 호수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아니라서 단 한 사람의 산책자도 만날 수 없었다. 우리는 무릎까지 자라난 풀을 헤치며 걸었고 곧 길을 잃고 말았다. 인적 없고 음습하며 키 큰 나무들의 우듬지가 하늘의 빛을 가리는 바람에 어둡고 무거운 습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숲을 빠져나가는 것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었다. 우리의 눈앞에서 노루 한 마리가 나무 사이로 뛰어갔다. 땅을 힘차게 디디는 노루의 발소리와 수풀이 스치는 소리는 빽빽하게 들어찬 육중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숲속의 빈 공간에서 무시무시할 만큼 크게 울려퍼졌다. 이곳의 숲은 벌목이 덜 이루어진 것 같다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말했다. 예를 들자면 과거 러시아 군대의 주둔지가 있어서 출입이 제한된 숲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아서, 숲 한가운데서 우리는 형편없이 낡고 녹슨 차단기를 발견했다. 차량의 진행을 통제하는 용도인데 최소한 수십 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숲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차단기가 있는 길을 따라가자 놀랍게도 우리의 눈앞에, 마치 정글 속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앙코르 와트처럼, 거대한 콘크리트 폐허가 나타났다. 처음 우리가 마주친 것은 짙은 초록의 나무들 사이로 우뚝 솟은 커다란 굴뚝이었다. 지하 탱크에 연결된 시설물처럼 지표면에 바로 세워진 굴뚝은 낡아서 검은 이끼로 덮였으며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듯 녹슨 철제 사다리가 달려 있었다. 굴뚝을 통과하자 뒤편 널찍한 공터에 감옥이나 병영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사각형 건물이 있었는데, 그 역시 참혹하게 낡은 폐허였다. 건물 입구는 육중한 시멘트로 막혀 있었고 그것은 더욱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건물 앞에는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수십 년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출근해서 일했겠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폐쇄되어버린 장소. 그사이 정글처럼 무성하게 자란 풀과 식물들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뒤덮었고 이층의 창유리들은 커다란 검은 이빨처럼 깨어졌다. 모든 것이 연기에 그을린 듯 검게 녹슬었다. 움직이는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오직 무섭게 기승을 부리는 모기떼뿐. 커다란 모기들은 손으로 쫒아도 달아나지 않고 계속해서 얼굴과 눈을 향해 덤벼들었다. 팔과 다리가 금세 모기에게 물린 자국으로 부풀어올랐다. 하지만 숨막히는 숲의 습기와 사나운 모기보다도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하고 맞닥뜨린 그 장소의 암울하고도 위협적인 분위기였다. 또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어쩌면 이곳은 과거 러시아군의 핵시설이었을지도 몰라, 하면서 겁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숲속 콘크리트 폐허는 1980년대 초반 세워진 동독의 핵 벙커 시설이었다. 사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 벙커는 당시 최첨단 기술이 동원된 완벽한 핵전쟁 피난처로 알려졌다고 한다. 동과 서 모두 핵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던 냉전 시대, ‘처음에 쏘는 자가 두번째로 죽는다’는 모토가 있던 시대를 나는 기억한다. 그런데 공포가 없던 시대를 우리는 한 번이라도 가졌던가.  

게다가 우리는 조금 전 이미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수상한 장소와 마주치기도 했다.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그곳은 폐기계를 쌓아놓은 하치장처럼 보였고, 조그만 막사 건물에는 사람이 있는 듯 불이 켜져 있었다. 공공시설이 아님은 분명했고 이상하게도 ‘접근 금지’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그곳이 소위 ‘제국의 시민들Reichsbürger’이 점유한 땅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제국의 시민들’은 역사상의 독일 제국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극우파소수단체로, 현재의 독일은 1945년에 연합군에 의해 세워진 가설국가 혹은 회사일 뿐이라며 주권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독일에 적대적인 외부세력의 음모 때문에 자신들의 인식이 억압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력인 혹은 자연인으로 부르기도 하며, 국가의 행정명령이나 법원의 결정에 불복하여 무기로 대항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오랫동안 음습한 숲속을 헤매던 우리의 눈앞 저 멀리에서부터,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환한 빛이 쏟아지는 들판 한 귀퉁이가 나타나던 순간을. 나는 사막에서 신기루를 발견한 사람처럼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리하여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움푹하게 가라앉은 마른 강바닥을 채운, 거의 백색에 가까운 황금빛으로 넘실대는 끝없이 드넓고 우묵한 밀밭이었다. 그 어떤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는 풍성한 빛이 파도치는, 환한 강물처럼 길고 아득하게 너른 경작지 구덩이였다. 나는 그렇게 너른 밀밭을 본 적이 있었던가. 과거의 군사시설과 현재의 사설 군사시설이 음모처럼 웅크린 짙고 어두운 숲 한가운데서 마법처럼 나타난 드넓은 밀밭. 이것은 무엇에 대한 암시인가. 장소에는 마법적인 힘이 있다고 말하는 우리의 친구 시인 WG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왔다. “마법적인 장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밀밭 가에 앉아 쉬었다. 물병에 한 모금 정도 남은 최후의 물을 나누어 마셨다. 우리는 빛을 호흡하듯이 숨을 쉬었다. 고요했고, 주변에는 그 어떤 거주지의 흔적도,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마치 인류의 멸망 후 저절로 무르익은 최후의 밀밭을 연상시켰다. 지금껏 이토록 아름다운 밀밭을, 이토록 마음을 건드린 밀밭을 본 적은 없었다. 나는 밀밭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밀밭의 냄새, 밀밭의 풍요로운 빛에 매혹되었다. 빵에 대한 언약이면서 동시에 평화의 반짝임이기도 한 밀밭. 그러므로 밀밭을 태우는 일은 밀밭 이상의 것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반대로 말하면, 누군가 밀밭 이상의 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자는 밀밭을 태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감동과 아름다움의 사물들 중에는 언제나 빵이 들어 있었는데, 빵의 아름다움은 밀밭의 아름다움에서 나왔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바흐를 듣기 위해서 밀밭 길을 따라 계속해서 갔다.  


새벽의 책상. 나는 쓰고 있다. 갑자기 바로 눈앞에, 커다란 거미 한 마리가 나타났다가, 스르르 미끄러지듯 다시 위로 사라졌다. 천장을 올려다보자 전등갓에 무수하게 매달려 흔들리는 거미줄 뭉치가 보인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고개를 숙이고 나는 계속해서 쓴다. 책을 읽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나는 여러 개의 글을 동시에 쓰고 있다. 정원과 어머니에 대해서. 그리고 다시 글을 바꾸어 글쓰기와 거미에 대해서. 그리고 다시, 오래전 잊은 편지를 이어서 쓴다. 그것을 완성하지 못하리라는 예감 아래서. 또다시 글을 바꾸어 이번에는 “암시하다”라고 쓴다. 나는 FM의 글에서 “암시하다”란 어휘를 발견하고─누가 우리에게 자연을 암시하는가, 누가 우리에게 예술을 암시하는가─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기를 원했다. 내 물음에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햇빛이 환하게 비치는 창밖을 가리키며,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라고 말하는 의미라고 대답한다. (누가 우리에게 사랑을……) 암시하다, 느낌을 무엇인가로 향하게 하며 그것의 인상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은연중 믿게 만드는 속삭임. 마침내 그것을 내면에서 유발시키는 속삭임. 그리하여 지금 햇살 가득한 유리창에

첫번째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