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WG, 그리고 개구리를 먹는 자

나는 마법의 장소에 있었다. 둥그스름하고 평평하게 펼쳐진 드넓은 계곡이었다. 계곡의 입구에는 구석기인의 동굴이 있었다. 계곡을 흐르는 론강은 계곡의 크기에 비해서 수량은 아주 적고, 그나마도 대부분 카르스트 지형에 스며들어 지하로 흐른다. 길옆은 온통 초록 보리로 물결쳤다. 그 너머로 화가가 농담(濃淡)을 표현하는 것을 잊은 듯한 샛노란 유채 들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계곡은 황금빛으로 가득한 거대한 항아리 속처럼 우묵하고 뜨겁고 고요했다.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멀리 어두운 숲이 보였다. 길은 숲을 향해 일직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숲을 향하고는 있었으나 숲으로 가지 않아도 좋았다.

목적지 없는 산책이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짙은 초록의 보리밭이 무수한 층의 색을 이루며 파도처럼 일렁였다. 머리 위의 하늘에서는 찌르듯 날카로운 태양빛이 내리쬐었으나 숲 쪽으로는 번개를 품은 진회색 구름층이 높이 형성되고 있었다. 조만간 소나기와 번개가 들판에 닥칠 예정이었다. 하늘 높이 매 한 마리가 떠 있었다. 우리는 그림 속에 있는가? 남쪽이었고, 여행중이었다. 호텔에서 아침식사로 둥근 흰 빵이 나왔는데 부드럽고 맛이 좋았다. 나는 버터를 바른 빵을 두 덩이나 먹었다. 남쪽 지방의 빵은 햇빛의 맛이 난다고 나는 말했다. 마음을 건드리는 다정한 맛이다. 호텔은 옆으로 두 날개를 펼친 모양으로 넓게 자리잡은 옛날식 건물이고 방이 아주 많았으나 우리 말고 다른 투숙객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식사 식당은 흔히겨울 정원이라고 부르는, 저택의 일층에 자리잡은 유리 온실에 있었다. 아침의 공기가 좀 싸늘하긴 했지만 우리는 온실 바깥의 야외 정원 테이블로 나가 아침식사를 했다. 지난밤. 밤 두시와 세시, 그리고 네시에 호텔 어딘가에 있는 괘종시계가 무거운 소리로 시각을 알렸다. 옛날식 커다란 시계의 몸통에서 울리는 진짜 쇠공이 소리이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종소리를 세었다. 종소리로부터 파생된 무수한 생각들이 나를 뒤척이게 만들었다. 론강의 계곡은 마법적인 장소라고 누군가 말했다. 인류 최초의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는 석기시대의 조각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자와 인간의 형상을 합쳐놓은 그것은 곧 주술적 사물이기도 했다. 나는 박물관의 사물 앞에서 가장 경건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번개에 그을린 흙투성이 벽돌 조각 하나는 벌레의 집이 될 우리 육신에 대한 대응물이라고. 매와 번개를 피하기 위해 나는 사자 인간의 동굴로 숨을 것이다. 그 동굴에서는 석기나 일상적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곳은 주거지로부터 고립된, 의식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만약 들판에서 번개를 만나면 나무 아래로 숨을 생각은 말고 최대한 몸을 낮게 땅바닥에 엎드려야 한다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우묵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가장 좋다. 나는 몇 년 전에 들판을 홀로 산책하다가 갑자기 번개를 만났을 때의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트랙터 바퀴 자국이 움푹한 길에는 키 낮은 들꽃들이 만발했다. 5월이었다. 시골을 여행하다가 마주치는 엄청난 크기의 트랙터는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거대화되는 농기계는 숲의 토양을 망치는 한 원인이라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개인 농부들로부터 농토를 사들인 거대 기업이 농업을 산업화시키면서 그런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외따로 떨어진 한적한 농가, 제재소와 방앗간 풍경, 붉은 양귀비가 만발한 휴경지, 겨울 숲의 벌목, 눈 덮인 겨울 들판, 보리, , 호밀과 귀리, 옥수수의 수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 농부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우리는 호텔 근처에서 호수를 발견했다. 호수는 아주 작아서 연못이라고 불러야 할 듯했지만 탈의실과 샤워용 수도꼭지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아직 여름 피서객들이 몰려오기 전이라서 호숫가는 텅 비었다. 햇볕은 뜨거웠으나 물은 살짝 차가웠다. 수면 바로 위로는 모기들이 구름을 이루고 있었고 물속에는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기다란 수초가 발을 휘감았다. 호수는 깊지 않았다. 호수 주변 나무 울타리 저편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물은 투명한 연녹색이었고 이끼와 물풀, 벌레와 유충, 나뭇잎과 식물 조각 들이 둥둥 떠다녔다. 우리는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흰색 물체를 발견했다. 그것은 죽은 개구리였다. 풍선처럼 부푼 개구리는 수직으로 몸을 세운 채 물살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로 흘러다녔다. 간혹 내가 구석기시대의 동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믿을 수 없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정말일까?) 물이 차가웠으므로 우리는 금방 밖으로 나와 따뜻한 햇볕에 몸을 녹이며 누워서 사과를 먹었다. 호텔 앞 슈퍼마켓에서 산 사과는 과육이 무척 단단하고 신맛이 강했다. 사과를 먹으면서 우리는 WG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슈투트가르트의 한 묘지에서 나는 WG를 처음 만났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오래전 청년 작가이던 시절 마찬가지로 청년 작가인 WG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WG는 노동자 작가였다. 직업학교를 중퇴한 그는 발굴 인부, 철물공, 호텔의 접시닦이 등으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고고학과 지질학, 고대사를 공부했고 시와 산문을 썼다. 그리고 지금은 그에게 방을 제공해준 서점의 이층에 살면서 정원사로도 일한다고 했다. 그들은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았을 뿐, 이십칠 년간 만나지 못했다. 어느 날 우리가 남쪽으로 여행 온다는 것을 알게 된 WG, 슈투트가르트에서 함께 만나 작가 프란츠 융의 묘지를 찾아 돌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묘지를 돌보는 데 필요한 정원용 도구는 자신이 갖고 가겠노라고. 프란츠 융은 독일 표현주의문학의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작가라고 했다. 그동안 표현주의를 미술 사조로만 알고 있었던 나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에게서 그 말을 전해들은 순간 갑자기 기묘한 상상에 사로잡혔다. “묘지를 돌보는 도구라는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거대한 낫이 떠올랐던 것이다. 사람 키만큼 크게 자란 풀을 슥슥 베어내는 데 사용되는, 양날 손잡이가 달린 반달형 낫. 해골 형상을 한 죽음의 신의 손에 들려 있는 대형 낫. 아직 WG를 모르는 상태였던 나는, 기차를 타고 올 예정이라는 WG가 그런 무시무시한 도구를 들고 과연 기차를 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만나기 며칠 전 정신이상자로 추정되는 남자가 기차 안에서 막무가내로 칼을 휘둘러 여러 사람이 다쳤다는 뉴스를 보기까지 했다.

나와 베를린 서가의 주인 그리고 WG는 공사중인 슈투트가르트의 중앙역을 지나갔다. 바로 올려다보이는 이층에 포르노 극장이 있었다고 WG가 말했다. “은퇴자의 포르노 극장하고 WG는 말했다. 그는 일생 동안 많은 책을 읽었고 그보다 더 많은 것을 경험했으며 그것들 모두를 기억 속에 단단히 간직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이틀 동안 그는 자신이 한때 살았던 도시의 골목길과 상점들, 도서관과 박물관, 옛날식 담뱃가게, 오래전 이 거리를 걷던 사람 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물론 당연히 오래된 책들에 대해서도. 그러나 모든 것은 사라지고 허물어지고 철거되고 쫓겨나버렸다고 WG는 말했다. 사라짐은 진행형이다. 그가 말한 사라진 것들 중에서 옛날식 커피하우스가 내 흥미를 끌었다. 바로 이 자리에, 도시의 가장 번화가 모퉁이에 있었던 전설적인 커피하우스들, 둥근 대리석 테이블, 도자기 잔과 은색 스푼, 특유의 묵직하고 고전적인 짙은 색 목제 의자와 실내장식, 저녁이면 카바레 공연이 열리곤 하던 커다란 갤러리, 그리고 호두색 나무틀에 끼워진 신문들까지. 이제 그런 커피하우스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고 WG는 말했다. 그 커피하우스에서 오전을 보내며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꼼꼼히 읽는 것은 주말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리고 대화 상대가 그리울 때면 커피하우스에서 쉽게 누군가를 찾을 수 있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며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고, 옆 테이블에서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인상적인 것은, 커피하우스의 숙녀들이다. 숙녀들은 보통 홀로 커피하우스에 앉아 있었다. 숙녀들은 더이상 아주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의, 화장을 하고 한껏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여자들이다. 숙녀들이 선호하는 자리는 커피하우스의 이층 갤러리다. 숙녀들은 늘 오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든 자세였고, 아래층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담배를 피웠다. 그래, 커피하우스에서 담배를 피우던 시절의 일이다! WG는 슈바벤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나는 프란츠 융을 개인적으로 만난 일은 없지만,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프란츠 융의 묘석 앞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WG는 그렇게 말했다. 처음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낸 WG는 내 상상과는 달리 거대한 낫 대신에 조그만 종이백을 하나 들고 있었다. 종이백 속에서는 작은 갈퀴 하나, 주방용 수세미와 천조각, 그리고 수영보조기구처럼 생긴 폼 재질의 작은 받침이 나왔다. 우리가 프란츠 융의 무덤에 도착하자 WG는 묘석 앞에 받침을 놓고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갈퀴로 묘석 위에 덮인 이끼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프란츠 융의 묘석은 서 있는 게 아니라 바닥에 누인 형태라서 청소를 하려면 그 앞에 쪼그리고 앉거나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제야 나는 그가 받침을 갖고 온 이유를 알았다. 프란츠 융의 묘석은 오랫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이름을 새겨넣은 돌의 홈 사이에 초록 이끼가 가득했다. 그래서 묘석의 글자를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으므로 우리가 그 무덤을 발견한 것은 정말로 기적이었다. 우리는 수세미와 갈퀴로 한동안 묘석을 청소했다. 이끼를 꼼꼼하게 긁어낸 다음 수세미로 묘석 표면을 문질러 닦고 묘지의 수도에서 물을 떠 와서 묘석에 뿌리기를 반복했다. 누군가의 묘석을 청소하는 일은 생전 처음이라고 나는 말했다. 제발트의 책에서 읽은, 만성절 아침 안개가 짙게 낀 묘지에서 죽은 남편의 묘석을 청소하는 나이든 여자들의 묘사가 기억났다. 프란츠 융은 결혼에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었다고 WG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 결혼에 어울리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프란츠 융을 생전에 만날 기회가 있었더라면 나는 정말 기뻤을 겁니다.” 죽은 이를 생전에 알았느냐는 내 물음에 WG는 이렇게 대답했다. 프란츠 융은 1963년에 슈투트가르트에서 죽었고 그때 WG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커피하우스의 숙녀들은 옆자리의 사람과 시시한 잡담을 나누지 않았다고 WG는 말했다. 숙녀들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맞은편 자리에 앉아도 되느냐는 예의바른 대화 신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내 질문: 그 숙녀들은 부유한 계층이었을까? 예를 들자면 귀족? 아마도 그녀들은 적어도 한때는 부유함을 알았던 사람들일 거라고 WG는 말했다. 귀족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부심 강한 시민계층으로, 설사 몰락했더라도 과거의 루틴을 유지하는 노년의 사람들.

커피하우스 숙녀들의 모습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유럽 회화에 남아 있다. 빈의 커피하우스에 여자들을 출입이 허락된 것은 19세기 중반이라고 들었다. 우아한 긴 드레스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거나 신문을 읽는 숙녀들. 그림 속의 숙녀들은 젊고 아름다웠으나, WG가 묘사한 숙녀들은 모두 노인에 가까운 여자들이었다. 젊은 시절 그가 본 여자들은 커피하우스 숙녀의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또한 그런 전통적 커피하우스도 대부분 사라져버렸으나 몇몇 곳이 전설처럼 남아 있는데, 나는 그중의 하나로 서베를린 구역의카페 하르덴베르크를 알고 있다. 그곳으로 들어서는 것은 과거로의 여행과도 같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갤러리에서 도도한 자세로 앉아 있는 늙은 숙녀들은 보이지 않았다. 전통 커피하우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현대식 대량 생산물이 아닌 카페를 찾아보려고 했고, 슈투트가르트 주택가 어느 길모퉁이에서 그런 곳을 발견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소박한 형태의 옛날식 카페였다. 우리는 커피와 집에서 만든 케이크를 주문했다. “이곳의 실내장식은 과거의 커피하우스와 유사합니다, 바로 이런 분위기였죠, 저기 나무틀에 끼워진 신문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탁자는 대리석이 아니군요.” WG는 아쉬워했다. 케이크는 지나치게 달콤했으나 흰 사기잔에 담긴 커피맛은 훌륭했다. 젊은 시절의 WG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숙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커피하우스의 숙녀들로 대표되는, 정체불명의 도도한 노년 여성 계급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다정한 수다를 풀어놓는 동네 할머니들이 앉아 있었다.

오후가 되자 날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우리는 걸어서 공원을 가로질러 인공 호수를 지나 개신교 단체의 찬양 모임이 열리는 잔디밭에서 잠시 동안 서서 노래를 듣다가, 번화가 광장의 주말 벼룩시장을 구경했고, 보행자 전용 쇼핑가를 걸어 중앙역으로 향했다. 거리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일요일이라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고 길거리 카페에는 빈자리가 없었으며 길거리 벤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덥고 지쳤다. WG는 겉옷을 벗어서 왼팔에 걸치고 오른손에는 사각형의 가죽 여행가방을 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배낭이나 캐리어가 아니라 그 가방을 들고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WG는 길 한가운데서 가방을 내려놓고 열었다. 잠옷과 티셔츠 양말 등의 내용물을 뒤적이던 그는 손바닥만한 벽돌 조각 하나를 꺼내서 내게 건넸다. 기와처럼 두께가 엷은 벽돌은 흰 얼룩이 섞인 불그스름한 색이고 잘린 단면에는 녹색 이끼가 보였다. 이것은 로마 시대에 구워진 벽돌이라고 WG가 말했다. 그는 독일 서쪽의 자르브뤼켄에 살고 있는데, 그곳은 과거 로마제국에 속했던 도시이고 아직도 로마 시대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그는 내게 주기 위해서 로마 시대의 폐허에서 이 벽돌을 가져왔다고 했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오기 전까지 그곳은 켈트족의 땅이었다. 켈트족은 문화가 발달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상하게 문자도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의례와 관련된 이유로 글쓰기와 기록을 의도적으로 기피했을 거라고 추측된다. (순간들 기록 없이.) 우리는 어느덧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은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간신히 한 야외 카페에서 빈 테이블을 발견한 우리는 맥주와 레모네이드를 주문할 수 있었다. 담배 마는 종이가 떨어졌는데 담뱃가게가 문을 닫았으므로 살 수가 없다고 WG가 말했다. 과거에는 모든 카페에서 담배는 물론이고 담배 종이도 살 수 있었으나 이제는 아니라고. 우리는 젊은 웨이터에게 혹시 담배 종이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웨이터는 아마도 그것을 갖고 있을 만한 동료에서 물어봐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뉴스에 따르면, 독일 정부는 6월부터 매우 저렴한 기차 정기권을 판매할 예정이었다. 한 달 동안 독일 전역을 기차로(특급열차제외)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티켓의 가격은 9유로였다. WG는 그 표로 특정 종의 난초를 찾아가는 여행을 계획중이라고 말했다. 잠시 후 웨이터가 담배 종이를 몇 장 가지고 왔다. WG가 사례를 하려 했으나 웨이터는 받지 않았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과 WG는 필터 없는 담배를 말아서 피웠다. 이십칠 년 만에 재회한 두 친구는 이제 곧 다시 헤어지게 될 것이다. 번잡한 관광지 카페에서 만난 젊은 웨이터의 친절은 더위와 먼지와 긴 산책과 작별에 지친 우리를 맑은 우물처럼 위로했다. 기차 시간이 다가왔다.

 

론강의 계곡은 마법적인 장소라고 WG가 말했다. 강은 있으나 물줄기가 보이지 않는 마른 계곡으로, 나무가 거의 없이 풀과 갈대가 자란다. 여행중에 기회가 되면 그곳을 걸어보라고 했다. “동굴에서 발견된 사자인간의 조각상이 남성이라고 믿은 학자가 있는 반면에 어떤 학자는 여성의 모습이라고 확신하기도 했습니다. 논쟁은 뜨거웠지요. 그래서 박물관은 조각상을 남자도 여자도 아닌사자인간이라고 명칭함으로써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다른 누군가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WG는 자신의 손이 너무 흉하기 때문에 후손을 갖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 결혼에 어울리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나중에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나는 론 계곡에서 번개에 갇힐 뻔했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자신은 어린 시절에 집안으로 들어온 번개와 마주친 일이 있다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말했다. 번개는 공 모양으로 뭉쳐진 빛의 형태였고, 열린 창으로 들어와 천천히 구불거리며 방안을 떠다니다가, 마치 술 취한 사람이 든 등불처럼 비틀거리고 흔들리더니, 불이 꺼진 어둑한 방구석에 파편 같은 빛 가루를 한줌 떨구고는 다시 창밖으로 날아갔다고. WG에게 엽서를 보내자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말했다. WG는 전화가 없다. WG는 컴퓨터도 핸드폰도 갖고 있지 않고 이메일 주소도 없으므로, 그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편지와 엽서뿐이라고. WG에게 연락을 하려면 그의 이웃에게 일단 전화를 걸어 WG를 불러달라고 부탁한 다음, 십분 후에 다시 전화를 걸면 된다고 했다. 혹은 그런 식으로 WG는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오게 된다. 하지만 WG는 유별난 은둔자가 아니며, 그 자신이 자주 친구들에게 엽서를 써 보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관절에 통증이 있는 WG는 어느 순간부터 손으로 글을 쓸 수 없어 구식 타이프라이터로 엽서를 쓰며, 종종 두세 장의 엽서를 이어서 쓰고, Ⅰ, Ⅱ, Ⅲ 등으로 번호를 붙여서 보낸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그는 우리에게도 엽서를 보냈다고. 우리는 WG와 헤어진 다음날 론강의 계곡을 걸으며 WG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번개 구름보다 더 빠를 수는 없었다. 우리는 천둥소리와 섬광에 갇혔다. “우리는 박물관의 켈트족 유물 앞에서 언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이것이 WG가 남긴 작별의 말이었다.

여행의 마지막날 베를린 서가의 주인과 나는 호수로 갔다. 아직 5월이었고, 호수에는 여전히 우리 둘뿐이었다. 우리는 물가에 자리를 펴고 누워서 점심으로 준비해온 사과와 크루아상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샛노란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갔다. 우리는 번개에 몸을 맡기듯이 햇볕에 몸을 맡기고 누워 있었다. 나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 겉옷 주머니에서 중국 시집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중국시의 번안 시집이었다. 여기서 번안이란 외국 시를 원어에 얽매지 않고 독일어에 어울리게다시 시로 짓는다”(나흐디시퉁Nachdichtung)는 의미이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도 일본 시인 다네다 산토카의 하이쿠를 영문에서 나흐디시퉁한 적이 있다. WG는 유럽을 벗어난 동쪽으로는 멀리 가본 일이 없다고 내게 털어놓았다. “내가 가본 가장 먼 동쪽은 코카서스였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도 트빌리시에 있었답니다. 거기서 피로스마니가 죽음을 맞은 계단 밑 방을 보았어요하고 내가 대답했다. 이 세상의 마법적인 장소들이 우리의 몸을 흐른다. 어떤 순간, 나는 내가 구석기시대의 동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다. (그것은 정말일까?)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호수를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헤엄쳐가고 있었다. 그가 햇빛 속에서 가물거리며 멀어졌다. 그 작은 책은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겉옷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잊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 시집을 여행길에 갖고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시집을 펼치고 저절로 나타난 페이지를 소리내어 읽었다. 당나라 시인 이하의 번안시를 읽는 내 목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이 세상은 오직 한 마리 죽은 개구리의 우주였다.

 

하늘의 푸르름 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며

누런 땅속이 얼마나 깊은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달은 차갑고 태양은 더우며

둘 모두 인간의 목숨을 갉아먹는다는 것.

곰 고기를 먹는 자 살이 찔 것이며

개구리를 먹는 자 여위어가리라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