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낙엽을 헤치며 걷는 사람

5월의 정원은 잊게 만든다. 우리는 잊는다. 말과 우리 자신을. 세상으로부터의 근심과 고통을. 우리들 앞에는 치즈를 올린 호밀빵 한 조각과 오렌지 한 알. 잎이 무성해진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오두막의 벽과 유리창, 테라스 그리고 우리의 얼굴 위에 그물처럼 어지럽게 흔들리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는 짙은 초록이며 어두운 보랏빛이다. 나른하게 내려앉은 대기 속에서 새들이 끊임없이 지저귄다. 수분을 머금은 공기는 흙과 꽃과 풀 들의 향기로 숨막히면서 무겁다. 하루종일 빛과 그림자가 우리들의 발길을 따라 일렁인다. 우리는 거의 대화조차 나누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읽거나 쓰는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정원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한 가장 적절한 장소이다. 잠시 동안 빛이 넘실대는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우리는 밤의 정원에 있다. 밤새도록 나이팅게일이 운다. 잠 속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그 소리를 듣는다. 잠시 동안 나이팅게일의 소리를 듣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우리는 수많은 세월을 늙어버린 다음일 것이다. 그것이 환희라면.

커다란 로우더덴드런 나무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지만 정원 가득히 이빨 같은 꽃잎을 가진 민들레와 미나리아재비 종류의 노란색 들꽃이 피어났다. 바닥에 깔린 짙은 녹색의 덩굴식물은 한겨울에도 윤기나게 싱싱한 초록을 유지한다. 바닥 전체를 뒤덮은 덩굴은 참나무 줄기를 타고 올라간다. 6월이 되면 덤불 뒤 숨겨진 자리에서 고운 장미가 자태를 드러낼 것이다. 심고 가꾸지 않는 우리의 정원은 자신의 의지대로 자라고 번성한다. 테라스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우리의 눈앞에서, 환하게 반짝이는 녹색의 빗줄기가 햇빛 속에서 미친듯이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아니 떨어지는 것은 빗방울이 아닌 나무의 씨방이다. 단풍나무, 참나무, 너도밤나무, 보리수나무, 버드나무와 자작나무. 천천히 허공에 날리는 이파리나 꽃잎과 달리, 연둣빛 씨방은 화살처럼 빠르게 약간의 경사를 이루며 대지를 향해 낙하한다. 빛이 스스로 대기에 녹색 음영의 사선을 긋는다. 처마에 매달아둔 새집의 입구에 커다란 거미가 거미줄을 쳤다. 아마도 거미는 이 집에서 개체수가 가장 많은 종이다. 정원 오두막에는 거미뿐 아니라 다양한 곤충들이 함께 살지만 지네나 뱀은 보이지 않는 것을 나는 다행스럽게 여긴다. 거미줄에 매달린 커다란 물방울들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인다. 정원 가운데 불쏘시개로 쓰려고 모아둔 나뭇가지 더미 위에서 노란색 부리의 검은지빠귀가 부지런히 가지를 고르는 중이다. 지빠귀는 우리가 있어도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지난가을 정원을 미친듯이 바쁘게 쏘다니던 다람쥐 한 쌍은 보이지 않는다.

봄이 돌아오고, 겨울 동안 비워둔 정원을 처음 찾는 일은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이다. 우리의 정원은 높고 빽빽한 투야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외부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구조이다. 작년에 이곳을 처음 찾은 전기 기술자는 끝내 오두막을 발견하지 못했다. 풍부한 햇빛을 받기에는 불리하지만 우리만의 고요를 지키는 데는 유리하다. 울타리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허리를 깊이 수그려야만 한다. 짙은 울타리에 가려 작은 나무문은 보이지 않는다. 올해 이른봄 오두막을 처음 찾았을 때, 울타리를 통과한 우리의 눈앞에는 놀랍게도 보랏빛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 펼쳐졌다. 설강화보다 더 커다란 꽃송이를 가진 그것은 크로커스였을까. 나는 이처럼 이른봄에 정원을 찾은 일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눈과 얼음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차가운 대지에 솟아난 꽃들의 장관을 이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심지 않고 아무것도 가꾸지 않았던 우리는 기적을 마주친 사람처럼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구인가, 이 숨겨진 정원에 낙원의 씨앗을 뿌려둔 이는. 그것은 저절로 탄생하고 저절로 사라지는 생명이었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연히 지나치던 행복한 나그네에 불과했다.

그러다 여름이 다가와 긴 폭우가 한 번 쏟아지고 나면 정원은 확연히 광폭하게 변했고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면 더이상 나이팅게일이 울던 향기롭고 은은한 5월 밤의 정원이 아니다. 무섭도록 무성해진 덤불들이 저마다 작은 정글을 이루며 온몸으로 거대한 습기를 내뿜는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오두막으로 출입할 통로조차 나날이 무섭게 자라난 짙은 초록의 거친 잎과 가지, 이름 모를 벌레들로 폐쇄되어버릴 듯하고, 나는 모기와 풀벌레에 물린 피부를 쉴새없이 긁어대야만 한다. 정원은 내 고통을 기뻐하는 듯이 보인다. 야생 식물의 생명력은 놀라웠다. 우리가 키워보려고 한때 미약하게나마─우리는 둘 다, 서로 매우 다른 방식으로 게으른 편이다─노력했던 감자나 토마토 등이 얼마나 쉽사리 죽어버렸는가를 생각하면, 나는 식물이 의지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종은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고, 승리하는 쪽은 항상 야생이었다. 농업은 인간의 개입에 불과했다.

이웃 오두막의 주인들은 여름내 부지런히 풀을 깎아댄다. 그들의 정원은 우리 정원에 비하면 골프장처럼 말쑥하다. 최대의 빛을 받기 위해 그들의 정원은 환하게 오픈된 형태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종일 테라스라는 방주에 앉아 야생이 번성하는 여름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비가 그치면 풀을 한 번쯤 깎아주어야겠어, 발을 디딜 땅이 보이지 않아.” 그런 대화를 나누며. 정원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여름에 풀을 깎아주는 일과 가을에 두텁게 쌓인 낙엽 치우는 일만은 피할 수 없다. 안 그러면 정원을 걸어다니는 일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일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비가 오면 테라스 곳곳에 양동이를 세워둔다. 테라스 지붕의 낡은 방수천을 걷어내버린 이후 지붕에서 종종 비가 샜기 때문이다. 오두막 침실 천장의 빗물 얼룩이 점점 커졌다. 우리는 방수용 송진을 사서 지붕에 몇 겹이나 칠했으나 폭우가 쏟아지면 크게 효과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침실의 빗물 얼룩은 더이상 커지지 않고 물도 새지 않았다. 펌프가 작동되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우리는 커다란 빗물받이 물통을 처마 밑에 세워두고 떨어지는 빗물을 받았다. 한번은 지붕에서 나무로 점프하던 다람쥐가 물통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나무판자를 받쳐주니 놀라운 속도로 판자를 딛고 사라졌다. 하지만 작년 여름 빗물받이통에서 번식한 모기 때문에 고생한 우리는 비가 올 때를 제외하고는 통을 비워버리기로 한다.

비가 내릴 거라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두근거린다. 정원에 비가 내리는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다. 지붕과 나뭇잎 흙과 바위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저마다 다른 음과 색조를 갖는다. 젖은 가지들이 흔들리고 부딪히며 낡은 문틀이 삐걱대고 유리창은 저절로 부르르 떤다. 모든 것이 새로운 심장을 갖는다. 모든 것이 새로운 음악이다. 폭우가 몰아칠 때면 정원 전체가 회색 파도에 실려 넘실대고, 뱀의 몸을 가진 세이렌들이 나무와 덤불과 한몸으로 어울려 어두운 녹색 머리칼을 펄럭이며 미친 노래를 부른다. 간혹 거센 바람이 오두막 전체를 무너뜨릴 듯이 뒤흔들며 지나가는 태풍의 밤, 잠에서 깬 나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암흑의 들판 너머를 응시한다. 번개가 번쩍이자 들판 너머 교회의 탑이 번갯불에 드러난다. 커다란 참나무 가지가 바람에 부러지며 굉음과 함께 지붕에 떨어진다. 우리는 잠들지 못한다. 만약 태풍에 나무가 통째로 지붕 위로 쓰러진다면 오두막은 당장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놀라워라, 물방울이 진주알처럼 매달린 테라스의 거미줄 사이로 무지갯빛 영롱한 햇살이 비친다. 물기 가득 머금은 초록은 더더욱 짙고 정원은 살아 꿈틀거리는 것들로 넘친다. 정원의 호흡이 느껴진다. 풀들은 밤사이 몰라보게 무성해졌으며 나무들은 사방에 부러진 가지들을 가득 떨구어놓았다. 빛과 이끼가 그 위로 덮인다.

 

5월의 정원은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꿈이다. 한여름의 정원은 어떤 격렬함의 구현이다. 그러나 가장 신비한 것은 겨울의 정원이라고 나는 말한다. 겨울의 정원을 책으로 비유한다면 모든 이를 위한 것은 아닌, not for everyone” 그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겨울 정원의 풍경을 안다. 전염병의 첫해에 우리는 처음으로 오두막에서 함께 겨울의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여기서 겨울을 지낸다는 것은 내게는 상상할 수 없었다. 추위도 추위지만 물이 얼어버리면 그 순간부터 이듬해 봄까지 펌프가 작동할 수 없다. 우리는 집안에 쥐가 들어오지 않도록 늘 주의하지만, 특히 기온이 낮고 먹이활동이 어려운 겨울에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긴 겨울을 지난 후에는 부엌에서 생쥐의 흔적이 발견되곤 했다. 오두막 벽 어딘가에 작은 틈새가 있을 것이다. 생쥐는 심각한 병균을 옮기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웠다. 작년에 우리는 부엌에서 새끼손가락만한 죽은 생쥐 몇 마리를 발견했고, 이후 생쥐들은 다시 오지 않았다. 늦가을부터는 인근의 농가 상점뿐 아니라 카페도 식당도 문을 닫고 이웃의 여름 정원 주인들도 도시로 가버린다. 주말에도 호숫가가 한산하다면, 그것은 겨울이 시작된다는 신호이다. 많은 이들이 떠나버린 마을 전체는 인적 없이 스산해진다. 창문마다 모두 덧창이 내려진 긴 거리를 걸으면 기묘한 기분이 든다. 게다가 눈이 내리면 오두막 지붕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오두막은 낡았고 점점 더 낡고 있는 중이다. 집 앞 자동차 진입로는 흙길이어서 눈이 내려 땅이 질척해지면 자동차가 빠지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여름 정원의 기온은 바깥보다 더 낮았다. 결정적으로 오두막은 실내에 불을 피울 수 없는 구조이다. 우리는 테라스에 늘 불을 피우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흙이 피워올리는 땅의 냉기는 얼마나 싸늘한지. 한적한 호숫가 시골 마을의 추위는 도시의 추위와는 성질이 달랐다. 겨울이 깊어지면 인근 호수는 한가운데까지 전체가 다 얼어붙는다. 우리가 늘 산책을 하는 낙엽송 숲은 잎을 잃어버리고 앙상해진다. 남은 것은 알몸의 쓸쓸함. 남은 것은 텅 비어버린 풍경.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어느 해 겨우내 오두막에서 홀로 머물렀다고 했다. 그 겨울, 얼어붙은 땅에서 올라온 냉기가 온몸을 파고들던 밤은 길고도 길었다. 소파에 앉은 그는 두꺼운 털양말과 실내화를 신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큰 판형과 육중한 두께로 유명한 아르노 슈미트의 책 『체텔스 트라움Zettels Traum』을 발받침 대용으로 딛고 있어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글과 함께 머물 장소를 간절히 원했다. 이미 가을이 깊었고 우리는 오두막에서 겨울을 나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나는 한국행 비행기표를 취소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떠나는 늦가을 11월의 마지막 주에도 정원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11월에 대해 말한다. 그 당시 내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다면, 그게 누구이든 상관없이, 나는 그 편지를 “11월은 황홀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11월은 황홀했다.

오후. 낮은 태양은 들판 위로 마지막 빛을 길게 드리우고 황혼의 색채들이 천지에 가득했다. 하지만 빛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하루는 곧 어둠과 그늘을 향해 기울었다. 투야나무 울타리 사이로 석양빛을 머금은 노란 태양이 커다랗게 번득이며 밀려들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그 빛은 오두막 안쪽의 흰 벽에, 호두 빛깔의 서랍장 위에 움직이는 빛 덩이로 일렁였다. 이제 하루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짧아졌다. 모든 것은 경사를 이루며 기울어졌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마친 후 서둘러 호숫가 산책을 나섰지만 돌아갈 무렵 이미 밤의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 검은 거울과 같은 호수의 수면이 반짝이며 가만히 일렁였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호수의 수위가 높아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이 부풀어오른다. 호숫가 비탈의 산책로 가장자리로 물이 찰랑인다. 우리가 여름에 수영을 했던 자리에는 검은색 물닭이 앉아 있다가 우리가 다가가니 기묘한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헤엄쳐갔다. 여름에 우리는 이곳에서 오색의 영롱한 띠무늬를 가진 물뱀을 보았었다. 수면에 비친 갈대의 그림자는 물의 움직임에 따라 길쭉하게 휘어지며 고대의 글자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숲에서 어린아이를 데려온 가족과 마주쳤다. 그들은 숲 가운데의 넓은 빈터에서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피크닉을 하고 있었다. 해가 지자 숲에는 어둠이 빠르게 깔렸다. 숲 산책로, 개 짖는 소리와 함께 가물거리는 자전거의 불빛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 어두운데다가 숲 전체에 낙엽이 두텁게 깔려 우리가 늘 다니던 작은 샛길을 놓쳐버린 것이다.

늦가을 숲에서는 모든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빛 없는 밤, 숲 여기저기서 마지막 너도밤나무 이파리들이 예고도 없이 무겁게 뚝뚝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우리의 등뒤에서 나뭇가지들이 저절로 부러졌다. 아니 그것은 우리를 따라오는 우리 자신의 발소리였을까. 바로 곁 덤불에서 커다란 새 두 마리가 갑작스럽게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갔고, 그 소리가 숲 전체에 천둥처럼 메아리치며 울렸다. 우리는 숲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같은 자리를 빙빙 돌았다. 쓰러진 통나무나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낙엽 깔린 미끈미끈한 땅을 조심스럽게 디뎠다. 밤의 숲은 마법을 걸었다. 숲에는 눈동자가 있었다. 축 늘어진 덩굴처럼 보이는 것은 나무에 매달린 낯선 손이었다. 어둠 속에서 우리가 서로 떨어지게 될 것이 두려웠다. 그러면 길 잃은 자는 밤새도록 숲의 같은 자리를 맴돌게 되리라. 정원 오두막의 서가에는 『낙엽을 헤치며 걷는 사람』이라는 책이 있고, 자신은 그 제목이 마음에 든다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말했다. 그는 종종 단지 제목 때문에 책에 사로잡히고, 자신을 사로잡은 제목에 대해서 즐겨 이야기하곤 했다. 마침내 멀리서 깜박이듯 작은 불빛이 보였다. 우리는 낙엽을 헤치며’, 그곳을 향해 걸어갔고, 작은 호텔을 발견했다. 호텔의 이름은 숲호텔이었다. 이 마을 주변의 시설물 이름에는 이 붙은 것이 많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 중에는 숲안쪽das Waldinnere’이 있다. 혹은 그것을 우리는 훨씬 더 평범하게 숲속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나를 가장 매혹시킨 하나의 단어는 숲고독die Waldeinsamkeit’이다. 그러나 그것을 숲속의 고독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다.

그날 밤 나는 취리히의 친구 R에게 우리의 숲 산책에 관해서 긴 편지를 썼다. 날이 점점 추워지지만 우리는 오두막을 떠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테라스의 온도계를 확인했다. 온도가 빙점 너무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지 살피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입김이 하얗게 피어났다. 저녁이면 양동이에 물을 데워 몸을 씻었고, 물이 충분하다면 간단한 세탁도 했다. 펌프의 문제 때문에 우리는 물을 최소한으로 소비하면서 생활하는 법을 저절로 익히게 되었다. 물은 요리와도 직결되므로, 우리는 점차 요리를 하지 않고 먹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호밀빵과 치즈, 포장 샐러드, 달걀, 요구르트, 바나나와 사과. 그뿐만 아니라 정원의 삶은 도시에서 익숙하던 많은 일들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도 점점 멀어지고 있는 나 자신을 느낀다. 그래도 여전히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우리는 행복하게 했다. 나는 매일 늦잠을 잤고, 눈을 뜨고 나면 이미 해가 지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북독일의 겨울은 오직 밤과 어스름으로만 이루어지는가? 또다시 11월을 이곳에서 혼자 보내지 않게 되어 너무도 다행이라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말했다. 늪지에 가라앉은 이끼같이 무거운 11. 차갑게 고인 물냄새와 젖은 갈대 냄새, 이른 서리 앉은 자작나무의 냄새.

11월에 나는 글쓰기의 기원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비틀거린다, 라고 나는 대답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공포에 질려 비틀거릴 뿐이라고. 나 자신이 쓴 모든 것에 걸려 넘어진다고. 그것은 밤의 숲에 드러난 뿌리다. 비명을 지르는 물닭이다. 나는 길이 보이지 않는 숲에서 방향을 잃은 채 오직 낙엽을 헤치며 가는 중이다. 그것이 나의 글쓰기이다. 그러나 나는 내 공포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

내 글은 아무도 모르게 달아나는 중이다. ‘글자 그대로 읽히는 것으로부터.

 

겨울이 되었다. 아침이면 우리는 화로의 재를 양동이에 담아 집 앞 들판 가장자리에 버렸다. 밤새 사그라드는 불씨가 가냘프게 남아 있는 따뜻한 재. 나는 정원용 고무장화를 신고 비틀거리며 걸었다. 아직 녹지 않은 눈 때문에 길이 잘 보이지 않았고, 장화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풀 한 포기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겨울날이었다. 나는 성에가 하얗게 내린 그림 속을 걷는 듯했다. 대야에 담긴 물이 테두리부터 얼어붙었다. 우리는 빗물받이통 속의 물을 비우고 통을 뒤집어놓았다. 그러지 않으면 물이 얼어 통이 깨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장작이 떨어졌다. 우리는 근처 농가에서 장작을 샀다. 벚나무 자작나무 버드나무가 섞인, 한 트랙터 분량의 장작, 잘게 쪼개지는 않은 통나무 형태로, 운반 포함하여 삼백 유로. 농부는 우리의 테라스까지 장작을 운반해주려고 했지만 트랙터가 투야나무 울타리를 통과할 수 없었기에 장작을 울타리 문밖에 부려두고 갔다. 우리는 함께 장작을 집안 테라스 위로 운반했다. 잘라놓은 통나무는 허리가 휠 정도로 무거웠고, 정원용 수레에 싣고 겨우 스무 걸음 정도 거리를 운반하는데 둘이서 하루 온종일이 걸렸다. 일을 거의 마칠 무렵에는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녹초가 되었다. 장작을 테라스 난간에 빙 둘러서 쌓고 습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그 위에 방수포를 덮었다. 장작 보관용 창고가 있다면 이런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불쏘시개용 작은 나뭇조각과 석탄은 마을의 슈퍼마켓에서 살 수 있다. 그리고 정원에는 겨울 태풍이 떨어뜨린 나뭇가지들이 항상 널려 있다. 우리는 틈날 때마다 잔가지를 주워서 바구니에 담아 말렸다.

 

지난겨울, 눈 내린 날 아침의 산책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해가 뜨기도 전에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나를 깨웠다. 그리고 말했다. 밤새 눈이 왔어. 우리 새벽에 호수로 산책을 가자.

이른아침 숲은 밤사이 내린 흰 눈으로 덮였다. 숲을 가로지르는 산책로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우리를 앞서간 자전거가 있었다. 눈 위에는 간간이 짐승의 발자국도 보였다. 아마도 들토끼나 여우, 그리고 기러기 같았다. 눈이 없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것들.

숲 안쪽 호수 가까운 곳으로 들어가니 눈 위에는 아무도 다녀간 자취가 없었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눈은 보드랍고 포근한 소리를 내며 발아래서 조금씩 무너졌다. 호수의 물은 맑고 부분부분 엷은 얼음에 덮였다. 바람이 불었던 방향으로 소용돌이를 그리며 얼어붙은 얼음 위에는 새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거울처럼 잔잔한 회색빛 호수에 희고 둥근 얼음의 섬들이 고요히 떠 있었다. 눈 내린 숲과 호수는 무채색의 풍경을 이루었다. 순간 들오리떼가 활기차게 물을 저으며 지나갔다. 호수의 얼음이 확장될수록 오리가 헤엄칠 수 있는 수면은 줄어들 것이다. 오리들은 그 순간을 늦추기 위해 미친듯이 빠르게 헤엄치고 있었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눈 내린 탓인지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둘렀으나 우리는 뼛속으로 스며드는 축축한 추위를 느꼈다. 물가의 나무들은 호수를 향해 깊이 기울어진 자세로 자라며 엷은 얼음 위로 보라색 그림자를 드리웠다. 물을 향해 쓰러져버린 나무들도 많았다. 죽은 나무의 드러난 뿌리들. 물속에 가라앉은 나무들은 눈이 쌓인 검은 가지를 고요한 수면 위로 치켜든 채 얼어붙었다. 얼음 아래로 시체처럼 가만히 잠긴 나무들이 보였다.

숲속 눈 덮인 가지에 남아 있는 새빨간 열매들.

어디선가 단단한 눈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새들! 왜 눈 내린 다음날 아침의 빛 속에서는 항상 까마귀들이 우는 것일까? 나는 그런 묘사를 러시아 소설에서 자주 읽은 듯하다. 하지만 이처럼 실제로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도 내가 한국에서는 늘 도시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까마귀들이 날아오르자 나뭇가지 위의 눈이 흰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바람이 없고 유리처럼 맑고 환하고 빛으로 가득한 아주 차가운 아침이었다. 우리는 모자를 깊숙이 뒤집어쓴 채 계속해서 걸었다. 겨울 숲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말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 순간의 숲은, 어쩌면 가장 아름다웠다. 우리는 잊지 못하리라. 개와 함께인 산책객들이 우리를 지나쳐갔다.

돌아오는 길. 우리는 한 여자가 벌거벗은 채 호숫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방금 차가운 얼음물 속에서 수영을 하고 나온 참이었다. 우리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길을 돌아갔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