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일곱번째 아이

우편함에서 두 권의 책을 발견했다. 뒤라스의 『에밀리 L.』 그리고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죽음의 섬』. 

부활절 휴가가 시작되었다. 상점들은 문을 닫고 순식간에 거리는 고요해졌다. 

예전에 이 우편함 옆에 사람을 찾는 종이가 붙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일 년 전 이 집에서 살다가 사망한 ××씨에 대한 기억을 말해주실 분을 찾습니다. 어떤 내용이라도 상관없음.’ 나는 여기서 논의의 대상인 ××씨를 당연히 알지 못하고, 그가 혼자 살았으며 어느 해 장기간 캄보디아 여행을 다녀온 직후 베를린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베를린 서가의 주인으로부터 들었을 뿐이다. 대신 나는 지난여름 정원 오두막에서 꽃을 따서 직접 만든 엘더베리 시럽을 떠올린다. 시럽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마을의 창고 벼룩시장에서 뚜껑이 달린 오지항아리를 샀다. 황갈색으로 표면이 거칠고 푸른색 문양이 들어간 항아리였다. 엘더베리 꽃과 설탕, 레몬을 넣고 뚜껑을 덮어 열흘 정도 둔 다음에 시럽을 걸러주면 된다. 한여름 오후, 벌들이 잉잉거리는 정원, 꿀빛 햇살, 치즈를 올린 빵 한 쪽, 엘더베리 시럽 주스. 그토록 찬란한 여름날, 아무런 말도 없는. 아무런 기록도 없는.  

내가 뒤라스를 읽고 있다고 하자 여행중인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책 두 권을 소포로 보내왔다. 고향집 서가에서 뒤라스 몇 권과 내가 좋아할 만한 책들을 발견했고, 그중 두 권을 미리 보낸다고 그는 편지에 썼다. 책들은 낡은 종이 특유의 노랗게 바랜 기색이 완연했다. 시간에 의해 엷게 닳아버린 듯한 페이지들. 헌책방의 책들에서 언제나 발견되는 오래 묵은 냄새와 색채. 그러나 누군가 펼쳐본 흔적이나 구겨진 자국은 전혀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그가 뒤라스를 읽지는 않았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하지만 그는 나와 달리 책을 무척 소중하게 다루는 것도 사실이다. 단지 속표지에 종종 편지를 써놓을 뿐이다. 그에 반해 내가 읽은 책들은 순식간에 처참한 형태로 변해버릴 때가 많다. 연필로 밑줄을 그으면서 읽는 습관, 책 사이에 연필을 끼워두는 습관, 침대에서 책을 읽는 습관, 읽다가 뭔가가 떠오르면 침대에서 글을 쓰기도 하는 습관, 그러다가 베개 밑에 넣고 잠드는 습관, 커피를 흘리거나 욕조에서 읽다가 책을 젖게 하는 등의 부주의가 원인이다. 나는 책에 애정이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책상의 책들은 대개 표지가 누렇게 변하고 우그러진 상태이다. 한 번은 천으로 장정된 하이네 뮐러의 하드커버 책을 욕조에 빠뜨리는 바람에 완전히 망가뜨린 적도 있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그 책을 친구 부부에게 보여주었고 친구 부부는 그 자리에서 쓰러질 듯이 경악했다. 아마 책이 생명체였다면 그들은 나를 잔인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정원 오두막 서가에서 똑같은 하드커버 책을 한 권 더 발견한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상당수의 책들을 두 권 이상 갖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했다. 

언젠가 R은 내게 ‘우아함’에 대한 생각을 짧게 써달라고 부탁해왔다. 그녀는 우아함을 테마로 책을 쓰고 있으며, 작가들이 생각하는 각자의 우아함에 대해서 듣고 싶다고 했다. 그때 내게 처음 떠오른 생각은 나는 결코 우아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교회와 먼 만큼, 미래와 먼 만큼 우아함과 멀다. 왜냐하면 내게 작가들의 우아함이란 곧 그들이 책을 다루는 방식이라고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잘 보관된 오래된 책들은 내게 우아함을 연상시키는 사물이다. 얼마 전 나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으로부터 아주 낡은 책 네 권을 받았는데 놀랍게도 네 권은 모두 서로 다른 종류의 성서였다. 1912년판 마르틴 루터 번역본, 역시 루터 번역본으로 1978년 동독 라이프치히 출간본, 1981년 취리히 출간의 네 개 언어─라틴어, 그리스어, 영어, 독일어─비교본, 그리고 1976년 출간된 마르틴 부버 번역의 모세오경. 이 책들은 그의 고향집 어린 시절의 서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20세기 전반까지도 인쇄에 활용되던 독일어 프락투어 서체는 알아보기 힘들뿐더러 작은 활자가 페이지 전체를 너무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베를린 서가 주인의 설명에 따르면 종이가 그만큼 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거의 독서광은 그런 촘촘한 인쇄물을 촛불 아래서 읽었다고 한다. 그 시절 거실에 모인 친구나 가족들에게 한 사람이 책을 읽어주는 낭독이 활발했던 것은 이유가 있다. 우리가 헌책방에서 가장 최근에 산 책은 로볼트 출판사의 『연극백과사전』(1986년)이다. 나는 그 책을 펼쳐보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가장 최근의 작품에서 나는 ‘게릴라 연극’이란 형태의 연극을 상상해서 소설 내용에 포함시켰는데, 『연극백과사전』에 의하면 실제로 그런 명칭의 연극이 한때 존재했다는 것이다. ‘게릴라 연극(G.T) :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 인민해방전쟁의 일환으로 미국에서 생겨난 급진적 형태의 정치-거리극.’  

R의 책 『우아함』을 나는 한국의 작업실에 두고 온 것 같다. 베를린 서가 주인과 마찬가지로, 내 책들 또한 점차 여러 장소로, 각각 다른 대륙으로 흩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처음에 나는 그것에 저항했으나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내 서가는 우아하지도 단정하지도 않다. 나는 닥치는 대로 쌓아두었고, 공간이 부족하면 닥치는 대로 내다버리기를 반복했다. 나는 종종 내 책장의 책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만약 내게 충분한 시간이, 오직 진공으로 이루어진 하루가 주어진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책에 대한 내 태도는 우아함이 아니라 강박에 가까웠고 나는 익명의 책들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내 서가가 도서관이나 책방이 아닌 은자의 섬이 되기를 원했다. 텅 빈 해변, 하나의 발자국, 한 그루의 야자나무. 그 책들은 영원히 무인도에서 은둔할 자가 가방에 넣고 갈 책이어야만 했다. 은자는 그 책을 반복해서 읽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었다. 내 책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먼 곳으로 조금씩 흩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에밀리 L.』을 들고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 앞부분을 읽었다. 봄 햇살이 넘치는 공원은 연둣빛이다. 가족 단위의 산책객들이 많았다. 첫 장면부터 『에밀리 L.』은 형식의 측면에서 내게 빔 벤더스의 영화 <아란후에스의 아름다운 시절>을 연상시켰다. 그 영화는 페터 한트케의 동명의 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졌으며(부제는 ‘서머 다이얼로그summer dialogue’), 대사는 없는 역이지만 한트케가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여름 정원 퍼걸러pergola 아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두 주인공들의 배경에서, 사다리를 둘러메고 걸어가는 푸른 정원사 복장 남자의 뒷모습으로. 그리고 글쓰는 자─작가─가 있다. 그 작품을 “올해의 가장 지루한 영화”라고 평가한 것을 어디에선가 본 듯하다. 물론 역설적 효과를 노린 표현일 테지만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작품이 내가 좋아하는 형식을 갖고 있고 그런 점에서 흥미로웠던 것 또한 사실이다. 

눈부신 여름날, 한 여자와 한 남자. 기나긴 대화. 자기 자신을 향한 침묵과 관찰로 이루어진. 대화이자 독백. 센강 하구가 내려다보이는 해변의 카페, 마치 무대와 같은 고정된 공간, 하나의 장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이인극이며 대화극. 그러나 동시에 모놀로그인. 죽음과 공포가 언어로 표현된다. 그것은 “두려움과 함께 시작되었다.” 고통은 뒤라스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사랑. 여기에 글쓰는 자─작가─가 있다.  

나는 플롯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데, 그건 내가 플롯을 해체하는 글쓰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생각을 아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스위스 작가 게르하르트 마이어를 추천했다. “적어도 우리 둘은, 그로부터 배울 것이 있어” 하고 그는 말했다. 플롯의 외부에서 쓰는 작가들을 나는 좋아한다. FM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예이다. FM이 끊임없이 거트루드 스타인을 읽듯이 나는 항상 FM을 읽는다. 내가 책을 읽는 속도는 매우 느린 편인데, FM을 읽을 때 가장 느려진다. 나는 FM의 글을 가장 느리게 읽고, 가장 빠르게 잊는다. FM의 문장은 형체가 없으므로 간직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FM의 글은 플롯이나 형식이 없이 파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시간으로 분절되는,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실체이다. 내가 그녀의 책을 읽는 방식은 물리적으로 읽거나 읽지 않는 모든 상태를 포함한다. 내가 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자꾸만 같은 페이지를 되풀이해서 읽게 될까봐 무의식적으로 모든 문장에 연필로 밑줄을 그으면서, 하지만 읽은 것으로부터 빠르게 빠져나오는 방식으로 사로잡히면서. 어떤 문장은 읽기를 통해 불현듯 무한대로 확장되었고, 마치 거대한 날개에 실린 듯, 나는 읽는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심지어 망각하는 읽기를 계속한다. 어휘들의 래디컬한 배치. 혁명과 형이상학. 문장과 어휘 단위의 해체. 사랑의 해체. 만약 누군가 그녀의 글에 대해 묻는다면 전혀 당황하지 않고 사분의 삼만큼의 미소를 지으며, “그것은 내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고 깨어나게 했어.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나 문장을 묻는 거라면,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아”라고 대답하리라. 

FM의 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장소, 그곳이 곧 내 공간이다. 그 어떤 문장도 읽은 후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 않게 하는 글. 오직 언어를 통해 재구성된 세계의 황홀한 감각만이 있을 뿐. 그렇다, 나는 FM의 글을 통해 매우 독특한 읽기를 새로이 경험하게 되었다.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언제나 새로이 반복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읽은 페이지를, 문장과 단락을 되풀이해서 읽으며, 매번 그것을 다른 글로 받아들인다. 한 권의 책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는 순간 나는 그 책에 담긴 모든 것을 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다시 읽기 위하여.

나는 벤치에 앉아 『에밀리 L.』을 계속해서 읽는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종종 내가 무엇에 대해서 쓰고 있는지 묻는다. 과거의 나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매우 당황했고 끝내 적절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예전에 택시를 탄 내게 운전수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고, 소설가라는 말을 듣더니 대뜸 경쾌한 어조로 : “소설가라구요? 어떤 소설을 쓰나요? 추리소설, 연애소설, 아니면 역사소설? 참고로 내 아내는 연애소설 팬이랍니다.” 나는 그가 그토록 손쉽고도 명확하게 소설의 종류를 구분하는 것에 감탄했다. 그래서 나는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중에서 고른다면 아마도 추리소설을 쓰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나는 나중에 제발트의 책에서 비슷한 장면을 발견한다. 무엇을 쓰고 있느냐는 호텔 여주인의 질문에 그가 추리소설을 쓴다고 대답한 것이다.(그가 쓰고 있던 책에는 과거 미제 살인사건 내용이 짧게 등장한다.) 

나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에게, 아마도 나는 추리소설을 쓰고 있다고, 그런데 살인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탐정도 나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그러나 뭔가를 찾는 사람들이 나오겠지. 그게 범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이 탐정이나 형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추리소설은 플롯에 매우 충실한 장르일 텐데, 바로 그런 점 때문에 플롯 해체자인 내 주의를 끌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패턴화된 플롯과 전형적인 주인공들이 만들어내는 클리셰는 좋아하지 않는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예나 지금이나 추리소설 애독자이고 심농과 레이먼드 챈들러를 좋아한다. 그가 추리소설의 클리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궁금하여 물어보니, 자신은 플롯과 언어, 특히 대사를 중시한다고 했다. 추리소설의 대사 구현 방식이 오디오극이나 희곡을 쓸 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필름누아르를 연상시키는 대사들. 짧고 함축적이고 암시적이다. 그러나 나는 비밀의 문 안쪽을 향해 스쳐지나가는 시선을 선호한다. 그런 순간의 언어적 확장을 선호한다. 우리에게 뭔가를 불러일으키고, 긴 하루의 서막을 알리지만, 비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시선.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책 『눈의 발라드』를 읽으면서 나는 평소처럼 서가 어딘가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찾아낸 엽서를 북마크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무심코 살펴본 그 엽서의 수신인이 다름 아닌─베를린 서가의 주인 이름과 함께이긴 하지만─내 이름인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엽서는 수동 타자기로 타이핑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늘 그렇듯 이 또한 나와 무관하게 이 집에 속한 아주 오래된 사물로만 여겼던 것이다. 엽서 가장 윗줄에 Ⅱ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고 보낸 사람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다. 엽서의 그림은 시토회 봉쇄 수도원이었던 친나 수도원교회의 흑백 사진이었다. 나는 엽서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도 엽서Ⅰ에 이어지는 내용인 것 같았다. “……언젠가 이곳 토마스 교회에서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노래가 울려퍼졌고, 바깥 광장에서는 FW가 손풍금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렌츠처럼 ‘산 너머’로 가버리지는 말기를. 항상 곁에 머물기를.” FW는 우리가 아는 멋진 배우이자 친구이다. 지금 그는 독일을 영영 떠났다. 누군가, 나를,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아마도 시인이 분명한 사람이 베를린 인근의 수도원 마을을 방문하고 두 장의 엽서에 이어지는 글을 타이핑했다. 그리고 엽서에 순서대로 Ⅰ과 Ⅱ라고 표기한 후 각각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었다. 그러나 첫번째 엽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중에 분실되어버렸고, 두번째 엽서만이 수신자의 우편함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첫번째 엽서에만 남겼으므로 그것을 받은 사람은 누구로부터 온 엽서인지 알 길이 없다. 아마도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이 엽서를 누가 보냈는지 짐작하는 바가 있겠지만, 나는 묻지 않기로 한다. 대신 이 집에 속한 이 아름다운 사물을, 나는 말없이 징수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4월. 짙은 푸른 하늘과 흰 구름. 비수보다 아프게 가슴을 찌르는 연둣빛 나무들의 어린 새순. 검은색 지빠귀 한 마리. 나는 나무에 관한 브레히트의 시와, 브레히트에 관한 FM의 글을 떠올린다. 


“나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마치 범죄나 다름없게 되어버린 이 암흑의 시대. 오직 우연으로 살아남은 나는 밥벌이를 한다…… 먹고 마신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쓴, 흰 구름과 일곱번째 아이가 나오는 시는 가장 아름다운 독일 시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아이만 생각하면 한없이 눈물이 났다. 어느 날 흰 구름이 있었고, 그가 들판에서 한 여자와 동침하는 동안 구름은 흩어져 사라져버렸으며, 한 남자가 달에 발을 디뎠던 날 나는 들판에서 한 남자와 잠을 잤고, 남자의 가슴은 부드러운 리넨 천에 싸였으며, 남자의 입에서는 여리디여린 풀잎 하나가”**


나는 나무에 대해서 말하지 않지만, 언젠가 말하게 될 것이다. 정원 오두막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마가목이 있고 가을이면 윤나는 붉은 열매가 열릴 것이므로. 테라스 앞의 로우더덴드런은 이제 곧 화려한 꽃을 피워낼 것이므로. 나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항상 범죄나 마찬가지인데, 마치 사랑에 대한 말처럼, 이미 너무 많이 그것에 대해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와 별개로, 우리는 눈을 감으면 언제나 사랑과 암흑을 본다. 내가 일곱번째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은 오직 우연이라고, 나는 말한다. 혹은, 한 남자가 달에 발을 디뎠던 그날 흑백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은 가족들을 등지고 아무도 모르게 집밖으로 걸어나갔던 내가 바로 일곱번째 아이였던 것일까. 내가 최초로 당신에게 발을 디뎠던 그날. 브레히트, 마리 A.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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