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참은 것: “싫다.”

참은 것: “싫다.”


영화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더욱 그렇다.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일이 갈수록 더 안 좋아지다 마침내 싫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쓰다 지웠다. 싫다고 말하는 것에 망설임이 크게 들었으니까. 


아이 때는 지금보다 망설임이 적었다. 거의 없다시피 했다. 싫어한다고 말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뭐든 좋았고,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콩밥을 먹기가 어렵기는 했는데 콩을 골라내어 오빠의 밥그릇에 넣어두면 오빠가 군말 없이 먹어주었기 때문에 그 다정함이 좋아 콩밥이 아주 싫지는 않았다. 


어른들이 간혹 좋은지 싫은지를 확실히 하라는 요구를 할 때가 있었다. 다그치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주눅이 들어 쉽게 답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하게 됐는데, 아이는 몹시 확신이 있다가도 곧잘 우물쭈물하니까. 어른도 마찬가지인 것 같기는 하지만 아이의 태도는 훨씬 잘 받아들여지니까. 아무렇게나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떡해. 정말 싫지 않은데. 


학교에 다니면서는 좋음과 싫음을 반드시 결정해야 지나갈 수 있는 문제들이 생겼다. 지능 검사, 성격 검사 같은 무슨무슨 검사지를 많이 받았다. 검사지의 체크 항목은 ‘매우 좋음, 좋음, 보통, 싫음, 매우 싫음’으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진심 본심 다해서 ‘보통’에 체크를 했다. 검사지 제출 후 친구들이 이런 건 ‘보통’에 체크하면 결과가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듣고 혼란스러웠다. 오히려 싫다고 하는 것이 나아. 보통이라고 하면 분명하지 않으니까 점수가 낮게 나온대. 나는 분명하게 보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너무 이해가 안 가면서 내 검사 결과가 두려웠다. 어떤 검사지에는 ‘보통’이라는 항목이 아예 없었는데, 그게 몹시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이 어떻게 긍정과 부정만 있겠어요. 싫음과 좋음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 보통인지 충분히 고심하는 일은 중요하고 삶에 도움이 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래도 보통이었는걸. 상관없는 쪽에 가까웠지만. 


선택과 수용의 일을 더 많이, 여러 번 반복해서 겪은 뒤에 나에게도 분명히 싫어하는 것들이 생겼다. ‘영화 보기’와 같이. 그런데 싫은 것과 싫다고 말하는 것은 몹시 달라서, 싫어하면서도 싫다고 말하는 일은 적었다. ‘싫은 것’이 정신이라면 ‘싫다’는 말이고 말은 수단이니까. 타인의 마음을 바꾸거나 나와 같은 생각을 하도록 설득할 생각이 없었더라도. 말은 영향을 가지고 그게 무서워서. 싫다고 말하는 것이 공격의 도구가 되는 것도 싫었다. 내가 단지 싫을 뿐이지만. 말로 하는 순간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게. 


어쩌다 싫다고 말한 날에 나는 큰 말실수를 한 듯 몹시 우울해서 잠에 들었다. 더 나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더 나은 방식을 생각하다보면 나는 스스로에게 엄격해지고 싫다는 말을 도무지 할 수 없게 된다. 대상을 수없이 잘게 쪼개고, 분류하고, 합쳐보고 덜어보고 인과의 순서를 바꾸고 온갖 생각을 하다보면 그냥 싫지 않다고 덮는 것이 낫다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가 뭐라고 평을 하나 싶어. 좋다는 것도 아니고, 싫다는 말을. 그게 내 마음인 건 맞지만. 내가 뭐라고. 그런 마음이 든다. 싫음을 충분히 마음으로는 납득하고 있지만. 어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더라도 상처는 까닭으로 받는 게 아니니까. 한 마디, 한 장면일 뿐이니까. 


나에게도 몇 가지 장면이 있다. 지워지지 않는 말이 있다.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상처받는 일은 싫고 나 싫은 건 남들에게도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싫다는 말을 억누르게 됐다. 그러다보면 무엇을 싫어하냐는 질문에 고작 입에 맞지 않는 식재료나 요리 몇 가지를 댈 수 있었다. 또는 나의 불운을 싫어하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내 불운은 내 것이니까. 내가 나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남에게 주지는 않을 것 같아서. 


*


교회에 가는 것이 싫었다. 겨울방학 때는 종종 외갓집에 맡겨졌는데,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은 몹시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일주일에 몇 번이나 교회에 가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맡겨졌으니까,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군말 없이 교회에 따라나서야 했다. 교회에서 배우는 것이 무엇인지 책(성경)으로도 보고 목사님 말씀도 듣는데 잘 이해가 안 갔다. 이해가 안 가니까 지루해서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집에 혼자 갈 수는 없으니 잠이라도 자고 싶었는데 교회는 은근히 행사 구성(?)이 다양하니까.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해야 하고, 눈도 감아야 하고 감은 눈을 또 때에 맞추어 떠야 하고, 구호도 외쳐야 하고 노래도 불러야 했다. 그 모든 행동을 어길 수 없는 분위기가 싫었다. 나는 싫은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좋아해서. 싫다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싫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가 밥을 먹기 전에 손을 모으고 주기도문이라도 외우면 너무나 기뻐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할머니가 침대에 누운 내 손을 잡고 새벽 내내 기도를 하는 것도 싫었다. 소리에 민감해 잠에 잘 들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건강이 좋지 않은 할머니가 밤새워 기도를 하는 대신 깊이깊이 잠들었으면 좋겠기 때문이었다. 내 손을 잡은 딱딱하고 미지근한 체온이 지옥불에 닿는 것보다 싫고 괴로웠다. 온통 나의 좋음 나의 행복을 바라던 그 기도를 내내 견뎌왔다고. 나에게는 확실히 닿지 못하고 신에게도 들릴지 안 들릴지 모르는 그 기도가 싫었다고. 그렇게는 말을 못 했다. 지금도 못 한다. 


내가 죄를 가졌다고. 살아서도 죽어서도 갚아야 하는 죄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듣는 것도 참 싫었다. 어린이를 자책하게 만드는 것 너무 별로다. 너는 원죄가 있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는 것을 견디면서 내 영혼이 참 많이 죽었다. 그런데 종교는 믿음이니까. 남의 믿음이 싫은 것은 아닌데 결국 그게 싫다고 말하게 되는 것 같아서 그것도 싫다. 


무엇보다 교회에서는 세상 친구들과 놀지 말라고 했는데 내 친구들은 다 세상 친구들이었다. 세상이 어딘지도 경계가 불분명했다. 교회 친구들은 나처럼 주눅이 들어 있거나 이상한 광기에 가까운 확신으로 행동해서 잘 어울리지 않았다(몹시 편협한 경험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친구들과 노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그런데 재미가 완전할 수는 없었다. 세상 친구들과 놀지 말라고 배웠으니까. 누가 볼까 무당집에 얼굴을 가리고 들어가는 것처럼 늘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채로 놀았다. 


신의 존재, 타인의 믿음을 가까이에서 보고 만지고 들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깊이 감사하고 있다. 의심하지 않는 믿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그러나 싫어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나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싫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싫어하는 것은 좀 음흉한 것 같고. 나와 남을 모두 속이는 일 같고. 숨김이 서툴러서, 혹은 눈치가 빠른 상대에게 태도를 들키고 말 텐데. 그러면 그게 수동 공격이 되는 것도 싫고. 내 손만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 같아서 지긋지긋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완벽히 속이게 되더라도 그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부 내 마음에 감춰둔 짐이 된다는 것도 싫다. 


이렇게 감추는 연습만 하다가 정말 싫다고 말해야 하는 순간에 입을 열 수 없게 될까봐 그것도 걱정이 됐다. 입 다물고 피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게 소극적인 동의로 읽히는 것이 죽도록 싫어. 오해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점점 커지고 커져서 결국 나를 파괴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싫다고 말하지 않으면 줏대 없는 바보 취급받는 것도 싫고, 싫지 않다고 말하면 좋아하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사람들의 단순함도 싫다. 싫다고 말하지 않아서 내 탓이 되는 것들로부터, 싫다고 말하는 일이 나를 지키는 기록이 되기도 하기도 하니까. 


나는 자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다르고 나는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하지 않는 것이 더 많다. 정말 그렇고 그것은 사실이야. 거짓이 아니다. 그런데 좋아하지 않는 것은 판단에 대한 보류 같아서, 안전한 방식을 취하려는 약은 셈 같아서 그런 태도를 취하는 내가 우울해질 때가 있다. 좋다와 싫지 않다가 다르듯이. 나는 다름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말하고 있는 걸까? 의심도 든다.


*


영화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더욱 그렇다. 대부분 영화가 도무지 재미가 없다. 제작에 돈을 대단히 쓴 영화, 관객이 모여든 영화, 독립·예술 영화 모두 그랬다. 재미가 없으니 집중이 되지 않는다. 시작 직후라면 영화관을 나설 수 있을 텐데 혹시나 하는 기대에 집중하려 애쓰는 바람에 일어설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집중할 수 있을 때까지 잠시 화면을 멈추고 기다려준다면 좋을 텐데. 그게 영화관에서는 사고가 된다. 


나는 긴장하지 않고 탐색할 수 있는 것이 좋다. 어떤 영화는 하나의 장면에 너무 많은 의도가 있어 긴장하게 된다. 과잉을 질서 정연하게 보여주는 영화의 친절이 불편하다. 나는 그런 것에 잘 몰입이 되지 않는다. 잘 만든 영화일수록 부주의를 용서하지 않는 것도. 나는 주의력이 부족하고 몹시 선택적으로 집중한다. 내내 만들어진 세계를 믿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피로하기도 하다. 모르는 척을 할 수야 있겠지만은 모르는 척을 하려면 영화를 왜 보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어. 결국 몸도 마음도 묶인 채 멀리 가지를 못하고 서성이며 영화관에 갇히게 된다. 지루하고 답답하다. 


거북한 것은 당한다는 느낌이다. 영화에 당하는 것. 감각이 예민해서. 큰 소리에 잘 놀라고 불쑥 나타나는 것에 기겁을 한다. 요즘의 영화는 더 많은 자극을 동시에 주면서 관객을 당기려고 하고, 나는 동시다발의 자극으로부터 내 몸과 마음을 지키느라 혼이 빠진다. 

스케이트를 타고 달리다가 빙판에서 내려온 후 땅의 마찰에 적응이 어려운 것처럼 전환이 잘 되지 않는 것도 있다. 영화가 끝난 후 상영관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부단히 시간을 보내야 한다. 새로운 소리로 귀를 채우고, 여기저기에 눈을 두면서 영화의 잔상을 덮어야 한다. 이 과정은 회복을 닮았다. 회복이 있다는 것은 몸 또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다. 상처를 입어도 좋을 만큼 영화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기력도 없다. 기운을 아주 못 내어볼 것은 아니지만 굳이? 싶다.


*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두려워. 영화 업계 관계자가 볼까봐. 상처를 받을까봐. 누가 그림이 싫어! 만화가 싫어! 신변잡기나 길게 늘어놓는 산문이 싫어! 하면 나는 슬플 것이다.(지금 이거 적으면서도 슬퍼졌음.) 당신의 싫음을 이해하는 동시에 우리가 서로를 읽어내는 가능성을 차단당하는 것 같아서. 말이 칼이 되는 순간에서 눈 돌리고 싶다. 내 속에 수많은 칼자루가 있지만 함부로 겨냥하고 싶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싫다는 말이 상처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내가 언어를 가졌기 때문에 누군가를 끊임없이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이렇듯 싫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머뭇거림이 있지만, 동시에 싫다고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저항도 있다. 싫다고 말하기를 망설이는 이유는 훈련이 부족해서는 아닐까? 생각도 했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싫다고 말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당하고 고분고분 따르기를 평생 학습했으니까. 또는 불신에 기반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싫다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때가 많았으니까.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더욱 싫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더 나은 방식은 무엇일까? 



세상에 헤아림 없이 싫음을 외치는 말들이 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아진다고 느껴. 나는 그게 야만이라고 생각했다. 인내를 가지고 깊이 들여다본 후에 언어의 몸을 부여해야 해. 싫더라도. 망설이면서. 




참지 않은 것: 팔리는 우울 


 

나는 우울한 이야기를 해야 잘 팔린다는 귀띔을 해준 사람은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다정하고 솔직한 사람이다. 선생님의 다정과 솔직함이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하도록 했다. 그렇군요. 대답하면서 나는 호수에서 빠져 죽은 사람을 상상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현실로 나를 부르면서 물이 스르륵 얕아진다. 깊지는 않았대. 똑바로 서면 허리춤에서 찰랑찰랑한 정도인데. 그런데 그만…… 호수는 바닥을 드러내고 바닥에는 가라앉은 것이 있다. 


정말로 우울한 사람들에게 혼이 날 거야.


팔리는 우울에 대해서 쓰겠다고 하자 친구 ○는 경고했다. 그러면 쓰지 말까? 그건 아니지만. 어쩌라는 건지. 하지만 나는 네가 경고를 하기 이전에 이미 우울을 팔았다. 나도 정말로 우울하다. 정말로 우울해서 그리고 쓰는 것마다 우울이 깃들어 있다. 귀신처럼. 등뒤에 어깨 위에 있다. 질질 흘리고 다닌다. 너도 내가 쓰는 글과 그림을 읽잖아. 화면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나는 너의 주머니로 우울을 쑤셔넣고 있다. 팔아넘기고 있다. 사람들은 좋아요를 누르고 때로는 나쁜 말을 남긴다. 그러면 사랑을 하고 얼굴을 할퀴고 싶어진다. 


기쁨도 행복도 파는 사람이 있고 그런 건 기꺼워하면서 우울을 파는 건 왜 욕을 할까? 우울은 사람의 마음을 사람의 몸을 죽일 수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기쁨이 지나쳐 나를 해치게 되더라도, 그런 건 ‘운이 나빴다’라고 하니까. 우울은 ‘운이 나쁜’ 게 아니니까. 운을 파는 것처럼 허황된 일이 아니니까. 무서워지니까. 


우울을 파는 행위 자체가 우울의 진정성을 해친다고 생각하기 때문도 같다. 우울이 진짜 심각한 일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나도 우울이 심각하다고 생각해. 그런데 나에게는 기쁨도 절박하고 중대한 것이어서 사실 우울만 심각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의 우울한 글과 그림이 많은 관심을 얻으면 신기하고 좋고 무섭고 슬프다. 관심에 기뻐하는 내가 슬픈 것이 아니라 이토록 우울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많다는 게. 그 사람들이 다 우울한 사람들일까봐. 나도 겪어봤으니까. 내가 겪는 우울과 사람들의 우울이 같은 것이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지만 감정에는 양상이라는 것이 있고 우울의 양상이 대강 어떤 것인지는 아니까. 호수의 바닥에 가라앉은 것이 가만히 엎드린 모양을.


간혹 사람들은 자기만 그런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도 했다. 나는 솔직히 다행은 못 느꼈다. 걱정을 했다. 그래서 한껏 치장을 하고 우울 이거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같이 살 수 있다고 큰소리쳐도 우울이 나에게 슬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 것이 귀신이 된다. 호수의 바닥에 남아 있다. 


우울을 팔고 돌아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교환하고 있을까? 우울을 팔아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왜 안 되는데? 나 돈 필요해. 우울은 필요 없어. 필요 없는 것을 팔아서 필요한 것을 얻고 싶다. 


우울을 팔고 나에게 남은 것은 적은 돈과 관심이다. 돈도 관심도 내 거 아니고 다 남의 것이고 그렇게 보면 확실히 파는 일을 했다. 우울을 파는 동안 내 몸과 마음의 안에서 무언가 생기거나 줄어들지는 않았다. 나는 에세이 만화 『땅콩일기』를 일 년 넘게 그렸는데 거의 매일을 그려도 우울은 고갈되지 않았다. 새로 돋는 느낌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무한에 가까운 것을 경험해본 적 있다고 생각한다. 우울을 팔면서 그렇게 됐다. 충만한 기분은 아니었다.


나의 우울은 왜 팔릴까? 팔리는 우울은 무엇이고 팔리지 않는 우울은 무엇일까? 앞의 문장을 쓰는 동안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스스 몸이 먼저 섰다. 나에게도 도무지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우울이 있으니까. 그런데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죽이고 싶은 것이 있다”는 문장을 썼다가 SNS에서 내 게시물이 삭제당한 적 있다. 자살과 자해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죽인다는 말을 쓰면 안 되는구나, 배웠다. 누군가에게는 위험한, 어떤 신호를 내가 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성도 했다. 그런데 위험의 신호는 누가 캐치하는 것일까? 그것이 위험의 신호라는 것은 어떻게 판단하는 것일까? 이 위험에 지표가 있을까? 죽인다는 말을 쓰지 않으면 되는 것일까? 타인을 통과할 수 없는 우울에 대하여. 팔아서는 안 되는 우울에 대하여. 그것은 누가 어떻게 무엇으로 정하는 것일까? 앞의 문장을 쓰는 동안 또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귀신처럼. 나에게도 절대로 팔지 않는 우울이 있으니까. 명확한 형태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존재하고 있으니까.


우울을 파는 나도 때로 남의 우울을 산다. 사고 보니 우울인 경우도 있고, 우울인 것을 알면서 사기도 한다. 만지고 보기도 한다. 적당한 것을 고르기도 한다. 구경을 한다. 흘깃 보는 것으로 우울을 사게 되는 때가 있다. 마음이 선득할 때도 있다. 그러나 타인의 우울은 도처에 있고 보이는 것보다 가깝고 나는 우울을 사지 않고는 도무지 지날 수 없다.


나도 우울을 판다. 나는 다정하고 솔직한 사람이니까. 나의 다정과 솔직함이 우울을 팔도록 한다. ◇◇선생님의 다정과 솔직함이 “당신은 우울한 이야기를 해야 잘 팔린다”라는 이야기를 하도록 한 것처럼. 다정하고 솔직한 나는 우울한 사람이어서,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우울의 기록이 된다. 기록은 평범하게 전해진다. 아무도 나를 읽지 마세요. 누구도 나를 볼 수 없도록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 그러나 사라질 수는 없어. 귀신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