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참은 것: 엄마의 택배

참은 것: 엄마의 택배

 

엄마의 택배는 냄새가 구리다. 삶고 고고 푹 찌고 양념을 더해 익혔기 때문이다. 마음이 오랫동안 불 앞에서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엄마의 택배는 무겁고 거짓이 많다. 조금 보냈어(진짜 많다). 한 봉지뿐이야(봉투는 사람도 들어갈 크기이다). 몇 알 안 돼(키위 10kg을 받은 이후로 나는 키위를 먹지 못하게 됐다). 그리고 지난 시간이 있다. 낡아 버려진 내 취향이 있다.

 

성인이 된 이후로 입맛이 꽤 변했다. 전에는 먹지 않던 것을 먹기도 하고, 곧잘 찾던 것을 이제는 참고 견뎌야 입에 넣을 수 있다. 몇 종류의 달고 짠 간식을 전혀 먹지 않게 됐다. 반면 간이 전혀 되지 않은 생채소를 즐겨 먹게 됐다. 사람은 안 변한다는 말이 입맛 앞에서는 무색하게 느껴진다. 스스로 먹을 음식을 고르고, 살 수 있게 된 이후로는 더욱 그렇다.

 

엄마의 택배는 대용량의 반찬도 벅차지만, 특히 처치가 곤란한 것은 빵이다. 지금은 먹지 않는 종류의 커다란 빵. 반찬 사이에서 물끄러미 끼어 있는 커다란 빵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어렸을 때는 어떻게 맛있게 먹을 수 있었을까? 몇 개나 먹고도 더 먹고 싶다고 엄마를 보챘을까? 지금은 전혀 입에 대지 않게 된 그 빵을, 더는 먹지 않게 됐다고 해도 엄마는 곧잘 빵을 보낸다. 빵은 연고를 찾지 못한 시체처럼 딱딱해져 냉동실에 오래 있다. 그러다 기한이 지나면 버려진다. 버리는 일에는 비용과 죄책감이 들고 나는 그게 싫다.

 

언젠가는 도착한 엄마의 택배를 두고 가슴이 섬뜩했다. 단단히 밀봉해 부러 두고 온 상자가 돌아온 것 같았다. 오랜 여정으로 낡고 냄새가 나는 상자. 버려진 모습을 한 상자. 마음을 너무 많이 줬지. 그래서 상자는 안에 든 물건의 무게보다 무겁다. 영혼이 생겨버린 것 같다. 전봇대 아래에 두어도 자꾸 돌아오는 곰인형처럼.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택배를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한참을 방치하다가, 상한 음식을 치우는 일이 더 번거롭겠다는 셈을 하고서야 뜯어냈다.

 

요즘은 비행기를 타고 부모님 댁에 간다. 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아빠의 차를 타고, 나는 조수석에 앉은 엄마의 뻔한 물음에 휴대전화를 만지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신호를 받아 차가 멈춘 자리에 카페를 겸하는 빵집이 있었다. 몇 가지 빵을 커다랗게 인쇄해 걸어둔 것이 눈에 띄었다. 우리 딸이 저 빵 좋아하는데. 더는 먹지 않게 된 그 빵이었다. 이번 기회에 더는 그 빵을 택배로 보내지 말아달라고, 아니 택배 자체를 이제 보내지 않아도 좋다고 단단히 일러둘 요량으로 나는 엄마가 앉은 조수석으로 몸을 붙였다.

 

, 너는 이제 이거 잘 안 먹지. 예전엔 좋아했는데. 업데이트가 잘 안 돼.

 

엄마가 선수를 쳤다. 나는 불시에 할말을 잃고 몸만 세운 모양이 되었다.

 

쩡찌야, 장미가 많이 피었어. 집에도 장미가 있어. 엄마가 집에 가면 보여줄게.

 

할말이 번쩍 생각났다.

 

엄마, 그거 알아? 엄마가 노란 장미를 좋아한다고 말한 이후로 내가 몇 년 동안이나 계속계속 노란 장미를 선물한 거. 어릴 때였으니까. 백 원 이백 원 모아서. 매해 송이를 더해갔잖아. 꽃집에 가서. 엄마 생일 선물이니까 많이 달라고. 리본도 꼭꼭 내가 골랐어. 그런데, 엄마. 교환일기가 유행이었거든. 일기장에 그럴듯한 글귀 같은 걸 막 채웠어. 어느 날 내가 교환일기를 쓰다가 봐버린 거야. 노란 장미의 꽃말이 이별인 것을. 그거 알고 나 너무 놀랐잖아(깔깔). 엄마랑 헤어지기 싫은데. 영원히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내가 엄마의 생일마다 이별을 선물한 거잖아. 그래서 방에서 팍팍 내 배를 때리면서 울었잖아. 그뒤로 프리지어 선물했잖아. 똑같이 노란색 꽃이니까.

그런데 나중에 알았어. 엄마가 꽃 선물 안 좋아하는 거. 처치가 곤란해서. 잘못 두면 벌레도 생기고, 말라갈수록 부스러기도 날리고. 먹지도 못하고. 그리고 엄마가 죽어버리는 거 안 좋아해서. 그런 거 엄마는 무서워해서.

 

맞아. 우리 딸이 엄마 생일 만날 챙겨줬지. 쩡찌야,

엄마는 아직도 노란 장미 좋아해. 아직 좋아해. 엄마는 잘 안 변해.

엄마는 잘 안 변해, 쩡찌야.

엄마.

 

엄마.

 

 

참지 않은 것: 배달 음식

 

더는 못 해 먹겠다.

 

그렇게 말하고 정말로 해 먹는 것을 그만두게 될 줄이야.

 

끼니를 배달 음식으로 해치우게 됐다. 일주일에 한 끼 정도로 시작했던 것 같다. 간편하네. 그래도 배달 맛은 참 배달 맛이다. 그러다가 지금은 직접 차려 먹는 일이 드물어졌다.

 

비대면 요청에 따라 음식은 현관 앞에 놓인다. 마루 아래의 귀신처럼, 손만 문밖으로 내밀어 봉투를 쥐어 당긴다. 봉투는 여러 번 단단히 묶여 있는 경우가 많고, 일일이 풀어내지 않는다. 가위로 자른다. 나는 가위로 자르는 게 좋다. 특히 종이를 자르는 것이 좋다. 질깃하게 엉긴 섬유질이 잘리는 실감. 평평하고 단순한 노동. 날이 지나는 모양으로 즉각 잘리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좋다. (지긋지긋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좋음.) 반복하면서 정교해지는 것이 좋다.

식사는 짧게 끝낸다. 아무리 가지런히 놓아도, 배달 용기를 오래 펼쳐두고 보고 싶지는 않다. 플라스틱 그릇을 대강 씻어두고 누웠다. 손쉽게, 배고픈 나에서 배부른 내가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엇이 되어간다는 것은 너무 편리하고 끔찍한 기분이야.

 

나에게는 문제가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있지만 한 가지만 말해보자면 내 문제는 뭐든지 돈으로 해결하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나는 돈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

 

돈이 필요하다. 돈이 있으려면 일을 해야 한다. 지금 이 글도 돈 벌려고 쓰고 있잖아.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일로 돈 안 벌려고 한다더라. 몸 움직여 일하는 거 말고, 차트가 움직이는 거 보고 있다더라. 내가 가진 가상의 화폐 가치가 어떻게 될지 기도하듯 보고 있대. 자기들도 왜 오르는지, 왜 내리는지 자세히는 잘 모른대. 오르면 팔고 내리면 산대. 나는 그런 걸 보면 돈의 오름과 내림도 다 외주화 하는 거 같다. 코인이나 주식 같은 거.

앞선 글쓰면서 조심스럽다. 나는 이런 부분(대부분 경제관념)에 대한 통찰이 없고 식견이 짧기 때문에 통찰도 외주화 하고 싶다. 책 읽거나 강의 듣는 거 말고. 그냥 누가 대신 써주면 프롬프터 읽듯이 하고 싶다. 그리고 『참은 것과 참지 않은 것의 목록』에 써서 원고료 받아야지. 운이 닿으면 강의를 나갈 수도 있다. 요즘은 목이 안 좋으니까. 글을 입력만 하면 인터넷 페이지에서 목소리를 바꿔가며 읽어주던데.

 

나는 가끔 내가 감정의 외주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느낀다. 지금 이 산문을 쓰는 것도. 독자 분들이 내 글과 그림에 공감하며 자신의 감정을 대신 이야기해주어 고맙다고 인사하면 나도 참 감사하면서도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쓰이는 게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내가 감정을 외주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인 것 같다. 그게 나쁜가? 모르겠다. 그런데 나쁘게 말하게 된다. 나쁘게 말하게 된다는 것은 스스로 느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내가 감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 분들은 물론 그렇게 하고 계시겠지요. 앞서 쓴 글이 부끄럽습니다. 제가 너무 오만했던 것 같아요.

 

갑자기 쓰는 거 너무 무섭다. 제가 멍청한 소리를 하면 이런 멍청이가 있구나 하고 잘못된 정보가 있으면 바로잡아주세요. 그런데 이것도 외주화인가요? 스스로 공부를 하면 되는데? 외주화, 외주화 자꾸 불렀더니 이제 외주화가 뭔지 잘 모르겠다. 외주화와 외계인은 한 글자나 같네*. (*『고구마와 고마워는 두 글자나 같네』, 김은지 )

 

쉽고 좋은 게 좋은 나는, 늘 생각했어. 내가 못하는 거 굳이 안 하고 싶다고.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면 된다고. 우리는 각자 잘하는 것이 다르고, 서로 잘하는 걸 하면 되잖아. 감정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떤 사람은 슬픔을 잘하고, 누구는 기쁨을 잘하고 누구는 화를 잘 내고 그런 거. 나는 하자가 있는 물건의 교환이나 반품도 어렵지만, 누군가는 환불 원정대의 수장이 될 수 있는 거. 그러면 맡겨보는 거. 그렇게 서로서로 하면 안 되나. 나는 종이만 자르면서 살면 안 되나. 가위를 들고 나의 종이를, 너의 종이를 반듯하게 자르면서 살 수 없을까. 질깃하고 평평하게.

 

문제는 반드시 부담을 더 가지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는 거겠지. 노동의 가치에 순위를 달게 된다는 거겠지. 사람들 줄 세우는 거 참 좋아하니까. 그러면서 망가지는 것들이 생기겠지.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무너지는 것들이 생기겠지. 술래가 영원히 하나인 수건돌리기가 되는 거지. 그리고 사유하는 사람들이 잘난 척을 시전할 것이다. 근데 별로 안 잘나서 잘나 보이려고 소외를 시도할 것이다.

 

글쓰는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을까. 잘 됐다. 다 외주화 해버려. 글쓰는 게 어려웠던 때에, 모 시인께 산문 산다고 했는데 안 팔아줬다. 오만 원, 팔만 원, 십만 원까지 갔는데 안 팔아줬다. 팔 수 없는 게 있나봐. 글쓰는 또다른 친구에게 삼백 억 주고 너 글쓰지 말라고 그러면 어떡할 거야? 물은 적 있다. 나는 당연히 삼백 억을 받아 챙기고 그림을 그만둘 요량이었다. 그런데 친구는 삼백 억을 줘도, 천억을 줘도 반려하고 글을 쓰겠다고 했다. 팔 수 없는 게 진짜 있나봐. 그러면 외주화 할 수 없는 건 뭔데? 역시 사랑인가? 글을 사랑하는 마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 사랑 지겨워. 진짜. 너무 좋아. 안심이 된다.

 

 

참은 것: 나와 친구가 되어줄래? (1)

 

다리를 건넜어. 다리의 이름은 하늘다리라고 한다. 하늘다리는 구조물의 양끝이 땅에 단단히 고정된 육교이다. 다리는 도로를 건너지르면서 우리를 공중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아래로는 종횡 움직이는 기계들. 무진하는 오해. 철은 길을 따른다. 다리의 양 난간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냄새가 많이 났어. 꽃들은 자신이 마주보고 있다는 것을 알까? 보고 있기는 한 걸까?

다리를 건너며 꽃을 옆으로 본다. 곁눈질한다. 정면인 것은 꽃과 꽃.

 

학교에 가면 친구가 생긴다고 했다. 나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맞이할 준비를 했던 것 같다. 곧 생길 친구를. 새 친구가 생기면 이름을 묻겠다. 이름을 묻고 나란히 앉을 것이다. 옆자리를 비워두어야겠구나. 어쩌면 친구가 아주 많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면 분단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다들 내 가까이에 앉으려고 하기 때문에 몇몇 자리는 비게 될 것이다. 앉지 못한 아이들은 서게 되고 나는 너무 많은 팔꿈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 가자 기대는 의문이 됐다.

 

친구는 정말 생기는 건가?

 

새 학기의 교실은 조심스럽게 소란했다. 가끔 우악스러운 웃음이 터졌지만 철저히 계산된 과장 같았다. 몇몇이 뭉쳐 있었고, 나를 빼고는 서로 아는 얼굴들 같았다. 친구가 언제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화장실을 참았다. 친구는 정말 생기는 건가? 여러 번 되묻는 일이 불안이 됐다. 숨을 쉬는 방법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고른다. 있지도 않은 상상 속의 친구를 들킬 것 같다. 숨을 불규칙하게 쉬는 것만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새 학기는 망하게 될 것 같다. 새 학기를 여러 번 얻게 될 수도 있다. 부적응으로 학교를 옮겨다니게 될 수 있으니까.

 

다행도 불행도 아니도록, 나는 적당히 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했다. 친구는 많지 않았다. 친구가 많지 않은 것이, 별로 적당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친구가 엄청 많고 싶었다. 엄청엄청 많고 싶었다. 친구가 너무 많아서 도무지 나를 혼자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누군가를 부르는 내가 아니라, 부름 받는 내가 되고 싶었다. 어디를 가도 나를 친근히 여기는 얼굴이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혼자여서 생기는 부끄러움, 곤경 같은 일이 없었으면 했다. 이 친구에게서 저 친구로. 건너며 애쓰지 않아도 타인에 의해 내가 연속되기를 바랐다. 아무 문이나 열고 들락여도 환대받는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싶었다.

 

착한 아이가 되면 친구가 많아질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반대로 나쁜 아이는 친구가 많아 보였다. . 불량 학생들은 늘 몰려다니잖아. 북적이고, 가깝고. 어깨를 안고 있잖아. 그게 손쉬운 가담의 방법 같았다. 그런데 나쁘게 되는 방법도 잘 모르겠고, 알아도 하기가 겁이 나서 나쁜 애는 못 됐다.

 

가끔 친구가 되고 싶은 아이가 생겼다. 꼭 무리의 중심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또래의 보는 눈은 비슷한 면이 있어서 그런 아이는 이미 친구가 많았다.) 이마가 밝고 큰 소리를 내면서도 소란스럽지 않았던 아이에게는 각별히 더 그랬다. 친구가 생긴다는 말은 이미 낡고 내 몸의 높이에 맞지 않는 걸상 같았다. 이제 바꾸고 싶었다. 나는 기회를 보았고, 여러 번을 실패하고 마침내 그애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나와 친구가 되어줄래?

 

물끄럼 쳐다보던 얼굴. 투시되던 나의 부끄러움. 도무지가 무마할 수 없던 욕망이. 새 학기의 교실 속처럼 답답했다. 나는 운동장의 모래나 잔디 같은 것을 생각했다. 발끝을 보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고개가 숙여졌으니까. 모래는 셀 수 없고 잔디는 무성하지만 충분하지 않아서 나를 묻어버릴 수는 없다. 역부족. 역부족이라는 말이 싫다. 그것은 무력감이 들고, 내가 애써 가진 것들을 초라하게 만든다.

 

그애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에 나는 몇 번 더 그런 시도를 했다. 전부 다른 아이였다. 나와 친구가 되어줄래?

 

가끔 어느 아이들은 선의로 내가 친구의 모양을 갖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친구가 잘 되지는 않았다. 그게 너무 안타까웠다. 동시에 잘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잠시라도 기회를 얻기를 바랐어. 단팥빵을 얻어 한 입 물어보듯이. 그러나 나는 결코 그 빵을 다 먹을 수도 없고 어디서 살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단 한 입의 맛을 기억하게 된다. 달콤하고 고소하고 슬픈 맛이야. 그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야. 영원히 헤매게 되는 벌이야.

 

그것은 잠깐의 다정. 큰 기대 없이 붙여보는 불이었고 역시 잘 붙지도, 옮겨가지도 않았다. 나는 그 잠깐의 가능이 조금 더 자세하기를 바랐다. 그러지는 않았다. 너무 좁게 열린 문이었고, 내가 가진 기대는 늘 비대해 비집고 들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친구가 되리라는. 기대를 버릴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굳이 그 문으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교복을 벗은 나는 어느 날 마주치고 만다. 기회를 엿보던 아이를. 여러 번 실패했을 아이. 그리고 마침내.

 

너와 어떻게 하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나에게 묻는 아이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