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참은 것: 그해 여름

참은 것: 그해 여름

 

 

 

그애 앞에서 나는 자유롭고 이상하게 굴었다. 나는 어쩌면 자유롭고 이상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캘리포니아 LA 근처. 잠시 신세를 지게 된 집에 또래의 남자애가 한 명 있었다. 그애는 (자기 집이니까 당연히) 방이 있었고, 나도 곧 방이라고 부를 만한 공간이 생겼다. 대부분의 경우 각자의 방에 있었지만 인정이 많은 그애의 부모님이 나를 (아기처럼) 부탁해둔 바람에 일정 시간 그애의 차로 함께 근교를 돌거나 시간을 때우게 됐다.

차가 너무 많이 밀려서, 주차를 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겨우 차를 대고 고심하다 사먹은 그린티가 너무 맛이 없어서, 둘 다 몰래 담배를 피워서, 그애가 다 태운 내 꽁초를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가로채서, 내가 휴지통을 잘 찾아서

우리는 곧 친해졌다.

 

가방을 앞으로 메는 게 좋겠어. 그리고 눈. 거리의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마. 할리우드에서 내가 배운 것이었다. 하지만 거리엔 우리들도 있어. 그애의 뒤에서 조금 떨어진 채로 걸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고 횡단보도를 자주 건넜다. 옆으로 와. 그애는 내가 방향치인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나 길을 잘 못 찾아.

눈치챘어.

다들 그래. 내 이마에 쓰여 있나봐.

이마에?

 

그애가 웃었다. 여기에서는 이마에 쓰여 있다는 말을 안 하니?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애의 차를 타고 LA다저스 야구 경기장에 갔다. 그날 경기는 없었다. 어제도 없었고 내일도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스타디움 주변을 돌다가 자연스럽게 기념품 숍으로 향했다. 그애가 LA다저스의 검은색 모자를 내 짧은 머리 위로 푹 씌워주며 크게 웃었다.

 

이제 이마에 안 쓰여 있어.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애는 계산을 마쳤다. 고마워. 나는 모자를 괜히 고쳐 썼다.

 

그러니까 이제 내 차가 어디에 있는지 맞춰봐.

노력해볼게.

 

하나도 노력하지 않았다. 그애가 비스듬히 걸었기 때문에. 그것이 차의 방향이었으므로. 그애는 때로 나를 곤란한 생각에 근접하게 했지만 정말로 내가 곤란할 상황은 만들지 않았다.

 

아무도 없네.

하지만 거리에는 우리들이 있는걸.

 

경기장 주변은 한산했다. 옆으로 넓게 걸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방해되지 않았다. 해 진다. 경기장 외곽의 철조망에 매달렸다. 그렇다고 지는 해가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맞는데 웃음이 났다. 괜히 깔깔 웃었다.

이거, 끝까지 올라가볼까? 올라가면 뭐가 있는데? 아무것도 없지. 철조망에 가만히 뺨을 댔다. 자유로웠다. 이상했다. 자유롭고, 이상했다.

 

담배를 물었고 그애가 무언가 말을 했다. 너무 빨라. 알아들을 수 없었어. 내일 어디로 간다고? 포틀랜드. 공항. 새벽에 가야 해서 너는 자고 있을 거야. 그애가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고는 눈을 맞추었다. 거리의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나 거리엔 우리들이 있다.

 

다 피운 내 담배꽁초를 가로채기 위해 그애가 가까이 왔다. 훅 더운 기운이 끼쳤다. 따뜻하다, 고 생각했다. 따뜻하다니. 드디어 캘리포니아의 날씨에 적응한 걸까. 하지만 내일이면 나는 또 다른 곳으로 간다.

 

아마 이애와는 적당히 연락을 하다가 끊기고 말겠지. 늘어난 고무줄이 제 형태로 돌아오듯. 이전의 삶에 잠깐 걸려든 이벤트는 서서히 시들 것이다. 직접 아는 사이도 아니니까. 나는 이애의 전화번호도 모른다.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내 이마로는 이애의 방향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잘 자.

문으로 들어서는 그애의 소매를 잡았다. 다른 어른들은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조용하고 어두웠다.

한국, 놀러와. 힘들면 내가 여기 다시 놀러올게. LA 다시 올게.

의미 없는 말이라고 생각할까?

지나가는 인사라고 생각할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고,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할 수 있는 영어는 농담이 아니라는 문장이었지만, 그건 어쩐지 잘 맞지는 않는 말 같아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그애는 나를 한번 살짝 껴안고 헤어졌다

이런 건 예정에 없었다.

이렇게 헤어지는 건.

이제 나만 우리가 껴안은 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참지 않은 것: 실외 배변

 

결국에는 똥오줌 이야기를 하게 되는구나.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나는 똥 이야기를 너무 잘한다. 아무튼 나는 어릴 적 밖에서는 도무지 용변을 보지 않는 아이였다. 볼 수가 없었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는지, 청결함은 유지되고 있는지, 육안으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변기에 내 엉덩이를 맡길 수는 없었다. 애를 써서 변기에서 얼마간 떨어지더라도. 공기 중 감염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몸뿐 아니라 기분도 공기 중 감염이 되니까. 그러니까 실외 배변이 불가능하고 실내 배변만이 가능했다. 정확하게는가家내 배변만이 가능했다. 실외 배변을 하는 반려견을 위해 하는 수 없이 산책을 하듯, 나도 변의가 느껴지면 하는 수 없이 집으로 갔다. 때로는 몸안에 폭풍이 일어도 집으로 갔다. 학교 수업중에도 집으로 갔다. 안 되면 참았다. 길에서 실수를 하는 위험이 있더라도 꼭꼭 집에 와서 해결을 했다. 그러다 현관에서 걸레로 나의 소변을 훔치기도 했다.

오늘 처음 간 빌딩 화장실에서 실외 배변을 하며 나의 넓어짐을 느꼈다. 용인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긴 것 같다고. 인간에 대한 믿음도 조금 생긴 듯하다. 우리 모두가 배변의 일을 하고 있다는 앎, 누군가는 이다음 화장실을 이용할 것임에 부쳐. 공중 시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떠난 자리를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선한 의지를. 나는 살아오며 조금 배운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 세상이 멸망으로 가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 길에 거침이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나의 실외 배변에서 인류의 희망을 본다. 사용을 금지한다는 뜻으로 휴지로 변기 뚜껑에 엑스 자를 쳐둔 선인의 선함을. 이 칸에 휴지 없어요. 모르는 이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다정을.

 

 

참은 것: 비밀

 

비밀은 이렇게 시작할게.

학교의 중앙에는 호수가 있다. 물가에서 자라는 풀은 쉽게 볼 수 없고 물은 사계절 내내 검정이다. 아주 가끔 겨울에만 얼어붙어 희끄무레 눈치를 살필 뿐이다. 나는 그 호수에 얼굴을 비추어보지 않는다. 호수의 둘레로 얇은 로프가 엉성하게 쳐져 있기 때문은 아니다. 검은 물에서 냄새가 날 것 같기 때문이다.

 

친구 A가 책을 샀다. 친구 B의 생일 선물이라고 했다. 곧 생일을 맞는 친구 B는 나와도 막역하게 지내는 사이이므로 그의 선물을 살 때 참고할 요량으로 무엇을 샀는지 물었다. 걔는 멋진 책을 모으는 것을 좋아해. 친구 A는 친구 B에 꼭 맞는 책을 구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비밀이야. 걔는 꿈에도 몰라. 그래. 비밀로 할게. 이런 비밀은 참을 수 있다.

 

나는 끔찍한 비밀이 많아. 그런 것들을 참고 있지.

 

비밀은 생활에서 태어나고 끔찍한 비밀이 생길 때마다 나는 내 삶이 나빠졌다고 느낀다. 실제로 나빠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의심에 시달리게 된다. 그것이 다시 비밀이 된다.

 

나는 호수에 가면 늘 빠져 죽은 사람을 생각해.

 

친구의 생일 선물 비밀은 귀엽고 나는 마음이 좋아진다. 깜찍한 친구 A는 정작 친구 B의 생일까지 비밀을 지키지 못한다. 생일인 친구 B를 만나자마자 바로 준비한 선물을 건네었기 때문이다. 친구 B의 생일은 보름이나 남았다. 그 자리에는 나도 있다. 나는 그러나 모르는 척, 비밀을 참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