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참은 것: 책상

참은 것: 책상

매일 아침 책상을 참는다. 책상을 참는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책상은 가만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책상을 참는 이유이다. 방 가운데를 온통 차지하고 있는 다리가 네 개인 커다란 것을 볼 때마다 가슴에 뭐가 꽉 찬 듯 답답하다. 전부 버리고 깨끗하게 하고 싶다. 방을 가능한 만큼 비우고 싶다. 


가끔 충동을 못 이길 때는 편의점에서 일반 쓰레기 오십 리터 봉지를 여러 장 사온다(백 리터는 다 담았을 때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고 부피가 커 오십 리터를 산다). 빈 봉지의 귀를 잡고 흔들어 방의 숨을 담는다. 봉지는 부풀어 아가리를 벌리고 몸이 있는 것을 기다린다. 방을 둘러본다. 비워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가진다. 


책상은 죄가 없다. 책상을 방으로 들이기로 결정한 것은 나다. 책상이 없던 때에 나는 손바닥을 여러 개 겹쳐놓은 듯한 작은 밥상을 책상으로 썼다. 컴퓨터를 어떻게든 세워 올려두고 일을 했다. 방에 커다란 물건이라고는 침대가 전부였다. 옷장도 아동용으로 구입하여 구색만 겨우 갖추었다. 친구들은 내 방에 들어서며 매번 경악했다. 물건 집에 못 두는 것도 병이야. 너는 마음에 병이 있다. 그래?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말을 굳이 왜 하니. 

방은 방의 주인을 닮는다. 주인의 마음을 닮는다. 속이 엉망이고 진창일 때 집안은 난장이 된다. 그러니 실제로 다 비워버리고 싶은 것은 마음, 머릿속이다. 뭐가 자꾸 불쑥 들어서는 마음을, 마음의 모양으로 그림자 지는 머릿속을 깨끗이 하고 싶다. 희게 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만은 도무지 내 의지로 되지가 않으니까. 물건을 버리는 것으로 비우는 일을 해본다.


책상이 없는 생활은, 마음은 걸리는 것 없이 편했지만 몸이 그렇지를 못했다. 허리와 무릎이 심하게 아프게 됐다. 도대체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애 집에 책상이 없는 것이 말이 되냐는 엄마의 성화도 있었다. 성화야 참아 넘길 수 있었지만, 나의 건강을 향한 엄마의 염려는 도무지가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그것은 엄마의 사랑이니까. 결국 다리가 네 개인 것이 방 가운데에 크게 엎드리게 됐다. 그러니까 내 방에는 내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도 있게 됐다. 결국 또 주인의 마음을 닮게 됐다. 나는 매일 아침 내 마음이면서 내 마음이 아닌 것을 참는다. 그것은 엎드려 있지만 덩치가 크고, 유용하며 때로 나를 무력하게 한다.  


덧붙여, 책상을 참았다고 하자 친구는 그러면 네 관짝 빼고는 다 버리라고 했다. 관짝도 나중에 태워버릴 것인데, 뭐하러 가지고 있느냐고 대꾸했다.  



참지 않은 것: 남 욕하기

남을 욕하는 일은 자기 얼굴에 침 뱉기라고 배웠다. 그래서 남 욕하기 전에 내 죄부터 가늠하고 만지고 들여다보고 그러다가 기분 다 잡쳐서 입 다물게 되는 걸 숙연이라 믿으며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사랑이든 저주든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자기 세계 드러내기는 마찬가지 아니야? 그러니까 남 욕 좀 해본다. 

그는 기회주의자이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사람에게만 친절하며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쉽게 깔본다. 남 이야기, 비밀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고 이야기의 출처는 오직 자신만이 알 수 있다. 자신의 위치에는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항상 가상의 적이 있다. 적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복수를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면서 입 밖으로는 겸양의 말을 하며 스스로를 낮추어 듣는 이가 민망할 정도가 되게 한다. 여기서 민망한 것은 그가 말하는 낮음이 아니라 낮음을 흉내내는 그의 끔찍한 연기력이다. 

이것은 약 세 명 정도의 욕을 섞어둔 것인데 누군가가 특정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셋이나 한 냄비에 넣고 섞으면 악마가 나타날 줄 알았는데 그냥 몸피 조그만 한 사람의 형상이 됐다. 내가 욕하는 사람들은 적당히 한 궤도 안에서 앞서거나 뒤서고 있나보다. 그리고 그 궤도가 그리는 것이 결국 내 세계의 테두리라는 것이 화가 난다. 

싫어서 나빠 보이는 것과 나빠 보이기 때문에 싫게 된 것을 구분하지 못하겠다. 이미 싫어하게 됐기 때문이다. 대개 싫어하는 일은 좋아하는 일보다 이유가 분명하지만 대상은 불명확하다. 흐려지고 이곳저곳으로 옮기고 섞인다. 게다가 이 글을 쓰면서 구린내나는 것을 크게 들춰본 듯 나는 그를 더욱 덮어두고 싫어하게 됐다.



참은 것: “미안해”


미안해. 또 내가 미안하다고 했나보다. 연재하던 그림일기에 댓글이 달렸다. 이 작가는 뭐가 만날 다 미안하냐는 것이다. 만날 미안해서 미안하다. 그런 댓글을 붙이려다 참았다. 참으니까 참아진다. 참을 수 있는 미안함이었나보다. 그런데 굳이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굳이 참지 않는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을까. 미안하다는 말을 참는다고 해서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은 참을 수 있고 그렇게 말하지 않는 마음은 무엇이 될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힘든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드라마에서도 듣고 소설에서도 보고 주변에도 찾아보면 있을 법하다. 그럼 나한테 돈 주고 사갔으면 좋겠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이 많고 꺼내기 쉬운 모양으로 생긴 사람이니까. 미안하다는 말이 적어서 꺼낼 수 없는 사람에게 하나에 삼만 원씩 팔고 싶다. 부자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