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회



그들을 보며 나는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에, 그리고 사람들이 결국 어떤 사람들이 되고 어떤 사람들은 되지 못하고, 어떤 사람들은 되다 말고 하는 것들에 관심이 있었던 때를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이제 더이상 그런 것들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지만 야쿠자나 갱이나 마피아나, 그 밖의, 소위 말하는 악의 편에서 일하는, 가급적 세상에 질서보다는 혼란과 혼돈을 초래하고 싶어하고 그렇게 하지만 그 과정에서 때로는 보통 사람들은 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하지 않는 재미있는 짓들을 하기도 해 문학과 예술, 특히 그 가운데서도 영화에 직접 출연하지는 않지만, 대역 배우들을 출연하게 해 자신들을 그린 영화들을 사람들이 보며 좋아하게 하고 사람들 역시 보며 좋아하기도 하는, 그들이 없다면 그런 영화들이 만들어지기도 어려운 사람들 역시 조금 다른 차원에서이기는 하지만 캘리포니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캘리포니아의 산불처럼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세상이 어떻게 되어도 세상의 일부일 수밖에 없기도 한 그들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었고, 그런 사람들을 못 견디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세상에 질서와 함께 혼란과 혼돈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도덕주의와 윤리주의와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아 그것들을 멀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무척 다행한 일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림이나 음악에 소질과 적성을 타고난 사람들처럼 그들 역시 어떤 방면으로 소질과 적성을 타고난 사람들이고, 타고난 소질과 적성을 발휘하지 않기는 어떻게 해도 쉽지 않을 테고, 그들이 하는 모든 것들 역시 인간이라는 종이 하는 것들의 일부이고,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종의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그런 다양성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양성을 보여주는 어떤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세상에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창밖으로 몸을 던져 죽는 것에 매혹되어 낮은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지만, 그렇게 해서는 죽기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에 대한 생각을 쉽게 떨치지 못했지만 마음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의 비유로 물속에 가라앉는 것과, 힘든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의 비유로 물에 떠 있거나 떠내려가는 것을 좋아해 결국 비유를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며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 자살해 삼 주간 강물에 떠내려간 후 발견된 버지니아 울프의,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이야기지만 좋은 이야기로 생각하며 내가 좋아하는 단편 「잡종개 집시」에 나오는, 물론 그 개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함께 사는 개로 족보도 있고 신사지만 약간 모자라는 헥터에 대해, 세상에는 이런 개도 있어야 하고 저런 개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울프가 묘사해 그 개가 생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본래 길에 버려진 것을 주워 와 키운 개로 집시들이 버리고 간 것 같아 주인이 집시로 이름을 지어준, 반은 테리어고 반은 뭔지도 알 수 없는 잡종개 집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고 그 점에 있어서는 집시와 생각을 같이했는데, 물론 그 개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니었고, 늘 그렇게 생각해왔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잡종개 집시보다도 모자라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냥 좀 모자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해서 집시만큼이라도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좋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집시보다도 모자라게 생각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일본인들이 간식으로 먹는 뭔가와 딸기를 먹고 있는, 야쿠자 문신을 한 게이 커플이 전직 야쿠자들로 일본에서 딸기를 따다가 오지는 않았지만 일본에서 휴가를 온 야쿠자들일 수도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제 포도처럼 보이는 뭔가를 먹으며 얘기를 시작했고, 우리 사이에는 급류에 휩쓸린 듯 쓰러져 뿌리째 뽑혀 불편하게, 하지만 그것을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누워 있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고, 나무뿌리들 사이로 보이는, 나무뿌리들의 일부로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뿌리들이 어떤 식물의 넝쿨 문신을 하기도 한 그들에게서 자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야쿠자들은 그 너머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 그들이 하는 얘기는 거의 들리지 않았는데, 조금 후 그들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나는, 이제 일본에서 휴가 온 야쿠자들이 싸우려는 모양이군, 야쿠자들이니 야쿠자들처럼 싸우겠지,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그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싸우려는 것 같지는 않았고, 약간 거리가 있어 영어인지 일본어인지도 분명치 않았지만 일본어 억양의 영어로, 혹은 일본어 특유의 시비를 거는 듯한 억양으로, 그리고 상대의 기를 꺾으려는 듯한 야쿠자 특유의 억양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서로 싸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서로 다정한 말을 주고받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야쿠자이거나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면 그들에 대해서도 야쿠자에 대해서도 더이상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뭔가를 먹는 것으로도, 다른 것으로도 그들이 야쿠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게 했고,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들과 야쿠자에 대해 생각하게 했는데, 아무래도 그들이 야쿠자들일 것 같지는 않기도 했는데, 편견을 갖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었지만, 야쿠자들이 밴쿠버에서도 주로 나체주의자 게이들이 오는 강가에서 피크닉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는데, 야쿠자들은 나체주의자 게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기를 좋아하는 그곳과는 가장 거리가 먼 어떤 것으로 여겨졌고, 야쿠자들에게 그사이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변화의 강풍이 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야쿠자 조직도 조직 내 나체주의자 게이 커플을 용납할 정도로 개방적이고 포용적이고 인간적이고 서정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바뀌지는 않았을 것 같았고, 그런 야쿠자 조직이 있다면 그것은 더이상 야쿠자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야쿠자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아시아계 게이 커플이 일본어 억양으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사무라이 생각을 했는데, 야쿠자와 사무라이는 다르지만 비슷한 점도 있는 것 같았고, 애초에 사무라이의 시대가 저물며 일자리를 잃게 된 사무라이의 잔당들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하는 야쿠자들은 할복이라는 기발하고 근사한 관습을 비롯해 사무라이 문화도 일부 계승한 것 같았지만 사무라이 문화의 좋은 것들은 버리고 주로 안 좋은 것들을 물려받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그렇게 한 것 같았는데, 어쩌면 사무라이가 없었다면 야쿠자의 문화도 조금은 달랐을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좀더 혹은 좀더 심하게 안 좋은 쪽으로 달라졌을 것 같았고, 나는 스스로를 극단의 길을 의미하는 고쿠도로도 칭하며 가급적 극단의 길을 가려고 하는, 본래 의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인 야쿠자의 문화에는 사무라이의 문화에는 없는 우스운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표적인 것들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제는 야쿠자들 사이에서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해 점차 사라지고 있는지, 아니면 소중한 전통이라고 생각해 야쿠자가 어떻게 되어도 그것만큼은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며 지키려고 하는지는 나로서는 알지 못하는, 왼손 새끼손가락을 자르기를 좋아하는, 일명 손가락 날리기, 로도 알려진 유비츠메 관습 같았는데, 야쿠자들이 실제로 잘린 새끼손가락을 손가락으로 뭔가를 튕기는 것처럼 공중에 날리기도 하고 날아오는 새끼손가락을 결혼식의 부케처럼 누군가가 받기도 하고 모두가 손뼉을 치며 축하하는 것으로 손가락 날리기 의식을 끝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냥 야쿠자로서 기분을 내려고 하기도 하지만 벌을 받아 마땅한 조직원이 속죄할 때 주로 행하는, 고해성사와 종교재판과 형의 집행의 효율적이거나 비효율적인 요소들을 조금씩 섞어 종합해놓은 것 같은 그 의식의 의도는 뭔가 결연하고 비장한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일 텐데, 뭔가 결연하고 비장한 것을 보여주고자 할 때 피를 보여주는 것은 쉽고도 좋은 방법이고, 더 나아가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것 역시 쉽고도 좋은 방법이지만 몸에서 잘라내도 신체 활동을 하는 데 불편함을 가장 적게 주고, 다시 자라지는 않지만 몸에 있던 뭔가가 없어진 느낌을 최대한 적게 주는 것일 수도 있는 새끼손가락을 자르는 것을 생각해낸 것도 우습지만, 모두가 숨을 죽이고 타는 목으로 침을 삼키며 구경을 하는 근엄한 속죄의 자리에서 없을 경우 사는 데 커다란 지장을 주는, 뭔가가 아주 마음에 들 때 성가시게 말로 할 것 없이 그것을 치켜세워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엄지손가락을 비롯한 다른 무엇도 아닌 새끼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누가 봐도 굉장히 우스울 것이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들이기는 하지만 야쿠자들도 사람이고 그것을 느끼지 못할 수는 없고, 그 자리의 야쿠자들 모두가 그렇게 느끼면서도 웃음을 참으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은 그것을 우연히 보게 된 사람뿐만 아니라 야쿠자 본인들에게도 아주 우스울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언젠가 일본에서 한 야쿠자 보스에 대한 교수형을 집행했다는 뉴스를 봤을 때, 문명화된 나라를 자처하는 많은 나라들에서 사형제가 폐지되었거나 사형제가 있더라도 형을 잘 집행하지 않는 반면, 사형 집행이 이루어질 때마다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도록, 사형제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모두를 위해 틈틈이 사형을 집행하는 일본의 사형제와 관련해 특이한 어떤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형수에게 언제 사형이 집행될지 사전에 알려주지 않아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는 자신이 언제 죽게 될지 모르게 한다는 것이었는데, 사형수에게라지만 자신이 언제 죽게 될지 모르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에 대해, 그런 것에 대해서라면 나는 깊이 생각해보는 버릇이 있었고, 그래서 깊이 생각해보았지만 잘 알 수 없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일본인 특유의 타인에 대한 지나친 배려심에서 나온 것으로, 사형수가 자신의 죽음에 마음의 준비를 충분하고도 필요한 것 이상으로도 할 수 있게 사형수를 지나치게 배려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 같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형수로 하여금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몰라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하기 어렵게 하는, 역시 일본인 특유의 타인에 대한 지나친 배려심에서 나온 것으로 잔인한 어떤 것일 수도 있는 것 같았는데, 어쩌면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았고, 그것이 그 제도의 의도이거나 목적이기도 한 것 같았는데, 사형수로 하여금 언제 죽게 될지 모르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사실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도 하는 것과는 또다른 것이고, 그것들에는 쉽게 말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고, 어쩌면 사형수로 하여금 그 차이를 알게 하고, 죽는 날까지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지만 죽는 순간에도 그 차이를 알기 어렵게 하는 것이 그 제도의 또다른 의도이거나 목적이기도 한 것 같았지만, 일본의 사형수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들이 언제든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과 강박에 시달릴 수는 있지만 죽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었고, 일본의 사법부가 야쿠자들이 조직을 심하게 배신해 용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누군가를 처단할 때 운용하기도 하는 야쿠자들의 독특한 관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 제도를 만들지는 않았겠지만, 만약 야쿠자들에게 그런 관습이 있었고 일본의 사법부가 그렇게 한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아주 기발한 그 독특한 제도는 어떻게 결론을 내리기 굉장히 어려운 문제 같았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일본인들은 여러 가지로 기발한 데가 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고, 그럼에도, 일본인들이 좀 이상한 데가 있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어떤 나라 사람들도 누구도 그것을 끝내 이해하려 하면 이해할 수 없는 뭔가를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사람들이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고 생각하는 일본에 몇 번 갔었지만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보지 못했지만, 상당히 더운 어느 여름날 도쿄의 도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어느 한적한 공원의 구석에 있는 농구 코트에서 농구를 하기에는 키가 확실히 작은 것이 두드러져 보이는 일본인 남자 여섯 명이 코트를 절반을 사용해 농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 적이 있었는데, 그중 세 명이 일본인들이 제이차세계대전 때 전쟁에서 이길 욕심으로 전함에서부터 군모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들에 장식으로 달고 싸웠지만 결국 패한,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가 들어가 있는 띠를 머리에 두르고 있었는데, 보는 사람도 없는 공원의 구석에서 코트도 반만 사용해 농구를 하는 주제에 가당치 않게 그런 띠까지 둘러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괜히 그것을 두른 것 같지는 않았고, 아무래도 군국주의자들쯤 되는 것 같았고, 그래서 일본의 흔한 가소로운 군국주의자들이 농구를 하고 있나 보군, 하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실제로 뼛속 깊이, 그리고 내장까지 군국주의자들인 듯 뭐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군국주의자들처럼 아주 딱딱한 느낌이 나게 농구를 했고, 소리도 군국주의자들처럼 딱딱하게 질렀고, 역시 군국주의자들이거나 아니면 군국주의자들도 못 되어 띠를 두르지 않은 듯한 나머지 셋 역시 상당히 딱딱한 느낌이 나게 농구를 했고, 소리도 군국주의자들처럼 딱딱하게 질렀지만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머리띠를 두르고 있지 않아서였는지 약간 덜 군국주의자들 같았는데, 모두 군국주의자들 같은 그들이 농구를 하는 것을 잠시 보았는데 어쩌다가는 넣기도 해야 하는 골 하나 못 넣었고, 그래서인지 농구를 하고 있는데도 농구가 아닌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고, 모두가 농구를 정말 못해서이기도 했지만 농구가 군국주의자들에게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군국주의자들에게는 어쩌면 군화를 신은 발로 하기에 좋은 족구가 어울릴 것 같았고, 한국에서 한때 유행한 족구 역시 일본에서 유래했고, 어쩌면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남태평양의 섬들에서 일본군 병사들이 언제 죽게 될지 알 수 없는 데서 비롯된 극심한 불안과 함께 느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역시 극심한 어떤 무료함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았고, 문득 70년대 이후로, 이제는 대부분이 그냥 아이들처럼 여겨지는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화감독들을 포함해 서구에 많은 아류들이 있게 한 일본의 영화감독 데라야마 슈지가 만든, 장차 훌륭한 군국주의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군국주의자 흉내를 내며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상당히 짓궂은 짓들을 하며 군국주의자로서의 자질을 익히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영화 <토마토 케첩 황제>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어엿한 군국주의자는 되지 못해 농구를 짓궂게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상당히 더운 어느 여름날 도쿄의 한적한 공원에서 군국주의자들 같은 자들이 농구를 하는 것을 본 것이 내가 일본에서 본 것 중 거의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흥미로운 것이었고, 그래서인지 그후로 일본을 생각하면 약간 어이가 없었고,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고 생각하고 흥미로운 것들이라며 많은 얘기들을 하는 일본에 대해 그렇게밖에 느끼지 못하는 나 또한 약간 어이가 없게 생각되었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오믈렛에서 영감을 받아 오므라이스를 만든 것처럼 젤라토라고 할 수 있는지 말하기 어려운 변종 젤라토를 만들어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은 일본인일 것 같았지만 그것은 오므라이스가 사무라이나 야쿠자나 군국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만들어진 것처럼 그것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나는 밴쿠버에서도 주로 나체주의자 게이 커플들이 오는 강가에서 야쿠자들에 대해, 그리고 내가 야쿠자 비슷한 것이 될 뻔한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지는 않게, 나는 개인적으로 야쿠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고, 막상 야쿠자인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만나는 즉시 안 좋아할 가능성이 컸지만 야쿠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내가 먹는 것도 좋아하고 그 자체도 좋아하고, 그것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들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많은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것들에 대해 평소에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고, 호박에 대해서처럼 생각할 것들이 많지 않아 많은 생각을 하지는 않고, 그것들을 살 때나 손질할 때나 먹을 때 외에는 거의 생각할 필요가 없는 가지나 무와는 달리, 절대로 가지나 무를 무시해서는 아니었고, 나는 가지나 무를 단 한 번도 무시한 적이 없었고, 야쿠자에 대해서는 가지나 무에 대해서보다는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더 있으며, 애초에 가지나 무에 없는 것인지 그것들에서 찾기 어려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다지 있어 보이지 않는 우스운 것들이 야쿠자들에게는 있다고 생각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밴쿠버에서의 마지막 전날을 주로 야쿠자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며 보내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았고,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하고자 했는데, 밴쿠버에서 몇 주를 보내며 얼마나 한 게 없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그전에, 살면서 얼마나 한 게 없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는데, 여가활동으로 한, 이력이라고 할 수 없는, 소설 쓰는 것 말고는 이력이라고는 없었고, 살면서 한 게 정말 없는 것 같았고, 그래서 갱단의 이인자로서 갱으로서의 이력을 약간이나마 쌓아두지 않은 것이 약간 아쉽게 여겨졌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본래 수다스럽지 않은 성격인데 어쩔 수 없이 수다스러워야 하는 소설가가 적성에 맞지 않아 힘든 것처럼 야쿠자인 갱 역시 적성에 맞지 않아 힘들었을 것이 분명했고, 오래 하지 못했을 것이었고, 소설가로서 고쿠도, 즉 극단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했지만 나는 종교적 극단주의를 비롯해 모든 극단주의를 우습게 생각했고, 전위적이거나 실험적인 소설로 치부되는 소설들도 약간 우습게 생각했고, 그런 류의 많은 소설들에는 그것들이 어쩔 수 없이 쉽게 빠지게 되는 특유의 유치함이 있다고 생각했고, 비록 여가활동으로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소설 쓰는 것을 말과 생각을 갖고 노는 일종의 놀이로 생각하고 그 놀이의 끝은, 그 끝에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마음속으로 그 위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는 절벽 같은 극단의 곳이라고 할 수도 있는 곳에는 무엇이 있는지 보려는 소설을 쓰고 있기도 했고, 그래서 나 스스로를 일종의 고쿠도를 가고 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을 한다는 점에서는 야쿠자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오래전 야쿠자 같은 것이 될 뻔했다가 되지 못했지만 그후로 어떤 점에서는 야쿠자의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 약간 놀랍기보다는 약간 우스웠지만, 야쿠자와 내가 소설을 써온 것을 연결 짓는 것은 억지 같기도 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생각이 없게 소설을 썼을 뿐이었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아무 내용 없이 돌고 또 돌 수 있는 위니펙의 짧은 트레일의 빙판 위로 미끄러지듯 스케이트를 타는 것처럼 이렇게 내용이 없기도 어렵게 아무런 내용이 없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별로 상관이 없는 옆으로 새는 이야기를 하느라 이 소설을 쓰면서 무슨 병에 걸린 것처럼 말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유조차가 전복되어 기름이 유출되는 사고와 같은 무슨 사고가 난 것처럼 말이 쏟아졌고, 말이 많은 것이 어떤 경우에도 좋은 것일 수 없다는 점에 비춰보면 뭔가 아주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고, 어디에서라고는 말하기 어려웠지만 커다란 화재가 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지만 그것 역시 아무 생각이 없어서 혹은 아무 생각이 없어지게끔 해서였던 것 같기도 했다.

또다시 야쿠자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는데, 야쿠자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가령 피넛 버터나 티라미수에 대해, 혹은 야쿠자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가령 젤라토나 우주의 형태에 대해, 혹은 야쿠자와도 거리가 멀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가령 오믈렛이나 오므라이스에 대해, 혹은 야쿠자와는 거리가 먼지 아닌지 말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가령 할로윈이나 잭오랜턴에 대해 생각해도, 주인을 잃은 발에 대해 생각해도 호박에 대해 생각해도 야쿠자에 대해 생각해도 가지나 무에 대해 생각해도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는데,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들에 대해서라면 무슨 생각을 해도 상관이 없었는데, 나는 생각을 하면 달라지는 것이 있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잘하지 못했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면 생각이 바로 막혔다.

그런데 그때 피크닉을 끝낸, 야쿠자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면 더이상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그것을 알 수 없게 해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야쿠자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고, 끝내 야쿠자들인지 아닌지 알 수 없게 한 자들을, 홍콩의 부유한 양복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를 마치고 유학을 떠나, 폐허가 된 건물들이 인상적으로 서 있기도 하고 실비아 플라스의 묘지가 있기도 한 영국 웨스트요크셔의 작은 중세 마을 헵턴스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리즈대학교에서 섬유학을 전공한 후 홍콩으로 돌아가 먼저 가수로 데뷔한 후 누아르 영화 <영웅본색>으로 이름을 알렸고, 왕조현과 함께 출연한 <천녀유혼>으로 신드롬을 일으켰고,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천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 <아비정전><백발마녀전><이도공간>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동경가요제에 참가했을 때 천안문 사태에 대해 언급한 것이 물의를 빚으며 1990년 정식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것에 잠을 설치던 많은 홍콩인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밴쿠버로 이주해 캐나다 시민권자가 되었다가 이 년 뒤 영화계에 복귀했지만 200341일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마흔여섯의 나이에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투신한 소식이 들렸을 때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약간 충격을 받았던, 어쩌면 그곳 누드 비치에 와 비치 타월 위에서 물에 떠 있는 통나무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는 장국영이 양조위와 함께 출연한 영화 <해피 투게더>를 만든 왕가위가 더는 영화를 만들지 않을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작품으로, 마지막 영화로, 새 배우들을 구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대역을 쓸 필요도 없이 그냥 밴쿠버의 강가에 있는 야쿠자 같기도 한 그들을 직접 출연하게 해, 야쿠자 문신을 한 나체주의자 아시아인 게이 커플이 주인공들로 등장하는 <해피 투게더 2500>이라는 제목의, 야쿠자 문신을 한 나체주의자 게이들이 전편에 걸쳐 알몸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중요한 장면에서는 알몸으로 칼을 휘두르거나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강가에서 피크닉을 하며 뭔가를 먹으며 자신들이 키우는 거대한 닭이나 거대한 호박에 관한 의미심장해 보이고 울림이 있는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의미심장해 보이고 울림이 있는 것 같지는 않기도 한 말들을 하기도 하는, 제목의 2500이 서기 2,500년을 암시하는 것 같지만 시대적인 배경은 알 수 없고, 기원전 2,500년에서부터 서기 2,500년에 걸친 이야기 같지만 확실치 않고, 영화를 본 사람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2500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것을 알 수는 없는, 역시 장국영이 출연한 <동사서독> 같은 무협 영화를 만들어도 좋을 것 같은, 애초에 바람처럼 나타나지는 않은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어떻게 된 일인지 순식간에 어떤 바위 뒤로 가더니 바람이 불지는 않아 바람과 함께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영화 속에서 바람처럼 사라지는 사무라이들처럼, 돌풍에 날아간 것처럼 사라져 더이상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계속해서 헛것을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는데, 나는 헛것이 보이거나 헛것을 보거나 뭔가를 헛것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헛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좋아했고, 그래서 내게는 그들이 나를 위해 나타났다가 사라진 헛것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야쿠자들일 수도 있는 누군가들이 실제로 사라졌는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사라진 것 같이 보인 후 더이상 야쿠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사무라이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고, 다시 한번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속에 등장하는 사무라이들에 대해 생각했지만, 더이상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았고, 그들 역시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존재들 같았고, 어쩌면 내가 거의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가는 것에 관한 흥미롭지 않은 기록 같은 것이었고, 매번 이전에 쓴 소설이 이후에 쓴 소설의 연습으로 쓴 것처럼 이 소설의 연습으로 썼던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에 이어 거의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것에 관한 흥미롭지 않은 기록 같은 것인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2』 같은 것을 이미 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것은 바람에 날아간 것처럼 사라진 후 다시 나타나지 않는 영화 속 사무라이들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흥미를 잃을 수 있는 모든 것들에 흥미를 잃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같았다.

그런데 그런 것들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것으로, 나는 그럴 줄 알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알아내지 못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끝내 내 힘으로 알아내지 못한, 통나무들이 물에 떠 있는 이유를 얼마 전 검색을 통해 알아냈는데, 그것은 지상에 둘 경우 통나무의 끝부분이 건조해져 갈라지고, 벌레가 파먹고 알을 슬고, 곰팡이가 펴 목재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데,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고 그래도 모를 경우 생각지 못한 곳에 답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생각 속의 생각지 못한 곳을 잘 뒤져 아주 잘 생각해보면 충분히 알 수도 있었을 그런 것도 혼자 힘으로 알아내지 못하는데 계속해서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며칠을 우울한 상태에서 보내야 했는데, 그로 인한 우울한 상태가 저절로 막을 내릴 무렵 오래전 물에 떠 있는 통나무들을 보며 그런 거라면 궁금해하는 게 마땅한 그 이유를 궁금해했었고, 그 이유를 알아내기까지 했지만 그것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기억력조차도 이렇게 없어진 채로 계속해서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로 인해 또 며칠을 우울한 상태에서 보내야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딘가에 있을 주인을 잃은 발들에게도 작별인사를 했는데, 그들이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도 발견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도 적절치 않은 것 같았고, 그래서 그냥 알아서 잘 지내고 잘 알아서 하라고만 했고, 작별을 하러 간 통나무들과 작별을 하며,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통나무들 위에 앉아 있는 아비새들에게도 작별인사를 해도 좋을 것 같았지만 그날따라 알몸의 백인 게이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그들 모두가 어딘가의 강가에 가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다른 새들은 보였지만 그들에게까지 작별 인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프레이저강과 통나무들과 잘 지내라고 해주었는데, 그들을 뒤로하고 떠나며 마지막으로 통나무들을 본 순간 어떤 생각에서인지 이렇게나 하나 마나 한,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하느라 쓸 수 있었던 이런 글은 소설뿐만 아니라 뭔가의 본문으로는 적합하지 않고, 그렇다고 뭔가의 프롤로그나 에필로그로도 적합하지도 않다고 생각했지만 프롤로그로나 에필로그로는 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었고, 뒤에 에필로그가 있어 여기까지의 글은 프롤로그가 되었는데, 이튿날 아파트를 떠나면서 나는 너무도 익숙한 존재들이 되어버려 내가 그들에게도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파리들과도 작별을 했는데, 그들은 원래의 숫자 같은 일곱 마리였고, 나는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 소설을 쓰게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역시 어떤 역할을 한 것 같았고, 이 소설을 쓰게 된 데에는 재미없는 캐나다인들의 도움도 있었던 것 같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말하기 어려운 것 같았지만 아주 없었던 것 같지는 않았고, 누군가를 적당하게 놀려주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도 좋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캐나다인들을 적당한 정도로 놀려준 것 같았고, 그런 것을 소설에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쓰지 않았지만 캐나다는 좋은 점들이 많은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게는 밴쿠버에서 가장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누군가들 같은 파리들에게 손을 살짝 흔들며 아주 간략하게, 안녕이라고만 했고, 파리들 역시 원자 속 소립자들이 평소보다 아주 조금 더 불안한 움직임을 보인 것처럼 평소의 비행과는 아주 살짝 다른 것 같지만 그 차이를 알아차릴 수는 없는 비행으로, 안녕이라고만 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사람과 파리들 사이에 하는 인사법으로 서로에게 안녕이라고 하게 된 것 같았고, 그래서 그것에 대한 이야기로 이 소설의 프롤로그를 끝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