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시카고는 아무 곳도 아니었다. 정해진 장소가 아니었다. 그저 미국이라는 공간을 향해 방출된 무엇일 뿐이었다—3

팔꿈치의 노래를 들어라 

겨울에 태어난 사람은 복수를 잘한대요. 한기씨가 말했다. 내가 여느 때처럼 한기씨에게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어요, 아무거나 좋으니 힌트를 주세요, 라고 하니 돌아온 말이었다. 맥락을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한기씨는 늘 맥락을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놀라운 건 그 무맥락의 말이 어느 순간 연결되며 의미를 ‘창발’한다는 사실이다(대부분 아무 말이긴 하지만). 


—누가 겨울에 태어났는데요? 

—저요. 

한기씨가 말했다. 

—그리고 은진이(한기씨 와이프), 정원이(한기씨 딸). 다 겨울에 태어났어요.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그런 셈이죠. 


눈밭의 쓸쓸한 최후 같은 이미지가 떠올랐지만 쓸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게다가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해…… 그런 말은 쓸 수 없네요. 나는 다시 한번 한기씨에게 징징댔다. 어떡하죠? 한기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내면에 귀를 기울이세요. 한기씨한테 내면도 있어요? 한기씨는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머리에서 들리는 소리를 쓰지 말고 팔꿈치에서 들리는 소리를 쓰세요.

—팔꿈치?


나는 팔꿈치를 귀에 대려고 했지만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았다(다들 한번 해보시길……). 팔꿈치를 안고 낑낑대다보니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게 돼요?

—안 되죠. 

—……

—그게 바로 문학입니다. 팔꿈치와 귀의 관계.

—…… 


오한기가 천재라는 건 공인된 사실이다. 본인도 알고 다른 작가들도 안다. 오직 독자들만 모를 뿐이다. 다시 말해 한기씨와 독자의 관계도 팔꿈치와 귀의 관계다. 금정연은 매일 연금 복권을 산다. 연금 복권 한 방이면 인생 역전. 정연씨가 말했다. 누구나 죽기 전에 한 번은 복권에 당첨됩니다. 물론 정연씨는 아직 당첨되지 않았고 인생은 역전되지 않았다. 죽을 때가 되지 않아서일까? 삶은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일까? 정연씨와 연금 복권의 관계도 팔꿈치와 귀의 관계다. 상우씨는 이어폰에 빠졌다. 매일 이어폰과 헤드폰 후기를 검색해 정보를 알려준다. 에어팟 프로 완전 상세 리뷰! 구매 전에 반드시 봐야 할 영상! 음향 기술로 풀기 힘든 것을 애플은 해냈다! 음향 엔지니어로서 완전 멘붕…… 상우씨는 본인의 이어폰을 우리 귀에 꽂아준다. 들어봐요. 후지이 가제もうええわ"(Mo-Eh-Wa)”.  스윗한 상우씨…… 그러나 상우씨도 우리도 백 퍼센트 마음에 드는 이어폰을 가질 순 없다. 이때 하이엔드 이어폰은 욕망의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욕망의 원인으로서의 대상 a다. 어떠한 실체도 갖고 있지 않은, 그 자체로는 텅 빈 혼돈이지만 주체의 욕망을 통해 볼 때만 형태를 갖는 실체가 아닌 것의 그림자, 닿을 수 없고 닿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그런……(이어폰). 그러므로 이것 역시 팔꿈치와 귀의……

무슨 아무 말이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와 오한기, 금정연, 이상우가 나누는 대화는 늘 이런 식이다. 우리는 상우씨의 서울 방문을 기념해 연희동에서 만났고 중국식 냉면과 유린기, XO볶음밥과 쟁반 짜장을 먹고 연희동 골목을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문학적 은유와 지적 유희, 기발한 착상과 우연에 기대는 미학적 태도,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질문, 새로운 예술적 실천에 대한 고민, 같은 것들은 없고 모종의 의미가 있는 것 같은 텅 빈 중심을 빙빙 도는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것이다. 아무런 해도 되지 않고 득도 되지 않는, 목적지 없는 산책 같은 그런 대화……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에겐 연희동의 FLIT COFFEE라는 목적지가 있었다. 그러나 카페는 문을 닫았다. 휴무네요. 한기씨가 말했다. 우리가 휴무를 확인하지 않고 와서 허탕을 친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영업시간도 확인하지 않고 예약도 하지 않는다. 이건 어쩌면 우리의 상태에 대한 은유 아닐까. 슬라보예 지젝은 말했다. 욕망의 대상은 환상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환상 속에 실재적인 것이 있다고. 이것저것 애써보았자 모두 헛되다는 체념적 통찰보다는 욕망에 무조건 충실한 것 속에 더 많은 진리가 들어 있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걷고 연금 복권을 사고 이어폰을 검색하고 맛집을 찾고 글을 쓴다……


이쪽이에요, 정연씨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고 걷는 공간은 합정과 상수, 망원, 가끔은 연남, 연희를 포괄하는 마포구 일대다. 금정연은 마포구에서 나고 자라 현재는 은평구에 사는 서울 사람이다. 상우씨는 정연씨가 가장 이상적인 서울말을 쓰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상적인 서울말이 뭔지 모르겠지만 정연씨의 말투가 듣기 좋은 건 사실이다. 특히 대구에서 나고 자란 내게 금정연은 서울 사람의 이데아고 모든 서울 사람은 금정연의 모사다. 결코 금정연에 닿을 순 없지만 말이다. 반면 오한기와 이상우는 경기도 사람이다. 오한기는 성남, 이상우는 인천. 두 사람 모두 지금은 다른 곳에 살지만 태어나고 자란 곳에 대한 증오는 뼛속 깊이 배어 있다. 표현이 조금 심한 것 같으니 애증이라고 하자. 많은 한국 사람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경기도 사람들은 정도가 심하다. 경기도는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 단위지만 언제나 정체성의 위기에 시달린다. 수도인 서울을 편집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위치를 상상할 때마다 분열증에 빠진다. 그들은 자기(도시)를 혐오하면서 동시에 자기(도시)를 연민한다. 서울을 오가는 데 인생의 절반을 쓴다고 투덜대지만 이동을(다른 말로 욕망을) 멈출 수 없거나 멈추지 않는다. 경기도민은 현대 국가와 도시 정책이 낳은 지정학적 정신병자들일까. 하지만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것은 분열증적 주체들이고 그런 의미에서 서울을 전복할 수 있는 것은 경기도민이다. 실제로 이미 서울은 경기도에 의해 경계가 와해되고 게토화 되고 있다. 건대, 신림, 강남역, 홍대를 서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종로, 을지로, 서촌, 북촌, 명동을 서울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서울이란 대체 뭐고 서울 사람이란 뭘까. 


톰 앤더슨의 에세이 영화 <LA 자화상Los Angeles Plays Itself>은 도시에 대한 작품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작품이다. 영화는 LA가 배경인 백 편이 넘는 영화의 푸티지를 연결하며 도시를 드러낸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전설적인 에니스 하우스와 유선형 모더니즘 스타일의 팬 퍼시픽 오디토리엄, 이탈리아 범죄자들의 서식지인 빈민가 벙커 힐, <블레이드 러너>가 그리는 미래의 LA와 <LA 컨피덴셜>이 그리는 과거의 LA, 그리고 톰 앤더슨이 미국의 네오리얼리즘이라고 부르는 영화들에서의 LA 등등. 영화가 진짜 LA를 그리려고 한다거나 주장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톰 앤더슨이 이어붙인 도시는 실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도시인 동시에 영화 속에서 재현되고 왜곡된 도시이다. 이곳에서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와해되며 서로가 서로에게 틈입한다. 도시는 경계 너머로 끊임없이 구성되고 확장되는 공간이다. 어쩌면 LA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LA는 수많은 영화 속에서 반복 재현되면서 자의식을 가지게 됐고 자의식을 가지게 되는 순간 구조적 문제, 빈부격차와 인종차별, 도시의 비리와 기억을 숨길 수 없게 된 것이다. 도시는 스스로를 재현하고 반영하고 갱신하고 실천한다. 일종의 자기생산적 체계로서의 도시. 반면 이 영화를 패러디한 <Vancouver never plays itself>(Tony Zhou, 2015)에서 밴쿠버는 자의식이 없다. 밴쿠버는 다국적 영화들에 다국적으로 이용되는 일종의 그린스크린이나 세트일 뿐이다. 다시 말해, 영화(또는 소설이나 미술 등 그 어떤 예술)에서 작품은 도시를 단순히 반영하는 게 아니라, 도시를 만든다. 우리가 언어와 예술, 이데올로기, 담론 등등 수많은 요소를 통해 스스로를 구성하는 의식과 서사를 갖게 되듯이 말이다. 

<LA 자화상>에는 이런 내레이션이 나온다. 


영화 속에서 로스앤젤레스에 개성을 부여하고 주역으로 만든 감독들은 와일더 같은 국외자들이었다. 이들은 LA를 도시처럼 만드는 데 관심이 없었다. LA를 자신들이 알던 도시와 같지 않게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다.

영화는 도시라는 곳이 불투명한 현실의 장소이며 다른 사회질서들이 서로 접촉하지 않고도 같은 공간에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우씨는 얼마 전 미술작가 김희천과 부산비엔날레 토크에서 도시는 겹쳐 있다는 의미의 이야기를 했다. 도시는 하나가 아니다. 인간이 하나의 단일한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서울 안에는 수많은 도시와 도시 안의 도시가 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겹치고 분리된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도시 또는 신체가 끌어안는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은 잠재력이 크다. 어떤 것도 동시에 하나 이상의 존재일 수 없다. 그러나 특정 공간 안에 두 존재가 있는 것은 가능하며 우리는 그렇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구분한다. 시간은 우리를 속박하지만—그래서 존재에 의미가 부여되지만—공간은 우리를 해방시킨다. 시간이 공간화되면서 소위 말하는 문명이 생겼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리학자 리 스몰린의 관점에서 시간은 자연의 근본 성질인데 반해 공간은 발생적 성질이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시간의 앞으로 갈지 뒤로 갈지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공간에서 어디로 움직일지 선택할 수 있다. 이 차이가 우리의 경험 전체를 빚는다. 라이프니츠는 말했다. 공간은 다른 무엇도 아니며 그 질서 또는 관계다.     


우리는 합정역 부근의 라멘집 앞에서 만났다. 상우씨가 서울에 온 뒤 두번째 만남이었다. 정연씨는 건강검진 때문에 조금 늦는다고 했다. 내시경 할까요? 하겠죠. 수면 마취 하겠죠? 수면 마취하면 통증이 다 느껴진다던데 사실인가요? 한기씨가 말했다. 마취하는데 왜……? 상우씨가 마취했지만 수술중에 정신이 깬 사람이 나오는 영화가 있다고 했다. 이른바 마취중 각성 현상. 의사들은 마취가 된 줄 알고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고…… 윽. 진정한 공포영화네요. 정연씨 무사하시길. 

우리는 바질 라멘을 먹었다. 원래는 줄을 길게 서는 집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인지 우리 밖에 없었다. 기억나요. 예전에는 가게 앞이 인산인해를 이룰 만큼 사람이 많았는데. YG 사옥 때문인가요? 네? 옆에 YG 사옥이 있잖아요. 음…… 그냥 라멘이 맛있어서 아닐까요. 베를린에서는 이런 라멘 못 먹어요. 상우씨가 말했다. 기사에는 완공되었다고 나오는 YG사옥은 여전히 증축중이었고 우리는 정연씨가 오기 전까지 합정역 일대를 걸으며 카페와 편집숍 아웃렛에 들렸다. 나와 상우씨는 아웃렛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다. 그런데 오십 프로 세일해도 오십만원이네요. 이건 오십 프로 해서 백만원. 암스테르담에 기반을 둔 브랜드라는데…… 사시죠. 한기씨가 말했다. 살 수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브랜드를 검색하니 디자이너가 자신의 옷에 대해 설명하는 말이 나왔다. “내 작품의 주요 주제는 ‘불완전성’이다. 나는 패션이나 트렌드에 관심이 없으며 내 작품은 멋진 컬렉션이나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흠…… 저랑 똑같네요. 가격 빼고는 모든 것이……

정연씨와 우리는 양화진 입구의 카페 테라스에서 만났다. 원래는 투 도어즈라는 카페가 있던 자리인데 지금은 양화라는 카페로 바뀌었다. 정연씨는 아직 마취에서 덜 깬 듯 조금 피곤해 보였다. 그게 마취 때문일까요, 지돈씨? 한기씨는 트리플베리 에이드를 주문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커피를 마셨다. 쿠키를 네 개 주문했고 치즈케이크도 시켰고 아마 브라우니도 시킨 듯? 한기씨는 어린이집을 마친 정원이를 데리러 갔고 잠시 후 희천씨와 동주씨가 왔다. 정연씨는 두 사람을 처음 봤는데 희천씨를 보더니 성공할 관상이라는 게 이런 거군요, 라고 말했다. 마스크를 썼는데 어떻게 아시고? 희천씨가 말했다. 그래도 알죠. 연금 복권 되실 듯. 만약 사신다면…… 우리는 양화진 선교사 묘원을 산책했고 한강을 따라 망원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해가 지기 시작했고 성산대교 너머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오랜만에 한강에 나오니까 좋네요. 정연씨가 말했다. 작은 개구리를 발견했는데 청개구리인지 아닌지 잠깐 논쟁이 오갔다. 청개구리는 아니에요. 내가 강하게 주장했다. 청개구리를 잡아서 길렀던 적이 있어요. 에이, 거짓말. 진짜. 어릴 때 아파트 욕조에서 길렀는데 청개구리가 화장실 창문으로 뛰어내림. 정말…… 소설가답네요. 이야기를 지어내시는 게. 희천씨가 말했다. 


톰 앤더슨은 말했다. 누가 도시를 알까? 걷는 사람만이, 버스를 타는 사람만이 안다. 옳은 얘기지만 해석이 필요하다. 진짜 중요한 건 도보나 버스라는 특정 요소가 아니라 관계다. LA에서는 오로지 가난한 사람들만이 걷고 버스를 타며 그들만이 거리와 접촉한다(부자들은 베벌리힐스와 같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오로지 집과 차 안에만 거주한다). 도시는 연결과 접촉, 관계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며 그런 모습을 담은 영화를 톰 앤더슨은 ‘City of Walkers/Cinema of Walking’, ‘걷는 사람들의 도시/걷는 영화’라고 부른다. 영화에서 그 시작은 켄트 매켄지의 <유배된 사람들The Exiles>(1961)이다.   

미술에서 걷기를 예술이라고 주장한 최초의 예술가는 남아메리카 국가인 수리남 출신의 미술가 스탠리 브라운이다. 그는1935년 당시 네덜란드령이었던 수리남의 수도 파라마리보에서 태어났고 1957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1960년에 처음 시작된 그의 행위 예술 <이쪽이에요, 브라운씨This Way Brouwn>는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길을 묻고 약도를 그려달라고 하는 작업이었다. 스탠리 브라운은 베니스 비엔날레와 다수의 도큐멘타에 참여했지만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는 거의 대부분의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거부했고 작업을 재생산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전시 카탈로그에는 언제나 “작가의 요청으로 이력을 제공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극히 적은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매일, 사람들이 그들이 사용하는 거리를 발견하게 만드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나의 모든 작업과 앞으로 할 작업들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람들은 지구 위를 걷는다people walk on planet earth.


 

Stanley Brouwn, THIS WAY BROUWN (1), 1962. KONRAD FISCHER GALERIE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