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시카고는 아무 곳도 아니었다. 정해진 장소가 아니었다. 그저 미국이라는 공간을 향해 방출된 무엇일 뿐이었다—2

가끔 내가 할 말을 먼저 한 책을 만날 때가 있다. 내가 썼나 싶어서 저자 이름을 확인하기도 한다. 나라면 좋을 텐데, 쓴 걸 기억도 못하는 책들이 내 이름으로 출간되어 있고 14개 국어로 번역됐으며 인세가 따박따박 들어오는 평행 우주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곳에서는 다른 작가가 내 책을 보고 내가 할 말인데!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독서가 모여 그는 지금 이 우주에서 세계적인 작가가 된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책을 출간한 모든 저자들은 인정해야 한다. 다른 평행 우주에선 자신이 독자일 수 있음을, 지금의 나는 수많은 평행 우주 속 독자인 내가 합해진 결과라는 사실을 말이다. 

보스니아 출신 작가 알렉산다르 헤몬은 평행 우주에서 내 책의 독자였을 것이다. 그가 먼저 내 책을 인용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책을 보고 똑같이 할 수밖에 없다. 사실 내가 쓴 거니까. 『주간 문학동네』 10회 ‘두 사람이 걸어가’에 그의 문장(평행 우주에서는 내 문장)이 나온다. “나는 소설은 쓰지 않을 수 없어 쓰지만, 비소설은 누가 강요해야만 쓴다.” 에세이를 시작하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문장이다. 비슷한 유형의 문장으로 찰스 부코스키가 『우체국』 에 쓴 첫 문장이 있다. “이 작품은 허구이며 아무에게도 바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알렉산다르 헤몬은 찰스 부코스키 빠였다. 여담이지만 그가 가장 좋아했던 감독은 브라이언 드 팔마고 십대의 내게 충격을 준 첫번째 영화는 <미션 임파서블 1>이다. 평행 이론? 보스니아와 남한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다.

구(舊)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문화 도시 사라예보에서 자란 알렉산다르 헤몬은 급진적인 유럽 현대 예술과 대중적인 미국 문화의 세례를 동시에 받고 자랐다. 고국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발칸반도 전공자 외에는 대체 누가 어떻게 싸우고 왜 싸우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내전과 학살로 얼룩진 동유럽의 난해한 국가지만 그가 자랄 당시만 해도 사회주의의 끝물이라는 역사적 시기 속에서 서구의 영향력을 마음대로 상상하고 녹여낼 수 있는 종말론적 유토피아였다. 헤몬은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며 라디오 방송국과 신문, 잡지 등 여러 지면에 짧고 황당무계하며 요령부득의 글을 썼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는 세르비아계와 보스니아계의 충돌로 생긴 전운이 도시의 상공을 떠돌던 때였지만 사람들은 생각했다. 설마 전쟁이 나겠어? 저러다 말겠지. 세르비아 민병대의 수장인 보이슬라브 셰셸은 인터뷰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의 눈구멍을 녹슨 숟가락으로 파버리겠다고 했지만, 헤몬은 그 발언을 멀쩡한 숟가락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군, 같은 농담으로 웃어 넘겼다(어쩌겠는가. 사람의 눈을 숟가락으로 파면 안 됩니다! 라고 대응하기엔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시인이자 정신과 의사인 발칸의 도살자 라도반 카라지치가 밀로셰비치의 지원을 받아 사라예보 포위를 준비하고 있는 와중에도 헤몬과 친구들은 그들만의 유토피아에서 곧 사라질 무의미하고 급진적인 짓거리를 벌이며 지냈다. 밤새 이어지는 푸리에적인 난장 술판, 유고슬라비아 프로파간다 영화 속 스타일로 재현한 나치의 칵테일 연회, 대마를 피우고 빈센트 미넬리의 <지지>를 보며 고함지르기, 도박, 춤, 폭식, 침몰하는 배에서 이루어지는 타이타닉 섹스, 지엽적이고 사소하며 광적인 논쟁, 딘 마틴에게 영혼을 바친 송가 등등. 어쩌면 그들의 무의미하고 급진적인 짓거리는 자신들에게 미래가 없음을, 더이상 의미라는 체계가 작동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알아챘기 때문에 일어난 행위일지도 모른다. 

라도반 카라지치의 롤 모델은 세르비아 고전 서사시인 「산의 화관」에 나오는 군주 블라디카 다닐로다. 다닐로는 이슬람교도들의 몰살을 명령하며 이렇게 말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있게 하라.” 시인인 카라지치는 서사시에 나오는 이 말을 현실에 옮겨 적으며 지옥문을 열어젖혔다. 그에 대항해 소수의 사라예보 청년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모두 각자의 픽션이 필요하다. 헤몬이 택한 것은 모든 의미의 기각이라는 픽션이었다. 시의 의미가 문자 그대로 현실에서 작동하는 상황 속에서 헤몬과 친구들은 급진적인 과잉-의미의 생산을 통해 이전까지 믿어왔던 이데올로기들을 무의미하고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렸다. 사람들은 조롱이나 철없는 아방가르드적 실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행위는 (사후적으로 구성된) 징후이자 경고였다. 당시에는 누구도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사라예보의 짧은 (반)유토피아가 끝나갈 때쯤인 1992년, 알렉산다르 헤몬은 미 공보부가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지원하는 국제 방문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한 달간 시카고로 떠나게 된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냥 운명인지 그가 시카고에서 지낸 한 달 동안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했고 현대 역사상 가장 긴 포위전이 시작됐다. 헤몬이 평생을 살고 사랑한 도시인 사라예보는 비처럼 쏟아지는 포탄과 유산탄, 거의 신적인 시선을 견지한 저격수들의 총탄에 의해 물리적으로 가루가 되었고 정신적으로도 가루가 되었다.     

헤몬의 가족들은 국제전화를 걸어 말했다. 돌아오지 마. 돌아와봐야 좋을 일 하나도 없어. 헤몬은 졸지에 망명자가 됐다. 사라예보에서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그곳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미국에서 살 생각도 없었으며 살 방법도 없었던 그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생뚱맞은 도시 시카고에 남겨져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책임감,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그 시간 동안 헤몬이 시카고에서 할 수 있는 건 걷는 것뿐이었다. 시카고라는 낯설고 거대하며 지리학적으로 보행자들에게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곳을 끝없이 산책하는 것. 걷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다. 헤몬은 걷고 또 걸었고 지치면 극장에 들어갔다. 영화를 보기 위해 들어간 건 아니었다. 영화평론가 시절의 습관, 몸에 밴 도시인의 습관이었고 낡고 오래된 시카고의 극장들은 돈만 내면 난민은 물론이고 시체도 받아줬다. 거리와 도로가 도시의 순환계이자 신경계라면 극장은 도시의 망상을 상영하는 변연계이며 영화는 뉴런이 직조한 꿈이다. 도시가 토해낸 무의식이 극장 안에서 분출되고 있었고 관객석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낮이고 밤이고 의자에 구겨져 뇌 속에 상영되는 찌꺼기를 가수면 상태로 보고 있었다. 헤몬은 친지들이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물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실향 속에서 도시의 악몽 사이를 산책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산책의 운동과 흐름 속에서 그의 신체가 정신보다 먼저 시카고에 적응해갔다.


여행지의 숙소에 체크인을 한 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걷는 일이다. 오랜 비행과 기다림으로 지쳐 있어도 숙소 주변을 걷지 않으면 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짐을 두고 손을 씻고 양치를 하고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숙소를 중심으로 대로와 골목, 도시의 지형과 상점, 사람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는다. 나카메구로의 아파트에 묵을 때는 숙소와 메구로 강, 나카메구로 역을 잇는 가장 쾌적한 길을 찾고 목욕탕, 블루블루 재팬, 마카 웨어, 카우북스 같은 상점들을 찾았으며 교복 입은 고등학생들 무리에 섞여 다리를 건넜다. 베니스 리도에 머물 때는 해변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 어디인지 찾기 위해, 마음에 드는 마트와 카페를 찾기 위해 한 시간 가까이 걷다가 베니스 영화제가 열리는 팔라조 델 시네마의 광장까지 걸었다. 걷는 동안 아주 조금씩이지만 낯선 도시와 나의 위상학적 위치가 피부의 경계 너머로 들어온다. 알렉산다르 헤몬은 사라예보에 살던 시절에는 내면과 외면의 경계가 부재했다고 쓴다. “내 삶의 지형들. 내가 누구라는 감각, 자아의 가장 심오한 정체성은 인간관계망에서의 내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고, 그 인간관계망의 물리적 필연의 결과가 도시라는 구조물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관계망은 가까운 친구나 가족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도시에는 이름도 나이도 국적도 모르지만 자주 보는 얼굴 또는 유사한 유형의 얼굴들이 활보한다. 도시와 관계를 주고받는 인간들의 지형이 있는 셈이다. 이웃의 개념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거리는 여전히 사람과 사물들로 이루어진 특수한 지형을 그리며 우리는 그 일부가 되는 과정을 통해 도시에 정착한다.  

시카고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헤몬은 일자리를 구해야 했고 제3세계에서 온 망명 작가답게 할 수 있는 일은 최저임금 노동밖에 없었다. 처음 구한 일은 그린피스의 지지를 호소하는 호별 방문원이었다. 문전박대는 일상이었고 난민을 쓸어버리겠다는 굳은 의지를 손에 든 총으로 보여주는 백인도 있었다. 그러나 헤몬은 일이 마음에 들었다. 가장 큰 장점은 집과 집 사이를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는 거였다. 그는 시카고 북부 해안의 부촌과 노동자 계층이 사는 남부 지역까지 걷고 또 걸었다. “그때의 나는 저임금의 이민자 만보객이었다.”

 헤몬처럼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대구의 정치적 지형에서 벗어나 서울로 망명 온 내가 적응하는 데도 일은 큰 역할을 했다. 스무 살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전단지 배포, 공무원 입시 인강 촬영, 영화 스태프, 전시 스태프, 법원 업무 보조, 광고회사 어시 일을 했으며, 자동차 부품 공장, 카페, 와인 바 등에서 일했다. 경험이 곧 자산이다!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니다. 영문을 모를 정도로 많은 알바를 전전했고 그 경험은 별 자산이 되지 않았다. 일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일을 하면서 깨달은 건 그것뿐이다(지금 글을 쓰는 와중에도 깨닫고 있다). 

네비게이션 맵을 위해 스트리트 뷰를 만드는 아르바이트도 있었다. 대여섯 명이 그룹을 이뤄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 오전 아홉시까지 회사에 가면 인원수에 맞춰 디지털 카메라를 나눠준다. 그룹장의 안내에 따라 배정된 서울의 특정 지역으로 가서 각자 맡은 블록의 모든 건물과 거리의 사진을 매뉴얼에 따라 찍는다. 구글처럼 스트리트 뷰를 위한 세그웨이나 파노집 같은 첨단 장비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손에 디카를 든 알바생들이 도시 곳곳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일한 업체에도 다른 장비가 있었겠지만 가장 최선의 장비는 도보였다. 알바생들은 왕십리, 안암, 잠실, 영등포, 공덕, 학동, 대림 등을 다니며 사거리와 신호등, 건물의 전면과 간판을 찍었다. 최대한 수평을 유지해서 찍을 것. 고층 건물은 여러 장 나눠 찍고 교차로는 모든 각도에서 찍을 것. 고층 건물 옥상에서 거리를 내려보는 사진도 필요했는데 대부분의 건물 옥상은 잠겨 있었고 경비원은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면 보너스라도 받는 것처럼 행동했다. 가끔은 건물 밖에서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도 뛰어나와 소리를 지르고 카메라를 뺏으려고 했다. 유명 건축가가 지은 건물이라나. 나는 사람들의 불친절과 도시의 지형에 조금씩 익숙해졌고 같이 일하는 그룹 사람들의 사정도 알아갔다. 그들은 모두 남자였고 사연이 있었다. 리더인 일식 요리사 출신의 남자는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초밥집을 차릴 생각이라고 했다. 왜 일식집에서 돈을 안 모으고 알바로 돈을 모으는지는 묻지 못했다. 항상 은색 슈트를 입고 다니던 남자는 잘나가는 HSBC 은행 대출계 직원이었는데 어느 날 때려치우고 이 일을 선택했다. 학부 때 사진을 전공했기 때문이란다. 논리가 조금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는 외제차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말했다. 소나타를 타는 사람은 소나타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벤츠를 타는 사람은 벤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직업, 커리어, 여자, 친구, 집, 가족 모두 외제차만 있으면 만사형통. 순서가 반대 아닌가? 내가 물었지만 아직 어려서 세상물정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후드 티를 입고 다니는 후리후리한 키의 남자는 유학 준비중이었고 안경 낀 마른 남자는 명문대 철학과 대학원생이었다. 말하자면 이 그룹은 전형들의 전시장이었다. 도시마다 특정 군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스며드는 문화적인 습속이 있고 그것이 외모와 인격의 지형을 만든다. 조금 벗어나거나 많이 벗어나는 사람도 있지만 누구도 무관할 수 없다. 도시의 지형을 담는 도시의 지형으로 빚어진 사람들?  

아무튼 그들은 서울의 사진을 찍으며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모두 한가락 하는 과거가 있었고(사실 유무와 별개로) 앞으로 크게 한 건 할 예정이었다. 돈만 모으면 대박 터뜨리는 거야! 나는 그냥 학부생이었고 야심 같은 건 없었다. 있다면 이 일을 경험으로 소설을 쓰는 거였다. 결국 습작을 쓰긴 했다. 지도를 만드는 남자가 관료제와 현대 도시의 미궁에 빠져 길을 잃는 전형적인 카프카풍의 망작이었다.  

알렉산다르 헤몬은 대학교의 국제 인권법 연구소에서 봉사활동도 했다. 연구소는 보스니아의 전쟁 범죄 가능성에 대한 증거를 모으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사라예보의 파괴되거나 훼손된 건물 사진을 보며 실제 위치와 용도를 확인하는 일을 했다. 어떤 건물은 보자마자 주소까지 떠올랐고 어떤 건물은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 여자친구인 레나타를 기다리던 모퉁이의 건물을 보기도 했다. 여자친구가 늦으면 일층 슈퍼마켓에서 사탕이나 담배를 샀다. 한 시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고 그후 오래 잊고 있었던 건물을 시카고에서 사진으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건물은 포탄으로 지붕이 붕괴되고 층들이 무너져 속이 텅 빈 모습이었다. 그의 형이상학적인 상태처럼 말이다. 전쟁으로 파괴된 고향의 건물을 보는 일은 그의 말대로 “사체의 신원을 파악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사체는 친구나 가족이었고 심지어 자신의 일부이기도 했다. 그가 알아보지 못하면 건물의 정체는 영영 미궁에 빠질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된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헤몬은 전쟁이 끝난 1997년 봄, 사라예보에 방문했다. 오 년 만이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이면서 그대로가 아니었다. 길은 그대로였고 건물은 부서지고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 자리에 있긴 했다. 그러나 위치가 같다고 위상이 동일한 건 아니다. 길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시절 친구를 만났다. 그는 반가움에 흥분해서 물었다. “잘 지냈어? 어머니는 잘 지내시고?” 친구가 말했다. “어머니는 전쟁 첫 달에 저격수의 총을 맞고 돌아가셨어.” 친구는 당황하지도 화내지도 않고 말했다. 사라예보는 더이상 헤몬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가 아니었다. 그곳은 전쟁이 토해낸 사라예보 비슷한 그 무엇이었다. 그리고 그게 사라예보였다. 



* 이 글에는 『나의 삶이라는 책』 (알렉산다르 헤몬, 이동교 옮김, 은행나무, 2019), 『인터뷰, 당신과 나의 희곡』 (엘리너 와크텔, 허진 옮김, 엑스북스, 2019)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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