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죽어서 승리를 거둔 사람들이 살아서 승리를 거두었다면—1


플라뇌르의 여성형은 플라뇌즈다. 학계의 통설상 플라뇌즈는 존재하지 않는 전설 속의 유니콘 같은 존재다. 여성이 플라뇌르가 되기에는 사회의 편견과 위협 요소가 너무 컸다. 여성은 거리로 나서는 순간 응시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다. 쉽게 말해 남자들이 자꾸 쳐다보고 집적댄다는 말이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야행」(1969)을 영화로 만든 김수용의 영화 <야행>(1977)에서 밤거리를 걷는 윤정희 역시 시선의 대상이 된다. 단지 길을 걸을 뿐인데 온갖 남자들이 와서 말을 건다. 

—저 댁이 어디신지, 어디서 많이 뵌 분 같군요. 커피라도 한잔? 

1970년대 후반의 어색한 영화적 제스처와 이제는 레트로한 감성으로 소환되는 폰트 디자인과 육교, 고가도로의 도시 풍경 속에서 윤정희 홀로 요즘 사람처럼 보인다. 그녀는 서울 시내를 산책하고 술집에서 혼술을 한다. 단체로 온 남자 손님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휘파람을 불고 플러팅을 한다. 

김승옥의 소설 「야행」의 주제는 1960년대 후반 명동의 헌팅 풍경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소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서로에게 접근해서 하루를 보내려는 심리를 남성의 시각으로 집요할 정도로 묘사하고 있다. 소설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현주는 자기 몸에 늘어붙고 있는 사내의 시선을 느꼈다. (……)

“댁이 어디십니까?”

사내가 앞을 가로막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집이 어디세요?”

어떤 사내가 그 여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을 걸어왔다. 

 

이러한 판국이니 도시 산책이 가능할 리가 없다. 김수용의 영화는 윤정희의 직장인 은행과 신성일과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는 장소인 한강 이촌 아파트 내부, 그리고 도시의 밤거리를 동일한 수준으로 다루고 있어 상황이 좀 낫지만 큰 맥락에서는 다르지 않다. 요즘 분위기에서는 상상도 못할(그러나 언제나, 어디선가 만들어지고 있는) 강간을 꿈꾸는 여성의 심리가 서사의 중심이며 그러한 심리를 자기 파괴, 구원, 세태 비판(?) 등의 주제와 연결시킨다. 

중요한 건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김수용의 <야행>이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가능성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혐오적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신체와 욕망을 도시와 함께 카메라에 담는 순간 전체 서사에 포섭되지 않는 재현-이미지가 발생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근대의 스펙터클과 여성 산책자”를 창조하며 “남성적 시선에 의해 대상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세하게 텍스트의 불균질을 생산한다. 불균질은 이들이 서울이라는 공간을 활보하는 이미지로 등장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특정 장면과 이미지는 관객의 눈에 의해 외부로 이탈할 수 있으며 새로운 의미와 욕망으로 재창작될 수 있다. 

윤정희가 인적이 드문 덕수궁과 명동 거리를 걷는 장면은 <야행>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영화적 성취다. 산책은 내면의 충동이라는 서사적 기제 안에서 작동하지만, 서울의 풍경과 윤정희의 신체는 그러한 서사에 무관심하다. 또는 서사와 무관하게 우리는 그 장면을 소비할 수 있다. 윤정희의 리즈 시절로 이미지를 소환하고 시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은 헤어스타일과 트렌치코트 따위를 인터넷 게시물로 만들 수 있다. 잘 차려입고 서울을 걷는 여성 위에 드리워져 있던 이데올로기와 서사적 장막이 더는 무의미한 것이다.  

영상 매체가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여성들의 일과 대화, 일상을 다룬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일이다. 남자들이 주체인 영화에서는 거리를 배회하는 장면이 일상이다. 반면 여성의 경우에는 소수에 불과하며 거리가 배경이 되면 언제나 성적인 요소가 따라다녔다.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는 플라뇌즈를 그린 기념비적인 영화지만 불륜이라는 테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섹스 앤 더 시티>가 대히트작이 된 건 대사나 드라마 때문이 아니라 단지 여성들이 거리에서 대화를 하고 음식을 먹고 걷는 일상을 향유하는 모습을 전시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볼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물론 그 거리가 뉴욕이긴 하지만……) 그러나 여기서도 여전히 ‘섹스’는 전면에 드러난다. 이제는 산책과 대화의 배경에서 성적인 욕망이 빠져도 좋지 않을까. 그냥 (여성이) 걷고 대화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기엔 아직 사회가 성숙하지 못했나. 그러나 사회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예술은 시대를 반영하지 않는다. 시대가 예술을 반영한다.  

 

아스팔트의 딸

여성 산책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최초의 시기는 1920~1930년대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유사한 시기에 모던걸(일본어로 모가モガ)이 등장했고 이들은 사회적 배경과 새로운 문화적 요인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이러한 모던걸들은 왜 플라뇌즈로 개념화되지 못했을까. 그들이 자주 비판받은 요인 중 하나는 여성은 상품 소비문화의 수동적인 노예에 불과하다는 시각이었다. 플라뇌르 역시 동일한 문화에서 탄생했지만 남성들이 관찰자이자 소비자로서 양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반면 여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모던걸은 허영과 사치를 일삼는 성적 방종의 상징이었다. 

당대의 모던보이이자 플라뇌르였던 박태원의 구보 역시 다를 게 없었다. 


여자들은 그렇게 쉽사리 황금에서 행복을 찾는다. 구보는 그러한 여자를 가엾이, 또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 사내의 재력을 탐내본다. (……) 여자는 확실히 어여뻤고, 그리고 또…… 구보는, 갑자기 그 여자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자에게 몸을 허락하여 온 것이나 아닐까, 생각하였다. 그것은 생각만 해볼 따름으로 그의 마음을 언짢게 하여준다. 역시, 여자는 결코 총명하지 못했다. 또 생각하여보면 어딘지 모르게 저속한 맛이 있었다. (……) 남자는 여자의 육체를 즐기고, 여자는 남자의 황금을 소비하고, 그리고 두 사람은 충분히 행복일 수 있을 게다. 


그러나 실제 플라뇌르적인 역할을 맡은 남성들이 모던보이가 되고도 그 양가적인 태도로 인해 아무런 변화의 주체가 되지 못한 데 비해, 여성들은 새로운 직업과 소비문화의 최전선에 뛰어들면서 기존의 젠더적 억압에 균열을 일으켰다. 리타 펠스키는 소비주의 문화가 조장하는 쾌락주의는 개별 남성 자본가에게는 중요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지만,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의 만족에 빠져들게 하면서 남성의 권위를 침식할 뿐 아니라, 남성이 주도하는 가부장적 가족구조의 신성함을 교란하고 토대를 흔들리게 하는 파괴적인 힘을 가진다고 보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회의 변화는 소비에서 온다.

나는 여기서 다소 뜬금없지만 아즈마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을 떠올렸다. 아즈마 히로키는 관광객을 새로운 철학적 개념으로 내세운 이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관광객론의 본질은 얼마간 그 비본질적인 스타일에 있었다. 내가 시도한 것은 지금까지 ‘타자’나 ‘유목민’ 같은 좌익적이고 문학적이자 정치적이며 어쩐지 낭만적인 말로 쓰였던 개념을 ‘관광’이라는 극히 상업적이고 즉물적이며 세속적인 말과 연결 짓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관광객은 소비자와 겹친다. 이 둘 모두 세계를 사유하고 경험하는 태도의 전환을 뜻한다. 우리는 사실 관광하고 소비하는 것에 불과하면서도 진정한 경험, 겉만 훑고 오는 관광이 아닌 깊이 있는 삶을 체험하길 원하고(실제로 가는 곳은 현지인 맛집에 불과하다) 생각 없는 소비자가 아닌 주체적이고 합리적인 소비자가 되길 원한다(실제로는 가성비나 운운한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러한 합리적이고 계몽적인 태도가 한계에 봉착했다고 본다. 그는 관광객의 철학을 사유하는 목적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번째 목적은 지구화를 사유하는 새로운 틀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동시에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옷을 입으며 심지어 미국 영화를 한국에서 먼저 개봉한다. 다시 말해 쇼핑/관광으로 평평해진 세계를 어떻게 사유하느냐의 문제다. 둘째 목적은 인간과 사회를 우연성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즈마 히로키는 발터 벤야민의 산책자 개념을 언급한다. “관광객의 시선이란 세계 전체를 파사주=쇼핑몰로 여기는 시선이다.” 이러한 관광객-산책자-소비자는 우연성에 개방된 상태로 사물,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한다. 백화점이 단순한 속물적 소비의 공간인가. 백화점을 비판하는 계몽주의적인 정신으로는 <캐롤>에서 두 주인공이 백화점에서 만나는 사건을 설명할 수 없다. <캐롤>은 소비주의적 공간이 해방적 공간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번째는 진지함과 경박함을 넘어서는 새로운 담론을 구축하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그 예로 테러와 관광을 든다. 전통적인 시각에서는 테러는 매우 근본적이고 진지한 행위이지만 현대의 테러리스트는 웹과 할리우드 영화의 경박한 언어로 무장한 관광객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단순히 가벼운 존재로 치부할 수도 없다. 소비 역시 마찬가지다. 문학은 소비의 대상인가 아닌가. 책이 굿즈가 되는 일은 경악할 일인가? 시위를 소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진지한 계몽주의적 지식인/예술가들에게 시위를 소비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행위지만 시위는 소비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촛불 시위가 소비 심리와 동떨어져 있을까. 소비자로서 시위를 사용하는 것은 진지하지 않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하는 걸까. 시위를 비판하는 이들은 으레 선동되어서 한다, 겉멋으로 한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한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위는 오직 그럴 때 진정으로 힘이 생긴다. 이것은 샹탈 무페가 말한 포퓰리즘적 계기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샹탈 무페는 포퓰리즘을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에 따라 기존과 다르게 정의한다. 그가 말하는 ‘포퓰리즘 계기’는 빠르게 증가하는 불만족스러운 요구들로 인해, 정치적 혹은 사회경제적 전환에 대한 압박에 처한 지배 헤게모니가 불안정해진 때이다. 여성들의 소비가 일어난 것, 그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소비의 주체가 된 것이 바로 이러한 때 아닌가. 

『개벽』 『신여성』 등에서 기자로 일하며 소설을 썼던 식민지 시기의 소설가 이선희는 1934년 『별건곤』에 기고한 「다당여인」에서 이렇게 썼다. 


떼파트 쇼-윈도의 황홀한 색채가 나를 유혹하고 울트라 모-던니즘을 숭배하는 젊은 남녀의 야릇한 채림새가 내 호기심을 끈다. 거리로 나가거라. 입술을 빩앗케 물드리고 눈섭을 가늘게 그리고 윙쓰를 사방으로 보내며 레뷰식으로 깡충깡충거러라. 단연이 갑싼 모-던니즘의 여왕이 될 테니. 나는 이것이 조흔지 납븐지 모른다. 하기는 아마 조선의 녀성이 다 이 모양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내 눈은 변變으로 아름다운 것을 구하고 내 가슴은 허영과 향락으로 차 잇지 안은가. 나는 도회의 딸이다. 아스팔트의 딸이다. 티-룸 이것의 탄생은 퍽이나 유쾌한 일이다. 활동사진에도 실증이 난 내게 유일한 사교장社交場이다. 일전 엇던 잡지에 찻집이 넘우 만허서 차만 마시면 사느냐고 하기는 햇지만, 장곡천정長谷川町으로 가다가 낙랑樂浪 파-라 이 집을 내가 제일 조와한다. 쏙 드러서면 그 화려하고 경쾌한 맛이라니.


이선희의 등단작 「가등」(1934)은 연인과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지를 놓고 갈등하는 명희가 종로와 백화점, 혼마치를 배회하는 풍경을 담은 짧은 소설이다. 그녀는 날마다 밖으로 나갈 계획을 세우는 모던걸이다. 어머니는 또 어딜 가냐며 그녀를 구박한다. 명희는 생각한다. "이 방안만이 내가 사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나무칼로 목이라도 따 죽는 게 낫지."

그녀의 연인은 전형적인 룸펜이다. 예술적이고 지적인 고뇌와 멀쩡한 허우대 덕분에 과거에는 꽤나 그럴듯해 보였으나 세월이 지난 지금은 피해의식에 찌든 인물이 되었다. 그는 명희를 "사치한 것과 모던"을 좋아하는 경박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명희는 그와의 약속을 어기고 홀로 거리를 떠돌지만 두 사람은 우연히 마주친다. 둘은 별수없이 찻집에서 대화를 나눈다. 할일이 없다고 괴로워하는 남자를 달래는 명희를 위한답시고 그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는 괴로운 존재입니다. (……) 명희씨는 흰 새와 같이 아름다고 종다리와 같이 노래 불러주십시오.

당신은 다만 즐겁고 유쾌히 살아주십시오. 그리고 모든 문제는 남자인 우리에게 미뤄주십시오.


그러고는 돌연 찻집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다. 


명희씨는 대단히 사치한 것과 모던한 것을 좋아하시지요. (……) 명희씨가 그다지도 찬미하는 이 찻집이 무엡니까. 무에 그다지 좋습니까. 

 

지금은 도시 전설 같지만 스타벅스가 처음 한국에 론칭했을 때 식사 한끼 값보다 비싼 커피는 비난의 대상이었다. 된장녀 논란(이라고 말하기도 싫지만)도 그와 함께였다. 백화점, 카페, 쇼핑몰 등등 소비문화를 비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중요한 건 이러한 장소 또는 장치들이 소비의 주체로 끌어들인 대상이 누구이며 그들이 그 안으로 들어간 이유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는 것이다. 여성은 그들이 처한 차별적인 환경 때문에 소비와 현대 도시, 기술 문명의 가능성을 먼저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플라뇌르는 단 한번도 플라뇌르였던 적이 없다. 플라뇌르는 처음부터 플라뇌즈였다. 

카페에서 나온 명희는 연인과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명희는 생각했다.

‘나는 그를 떠나리라’고.

그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명희는 사람도 없는 거리를 방향도 없이 자꾸 걸었다. 




  

* 이 글의 논의는 다음 책과 논문에서 인용 및 참고했다.

서지영, 『경성의 모던걸: 소비, 노동, 젠더로 본 식민지 근대』, 여이연(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3

아즈마 히로키, 『관광객의 철학』, 안천 옮김, 리시올, 2020

샹탈 무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이승원 옮김, 문학세계사, 2019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문학과지성사, 2005

이선희, 『이선희 소설 선집』, 현대문학, 2009

김승옥, 『생명연습』, 문학동네, 2014

황혜진, 「〈야행〉에 나타난 여성 산책자 연구」, 『씨네포럼』 34호, 동국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2019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