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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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책의 아이러니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매일 산책을 해야 하는 법이다. 매일 가는 산책 코스도 있어야 하고 가장 좋아하는 산책 코스가 어디냐고 하면 눈 감고도 안내해줄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가장 유명한 산책 광인은 칸트일 것이다. 칸트는 매일 새벽 4시 55분에 일어나 차를 마시고 딱 한 번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아침 강의를 하고 같은 시간에 점심을 먹고 산책을 했다. 산책에 관한 그의 철칙은 단 두 개다. 혼자서 할 것, 입으로 숨쉴 것. 그래야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그는 땀 흘리는 걸 질색해서 여름에는 그늘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게 산책이었다. 산책이 끝나면 독서와 글쓰기를 하고 밤 10시에 침대에 누워 ‘키케로’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고 잠들었다. 불면증은 없었다. 칸트처럼 강박적이진 않지만 다윈도 매일 산책을 했다. 그는 자신의 다운하우스 정원을 폭스테리어와 함께 거닐었다. "극도의 고요함과 소박함"이 있는 이 시간 동안 진화론의 기초가 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라고 하면 좋겠지만, 실상은 정반대에 가깝다. 진화론은 진작에 떠올렸고 그가 산책에서 한 일은 진화론의 발표를 미루는 것이었다. 

일하기 전에 산책하는 것은 낭만적인 일이다. 상상 속에서는 그렇다. 실제로는 산책을 하고 나면 일을 다 한 느낌이다. 피로가 몰려오고 잠깐 눕고 싶다. 누우면 자고 싶고(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자고 일어나면 다시 산책을 하고 싶다. 원고 쓸 준비를 위해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해야지.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이 모든 과정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누워서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다. 약속 시간이 되기 직전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마감이 코앞일 때까지 글을 시작하지 않듯이. 『미루기의 천재들』을 쓴 앤드루 산텔라는 이렇게 썼다. 작가는 가장 최후의 최후의 최후의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커리어와 성공, 어길 수 없는 마감일까지)을 거는 사람이다. 

─아무래도 저는 산책을 좋아하지 않는 거 같아요. 

나는 한기씨에게 말했다. 

─제가 진짜 좋아하는 건 산책하는 걸 상상하는 거 같아요. 

─그게 산책을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한기씨가 말했다. 

7월 중순이었고 우리는 절두산 순교 성지 입구에 있는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서 금정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기씨는 진회색 반소매 티셔츠에 검은색 반스 어센틱을 신고 있었다. 십 년 전과 같은 차림이다. 십 년 전에는 스케이트보드를 잘 타진 못해도 캘리포니아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청소년 비슷한 느낌이 났는데 지금은……

─아니죠. 그건 상상하는 걸 좋아하는 거죠.

─산책을?

─그렇죠. 

─그러니까 산책을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산책하는 걸 상상하는 걸 좋아한다니까요!

내가 말했다. 산책은 막상 하면 피곤하고 걸을 곳도 마땅치 않고…… 집에 정원도 없고……

─축구 하는 거 상상하는 거 좋아하세요?

한기씨가 말했다.

─……아니요.

─저도 안 좋아해요. 그치만 산책을 상상하는 건 좋아하죠. 왜냐하면 산책을 좋아하니까.

한기씨의 논리에 따르면 그것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그걸 좋아하는 가장 완벽한 증거이자 방법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만큼 행복한 게 어디 있을까.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라고 어린 왕자도 말하지 않았나.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지금은 3시이고 금정연은 3시 30분에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문제는 우리가 왜 만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일정 시기가 되면 약속을 잡고 만났는데 대부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다. 육아와 가사, 돈벌이와 집필 활동으로 바쁜 분들인데 왜 만나는 걸까. 스트레스 해소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낮시간에 만나서 커피를 마시고 잠깐 걷다가 헤어진다.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는 가명 만들기다. 가명을 만들어서 작품을 발표하자. 아무도 우리가 쓴 작품이라는 사실을 모르게. 그러면 조금 더 팔리지 않을까? 최근에 만든 가명 중 하나는 ‘돈기호’다. 

─그건 너무…… 티나지 않을까요? 

─그럴까요? 

─누가 봐도…… 

돈키호테에서 따왔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뭐가 된다는 건지)

물론 우리가 만나는 표면상의 이유가 있긴 하다. 우리는 공동작업을 위해서 만난다. 그 작업이 소설이 될지 시가 될지 시나리오가 될지, 그 무엇도 아닌 뭔가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브레인 스토밍을 하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요. 스타트업 힙스터처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우린 이미 몇 번의 공동작업을 했다. (지금은 한국에 없는 상우씨까지 합세해서) 시나리오 형식의 이상한 픽션을 쓰기도 했다. 제목은 ‘펫시티’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4년, 앨런 튜링이 기르던 앵무새 마부제는 자살한 튜링의 뇌를 쪼아먹은 후 절대 지능의 존재로 거듭나고, 1963년 새들을 규합해 인간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그리고 2002년 미래사회, 길고 긴 전쟁이 끝난 후 인류는 결국 새에게 지배당하게 되는데……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에 연재했던 글인데 당시 경기도지사는 지금은 은퇴한 정치인 남경필이다. 그가 우리의 시나리오를 보진 않았겠지만 이 자리를 빌려 감사 인사를 드린다. 아마 그가 글을 봤다면 연재를 허락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행복한 시절이었죠.

한기씨가 말했다. 그때 시나리오에서 한기씨가 담당했던 건 광기였다. 지금도 한기씨가 쓴 파트를 보면 오싹하다. 이 사람…… 제정신인가? 한기씨는 부탁했다. 제가 썼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아주세요.  

오한기는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시나리오와 산문, 시 모두에 뛰어난 사람이다. 대학교 때 트리플크라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시, 소설, 시나리오, 세 종목 석권. 그가 더이상 시를 쓰지 않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시를 가끔 읽긴 하는 것 같다.  

오한기는 2016년 『GQ』 9월호에 송승언의 시 「사랑과 교육」을 추천하면서 이렇게 썼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 산책도 잘 하지 않는다. 산책을 좋아하고 자주 생각하긴 한다. 산책하기 좋은 날이야. 산책할 때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산책하기 좋은 날이다 정말. 햇빛과 새 지저귐이 생각난다, 야구 점퍼, 오리, 소나기가 떠오른다.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리워하고 상상한다. 산책을 할 땐 현재와 연애하지 않는다. 과거나 미래와 연애한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과거는 슬프고 미래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산책은 되돌아오는 것이다. 좋은 날에 걸으면 반드시 죽고 싶다는 것. 되돌아올 걸 알기 때문에 누군가는 죽고 싶다.


참고로 송승언의 시 「사랑과 교육」은 이렇게 시작한다. 


좋은 날이야 

산책하기 좋은 날이다 정말


나는 이것을 산책의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꿈꿀 땐 행복하지만 막상 시작하면 피곤한 행위들. 산책에서 제일 좋은 파트는 산책하기 직전이다. 연애에서 제일 좋은 파트는 연애가 시작되기 직전이며 극장에서 제일 좋은 파트는 예고편을 볼 때이고(영화사 로고가 뜰 때?) 여행을 떠날 때 제일 좋은 파트는 계획을 짤 때이다(물론 나는 계획 짜는 걸 싫어하고 그래서 여행을 싫어한다).


2. Are you ok? 

앞서 말한 문장에는 조금의 과장이 섞여 있다. 산책할 때 좋은 일은 무수히 많다. 날씨가 좋고 몸이 가벼우면 거의 모든 순간이 기쁘다. 익숙한 길과 낯선 길이 섞이고 우연히 발견한 상점에서 마음에 드는 포트와인을 사고(얼마 전에 연남동에서 있었던 일이다) 약간 지루하다 싶을 땐 이동 수단을 바꾼다. 최근의 행복은 공유 자전거/킥보드가 다양해졌다는 사실이다. 내가 주로 이용하는 건 

1) 따릉이

2) 일레클

3) 라임

이다. 각각 장단점이 있어 하나도 버릴 수가 없다. 따릉이의 장점은 싸다는 거다. 일레클의 장점은 체력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인데 아쉽게도 주차 불가 구역이 너무 많다. 반면 라임은 가까운 곳에 있고 어디든 주차할 수 있지만 가격이 비싸다. 거의 택시비 수준.  

정연씨와 나는 파리에서 라임을 탔다. 정연씨는 라임을 처음 타는 거라 상당히 긴장했다. 

─균형잡기 어렵지 않아요? 

정연씨가 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동 킥보드는 막상 타면 굉장히 쉽다. 시동 거는 법만 배우면 된다. 정연씨도 출발할 때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금방 요령을 익혔다. 

─정연씨, 괜찮죠?

─…… (달리는 중이라 대답 못함)

우리는 레퓌블뤼크 광장에서 20세기 중반 지어진 브루탈리즘 주거 단지가 있는 19구까지 라임을 타고 시속 20km로 질주했다. 누가 봐도 관광객이었지만 마음만은 파리지앵이었다. 파리지앵은 요즘 출퇴근할 때 라임 탄다며? 누가? 르몽드에서 그러던데! 울랄라~ 문제는 19구로 가는 길에 포석이 깔린 구간이 있다는 사실이다. 오스카 니마이어가 설계한 프랑스 공산당 당사 앞의 로터리인데 크진 않지만 차와 사람, 자전거, 오토바이 등으로 늘 북적한 곳이다. 

타본 사람은 알겠지만 포석은 킥보드의 천적이다. 돌 위를 지날 때면 안마의자에 앉은 듯 온몸이 덜덜 떨린다. 회전 교차로를 진입하는 차들은 클랙슨을 울려대고 길을 건너는 사람들은 양보가 없다. 포석 위를 지날 때 정연씨는 온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손이 너무 떨려서 핸들을 놓칠 뻔하기까지 했다. 날렵한 자전거를 탄 백인 남자(아마도 진짜 파리지앵)가 정연씨 옆을 지나며 말했다. 

─Are you ok? 

정연씨는 옆을 볼 수 없었다. 아래턱부터 위장까지 진동중이었다. 

─Are you ok?

백인 남자가 다시 물었다.

─…… (앞을 보며 끄덕끄덕)


─굴욕……

정연씨가 한기씨에게 그날의 경험을 회상하며 말했다. 

나는 라임을 타며 넘어진 적도 있다고 말했다. 샹젤리제 쪽의 어느 골목이었던 것 같다. 익숙해졌다고 건방 떨다가 균형을 잃었고 아스팔트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그 결과 아끼는 살로몬 운동화에 구멍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임 타는 걸 멈추지 않았다. 파리에서 처음 라임을 탔을 때 감각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멈출 수 없었다. 9월 초순이었고 레퓌블뤼크 광장에서 마레 지구로 가는 길이었다. 방금까지 흐렸던 날씨가 맑아졌고 햇살은 구름 사이로 떨어져 회백색 벽과 거리 위에 드리웠다. 가로수가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라임을 타고 골목으로 접어들었는데 빛에 의해 사선으로 갈라진 거리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나는 라임 바퀴가 굴러가는 고요한 소리를 들으며 빛 속으로 들어갔다.

라임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이런 카피가 뜬다. “삶이 새롭게 열리다.” 스크롤을 내리면 “우리는 도시 생활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파리의 외관을 생각했을 때 라임보다 자전거가 더 어울리지만 전동 킥보드가 주는 다른 감각이 있다. 이동이 자유로운 무빙워크 위에서 파리 시내를 구경하는 느낌이랄까.  

이동 수단은 도시를 감각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일종의 매핑 도구로 무엇을 타느냐에 따라서 도시는 다르게 구성된다.

폴 비릴리오에 따르면 자동차의 차창은 스크린으로 기능한다. 사람들은 외부와 감각적으로 격리된 상태에서 생경한 속도로 지나가는 풍경을 본다. 도시는 하나의 경관이 된다. 박해천은 자동차 좌석을 극장의 관객석으로 연결한다. 이러한 자동차 인터페이스는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의 움직이는 시선으로서의 공간 경험과 겹쳐진다. 로버트 벤투리에 따르면 현대 건축에서 건축 자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스쳐지나가는 시선에 포착되는 상징이다. 그는 말한다. 간판이 건축보다 중요하다!

발터 벤야민의 산책자들이 도보로 걷는다면 로버트 벤투리의 운전자들은 도로를 달린다. 도로를 달리는 사람들에게 도시는 그래픽이다. 출발지와 목적지를 잇는 선이며 도시 경관은 영화 <트론>에 나오는 전기적 디스플레이의 전시장이다. 벤야민에게 중요한 건 거창한 게 아니라 하찮은 것이었다. 마천루나 기념비가 아니라 아케이드 곳곳에 숨겨져 있는 일상적인 사물들. 그런 면에서 보면 발터 벤야민과 로버트 벤투리는 정반대의 인물 같지만 흥미로운 건 두 사람이 생각보다 겹친다는 점이다. 로버트 벤투리에게 중요한 것 버내큘러한 경관이었다. 그는 모더니스트인 르 코르뷔지에처럼 위대한 건축물에 집착하지 않았다. 오히려 팝적이고 유치한 간판, 폰트, 이미지에 매혹됐다. 발터 벤야민과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발터 벤야민은 파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파리 전도로 한 편의 흥미진진한 영화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파리의 다양한 모습을 시간적인 순서대로 펼쳐 보임으로써 말이다. 그리고 수 세기 동안 진행된 가로나 불르바르, 아케이드나 광장들의 변화를 30분이라는 시공간 안에 응축시킴으로써 말이다. 산책자는 바로 이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벤야민은 영화를 혁명적인 매체로 생각했고 그 이유 중 하나가 영화에서 체험하는 분산적 지각이었다(실제 영화의 역사가 이러한 지각으로 나아갔느냐는 다른 문제다). 그가 긍정적으로 본 분산적 지각은 산책자의 스쳐지나가는 산만하고 무심히 집중하는 시각과 겹치는데, 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산책자보다는 운전자의 시선에 오히려 가깝다. 자동차의 차창이 스크린이 되고 우리는 도시 그래픽-영화를 무심하게 바라본다. 현 위치는 내비게이션 위의 점으로 표시되고 목적지의 좌표 역시 현실의 그래픽 위로 겹쳐진다. 

그러나 자동차의 가장 큰 문제는 중간에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동차의 움직임은 도로와 주차장에 한정된다. 운전자는 어디 갈 때마다 주차장 유무부터 생각한다. 강변북로를 타면 매력적인 곳이 보여도 중간에 길을 이탈할 수 없다. 문제는 또 있다. 자동차는 외부와 내부를 분리한다. 감각이 차단되거나 최소화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발터 벤야민의 야심 또는 꿈이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는 것은 도보도 자동차도 아닌 전동 킥보드다. 외부의 감각은 그대로 유지하며 세계를 그래픽으로 환원하지도 않고 다양한 위치에 접속 가능한 이동 수단. 라임을 타면서 느끼는 건 이때의 감각이 VR과 유사하다는 사실이다(AR인가? MR인가?). 자동차=영화, 전동 킥보드=VR?(자전거는 전동 킥보드와 다른데 그건 자전거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보다 훨씬 육체적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자전거=육필 원고=김훈. 자전거 여행을 생각해보라). 영화를 대체할 매체로 혼합/확장 현실 게임이 언급되는 건 그러므로 당연한 귀결이다.  

물론 이건 이론적 과장이다. 실제로 서울에서 라임을 타면 금방 위협을 느낀다. 자전거 도로와 자동차 도로와 겹쳐 있고 사람들은 킥보드의 등장에 익숙하지 않다. <백 투 더 퓨처 2>의 호버 보드처럼 공중을 날지 않는 이상 지면에는 위험 요소가 다분하다. 그럼에도 아날로그와 디지털, 자동기계와 신체감각이 뒤섞인 이동 수단은 우리가 도시를 감각하는 경험의 새로운 차원을 요구한다. 자동차와 기차(지하철), 비행기는 장거리에만 쓰일지도 모른다. 단거리가 새로운 수단으로 대체되면 철도와 도로 중심의 도시계획은 무의미해진다. 과거에는 역세권이 아닌 역과 역 사이, 노변은 죽은 공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도 앱-내비게이션 역시 중요해진다. 지도 앱과 새로운 이동 수단이 완벽하게 연동되는 순간 도시의 전 영역이 활성화될지도 모른다. 좋은 일일까? 

‘크리티컬 매스’는 세계 곳곳에서 매월 한 번씩 열리는 자전거 타기 행사이다. 참가자들은 자전거의 권리를 주장하고 도시의 기존 인터페이스를 교란시킨다. 이와사부로 코소는 2004년 8월에 있었던 주행을 맨해튼 교통의 해방이라고 명명했다. 당연히 경찰들에게는 눈엣가시고 코소의 지인인 한 여성은 네 번이나 체포됐다고 한다. 반면 한국의 크리티컬 매스는 그보다 훨씬 점잖다. 한국의 시위가 그렇듯 말이다. 코소는 「보행자 도시, 자동차 도시, 자전거 도시」라는 에세이를 다음 문장으로 끝맺는다. 자전거를 탄 발터 벤야민 같은 존재가 있어도 좋지 않을까? 내 생각에 발터 벤야민은 자전거도 킥보드도 타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기엔 너무 약골이니까. 그러나 대신 이러한 도구를 이용한 미래를 상상했을 것이다. 그 미래가 어두워지기 전에 사람들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