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인생에서 두 번 저항하기란 어렵다―1

파리가 나의 정신적 고향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태어나고 자란 건 대구지만, 서른 살이 넘도록 유럽 대륙을 밟아보지 못했지만(모스크바에 가긴 했지만 러시아를 유럽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도 내 (정신적) 고향은 파리다. 고향이라는 단어와 파리라는 단어의 결합이 우스꽝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9월 3일이었고 파리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금정연과 이상우와 나는 유심 카드를 사고 짐을 풀고 오전에는 근처 빵집에서 바게트와 커피를 샀다. 기온이 30도가 넘었지만 따뜻한 카페 알롱제를 마셨다. 스벅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잠시 잊어두자. 파리나 로마에서 아이스커피를 시킨다는 건 이천 년 유럽 문명에 대한 모독이다! 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잠자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마셨다. 이런 게 타문화에 대한 존중 아닌가. 파리에 왔으니 미국식 편리함에 물든 습관을 버려! 덥긴 하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우리는 공쿠르역에서 나비고(파리의 교통카드인데 궁금한 사람은 검색……)를 사려고 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아니,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건 사실 숙소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샤를 드골 공항에서 택시를 탔다. 기사인 중년의 흑인 남성은 친절했고 프랑스어로 말을 걸었다. 내가 말했다. 즈 느 빠흘레 빠 프랑세je ne parle pas français(저 프랑스어 못해요). 아임 어 투어리스트. 남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프랑스어로 말했다. 음…… 그는 TV를 보며 운전했는데 이슬람 계열의 흑인들이 나오는 토크쇼 같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방송을 보다 종종 웃었고 그때마다 내게 말했다. 프랑스어로…… 숙소까지 삼십 분 좀 넘게 걸린 것 같다. 그동안 우리는 종종 말을 섞었고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각자 할말을 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이것이 프랑스식 대화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프랑스인들은 듣는 것보다 말하는 걸 좋아한다. 듣는다는 개념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들으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택시에서 내린 내 눈앞에 보인 건 공사중이라서 다 뒤집히고 엉망이 된 인도와 도로였다. 숙소가 분명한 건물의 현관 앞에서는 한 흑인 사내가 노상방뇨를 하고 있었다. 나는 말문이 막혀 그를 쳐다봤다. 내 손에는 캐리어의 손잡이가 쥐어져 있었고 다른 손에도 캐리어의 손잡이가, 어깨에는 가방이, 다른 어깨에도 가방이 걸려 있었다. 남자는 오줌을 누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고 그는 미소 지었다. 파리에 온 걸 환영합니다, 뭐 이런 미소였다. 그리고 오줌은 계속 현관을 향해, 벽을 향해,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쏟아졌다. 거리에는 약간 경사가 있었고 얕은 물길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는 흔들림이 없었다. 언제까지 눌 생각이지…… 나는 가방을 들고 기다렸다. 화장실에서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다시 공쿠르역으로 돌아가자. 첫날의 아픈 기억은 어느새 사라졌고 나는 친구들과의 즐거운 여행에 조금 들뜬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지하철 창구 직원은 백인 여성이었는데 우리에게 잔돈을 집어던졌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가 뭘 잘못했나? 아니었다. 나중에 사람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이것 역시 파리의 문화였다. 파리의 모든 지하철 창구 직원은 돈을 집어던진다. 미국식 친절함 따위는 잊어버려! 여긴 파리야! 

―제 고향은 파리인데 아무도 여기가 제 고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요. 

나는 정연씨와 상우씨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측은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이제 그만 정신 차릴 때도 되지 않았을까. 파리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잔잔히 나를 괴롭혔고 나는 천천히 적응했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이야기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나와 금정연과 이상우는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고 거리에서 인종차별을 당했으며 줄을 설 때마다 새치기를 당했다. 동전 던지기 역시 매번 이어졌다. 물론 호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나중 이야기다. 

그러나 그럼에도 파리는 나의 (정신적) 고향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격차 때문에 파리에서의 경험이 더 극적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비교해보자. 파리에 비하면 베를린 사람들은 천사에 가까웠고 런던은 편리함으로 무장한 초현대도시였다. 파리는 퉁명스러웠고 냄새났으며 작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인종적인 격차나 갈등이 눈에 띄게 보였다. 그런데 도시는, 특히 19세기에 이미 완성된 도시의 형태와 디테일은 다른 곳과 비교되지 않았다. 발터 벤야민은 1929년 보그 독일어판에 무기명으로 기고한 『거울 속의 도시―작가들과 화가들이 ‘세계의 수도’ 파리에 바치는 사랑의 고백들』에 이렇게 썼다. “세상 모든 도시 중에 파리만큼 책과 완벽히 하나가 된 도시는 없다.”

그러니 파리에서 스탕달 신드롬을 겪은 건 필연적인 일이다. 내가 십대, 이십대에 영향받은 텍스트의 대부분이 파리와 연관된 것이었고 나는 (과장을 조금 보태) 파리의 모든 곳에서 역사를 볼 수 있었다. 상우씨는 이렇게 말했다. 

―지돈씨 관광가이드 하면 잘할 듯.

―……


1차 스탕달 신드롬은 마들렌 사원에서 왔다. 우리는 오페라가르니에역에 내려 마들렌 사원을 지나 콩코르드 광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상우씨, 저 스탕달 신드롬 온 거 같아요. 

내가 말했다. 마들렌 사원을 올려다보는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지붕의 조각이 머리 위로 떨어져내릴 것 같았다. 고소공포증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기분이랄까.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울렁거렸다.  

―아무래도 코린트식 기둥 때문인 것 같아요.  

내가 (비틀거리며) 말했다. 상우씨와 정연씨는 햇살 때문에 찌푸린 건지, 그냥 찌푸린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멀뚱히 보고 있었다. 

―더워서 그런 거 아닐까요.  

상우씨가 말했다. 

그러나 1차 스탕달 신드롬은 서막에 불과했다. 2차 스탕달 신드롬은 황당하게도 마가렛 호웰 매장에서 왔다. 콩코르드 광장에 가는 길에 들른 매장에서 나는 마가렛 호웰과 바버의 콜라보 재킷을 입었고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꼈다. 정연씨가 물었다. 

―마가렛…… 호웰이 뭐예요, 지돈씨?

나는 자칫하면 파리에서의 한 달 생활비를 다 쓸 뻔했지만 정연씨의 질문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파리에 온 지 이제 겨우 이틀 지났어, 정신 차리자. 상우씨가 나를 위로했다. 앞으로 기회 많을 테니 다음에 사요.  

그러나 콩코르드 광장에서 정신을 차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들렌 사원에서 광장으로 걸어가는 길 양옆으로 고급 호텔과 상가들이 즐비했다. 나는 관광객처럼(관광객이지만) 주변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들어갈 수 있는 매장은 하나도 없어 보였고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길은 현기증을 증폭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자동차와 오토바이들은 가차없이 달렸고 인도와 도로를 구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걸어간다기보다 자석에 붙는 쇳가루처럼 콩코르드 광장으로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광장에 들어서자 그 느낌은 몇 배로 강해졌다. 우선 길을 건너야 하는데 어디로 건널지 알 수 없었다. 차들은 빵빵거리며 회전 교차로를 돌고 오벨리스크와 분수대를 종횡했다. 유럽에서는 차들이 보행자를 존중하고 클랙슨도 안 울린다면서! 나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한 말이 사대주의의 콩깍지임을 즉각 눈치챌 수 있었다. 파리 사람들은, 최소한 콩코르드 광장의 운전자들은 보행자 따윈 안중에도 없다. 광장 중앙의 오벨리스크로 가려면 날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정신을 잃은 건. 왜냐하면…… 나는 어느새 콩코르드 광장의 중앙에 서 있었기 때문이고, 시야에는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 루브르와 튈르리, 그랑 팔레의 지붕과 앵발리드와 센강이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고, 포석 위로 올라오는 열기와 번쩍거리는 금빛 조각상들, 사방에 펼쳐진 광경들로 인해 다시 정신을 잃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돈씨, 지돈씨.

정연씨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말하고는 근처의 여신상에 몸을 기대고 휴식을 취했다. 상우씨와 정연씨는 약간 떨어져서 나를 멀뚱히 보며 사진을 찍었다……  


반면 1948년 11월 11일 파리에 도착한 제임스 볼드윈이 콩코르드 광장에서 본 건 폭력과 피의 역사였다. 그는 콩코르드 광장을 지날 때마다 사형수 호송차가 도착하는 소리, 군중의 함성을 들었고 오벨리스크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기요틴을 봤다. 제임스 볼드윈은 파리에 놀러 온 게 아니었다. 그는 미국의 인종차별을 피해서 파리로 도망쳤다. 검둥이인 자신이 뉴욕에 계속 살면 둘 중 하나였다. 누구에게 죽든가 누구를 죽이든가. 

흑인이자 동성애자였던 작가 제임스 볼드윈은 삼중의 아웃사이더였다. 피부색 때문에 미국 주류 사회에서 멸시받았고 동성애자여서 흑인 커뮤니티에서 억압받았으며 게이 커뮤니티에서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다. 그는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파리에서 보냈고, 파리에서 지내는 동안 미국적인 그 어떤 것도 그립지 않았다고 썼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코니아일랜드, 데일리 뉴스, 타임스 스퀘어…… 그것들은 원래 없던 것처럼 기억에서 사라졌고 다시 못 보게 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미국적인 것이 아닌, 내면에 쌓인 관계는 그리웠다. 가족과 조카들, 할렘의 일요일 아침과 프라이드치킨, 흑인음악과 세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그들 고유의 스타일. 검은 얼굴이 닫히고 검은 눈이 바라보는 모습, 검은 얼굴이 열리는 모습, 모든 곳을 비추는 것 같은 빛이 그리웠다. 

제임스 볼드윈은 가난과 차별에 분노하고 악에 받친 작가 지망생이었으나 투덜거리기 좋아하는 백인 남성 작가 솔 벨로가 보기엔(그도 작가로 성공하기 위해 파리 체류중이었다, 당시는 야심 있는 예술가 지망생이라면 모두 파리로 향했다) 보부아르-사르트르 커플의 호위를 받으며 카페 플로르나 되 마고에서 놀고먹는 흑인 놈팡이에 불과했다. 솔 벨로는 에이전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파리와 볼드윈에 대해 이렇게 썼다. “빼어나게 아름답지만 예상치 못한 영역에서 야만적입니다. 계산적인 정서에서 말입니다. (…) 지미 볼드윈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완전히 빈털터리에 염치없이 남한테 빌붙어 살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제임스 볼드윈은 파리를 충분히 활용했다. 당시 파리 사람(백인)들은 미국과 달리 흑인을 냅뒀고 심지어 매력을 느꼈으며 특히 중산층 지식인들이 푹 빠진 재즈에 덕분에 가끔 찬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949년 5월 제1회 파리 국제 재즈 페스티벌에 참여한 마일스 데이비스는 이렇게 말했다. “파리는 내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영원히 바꾸어놓았다. 나는 파리에 있는 것이 너무 좋았고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방식도 너무 좋았다.”) 

제임스 볼드윈이 파리에서 처음 쓴 글은 「만인의 저항소설Everbody’s Protest Novel」이라는 에세이였다. 테미스토클레스 호에티스라는 B-17 폭격기 무전병 출신 그리스계 미국인이 편집장으로 있는 영어 문예 비평지 『제로』의 창간호에 실린 에세이로 그는 카페 되 마고의 2층에서 이 글을 썼다. 「만인의 저항소설」은 발표 즉시 화제를 모았다. 볼드윈은 에세이에서 저항소설의 창시자이자 자신의 후원자이며, 『제로』에 글이 실리게 소개해준 선배 흑인 작가 리처드 라이트를 비판했다. 저항소설은 희생자의 이미지만 강화하며 무엇보다 태생적으로 감상적이다, 검둥이에게 잘해라, 유대인에게 잘해라, 그런 유의 소설에 제임스 볼드윈은 질렸고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흑인다운 목소리, 동성애자다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요구는 억압적이다. 그는 특정한 정체성에 고착된 언어가 아닌 언어와 관점을 찾길 원했다. 그것은 몇 배나 힘든 싸움이었고 오해의 연속이었으며 자신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기도 했다. 그러나 그래야만 했다. 자신이 겹쳐 있는 형태의 소수자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정체성을 뿌리내리지 못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해방은 복합적인 문제가 되었다.   

에세이가 발표되고 난 뒤 리처드 라이트와 제임스 볼드윈은 생제르맹 대로의 식당에서 대판 싸우고 관계는 끝장난다. 차별에 더해 후배 작가의 질타까지, 글쓰기에 진절머리가 난 리처드 라이트는 배우로의 전업을 결심한다. 마침 피에르 슈날이 리처드 라이트의 소설 『미국의 아들』을 오슨 웰스가 각색한 각본을 활용해 영화로 만들 예정이었고 그는 주인공으로 섭외되었다. 영화는 문학의 미래다. 레이먼드 챈들러, 노먼 메일러 등 수많은 작가가 그랬듯 리처드 라이트도 그런 착각에 빠졌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그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파리의 모든 것은 식민지 경영의 잔재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말했다. “세계는 상실로 나아가고 있다.”



*이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

그러나 약간의 과장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에는 <I am not your negro>(라울 펙, 2016)와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 좌안 1940-50』(아녜스 푸아리에, 노시내 옮김, 마티, 2019), 『말의 색채』(마르그리트 뒤라스, 유지나 옮김, 미메시스, 2006),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발터 벤야민‧에스터 레슬리, 김정아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8)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