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결국 쇼핑 말고는 할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1

어디서도 말한 적 없지만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었다. 내용보다 연이어 이어지는 쉼표와 문장의 리듬감이 경성 거리를 걷고 말하는 구보씨와 결합되는 방식이 좋았다. 습작 시절 나는 구보씨를 흉내낸 소설을 썼고 제목은 「구스타프와 갈로」였다. 제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낯이 뜨거워지는 소설인데 당시에는 걸작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소설을 쓰는 족족 걸작이라고 생각했다(정신이 좀 이상했던 것 같다). 당연히 소설은 모든 공모전에서 떨어졌고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나를 떨어뜨린 심사위원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 인사를 건넨다……(뽑아준 사람보다 더 고마움.)

여담이지만 작가가 되는 데 가장 필요한 재능은 착각이다. 문장력이 좋거나 머리가 좋거나 인내심이 있거나 책을 좋아하거나 기타 등등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라는 착각이다. 이건 굉장히 슬픈 지점이다. 만약 작가를 만드는 요인이 남다른 언어감각 같은 실질적인 재능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착각과 자신감이라면, 많은 작가들이 왜 그렇게 덜되어먹은 건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뭔가를 해내는 인간들의 성취 중 많은 경우가 단지 자기 확신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세상이 왜 이렇게 엉망인지 알려주는 것 같다. 자기 확신은 완벽한 픽션인데, 사실 인간은 픽션적 존재고 세계(역사)는 픽션의 실현과 재현의 교차로 이루어지므로 픽션에 대한 확신이 그것을 실현시켜주는 원동력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금정연은 모든 재능을 갖추고 있음에도 시인이나 소설가 유의 작가가 되지 않은 전형적인 케이스다. 그는 몇 번이나 소설을 쓰려다 실패했고 그중 한 번은 내가 그걸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보기도 했다. 나는 그가 소설을 완성하길 응원했지만(나도 엮여 있는 계약이었으므로) 그는 결국 실패했고, 지금 생각해보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불확신의 픽션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그는 약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온건하거나 겸손하고 뭔가를 이루겠다는 욕심이나 기분 같은 게 없으며 그래서 주도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들이 이루는 일은 어쩌다보니, 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세계가 확신의 픽션과 불확신의 픽션, 둘로 나뉜다고 했을 때 권력을 차지하는 건 역시 확신의 픽션 쪽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역사라면 그만 끝내야 하지 않을까, 금정연 같은 사람에게 권력이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아쉽게도 정연씨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지돈씨?

물론 그럴 필요는 없다. 세상에 진정으로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게 요즘 생각이다. 필요한 건 단지 필요한 게 있다는 생각일 뿐이고 이 생각이 필요한 이유는 필요한 게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약하자면) 인간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소설가 구보씨가 경성을 걷는 이야기인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한국을 대표하는 모더니즘 소설로 알려져 있다. 자기반영적이고 실험적인 문체, 플라뇌르Flâneur적 시선으로 도시의 소비문화와 인간 군상을 관찰하는 기념비적 소설. 그러나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실제 내용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돈벌이가 시원찮은 성인 남성의 자기 연민이다. 당신이 만약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몰랐거나 소설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첫머리를 떠올려보자. 첫 챕터 제목은 ‘어머니는’이다. 다음 챕터 제목은 ‘아들은’이다. 소설은 변변찮은 아들이 할일 없이 밖을 나가는 모습을 걱정하는 어머니로 시작하며(“어머니는 대체, 그애는, 매일, 어딜, 그렇게, 가는, 겐가, 하고 그런 것을 생각해본다”) 마지막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사랑(“어머니는 그 아들을, 응당, 온 하루, 생각하고 염려하고, 또 걱정하였을 게다”)과 좋은 소설을 써서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겠다는 아들의 결심으로 끝난다(“참말 좋은 소설을 쓰리라”).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 소설은 모더니즘 소설이다……

또한 구보씨는 20세기 문학과 예술에서 중요한 개념이 된 플라뇌르의 한국형 버전이기도 하다. 보들레르에서 시작되어 발터 벤야민에 의해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은 플라뇌르는 도시 산책자, 만보객 등으로 번역된다. 다소 낭만화된 포장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되지만 플라뇌르의 산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산책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에게 산책이 휴식과 여가, 고요하고 평화로운 걸음이라면 플라뇌르의 산책은 산만하고 어수선하며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들이 걷는 곳은 도시의 뒷골목이나 요란한 상가, 백화점이고 가끔은 밤문화와 거래를 맺기도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파리의 도시 문화에서 연유한 플라뇌르는 이성애자 무직(또는 학자나 예술가 같은 얼빠진 직업을 가진) 남성 도시 산책자이며 이들이 관계 맺거나 목적하는 것은 많은 경우 거리의 여성, 그러니까 창녀들이다. 나는 이런 내용을 리베카 솔닛의 책 『걷기의 인문학』을 통해 인식하게 되었다. 아마 플라뇌르를 다룬 다른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일부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책들은 정체성이 핵심이 아닌 것처럼 다룬다. 반면 리베카 솔닛은 챕터 제목부터 ‘플라뇌르, 또는 도시를 걷는 남자’라고 이름 붙였다.

솔닛에 의하면 플라뇌르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에게 추근대는 남자들이다. 루소와 사드의 모방자인 파리의 기인 레스티프 드 라 브르톤은 발 페티시가 있어 예쁜 발을 가진 여자 뒤를 쫓아다녔고 네르발과 보들레르는 인생의 연인이 될 수 있는 여자와 스쳐지났으며(물론 자기들만의 착각) 앙드레 브르통과 필리프 수포의 소설은 주 내용이 우연히 마주친 여자 뒤를 추적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토킹에 가까운 섬뜩한 행동이지만 당시에는 흔한 내용이었다. 유사한 모티프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레오 카락스의 <나쁜 피>에서 드니 라방은 버스에서 마주친 쥘리에트 비노슈의 뒤를 쫓고 구보씨는 전차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성과의 행복을 꿈꾼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와 스쳐 지나가는 상상을 한다. 다시 말해 플라뇌르란 짜증나는 인간형이다……

솔직히 말하면 플라뇌르는 지겨운 개념이다. 도시 산책에 관한 대부분의 글 역시 억지스럽고 따분하다. 플라뇌르의 이중성, 상품과 여성을 소비문화로 누리면서도 산업화의 속도를 거부하고 도시의 숨겨진 가능성을 발굴하는 저항적인 태도는 의미화하기엔 너무 궁색하다. 예술을 하는 사람 중에 소비문화를 누리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으며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런 걸 이중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도시 산책도 그렇다.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드는 도시의 미로 같은 골목과 상점들 속에서 환각과 희열, 공포를 느끼는 ‘아해’가 되기엔 내비게이션과 지도 앱이 너무 발달했다. 핸드폰 앱만 작동된다면, 새로 생긴 가게가 을지로 어느 구석에 짱박혀 있어도 귀신같이 찾아내는 게 요즘 사람들이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고 도시는 뼈째로 발라 먹혔다. 이제, 아무도, 도시에서, 현기증을, 느끼지 않는다. 



 The Southdale Center in Edina, Minnesota in 1950s. Minnesota Historical Society

 

몰Mall은 원래 우아하게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의 단어다. 그런 몰이 현재의 쇼핑몰이 된 건 1950년대의 일이다.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일명 ‘아메리칸드림 건축가’ 빅토르 그루엔이 도심 공동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상한 것으로 1956년 완성된 미네소타주 에디나시의 사우스데일 센터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퀴퀴한 냄새나 시끄러운 차량, 위험한 행인들에게서 벗어나 상점 사이를 우아하게 산책하듯 걸어다닐 수 있는 쾌적하고 세련된 쇼핑의 신전, 소비의 왕국. 비엔나 출신의 유럽인 그루엔이 처음부터 이런 걸 구상한 건 아니었다. 그는 전설적인 산업디자이너 페터 베렌스 아래서 시작한 사회주의자 출신의 건축가였고 몰의 최초 구상에는 고향인 비엔나의 황금기에 대한 추억이 스며 있었다. 공공장소가 부족한 삭막한 세상에서 미국 사람들을 구출하자! 그들이 안락하고 편안하게 교류하며 만나고 대화하게 만들자!    

 세계는 좋은 의도를 무참하게 짓밟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심지어 의도가 선할수록 부작용은 더 크다. 그러므로 현대예술에서 의도 자체를 폐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무튼 쇼핑물은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끊임없는 비판 속에서도 계속해서 더 크고 화려하게 지어지고 있다. 나는 스타필드가 처음 생겼을 때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백화점과 쇼핑몰에 질리고 가든파이브나 신촌 밀리오레처럼 버려진 좀비몰이 도처에 존재하며 연남동, 망원동, 성수동, 을지로가 유행하는데 저런 철 지난 몰이 되겠어? 지금은 포스트-몰 시대 아닌가. 그러나 웬걸, 미세먼지가 한반도를 덮쳤고 스타필드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새롭게 지어진 백화점들은 몰과 편집숍의 개념을 적극 차용해 끝없는 전성기를 이어간다(렘 콜하스의 OMA에서 설계한 갤러리아 광교점은 코로나19 바이러스에도 불구하고 매일 1만에서 2만 명이 방문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의 파리에 아케이드가 있었다면 지금의 대도시에는 쇼핑몰이 있다. 웹에는 인터넷 쇼핑몰이 있고 서점에는 아마존과 쓰타야가 있으며 미술관에는 테이트모던과 MoMA, MMCA가 있고 사람들의 집에는 에어컨과 핸드폰이 있다. 모든 곳의 쇼핑몰화. 쇼핑이 없는 곳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케이드에서 쇼핑몰로 흐름이 넘어오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에어컨의 발명이다. 몰의 도시이며 렘 콜하스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 중 하나인 싱가포르의 경제 발전 원동력이 된 것이 에어컨인 것과 마찬가지로, 에어컨은 산책로와 도시 산책자를 인공 속에 자리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이다. 그리하여 에어컨이 세상을 지배하였다, 라고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람들은 인공적인 것이 흥하면 자연적인 것에 끌리고 자연적인 것을 누리고 나면 다시 인공을 찾아간다. 안타까운 건 자연/인공 모두 인공이라는 사실이다. 에어컨이 실내를 장악하고 있지 않은 도시의 골목과 공원에도 에어컨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편하게 쉴 인공적인 공간이 존재할 때에야 자연은 여가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한다. 그러므로 도시에 사는 사람은 몰에 가지 않아도 몰의 그림자 속에 살고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렘 콜하스의 출판물 『도시 프로젝트』에 대한 리뷰인 「미래 도시」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실제로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거대한 쇼핑몰을 건설하는 것에 더 가깝다.” 

나는 지난가을 파리에 세 달간 체류했다.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간 것으로 신청 당시 계획서에는 구보씨와 파리의 플라뇌르를 연결하는 구상이 담겨 있었다. 20세기 초반 서울과 파리의 모더니스트들을 중첩시킨 후 그들의 젠더와 인종적 한계를 사유하여 현대적 의미의 플라뇌르를 재발명한다. 계획서에는 루이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 필리프 수포의 『파리의 마지막 밤들』 같은 초현실주의 3대 저서와 발터 벤야민, 프란츠 헤셀,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가 번갈아 나오고 이들의 의의와 문제를 짚으며 남성 화자라는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며, 현대도시의 개념을 새롭게 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여기서 렘 콜하스와 제인 제이콥스 등장), 등이 포함될 예정이었지만 시간의 부족으로 모든 것을 담진 못했다. 그렇지만 대략 그런 말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운이 좋았는지 선정되어 파리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구상이 명확해진 건 파리에서 돌아온 이후이다. 100년 전 구보는 돈이 없었고 소설을 잘 쓰고 싶었으며 아내를 원하는 이성애자 남성이었다. 지금의 나는 어떨까.

 

1. 돈이 있다 or 없다

2. 소설을 잘 쓰고 싶다 or 그렇지 않다

3. 아내를 원한다 or 원하지 않는다  


만약 이 셋 모두 아니라면 이것이 도시와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과 결합되었을 때 무엇을 탄생시킬 수 있을까, 이 세 요소는 예술과 정치, 사회, 역사에서 어떠한 가능성/불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