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회

[무궁화의 개화 시기는?]

성규의 메시지에 답장하지 못하고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나는 준섭과 마주앉은 채로 얼굴은 마주보지 못하는 중이었다. 답장도 하지 못하고 마주 보지도 못하고 아무튼 그 순간만큼은 뭐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인간인 것 같았으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준섭이 나를 정인아, 하고 불렀을 때 그를 바라보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너랑 있어야만 세상이 편안해.

준섭이 말했고 기름이 묻은 손은 그대로였다. 나는 그것이 계속해서 거슬렸고 잃어버린 리모컨이라든지 열쇠라든지 설탕이 어디 있는지 궁금했다. 열쇠는 회사에 있을 수도 있고 설탕은 안 샀는데 사두었다고 착각한 것일 수도 있었으나 선풍기 리모컨은 잃어버렸을 리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이 집 안에 있어야 했다. 나는 준섭이 모아둔 폐건전지함에 든 건전지의 수를 헤아려보다가 텔레비전을 켜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보았고 준섭은 일어나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나는 내게 지금의 마음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상의 것이 아니라면 다른 것이 필요한 게 확실한데.

같이 가자.

같이?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준섭이 소리 없이 웃었다. 준섭은 작은 식탁 위에 있던, 남은 치킨과 접시들과 포크를 치웠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와 두 개의 잔에 따랐다. 하얀 거품이 넘쳐 잔을 타고 흘렀고 맥주는 십 분의 일쯤이었으려나, 나머지는 전부 거품이었다. 나는 어디선가 나타난 아주 작은 모기, 혹은 초파리 한 마리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너무나도 빨라 잡을 수 없을 것이었지만, 그게 사라졌다가도 자꾸만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가득찼던 거품이 흔적만 남기고 가라앉았다. 나는 다시 잔을 채웠다. 준섭은 영애이모가 작년인가 넉넉하게 준 것이라면서 냉동실에서 호두며 아몬드를 꺼내왔고 우리는 마주앉아 차갑고 딱딱한 것들을 먹었다. 나는 베트남에 가려고 하는, 베트남에 갈 수 있는 준섭이 부러웠다.

넌 이제 괜찮구나.

?

넌 정말 괜찮은가봐.

준섭은 정말 괜찮은 것 같다고, 정말 그런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가 이미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왜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대여섯 평 정도 되는 원룸 안에서 나는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왜인지 내 세상은 평안하지 않고, 그러니까 나는 아직 아니라는 것을 덕분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을 때 성규가 새벽안개를 들이마시며 와, 씨발 이거 맛있네, 라고 말하였다. , 너도 나처럼 해봐, 라며 눈을 감고 크게 숨쉬기를 반복하며 걸었다. 성규는 내가 선물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가만있어보자. 안개가 몸에 나쁜가?

?

뿌옇잖아.

뿌옇긴 한데 구름 같은 거 아닌가.

몸에 좋은가?

구름이?

촉촉하니 상쾌하다.

성규와 걷는 길 오른쪽으로 활짝 핀 무궁화들이 쭉 늘어서 있었는데 저멀리 비탈까지 가득했다. 나는 괜찮다와 괜찮지 않다 사이를 오가며 성규를 따라 새벽길을 걸었다. 적당히 젖은 흙이 밟기 좋았다.

정인아, 구름 속에 있다고 생각해.

성규가 말했고

아니지, 진짜 구름 속인 거지.

라고 덧붙였다. 안개가 구름 같은 거라면 진짜 구름 속에 있는데도 그렇다고 생각이 되질 않았다. 어쩌지 난 영 되질 않는데, 했더니

그런데도 그렇게 생각이 안 되는 거면 그냥 길을 걸어라. 푸하하하하하하.

성규가 길게 웃기에 왜인지 마지막엔 조금 따라 웃게 되었다. 조금 웃었으나 나는 내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으므로 그냥 길을 걸었다. 식품 공장들과 반듯한 논을 지나면 한강 하류였다. 일요일이었지만 이른 시간부터 몇 대의 트럭이 공장으로 들어갔다. 성규와 나는 트럭이 지나갈 때 길을 비켜주면서 한강을 향해 걸었다.

[벌써 갔어?]

준섭으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고 [가지 말까?]라는 메시지가 왔다. 나는 여기까진 올 수 있지만 거긴 못 갈 것 같았고 아니면 안 가고 싶었다. 나는 거길 가려고 하고 갈 수 있는 준섭이 부럽고 싫었다. 나는 그의 거의 모든 것을 좋아했으므로 오히려 정확한 감정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못 가는 것인지 안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채로 두 시간 넘게 걸어와 강가를 따라 쳐 있는 철조망 앞에 다다랐을 때는 해가 떠 있었다. 근처 밭 주인의 것으로 보이는 농막이 있었고 농막 옆으로 벤치가 있었다. 여길 오려고 한 건 아닌데 걷다보니 와 있었다. 가끔 차로만 지나치던, 강 너머로는 다른 도시가 있는 곳이었다. 벤치에 앉았더니 철조망 너머로 흐르는 강을 코앞에서 볼 수 있었다. 성규가 가방에서 막걸리 한 병을 꺼냈다. 아침 햇살, 아침 햇살. 성규가 막걸리와 떠오르는 해를 가리키며 말했다. 성규의 커다란 검은 가방 안에는 막걸리 두 병과 두꺼운 책들이 들어 있었다. 컵은 없다며 성규가 막걸리 한 병을 건넸다. 마침 배가 고파왔으므로 안주도 없이 막걸리를 마셨다.

에헤이, 성격도 급하지.

성규가 가방에서 작은 반찬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빨간 김치전이 있었다.

넌 말은 좀 없는 편이지만 성격은 급하지.

성규가 그렇게 말하며 김치전이 든 반찬통을 내밀었다. 컵도 없고, 젓가락도 없지만 막걸리랑 김치전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였다. 새벽 네시 반에 일어난 성규의 아버지가 부쳤다는 김치전을 먹는다. 햇살이 빠르게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왜인지 종일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불어난 강물이 빠르게 흐르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와, 진짜 빠르다, 왜 저렇게 빨라, 봐봐, 엄청 빨라, 하고 있을 때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뭐하는 거요!

밭 주인인 것 같았다.

아침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성규가 말했다.

아침을 왜 남의 집에서 먹냐고!

, 선생님 벤치인가요?

이 사람들 뭐 훔친 거 아녀!

, 아니에요! 앉기만 했어요!

밭 주인이 혀를 끌끌 차며 가란 뜻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성규와 나는 기름이 묻은 손을 어쩌지 못하고 엉거주춤 일어나는 시늉을 하였다.

휴지 있어?

없지. 컵도 젓가락도 휴지도 없어

우리는 각자 옷에 기름이 묻은 손을 대충 닦고 막걸리병을 들고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주인의 뒤에 대고 외치고는 술을 마시며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존나 웃기네.

성규는 껄껄 웃었다.

성규야.

. 껄껄.

평범하게 살고 싶다며.

. 껄껄.

평범하게 살고 싶다면서 이게 뭐야.

. 이렇게 웃고 사는 게 평범한 거지.

성규는 아직 웃는 중이었고 나는 성규와 세 시간을 걸어 보건소에 앞에서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엔 텅 빈 보건소 주차장에 앉아 잠시 쉬었는데, , 씨발 모자를 두고 왔다, 며 성질을 냈다. 봐봐, 정인아. 다시 갈 수 없을 만한 곳에 무언가를 두고 오고 가끔 성질을 내며 사는 것도 평범한 거 아니겠니. 성규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 독서실로 갔다.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었으나 보건소 문은 닫혀 있었다. 그리고 다시 헤어지기는 싫다고 준섭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을 때 나는 좀 복잡한 심경이 되고 말았는데 다시라는 말보다는이라는 한 글자에서 내가 어제부터 어렴풋하게 가지고 있던 확신이 그대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