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회

이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다음에는 복숭아를 같이 따러 가자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멀지 않아요. 세 시간 반.] 세 시간 반쯤 가는데 어떠냐고 묻는 것도 좋지만 멀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유진씨와는 사오 년 전쯤 모임에서 만났다. 유진씨는 겉으로 보기에는 호기롭고 호탕하고 호방한, 아무튼 豪자가 잘 어울리면서도 그렇지 않았다. 유진씨는 가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듯한 느낌을 풍기곤 했는데 찬미 언니에게서도 종종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휴대폰을 내려놓자 그제야 매미 울음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거실로 나갔다. 엄마는 건강주스를 만들어 먹고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참은 뒤에 테이블에 놓인 내 몫의 주스를 마셨다. 건강을…… 챙긴다. 남들처럼 텔레비전에서 본 방법을 메모해두었다가 장을 보고, 맛은 없지만 몸에 좋다는 주스를 만들어 먹고, 누군가와 복숭아를 따러 가자는 약속을 하면서 여름을 보내고 있다. 혼자서는 어려웠을 것이란 생각을 자주 한다. 정말 어려웠을 것이라고,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 몫의 건강주스를 만들어 집을 나섰다. 버스정류장 근방에서는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위험해 보였던 보도블록을 해체하고 있었다.

공터에서 짐을 내린 뒤에는 잠시 매장 안에서 찬바람을 쐬기로 하였다. 사장님과 후배는 오늘 새벽부터 일을 시작해서 평소보다 일찍 마칠 것 같다고 하였다.

숨을 참고 드시면 좀 나아요.

내가 말하자

그 정도인가요?

사장님이 물었고

전 맛있는데요?

후배가 말했다. 사장님이 한 예능프로 얘길 꺼내며 어제 보았느냐고 물었다. 종종 보는 프로그램이어서 전에도 얘길 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보지 못했고 후배는 다 마신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보았다고 대답했다. 컵 가장자리에 초록 띠가 남았다.

울었지?

어우. .

그 프로가 슬플 일이 있나요?

어우. . 어제 한 명이 마지막 방송이었어요.

나도 울었다.

사장님이 말했다.

그게 되게 슬프더라구요.

사장님이 내게 말하곤 컵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아마 많이들 울었을 거예요.

후배도 컵을 들고 사장님을 따라내려가며 말했다.

잘되어서 그만둔다고 하니까 좋지만 아무래도 슬픈 거야.

전 저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울었어요.

이 양반아.

두 사람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근방에 생긴 코다리식당 사장님이 찾아왔다. 사장님 말대로 곰탕집과 코다릿집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업했다. 우리는 떡을 얻어먹었고 식당엘 가서 한 번씩 식사를 했다. 식당 사장님은 하얀 털을 가진 몰티즈 한 마리를 안고 들어와 혹시 이 개 본 적 있느냐고 물어왔다. 내가 본 적이 없다고 하자 처음 보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개들을 본 적이 있거든요.

여기 공터에 자주 나타나는 개는 갈색이고요, 하얀 개는 처음이에요.

그래요?

. 그 갈색 개도 여기 개는 아니고요.

이를 어쩐다.

식당 사장님이 매장을 나가고 나는 계단을 뛰어내려가 공터를 둘러봤다. 갈색 털을 가진 개도 아이들도 없었다. 사장님만 호스를 든 채 세척작업이 한창이었다. 저멀리서 환희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기다란 풀을 들고 걸어오는 것을 보았고 나는 매장으로 돌아와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저는 왜 태어났을까요?

아래층에 전시된 사무용 의자에 앉아 환희가 물었다. 나는 좀 놀랐지만 무슨 뜻으로 물은 것인지 모르겠어서 다만 환희를 바라보았다. 그애는 매장을 둘러보며 의자를 빙그르르 돌렸다. 나는 그 와중에 판매용 의자라서 일어나자고 말했고 환희는 순순히 일어나 나를 따라 올라왔다.

어제 애들 왔었어요?

어제 못 봤어.

흐음.

무슨 일이 있었어?

그건 말하기가 조금……

그래.

해리는 엄청엄청 부잔데요, 머리가 왜 그렇게 기냐면요, 머리를 길러서 아픈 친구들한테 준대요.

환희는 갑자기 해리 이야기를 꺼냈다. 환희의 말대로 해리라는 아이는 머리카락이 허리를 넘길 만큼 길었는데 염색도 파마도 하지 않은 머리카락이라고 한다. 나는 해리라는 아이와는 따로 말을 해본 적이 없었고 아는 것이 없어 달리 대꾸를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준희는요, 학원을 좀 많이 다니고 음, 애가 여려요. 환희는 준희에 대해서도 한마디를 하였다.

준희가 너보다 어려?

아뇨. 여리다구요.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고 환희는 더 할말이 없는 것 같았으나 왜인지 딱히 가지 않고 매장 안을 돌아다녔다. 달리 방해는 되지 않아 그대로 두었으나 위험할 수도 있고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물건은 만지지 않을 수 있지, 라고 하였더니 몸을 똑바로 세워 경례를 하듯 오른손을 이마에 갖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