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

6
한여름에 들어서고부터는 매장 안도 에어컨 앞이 아니면 푹푹 찔 정도가 되었다. 공터에 모여 노는 어린이들은 종종 매장에 들어와 에어컨 바람을 쐬었고 일에 크게 방해되지는 않아 사장님도 아이들의 출입을 괜찮아했으며 매번은 아니지만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을 채워두기도 했다. 
오후에는 아이들에게 소다맛 쭈쭈바를 나눠주었다. 아이들 모두 꼭지를 따지 못해 내가 따주었다. 누가 먼저 내게 꼭지를 맡길지 순서를 정하는 데도 몇 개의 게임을 해야 했는데 나는 그걸 지켜보는 게 좋았다. 마지막 순서였던 준희가 쭈쭈바 꼭지를 내게 건네고는 지난주에 영어학원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전해왔다. 저희 엄마랑 동갑이셨거든요. 그러니까…… 동갑 아시죠? 선생님 나이가 저희 엄마랑 같으셨거든요. 준희는 쭈쭈바를 내려놓고 원장선생님께 그 얘길 들었는데 기분이 몹시 이상하고 슬펐다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를 보면 슬프기도 하고요. 에어컨 앞에서 땀을 식힌 아이들이 차례로 쭈쭈바를 받아들고 나갔으므로 매장 안엔 준희뿐이었다. 꼭지를 딴 아이스크림을 받은 뒤에 바로 나가지 않아 왜 그런지 물었더니 처음엔 우물쭈물 하다가 얘기를 꺼내놓았다. 준희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비밀로 해달라고 말하면서 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하고 싶었다고 하였다. 근데 엄마한테는 말 못했어요. 나는 준희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애가 다시 쭈쭈바를 손에 쥐고 매장을 나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유진씨의 연락을 받았다.

여기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하면서 유진씨가 등장했다. 휴일이었고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유진씨와 걷다가 환희네 집을 지났다. 파란 지붕 아래로 다정한 마당이 들여다보였다. 익어가는 포도나무 옆으로 늘어선 장독대 위에는 각기 다른 생김새를 한 마을 고양이들이 올라앉아 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침부터 곧 비가 내릴 듯이 무거운 하늘이었고 한여름 같지 않게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날이었지만 아직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환희 할머니가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은 날이 이래서 아무것도 못해. 어디 간대요?  
이 넘어 산에요. 할머니 산소. 
금방 비 올 텐데. 
괜찮을 것 같아요.   
비 떨어지면 국수나 말아먹어야지.
네. 맛있게 드세요. 
환희의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연신 하늘을 바라보며 걱정되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우산은 있어요.
비 쏟아지면 흙이 미끄러울 건데.
조심할게요.
할머니는 얼른 가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유진씨와 나는 산 입구를 향해 걸었다. 입구까지의 길은 얼마 전 포장되어 걷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성묘도 성묘인데, 이런 날 저런 마당에서 잔치국수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요. 유진씨가 말했고 나는 문득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유진씨 할머니의 산소에는 이름 모를 흰 꽃들이 돋아나 있었다. 주위로 달맞이꽃과 개망초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우리는 달맞이꽃과 애기똥풀까지는 구분해냈으나 산소에 자라난, 꽃대가 무척이나 긴 흰 꽃의 이름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발로 해도 된대요. 발로요? 네. 된대요. 근래 몇 차례 내린 비로 군데군데 흙이 조금 허물어져 있었으므로 우리는 손과 발로 무덤을 다듬었다. 
어떻게 지냈어요? 
그냥 평범하게 지냈어요. 
오, 요즘 제일 힘든 거네요. 
뭐가요?
평범하게 사는 것.
유진씨는요? 
저도 그런 편이에요.
좋네요.
영원히 살면 행복할까요?
유진씨가 내가 사온 생화 다발의 위치를 바꿔보며 물었다. 
아니지 않을까요.
왜요?
모르겠어요. 그거 할머니가 좋아하실까요?
그럼요. 
꽃을 살 때 꽃집 주인 아주머니가 어떤 꽃을 좋아하셨느냐고 묻기에 모른다고 했더니 그럼 어떤 색을 좋아하셨느냐 물으셨는데 또 몰라서요, 제가 좋아하는 색으로 샀어요. 
저도 너무 좋아하는 색이에요.
다행이고 좋네요. 
저도요.
산소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또 이렇게 다듬어본 건 처음이에요.
정인씨 공원묘지에 살잖아요. 
보기만 했지 경험해본 적은 없었거든요.
바로 옆에 살아도.
네. 바로 옆에 살아도요.  
나는 왜인지 기분이 좋았고 유진씨는 할머니에 대한 짤막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유진씨의 할머니는 사십 년 넘게 시장 골목에서 신발가게를 운영하셨는데 늘 주판으로 계산을 하셨다고 하였다. 계산기보다 빨랐지요. 유진씨가 말했고 아,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자기가 성냥을 갖고 놀다가 가게에 불을 낸 적이 있다고 말하며 놀란 눈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청난 일이었네요. 완전히 홀라당 태워먹었거든요. 살았네요. 다행히 다 살았어요. 유진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때를 떠올리는 듯했다. 습한 기운을 머금은 무거운 바람이 한바탕 불고 지나갔다. 바람에 날린 나뭇잎 몇 개가 다리에 달라붙었다. 우리는 달라붙은 나뭇잎들을 그대로 두었고 꽃대가 긴 흰 꽃을 뽑아 한쪽에 쌓았다. 
이 꽃도 예쁘네요.
할머니 돌아가시고 쭉 그 가게를 비워두었었어요. 
가게를요? 
아무도 안 한다고 해서. 
네. 
그래서 제가 하려고요.
유진씨가요?
네. 이달 말까지만 일하기로 했어요. 
생각이 많으셨겠어요.
시골로 내려오려니까 생각이, 많았어요. 정말…… 많았어요.
정말 많았을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고 유진씨는 왜인지 근처에 버려져 있던 빛바랜 플라스틱의자에 앉았다. 부서질까 염려하며 엉거주춤 앉고서는 괜찮은지 내게도 이리로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유진씨의 옆에 앉았다. 아마도 그건 파란색, 이건 빨간색이었던 것 같았다. 우리는 손등으로 땀을 닦으며 아무데나 바라보았다. 
돈 못 벌겠죠? 
유진씨의 질문에 내가 웃자 유진씨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적자면 어떡하죠? 하늘에 대고 묻기에 그래도 하고 싶나요, 했더니 그런데도 하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부터 거기 가서 신발 살게요.
오, 정말인가요?
정말이에요. 
어쩐지 안심……이라고 유진씨가 말했다. 
좋은 걸 많이 들여놔줘요. 
그건 자신 있어요. 
자신 있다 싶으면 걱정이 피어오르고 걱정이 커진다 싶으면 자신이 생기더라고, 그 두 마음은 별개이자 하나인 것 같다고 말하며 유진씨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유진씨가 일어나자마자 의자 다리 두 개가 부러졌다. 와우! 유진씨가 눈을 크게 뜨며 뒷걸음질을 쳤다. 살았네요! 네, 살았어요. 
내려오는 길가에 여기도 무덤이, 하면서 보았더니 강아지풀이 언덕 위에 동그란 군락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었다. 유진씨와 나는 어디선가 나타난 개 한 마리를 따라 산길을 내려왔다. 우산을 두고 왔다는 것은 다 내려와서 알았는데 다시 올라가진 않았다. 
환희는 포도나무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몸을 흔들거나 나무를 툭툭 치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우리를 발견하곤 손을 높이 들어 아는 체를 했다. 왜 놀러 나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정인이와 싸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공터에 모이는 아이들 중 하나가 나와 이름이 같았다. 환희의 할머니는 마당 한쪽 가마솥에서 물을 끓이고 있었다. 국수를 삶을 거라며 먹고 가라고 했는데, 유진씨가 머뭇거렸다.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전 빈손인데 초면에 밥을 얻어먹나요, 하기에 나도 어쩔 줄을 몰랐다. 
정인씨, 여기 가까운 슈퍼 얼마나 걸리나요? 
한 십오 분이요? 
그래요? 
네.
그럼 뭐 배달되는 거 없나요?  
여기까지는 도넛 가게 한 곳만 배달이 와요.
도넛 좋죠. 
유진씨가 도넛을 주문하겠다기에 내가 주문을 했다. 할머니가 끓는 물에 국수를 넣었다. 가마솥 안에서 국수가 하얗게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습하긴 한데 이상하게 시원하네요. 유진씨가 말했고 우리는 마당에 앉아 국수를 먹었다. 묵은 김치를 얹어가며 먹었더니 몇 번 젓가락질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릇을 싹 비우고 말았다. 
다 먹었을 무렵 도착한 도넛을 놓고 나오는데 할머니가 호박잎을 많이 땄다며 손에 들려주었다. 호박잎은 거절 못한다며 유진씨가 봉지를 받아들었고 환희는 초코 도넛을 입가에 묻힌 채로 내게 다가와 가게를 가느냐고 물었다. 쉬는 날이지만 버스 타러 가는 길이니까 갈 수는 있는데 왜 그러느냐고 묻자 공터에 친구들이 있는지 봐달라고, 내일 말해달라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였다. 
무슨 얘기예요?
매장까지 걸어오는 길에 유진씨가 묻기에 공터 사인방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해주었다. 길게 난 길 양 옆으로 벼들이 한창 자라고 있었다. 유진씨는 이런 장면은 오랜만에 본다며 휴대폰을 꺼내 사진 몇 장을 찍었다. 허수아비가…… 밀짚모자를 쓴 농부의 모습이 아니라 거의 좀비 수준이네요! 꿈에 나올까 무서워요. 나는 그런가, 생각하며 조금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꿈에 나왔어요.]
[좀비 허수아비들이요.]
[네. 그들이요.]
[어떻게 나왔나요.]
[같이 놀았어요.]
[뭐하면서 놀았나요.]
[넓은 공터에서 같이 술 마시고 노래했어요.]
[어땠어요?]
[엄청 재밌었어요.]
[다행이네요.]
[좀비들이 휴대폰이 있더라고요. 전화번호도 주고받고 친구가 됐어요.] 
유진씨의 문자메시지에 잠에서 깼다. 그러고 보니 나도 꿈을 꾼 것 같았다. 나는 한때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던 그 꿈을 기억해내려 눈을 뜨고도 한참을 그대로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