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이제부터 하는 얘기는 지금까지 한 얘기보다 더 별게 아닌 얘기지만.

.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어요. 코감기에 걸린 후였는데요, 몇 번 코피를 쏟고 난 뒤여서인지 안쪽에 딱지가 생겼더라고요. 세수를 하며 그걸 떼어냈는데 몇 시간이면 또 얇은 딱지가 생겼어요.

나으려고.

. 나으려고 그랬나본데 전 그걸 못 참고 또 떼어내고 말았어요. 하루만 참아보자, 했지만 몇 시간 지나면 또 딱지가 생겼는지 확인해보고 떼어내고, 또 확인해보고 떼어내고요.

찬미 언니는 다 마신 맥주캔을 손바닥 위에 뒤집어 보였다. 한 방울의 맥주가, 그리고 잠시 후에 또 한 방울의 맥주가 언니의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겨우 이만큼 됐으려나? 나중에는 이 정도도 안 될 만큼의 피만 비쳤는데도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계속해서 딱지를 떼어냈어요. 저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왼쪽 코가 부은 채 세 달을 보냈어요.

세 달 동안 계속 그랬나요?

. 멈출 수가 없었어요. 한심하죠?

아니요.

아니요, 라고 말한 뒤에 나는 그때를 떠올렸고 언니는 말을 이었다. 부드러운 저녁 바람이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코뿐만 아니라 입안에 상처가 났을 때도 그랬어요. 계속 혀로 상처를 건드렸죠. 역시 몇 달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그러니까 귀도 팠거든요. 귀는 심지어……

언니는 입술을 꾹 다물고 빈 맥주캔을 찌그러트렸다. 저 왜 계속 이상한 얘기 하고 있죠? 그렇게 말한 뒤엔 혼자서 고개를 젓더니 내 맥주캔을 가져가 찌그러트린 다음 쥐포 과자의 봉지를 접고 후후, 입으로 바람을 불어 테이블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땅으로 떨어뜨렸다.

혹시, 심지어 몇 년을 팠나요.

어떻게 알았죠.

모르겠어요.

피가 난 뒤에 굳은 작은 딱지를 떼어내고 나면 또 파고 또 떼어내고 또 파고. 이 년 정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봐요.

그걸 건드리지 않으면 안 아픈데 왜 자꾸 건드렸을까, 그게 궁금해요. 떼어낼 땐 시원하지만 금세 다시 아플 거란 걸 아는데요.

알지만 그게 잘.

. 잘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되지 않았어요.

어쩐지 언니의 마음을 넘겨짚고 싶지 않았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들을 받아들이려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언니가 일어섰다. 나는 언니가 주섬주섬 챙긴 맥주캔을 받아 좀전에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시던 곳에 있는 분리수거함에 넣고 언니가 앉아 있는 파라솔로 돌아왔다. 간간이 지나는 차들의 불빛이 잠깐씩 언니의 얼굴을 비췄다. 내 마음이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 같을 때, 정도가 아니라 전혀 되지 않을 때…… 종종 그럴 때가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내 잘못이 되어 있던 때가 있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어야만 되는 때. 갑자기 오는 비도 나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내 잘못으로 만드는 사람 곁에, 피하려면 피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아주 오래 있었다.

정인씨, 몸이 안 좋나요?

?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요.

, 괜찮아요.

갈까요?

. 다음에 또 맛있는 거 먹어요.

뭐 먹을까요.

안 먹어본 것.

, 좋아요.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능이버섯, 시카고피자…… 먹어봤나요?

아니요.

좋네요.

그때까지 밥 잘 챙겨드세요. 여름이잖아요.

, 정인씨도요.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건널목으로 같이 걸어갈 때 언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여름이니까?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푸핫, 하고 작게 웃었다. 언니가 앞문으로 버스에 올라탈 때 뒷문으로 한 사람이 내렸다. 버스는 언니가 자리에 앉기 전에 출발했다. 언니는 급히 손잡이를 잡으면서도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도 재빨리 손을 들어 언니를 향해 흔들었다. 집을 향해 걷는 동안엔 할머니 한 분이 계속해서 내 뒤를 따라 걸었다. 뒤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가볍고 조용한 발소리와 간혹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소리를 들으며 집까지 걸었는데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조금씩 발걸음이 느려지곤 했다.

 

오랜만에 출근을 했더니 게시판에 쌓인 글이 많았다. 스탠드 사나요, 스탠드 파나요, 십 년 된 냉장고지만 새것 같다며 가져가만 달라는 글도 있었다. 나는 사무실 캐비닛을 팔고 싶다는 짧은 글과 함께 첨부된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매뉴얼을 참고해 열심히 코멘트를 달았다.

거의 매일 공터에 오는 한 아이가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 빙수기를 샀다. 나는 진짜 여름이구나, 하였다. 가장 안쪽 라인에 비교적 작은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쪽으로 달려가 이것저것 물건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구경하는 아이의 이름을 할머니가 부르며 제지시켰다. 몇 차례 반복된 호명에 그애의 이름이 환희라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가 환희를 부를 때 희야, 희야 해서 희야인 줄 알았는데 환희였다. 환희는 배를 누르면 삑삑 소리가 나는 동물 모양 장난감들을 갖고 싶어했다.

또 하루 가지고 놀다가 버릴 거면서.

안 그럴게요!

할아버지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빙수기와 함께 환희가 고른 장난감을 계산했다. 실은 나조차도 이걸 사는 사람이 있나, 생각했던 물건이었는데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환희는 쉴 틈 없이 개구리의 배를 누르며 삑삑거렸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팥은 있으니 우유를 사가면 되겠다고 이야기 나누며 내게서 돌아섰다. 빙수기가 가볍지만은 않아 문을 열어주고 보니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슈퍼 쪽으로, 환희는 공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못 보던 갈색 개 한 마리가 공터를 돌아다니고 있기에 누구네 집 개인데 여기까지 왔나, 하다가 평소보다 일찍 집에서 싸온 점심을 먹었다.

사장님은 오후에 물건들을 잔뜩 싣고 돌아왔다. 오전에 일을 돕는 후배가 나오지 못해 내리는 것을 도왔다. 트럭을 가득 채웠지만 큰 물건들이 없어 둘이서도 가능했다.

잘 지냈어요?

, 덕분에요. 잘 지내셨어요?

글쎄요, 뭐라고 해야 할까.

라면서 사장님은 이거, 이거, 이거 같이 내려주면 나머지는 내가 할게요, 하면서 열심히 물건을 내렸다. 같이 물건을 내린 뒤로는 다른 말이 없어 나도 더 묻지 않고 세척 준비를 하는데 출입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와 가게로 뛰어올라갔다.

미안하지만 빙수기가 작동하질 않는다고 환희의 할머니가 말했다.

. 죄송해요. 잠시만요.

나는 빙수기를 작동해보았다. 버튼을 누른 뒤 칼날이 돌아가는 것을 본 할머니는 아까는 안 됐다고 말했다. 작동 버튼이 하나였기에 방법이 잘못된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빙수기가 있는지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은 했으나 방금 내린 물건이어서 바로 판매를 할 수는 없었다.

죄송하지만 내일 제가 댁에 가져다드려도 될까요?

그럼 내일 다시 올게요.

아니에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저 끝에 치킨집 아래 파란 지붕 집이에요.

. 파란 지붕.

점심 전에 와줄 수 있어요?

. 점심 전에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는 수고해요, 하고는 돌아서서 가게를 나갔다. 문을 열어주고서 나 역시 할머니를 따라나왔다. 내려다본 공터에서는 아이들과 갈색 개가 뛰어놀고 있었다.

세척을 마저 하기 위해 공터와 이어진 세척장으로 갔을 때 아이들은 공터와 밭의 경계에 늘어선 작은 묘목들에 물을 주고 있었다. 물론 물은 해동중고 야외 수돗가의 물이었다. 환희와 또 한 명의 어린이가 긴 호스를 두 손으로 잡고 아직 잎이 없어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없는 나무에 물을 주고 있었고 얼마간 떨어진 그늘에 사장님이 쭈그려앉아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얘들아.

사장님이 아이들을 불렀으나 아이들은 대답이 없었다.

얘들아!

아이들이 뒤를 돌아보았고, 그거 죽은 나무야. 사장님이 말했다.

?

그거 죽은 나무야. 물 줘도 소용없어요. 안 줘도 돼.

두 어린이는 호스를 잡은 채로 멀뚱히 사장님과 내 쪽을 바라보았다. 초여름의 오후 햇살이 기울어진 채로 빈틈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래도 줘볼래요.

살아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진 않을 텐데 줘봐 그럼.

사장님은 마치 혼잣말처럼,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고 아이들은 계속해서 그 나무에 물을 주다가 근처에서 한창 자라나고 있는 옥수수와 고추 같은 다른 작물들에도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장님과 아이들 그리고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추밭 위를 날던 잠자리들이 고인 물가를 향해 날아갔다.

어린이들! 이제 줘요. 우리 일해야 돼.

사장님은 아이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이리로 오란 뜻으로 손짓했다. 아이들은 할 만큼 했는지, 일한다는 얘기에 설득이 된 건지 그제야 호스를 들고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사장님도 나도 물을 잠그지 않아 아이들이 걸어온 길 그대로 흙이 젖으며 길을 냈다. 앞장서 호스를 든 환희는 빙글빙글, 호스를 돌려가며 무늬를 만들어냈고 나로서는 도통 어떤 무늬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환희는 그게 재미있었는지 걸어오는 내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