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티셔츠를 당겨 얼굴에 흐른 땀을 닦고 벤치에 앉았다. 목도 마르고 화장실에도 가고 싶지만 더 달릴 수는 없겠다며 잠깐만 쉬어가기로 했다. 날씨 때문인지 저수지의 수면은 평소보다 올라와 있었고 주변은 나무와 풀 냄새로 가득했다. 언니가 여기 이런 데가 다 있었느냐고 묻고 주위를 둘러보기에 나도 그렇게 했다. 간간이 불어오던 바람도 멈춰 그야말로 고요한 풍경이었다

목이 너무 마른데 가방엔 쥐포뿐이에요.

미안해요.

언니의 이마 아래로 대충 닦아냈던 땀이 다시 흐르고 있었다.

시원한 맥주랑 쥐포가 너무 먹고 싶네요.

사올까요.

아버지 보러 가야죠. 잘 못 알아보시지만 매일 갑니다. 하면서 언니는 저수지 중앙에 있는 소나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소나무 끝에 노을이 걸려 있어 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또 매일 가긴 가지만 사실 아주 매일은 아니고요, 언니가 꼬았던 다리를 풀며 말했다.

결국엔 제 걱정만 하고요.

나는 발밑을 지나는 개미들을 좇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는 아빠를 위하는 척하다가, 집에 돌아와 혼자 있을 땐 제 걱정을 합니다.

척이에요?

척은…… 아니네요.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언니가 손등으로 이마를 꾹꾹 눌러보며 말했다. 그러곤 이제 땀이 다 식은 것 같다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이제 뛸 수는 없었고 걸어가기로 한 뒤로는 내가 조금 앞서 걸었다.

별다른 말없이 우동집 앞에 다다랐다. 거기서 길을 건너면 요양원 방향이었다. 배가 고프네요. 언니의 말에 우동을 먹자고 하였더니 그러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작은 이인용 테이블 아래에 가방을 내려두고 앉아 물 두 잔을 연거푸 마셨을 때 화장실에 다녀온 언니가 맞은편에 앉았다. 언니가 물을 마시는 동안 메뉴판을 보았다. 우동을 먹고 싶어서 들어와도 막상 가게 안을 맴도는 짜장 냄새를 맡으면 짜장면을 시키게 되는 우동집이라는 말을 들은 언니가 또 푸핫, 짧게 웃은 뒤에 그렇다면, 전 우동! 하며 우동을 주문했고 나는 짜장면과 만두를 주문했다. 나는 왜인지 언니가 술을 시킬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 소주 한 병도요!

언니와 나는 동시에 술을 주문했다. 주문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음식들이 차례로 테이블에 놓였다. 교복을 입은 학생 여덟 명이 들어오자 작은 가게 안이 금세 꽉 찼다. 짜장면 여덟 개요. , 난 우동 먹을 거야. 그냥 다 짜장면 먹어! 우동 먹을 사람 손 들어요! 주인의 말에 두 명의 학생이 저요! 하면서 손을 들었다. 언니의 어깨 뒤로 주인이 바쁘게 면을 삶는 모습을 보았고 짜장면 여덟 개를 주문했던 학생이 일어나 단무지와 김치를 퍼 테이블로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

아까 그게 두번째 로즈마리거든요.

두번째요?

. 첫번째로 산 로즈마리는 왜인지 금방 죽었어요. 물 주기랑 통풍이랑 아무튼 열심히 했거든요. 로즈마리 키우기를 검색해서 열심히요. 잎이 말라보일 땐 그게 사실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거지 물을 많이 줘서 그런 거라는 그런 글도 봤고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걸로 판단하지 말자, 그런 다짐까지 했을 땐 제가 정말 잘 키울 것만 같았어요. 커지면 분갈이도 해줘야지 하면서 베란다에 있는 화분 중에 하나 골라두기도 했고요

그런데요?

역시나 잎 한두 개가 마르기 시작하더라고요. 옳거니, 나는 알고 있지. 나는 이게 실은 물을 조금만 달란 뜻이라는 걸 알고 있지 하면서 물주기를 열심히 조절했고요, 그래서 나머지는 다 잘 살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었군요.

. 점점 더 많이 그렇게 되었어요. 결국 한 뿌리를 뽑아버렸는데 일주일 있다가 또 한 뿌리도 그렇게 되었고요, 작은 화분이어서 네다섯 뿌리 정도 되었는데 한 달인가 지난 후에는 마지막 뿌리까지 죽더라고요. 그 마지막 뿌리를.

.

그 마지막 뿌리를 버리지 않고 그냥 뒀거든요.

아쉬웠나요?

맞아요. 아쉽고, 미안하고 그랬는데 또 얼마 시간이 지나고 집 청소를 하다가 이제 버려야지 하고 버렸는데.

버렸는데.

버리고 나서 우연히 얼굴을 만지는데 로즈마리향이 나더라고요.

신기하죠.

. 근데 정말이에요?

정말이에요. 신기하더라고요.

그것도 아주 진하게 나더라며 언니는 그때 맡았던 향이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마리 이야기를 들으며 오 분쯤, 십 분쯤 지났을까 식사를 마친 학생들이 우르르 가게를 나갔고 주인이 테이블을 정리했다. 언니와 나는 따뜻해서 맛있네요, 하면서 술과 주문한 음식들을 먹었다.

음식을 다 먹은 후엔 둘 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 근처 슈퍼로 자리를 옮겼다. 대단한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인가 싶어 안심이 되었다. 슈퍼 앞 너른 공터엔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저수지를 향한 방향 한쪽엔 타이어가 쌓여 있었고 그 옆으로 트럭 두 대와 세발자전거 한 대가 서 있었다. 차 열 대는 족히 댈 수 있을 만큼 넓은 곳이었는데 막상 파라솔이 있는 테이블 두 개와 간소한 지붕을 얹은 평상 하나가 전부였다. 우리는 슈퍼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파라솔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이 슈퍼 벽에 기대서서 캔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언니가 자꾸만 쥐포를 만지작거리기에 그건 구워야 하니까 못 먹지 않을까요. 하였더니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보기라도 할래요, 꿩 대신 닭. 하면서 바삭한 쥐포맛 과자를 안주로 맥주 한 캔을 다 마셨을 땐 반쯤 해가 져 있었다. 캔커피를 마시던 두 사람이 트럭을 몰고 떠나고 공터엔 언니와 나, 그리고 평상 아래 자리잡은 고양이 두 마리가 전부였다. 이젠 이 시간에도 이렇게나 밝아요. 그러게요.

정인씨는 형제 있나요.

, 언니가 한 명 있어요.

그렇구나.

.

저는 저 하나예요. 엄마는 제가 아주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고요.

그러시구나.

. 그래서 이제 아빠 돌아가시면 혼자 어떻게 사나 맨날 제 걱정만 해요.

자기 걱정만 하는 게 좀 그런가요?

. 나쁜 것 같은.

언니는 나쁘지 않나요? 하면서 맥주 한 캔만 더 사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네, 좋아요 하고서 근접해 있는 인도에 켜진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았다. 불빛 아래로 커다란 모자를 쓴 할머니가 지나갔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사람 여럿이 지나갔다. 언니가 맥주를 사와서 다시 앉았을 땐 가족으로 보이는 어른과 아이 둘이 슈퍼로 들어갔다.

그런 걱정이 드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나는 언니가 내려놓은 캔맥주를 따서 언니 앞으로 밀어두었다. 언니는 모르겠어요, 하면서 맥주를 마셨다.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 ! 뛰지 마! 쭈쭈바를 입에 문 아이 둘이 공터를 뛰어다녔고 아이들을 따라 나온 남자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야 씨발 이거 한정인 아냐? 올려다보니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재모였다. 야 니가 왜 여기 있어? 재모가 물었고 넌? 하고 물었더니 재모는 턱으로 길 건너 장어집을 가리키며 저녁 먹었지, 라고 대답했다. 아니 니가 여기 왜 있냐고? 재모가 다시 묻기에 씨발 그냥 여기 있으니까 있는 거지 왜 있냐니? 했더니 찬미 언니가 푸핫, 하고 웃었다. 언니는 정말 이상한 데서 웃는구나, 생각했고 재모는 다시 뛰는 아이들을 향해 야! 이리 와! 팔을 크게 흔들며 소리치고는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야 한번 보자! 연락할게! 재모가 말했고 나는 어쩐지 언니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어 대답 없이 언니를 바라보았다.

정인씨, 욕을 잘하네요.

그런가요.

아니, 잘했네요.

언니가 맥주 캔을 가져와 내 캔에 부딪혔다.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유치했나요, 물었더니 저렇게 물어오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하기에 모르겠지만 아무튼 했네요, 대답하고는 남은 맥주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