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비가 또 오나보다.

언니의 말에 창밖을 보니 유리창에 빗방울이 부딪치고 있었다. 잘못 봤나 싶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하하 크게 웃으며 카페 앞을 지나갔다.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있었으나 뒷모습조차 즐거운 듯 보였다. 천둥소리가 몇 번 지나가고 언니와 카페를 나왔다.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비 오는 진해를 걸었다. 거리는 한적했다. 어릴 때도 우리는 같이 우산을 쓰거나 같이 비를 맞았다. 왜인지 옛날엔 갑자기 비가 오는 적은 잘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날이면 교문 앞에 우산을 들고 아이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쳐 언니와 나는 벌을 서는 것처럼 신발주머니를 뒤집어쓰고 함께 집으로 왔다. 하하하 웃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걸었다. 흔한 얘기다. 일을 하고 있었을 엄마는 그럴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물었을 때, 미안하지만 크게 미안하진 않았대. 조금만 미안했고 엄마는 어차피 일터에서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우리가 잘 올 거라고 생각했대.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안 그래도 나 역시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어. 그랬더니? 그것까진 모르겠대. 다행이다. 엄마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다행이야. 왜인지 그 말을 끝으로 약간의 정적이 흘렀고 우리는 순식간에 내리는 비처럼 동시에 푸하하, 큰 소리를 내며 커다란 우산 속에서 웃었고 저녁으로 전을 부쳐 먹자고 얘기가 되었다.

언니 근데 이 우산 말이야.

, 이 우산이 왜?

네 명이 써도 될 것 같아.

그렇지?

뭐 이런 우산이 다 있지?

사람 많은 데선 쓰면 안 될 것 같아.

아무래도.

왜인지 또 한번 동시에 웃은 뒤엔 말없이 걸었다. 어릴 적엔 엄마와 언니가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이 아주 길었던 것 같고 오늘은 전에 없이 많이 웃었던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5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창밖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내기가 끝난 초록 논과 버드나무 몇 그루가 농수로를 따라 이어져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위를 나는 두 마리의 새를 보았다. 빠르게 지나쳤으나 마음은 논에 가 있어서 단정하게 모를 심고 싶다, 모를 심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철퍽철퍽 바닷물이 방파제에 와닿던 곳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한적한 밭들을 지날 때쯤엔 언니네서 받아온 사진 몇 장을 꺼내보았다. 전날 마루에 둘러앉아 애호박을 길게 썰어 부침개를 부쳤다. 양푼이 어디 있더라, 하면서 언니가 스테인리스로 된 양푼을 가져왔고 기름을 넉넉하게 부어 부친 전은 거기에 담겼다. 언니는 한쪽 무릎을 접어세우고 앉아 적당하게 식은 부침개를 손으로 집었고 나는 대충 다리를 펴고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형부가 처제, 양푼을 바라봐야 해, 이때 양푼을 바라보고 있어, 라고 말했고 나는 웃음을 참으며 양푼을 바라보았다. 처제, 웃지 말고 집중해야 해. 카메라를 든 형부가 진지하여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양푼을 바라보았다. 좋았어. 형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김밥이라면 제가 쌀게요. 아침엔 일찍부터 부엌에 나와 있던 형부를 밀어내고 김밥을 쌌다. 이 재능을 여기에 쓸 줄은 몰랐어요. 제가 김밥을 엄청 자주 싸거든요. 지금 자세를 봐서는 김밥가게를 해도 되겠어. 형부와 말을 주고받으며 김밥을 쌌다. 밥에 양념을 할 때 부엌 바닥에 떨어뜨린 깨를 형부가 주우며 이 작은 깨를 보고 어머님이 안심을 하셨던 거군, 하고 말했다. 아무래도 두 개로는 입안이 터질 것처럼 되지는 않아 세 개를 밀어넣고 사진을 찍었다. 마당에서 자라고 있는 작은 나무를 배경으로 하고서였다.

돗자리를 챙겨올걸 그랬네. 지금 보니 우리집엔 돗자리가 없다.

언니가 말했고 어쩔 수 없다며 형부가 국방색 담요를 꺼내왔다. 전날 내린 비가 다 마르지 않은 마당에 담요를 깔고 앉았다.

괜찮아, 잘 어울려.

, 찍자고!

나는 오케이 사인을 받기 위해 여러 번 입안에 김밥을 세 개씩 욱여넣었고 그러느라 몇 분 만에 김밥 한 줄을 다 먹어버리고 말았다. 오래 씹은 다음엔 시원한 보리차를 마셨다. 어릴 적 사진과 조금 전 찍은 사진을 번갈아보며 언니가 말했다

이런 게 유행이라잖아.

그렇구나.

재밌었고, 카메라를 사고 싶다고, 다시 생각했다. 기록하고 싶다. 어떤 순간들을 남기고 싶고 다시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사진들과 쥐포를 챙겨 기차를 타고 서너 시간쯤 달려왔다. 서울역에 준섭이 나와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 잘 있었나요?

아니요.

아니 왜요?

잘 있었어.

싱겁다.

싱겁고, 덥고.

라는 말을 들은 뒤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였다. 거리를 두고 계단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얼음이 담긴 커피나 휴대폰을 손에 쥐고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지나쳐 지하철을 타러 갔다. 월차를 냈다던 준섭은 오전엔 드라마를 보다가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고 하였다. 뭘 샀어? 달걀이랑 휴지랑 사과. 공항철도는 순식간에 도의 경계를 넘었고 우리는 동네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 창가에 머리를 대고 잠깐 졸았더니 내릴 때가 다 되어 있었다. 하늘이 어둑해지며 둥그런 회색 구름이 몰려왔다. 이번주 내내 이러네. 나 우산 있어. 나도. 우리는 안심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우산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 줘도 괜찮을 정도야. 우린 우산이 두 개고 집에 준영이가 준 우산도 많으니까. 준섭이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섭과는 다음날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하고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졌다. 왜 이렇게 바빠? 준섭이 물었고 나는 그런가, 역시 싱거운 대답을 하고 뭐할 거야? 하였더니 보던 드라마를 보면서 사과를 먹을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늘은 여전히 어둑할 뿐, 비는 오지 않았다.

들고 있던 가방이 무겁지 않아 고민을 하다가 바로 독서실로 가는 마을버스에 올라탔다. , 이상하네, 하면서 불과 며칠 사이에 왜인지 낯설게 느껴지는 동네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정말 며칠 전과 똑같은 풍경인가? 생각하니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독서실 문을 열자 적당히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찬미 언니는 데스크를 지키고 있었다. 전화로 상담을 하는 중이어서 눈인사를 한 뒤 한쪽 벽에 기대서 있었다. , 그럼 들러주세요. 전화를 끊은 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정말 오랜만이에요.

. 잘 있었나요?

그럭저럭이요.

저도요.

우리는 목소리를 낮추고 오랜만의 인사를 나누었다. 시계를 확인한 언니가 삼십 분 후에 사장님이 오실 거라고 말했다. 데스크에 작은 화분 하나가 눈에 띄었다. 로즈마리네요. 맞아요. 가끔 손으로 아주 살짝 훑습니다. 그러면 기분이 정말 좋거든요. 저도 한번…… 그러세요. 나는 닿을락 말락 하면서 로즈마리 가까이로 손바닥을 가져갔다. 너무 좋네요. 너무 좋죠? 언니가 속삭이듯 말했고 나는 잠깐 밖에 나가 있겠다고 하였다.

오래되었지만 깨끗한 상가는 겉으로 보기에 그대로였다. 지하 이발소와 일층 빵집과 편의점, 산악회 사무실, 미용실, 삼층 기원과 당구장 모두 그대로였다. 옆 건물 슈퍼마켓과 안경점과 부동산과 중국음식점과 휴대폰 매장 역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얼마간 그 자리에 서서 돌아가지 않는 이발소 간판을 바라보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담배꽁초 몇 개와 콜라캔 하나, 파란색 음료가 조금 남아 있는 일회용 음료컵이 떨어져 있었다. 이발소 옆 넓은 공간은 근처 교회에서 모임 장소로 활용하곤 하는 모양이었는데 이마를 맞대고 들여다보니 오래전부터 비어 있던 듯 글자가 잔뜩 쓰인 종이들과 물이 반쯤 담긴 생수통은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넘어진 의자 위로는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비어 있는 곳들은 꼭 여기가 비어 있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 물건들이 엉망으로 되어 있곤 했다. 다시 계단을 올라올 때는 쓰레기를 주워왔고 마땅히 버릴 데가 없어 독서실에 버리고 손을 씻었다.

가족이 없으셔서 여기 사람들이 장례를 도왔어요.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찬미 언니가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기 상가 앞에서 쓰러지셨거든요.

언니와 내가 카페로 들어설 때 손님들이 나간 뒤로 카페 안엔 우리밖에 없었고 카페 주인은 쌓여 있던 택배 박스를 뜯고 있었다. 그뒤론 내가 사는 집 근처 요양원에 계시다는 언니의 아버지 얘기를 들었고 언니가 해동중고에서의 일상을 물어와 생각이 나는 만큼 대답했다. 독서실을 그만두고는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왜인지 종종 보고 싶었어요.

저도요.

요즘에 취미가 하나 생겼는데요.

뭔데요?

막 뛰어요.

뛰어요?

. 전에는 걷는 건 좋았지만 뛰는 건 싫었거든요. 땀나는 것도 싫고 그래서 여름도 좋아하지 않고요.

.

그런데 변하기도 하나봐요.

나는 시원한 오미자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인씨, 오늘 뭐 신었어요?

하면서 언니가 테이블 아래로 고개를 숙여 내 신발을 보았다.

단화네요.

.

뛸 수 있나요?

뛰어요?

.

사실 전 걷는 건 좋아하는데 뛰는 건 싫거든요. 땀나는 것도 싫고 그래서 여름도 좋아하지 않고요.

푸핫.

찬미 언니가 웃었고 나는 언니가 매번 이상한 포인트에서 웃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요?

그리고 제가 며칠 어딜 좀 갔다가 방금 올라와서 피곤하기도 하고요, 제 가방이 무겁진 않지만 그렇다고 가볍진 않거든요.

그런데요

그런데 같이 뛰어볼까 해요.

. 왜요?

변할 수도 있으니까요.

. 안 변하면요?

그러면 아직은 싫구나, 하면 되죠.

그렇군요.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나는 집, 언니는 요양원이었다. 내가 사는 집에서 요양원은 걸어서 십여 분 거리였고 우리는 길이 갈라지는 곳까지만 함께 뛰기로 했다. 평소에도 한갓진 길이었지만 전용 트랙인 것은 아니어서 조금씩만 뛰기로 했다.

막 땀냄새를 풍기면서 아버지에게 갈 건 아니죠?

아빤데 뭐 어때요.

그런가요.

그럼요.

가다가 저수지에서 한번 쉬면 어때요?

좋아요. 가요.

잠깐만요! 선물이 있어요.

선물이요?

나는 가방에서 쥐포를 꺼내 언니에게 내밀었다. 진짜 생선으로 만든 비싸고 무게가 좀 나가는 쥐포였다. 많이도 들었네요. 그렇죠? 근데 이걸 왜 지금 주죠? 왜겠어요. 언니는 또 푸핫, 하면서 가방에 쥐포를 넣었다. 가방에 책이랑 쥐포가 있네요. 책도 있어요? .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아닙니다. 너무 맛있겠다. 정말 맛있어요. 우리는 남은 음료를 마저 마시고 가방을 맸다. 다 마신 잔을 들고 카운터를 향해 걸어갈 때 주인은 이제야 박스 정리를 마친 듯 숙였던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잘 마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카페에서 나왔다. 우리가 나올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카페로 들어갔다. 구름으로 가득해 어둑했던 하늘은 왜인지 밝아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