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돗자리를 두고 가는 것으로 얘기가 되었다.

잘 두고 가자. 버린 것 같지 않게 잘 두고 가는 거야. 누군가 이 돗자리를 봤을 때 버린 게 아니라 두고 간 걸로 느낄 수 있게.

가능한 거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는 모르지. 모르지만.

모르지만?

그렇게 보이길 바라는 거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언니는 여러분, 이거 쓰세요. 버린 거 아닙니다, 라고 덧붙인 뒤에 돗자리를 조심스럽게 정자 기둥에 세워두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그저 행동을 좀 천천히 하는 것만으로도 왜인지 마음이 전해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어때, 아무래도 세워두는 편이 정성스러워 보이는 것 같지? 언니가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했다. 돗자리를 두고 항구를 향해 얼마간 걷다가는 같이 뒤를 돌아보았더니 다행히도 그냥 버려질 거란 걱정은 들지 않았다.

바닷마을에 도착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아니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해서야 우산도 두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돗자리가 어떻게 보이는지 보기 위해 뒤를 한번 돌아보았는데도 몰랐다. 언니가 카페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뒤에 금방 다녀오겠다며 택시를 타고 떠난 뒤 나 혼자서 걷다가 수협공판장에 들른 참이었다. 건조 매생이와 쥐포 같은 걸 사고 밖으로 나왔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텅 빈 관공서 같은 공판장 로비에 한참을 서 있었다. 한두 사람이 오갔고 문득 이곳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매생이와 쥐포가 든 비닐봉투를 내려다보며 이것 참, 하고 있을 때 계산을 해주었던 직원이 뛰어와 휴대폰을 쥐여주었다. 다행히 아직 안 가고 계셨네요. , 감사합니다. 나는 직원이 준 휴대폰을 받아들고 간이의자에 앉았다. 왜인지 순식간에 졸음이 쏟아져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았다. 어떤 남자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바로 눈을 뜨지 못하고 잠에서 깨려 애쓰고 있는데,

애썼다.

남자가 말했고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잘 자란 것 같아 보이는구나.

아닌데요.

좋아 보이는데.

그 정도는 아닌데요……

가늘게 눈을 뜨자 무릎과 바닥에 떨어진 비닐봉투가 보였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꿈이었구나, 생각하며 휴대폰을 열어보았다. 겨우 십 분쯤이 지나 있었다. 찬미 언니와 언니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서 얼마간은 그 자리에 앉아 눈을 쓸던 새벽을 생각했다. 언니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면 이발소 아저씨의 장례식장에 가 있었을 것이다. 한 번, 찬미 언니와 함께 그 이발소로 내려가 머리를 자른 적이 있었다.

 

근데 말이야.

.

비가 그칠 때까지 정말 공판장에 있었어?

.

흐음.

영업이 끝난 카페 조명을 반쯤 끄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언니가 마지막으로 내린 커피를 마시며 낮에 제빙기가 고장나 슈퍼에서 얼음을 사다 날랐다는 얘길 들었다. 노란 벽으로 된 작은 카페에는 역시 작은 창들이 나 있었는데 십자 모양의 창틀이 예뻐 언니가 마감을 하는 동안엔 물소리를 들으며 그 창틀만 바라보았다.

바닥은 내가 쓸게.

그럴래?

바닥을 쓸고 닦은 뒤엔 창틀 앞에 놓인 선인장 화분들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지름이 야구공만한, 황토색 화분들이었고 선인장은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른 천으로 잔을 닦던 언니가 그것들 전부 모형이라고 말해주었다. 이건 꽃도 피었는데? 물었더니 꽃도 모형이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저기 저 책들도 전부 안은 텅 빈 모형이라고 말하며 카페 한쪽을 가리켰다. 영문 필기체로 제목이 쓰인 몇 권의 책이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미국에서 칠 년인가 살다 왔다는 어린이 손님이 있거든. 여기 바이올린 학원에 올 때마다 들러서 늘 아이스 초코라테를 마시는.

.

지난주에 그애가 와서 저 책을 들춰보는데 안 열리잖아. ? 안 열리네요? 그러기에 그건 아무나 열 수 없는 마법의 책이라고 말해줬지.

모르긴 몰라도 요즘 세상에 마법의 책이라니, 생각하면서 그랬더니 뭐라고 하더냐고 물었다.

안 믿더라고. , 장난감 같은 거네요, 그러더라고.

어린이를 얕잡아봤군.

열한 살이고, 선인장도 모형인지는 아직 모르고.

신기하다.

신기하지?

.

왕자와 거지에서 왕자 역을 맡았던 너라면 믿었을까.

나라면 믿었을 거고, 왕자와 거지가 아니라 외다리 거위야.

왕자는 왕자잖아.

왕자……

나는 왜인지 슬며시 웃고 말았다. 거지 역을 맡았어야 했는데. 아니, 거위 역을 맡았어야 했나. 생각했지만 말로 하진 않았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언니가 화를 내거나, 혹시 슬퍼할지도 모르니까. 화를 낸다는 건 바라는 게 있다는 거고 언니가 바라는 건 내가 그런 식의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가끔 까만 얼굴을 더 새까맣게 만드는 생각…… 어른이 되어도 크게 달라진 것 없이 불쑥 얼굴을 내미는 생각.

언니라면 믿었을까.

물었더니 고개를 저으며 언니가 내 앞에 마주앉았다.

난 안 믿지. 난 어릴 때부터 아무것도 믿지 않았어.

알지. 너무 잘 알지. 속으로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어른이 되어도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시원시원한 말투에 가려져 있지만 나는 언니에게 공허함에 가까운 감정이 있다는 걸 알았다. 언니와 나만 공유할 수 있는 감정, 엄마와 언니만 공유할 수 있는 감정, 엄마와 나만 공유할 수 있는 감정. 그리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고 오래 고인 물처럼 썩어버리는 감정이 있다는 걸 알았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 말이야.

.

아기를 가지면 어떻게 될까.

?

미국에서 칠 년 살다 왔다는 아이 말이야.

.

별명이 미소천사거든.

잘 웃는구나.

. 잘 웃어.

언니, 정말 아무것도 안 믿어?

그 순간 언니와 내가 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언니와 나만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삼대가 함께 운영하는 근처 떡 가게 주인이 남은 떡을 나눠먹자며 영업이 끝난 카페 안으로 들어오면서 아주 잠깐이게 되었다. 아까 문 닫지 않으셨어요? 언니가 물었고, 아니에요, 불만 꺼놨고 안에서 일하다가 이제 닫으려고 해요. 떡 가게 주인이 대답했다. 언니는 주인에게 나를 소개했고 나는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아유, 멀리서 오셨네요. , . 동생분이랑 언니랑 똑 닮았네요. 떡 닮았나요? 왜인지 초면에 헛소리가 나왔는데 떡 가게 주인이 크게 웃어주었다. 언니가 직접 담근 오미자청을 내밀었고 주인은 아유, 과하다며 손을 내저었다. 떡을 자주 주시잖아요. 더울 때 시원하게 해서 드세요. 주인이 마지못해 작은 유리병에 담긴 오미자청을 받아 나가며 잘 먹겠다고 말했다.

저분도 미소천사시다.

그치?

. 그러니까 언니, 아기를 가졌단 말이지?

떡을 감싼 랩을 매만지며 언니가 떡이 아직 따뜻하다고 말했다.

언니, 어제 술 마시지 않았어?

안 마셨어. 너만 마셨어.

나는 곰곰이 어제 저녁식사 자리를 떠올려보았으나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생각은 온통 언니에게로 가 있었다. 나보다 더 놀란 것 같은데 그 정도로 놀랄 일이야? 왜 그렇게 놀랐는지…… 집에 가서 토론해볼래? 언니가 물었으나 이번에는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