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돌아온 토요일에 독서실 일을 마치고 나오다가 성규와 마주쳤다. 이모네에 가져갈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조금 서두르던 참이었다.

, 계단에서 뛰면 위험하다.

. 맞는 말이야.

하고 돌아서는데

야야, 잠깐만.

하면서 성규가 불러 세웠다. 평소에는 인사만 하는 것이 다여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하였다.

.

오늘 날씨 너무 좋지 않냐.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날씨가 좋은가 생각했으나 우리가 서 있는 계단참은 어두웠다. 별 대답을 하지 못하고서 다만 싱겁다고 생각하며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성규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뭐가 그렇게 급한데?

아냐, .

너 돈 좀 있냐.

그건 왜.

왜냐하면.

.

여기선 한 달에 얼마 받아?

무슨 일 있구나.

. 귀신.

매번 나를 귀신 취급하는 성규가 표정을 바꾸며 말을 이었다.

그렇긴 한데 간단히 응, 아니, 로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냐.

무슨 일일까 하며 성규를 바라보았고 조만간 이야기 좀 하자고 하기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가를 빠져나와 마을버스 정류장을 향해 뛰었다. 성규의 말대로 요 며칠과 빛이 달랐다. 하늘을 보느라 하마터면 버스를 놓칠 뻔한 것을 겨우 올라탔다. 버스 안에는 운전기사와 나를 포함해 네 사람이 있었고 내가 내릴 때까지 아무도 더 타지 않았다. 타 시도의 경계를 향해 적당한 속도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시속이란 것을 생각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빛과 풍경은 잔잔하고 지금 이 버스는 위험하지 않다. 그런 생각을 다짐처럼 하였다.

 

엄마와 아몬드와 호두로 강정을 만들었고 적당한 통에 단단하게 담았다. 우리는 괜히 옷을 좀 차려입었고 약속한 시간에 늦지 않게 출발했다. 정오가 막 지난 시각이어서 어디든 햇빛이 가득했고 바람은 부드럽고 선선하였다.

막상 우리 생일 때는 아무렇지 않은데 남의 생일에 괜히 설레네?

엄마도 그래?

.

왜지?

그러게.

아무튼 오늘은 이렇게 날이 좋다.

엄마가 말했고 아무리 봄이라고 해도 이렇게 좋은 날은 몇 되지 않다는 말에 그렇다고 생각했다.

부드럽다 바람이.

어릴 적에 네 피부도 엄청 부드러웠다.

웬일로 옛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너무 오래전 이야기를 들으니 어쩐지 쑥스러웠다.

내가 그랬나.

그랬지.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취학 전으로 보이는 아이와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우리 뒤로 줄을 섰다. 문득 아이를 바라보았고 아이는아빠, 나 눈 감을 거야라고 말하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 라일락색의 카디건을 입은 여자아이였다.

버스에 올라타서는 엄마와 따로 앉았다. 우리 뒤로 버스에 올라탄 아이가 남자 대신 버스카드를 찍었다. 만약 같은 곳에서 내리게 된다면 아이가 벨을 누를지도 모르니 미리 누르지 않고 기다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종종 버스에서 벨을 누르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다. 그러면 아이들과 같이 있던 어른은 너무 빨리 눌러서도 안 되고 너무 늦게 눌러서도 안 된다며 벨을 누를 타이밍을 알려주곤 했고 어쩌다 누군가 먼저 벨을 눌러버렸을 때 우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엄마가 몸을 돌려 말했다.

예전에는 버스 뒷문에이라고 쓰여 있었거든.

.

정인이 네가 그걸 보고는엄마, 저거 거꾸로 하면 곰이야그랬었는데.

.

딱 한 번 그랬었는데, 그 장면이 왜 그렇게 잊히질 않는지 그게 신기해.

그게.

. 가르쳐주지 못했었거든.

가르쳐줬으니까 알지 않았을까.

안 가르쳐줬어.

에잇.

아무튼 그때 기분이 무지 좋았다

엄마는 다시 몸을 돌려 앞을 보았고 나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네 정거장을 지나서 라일락색 카디건을 입은 아이는 스스로 벨을 누르고 버스카드를 찍었다. 단말기에 카드가 제대로 닿지 않아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다. 엄마와 나는 각자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좀 돌아가는 버스였는데 나는 그게 좋았다.

돌아간다.

돌아서 이모네로 간다. 영애 이모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 집에 살았으므로, 내게도 그 집에 얽힌 기억이 있다.

그 마당 안에서만큼은 왜인지 자유롭게 뛰어다니곤 했다. 고추장과 된장이 담긴 장독대나 낮은 콘크리트 담벼락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마당에선 언니와 기하와 셋이서 숨바꼭질이나 팔방치기도 했다. 아주 낮은 담이었는데도 이곳은 안전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이 놀다보면 일곱시 이십분에 그 집 아버지가 주황색 대문을 열고 나타났다. 아저씨는 아침에 나갔던 자신의 집에 돌아왔을 뿐이었는데 나는 아저씨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자기 집에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이 맞나 싶지만 나타난 것이다. 언니와 나는 기하의 아버지를 아저씨라고 불렀으나 뒤에서 이야기를 할 때나 그랬지 실제로 그를 부른 적은 없다. 공장 일을 마친 아저씨는 늘 정확한 시간에 바깥바람과, 또 희미한 담배 냄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기하는 쥐고 있던 돌멩이를 내팽개치고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기곤 했는데 언니와 나는 멀뚱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필 기하가 술래를 맡았을 때는 우리를 찾지 못하는 줄 알고 기다리다가 남의 집 장롱 안에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면 어쩐지 약간은 서글픈 마음이 되었고 긴 길을 걸어서 언니와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는 별다른 말없이 내 손을 꽉 쥐고 걸었다.

언니, 빨리 집에 가고 싶어.

나도.

우리는 가로등 하나 없는 지름길을 택해 발소리를 죽이고 걷곤 했다.

일단 발소리를 죽이고, 아무 말도 하지 마.

없는 척을 해?

. 그러면 위험하지 않아.

.

무서우면 내 손을 더 꽉 쥐어. 그게 신호야.

. 언니도 그렇게 해.

우리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꽉 쥐고 걸었다. 골목 어귀 가로등 아래 서 있는 엄마의 실루엣을 확인하면 그제야 서로의 손을 놓았다. 왜 울어? 엄마가 물으면 그냥 울기만 하였다. 아무 일도 없었으나 나는 울었고, 울음을 그치고 나면 마주하기 두려운 감정과 직면하지 않아도 되었다. 엄마는 방안에서 우리의 손을 주물러주었고 이제 피가 통한다, 이제 피가 통해, 비로소 마음을 놓고는 손을 쥐었다 펴면서 안심을 하였다. 그런 날엔 셋이서 라면을 끓여 나눠먹었다.

자개장.

이모네 안방에는 자개장이 있었다. 그 자개장이 아직 있다. 언니와 기하와 나는 자개장 앞에 나란히 앉아 학과 사슴과 거북이를 찾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빤히 알았으므로, 언니가 자개장에 그려진 것들 중 하나를 외치면 그걸 먼저 찾는 사람이 승자였다. 나는 그 게임을 조금도 즐기지 못하고 기를 쓰고 이기려 들어 종종 기하를 울리곤 했다. 기하는 가끔누나, 왜 그런 거에 목숨을 걸었었어?”라고 웃으며 그 게임에 대해 얘기하곤 하고 나는 그럴 때마다 속으로만 복잡한 심경이 된다. 그 게임의 승자가 됨으로써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오히려.

오히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도리어, 라고도 생각했다.

오히려 진 것 같은 기분.

도리어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런 기분은 서둘러 처리하였다. 나는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도리어, 두 개의 단어를 반복해서 쓰다보면 문득 글자들이 이상하게 보이면서 묘한 기분이 될 수 있었다. 이상한 짓을 하고 있네? 엎드려 여섯 음절로 깜지를 만들던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언니가 말했고 나로서는 여러모로 뿌듯했는데 그러다 결국 바보, 소리를 들었다. 바보라니. 똑똑한 거 아닌가 하면서 혼자서 토라지곤 했다. 한 방에 살았으므로 숨어서 하기도 어려웠겠지만 그럴 생각까지는 못하였다. 나는 한참 더 해야 기분이 풀릴 것 같은데 그만해, 이제, 그런 말을 들었으므로…… 토라졌는데 최근에는 그런 나를 바라봐야 했던 어린 언니의 기분을 짐작해볼 때가 있다.

 

세상에.

이모가 꽃다발을 받고 말했다.

세상에나 말이다.

이모는 놀랐다고 한다. 꽃다발을 받은 적이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꽃다발이라는 건.

. 꽃다발이라는 건.

이런 걸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 줄 알았거든.

따로요.

.

어떤……

대단한 사람들.

대단한 사람들이요?

. 내가 나를 위해서 산다는 거는 더 말이 안 되고.

그거야 그렇지.

아무래도.

나는 뭐 모종을 받아본 적은 있어도 꽃다발은 처음이거든.

이제 대단한 사람 된 거지 뭐.

엄마가 이모를 향해 말했다. 딱히 바라는 거 없이 살아왔는데 이런 일도 다 있고 살아볼 만하다며 이모는 한참 동안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엄마도 그런 이모를 편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엄마와 눈이 잠깐 마주쳤는데 그러자 어쩐지 조금 멋쩍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아무튼 진작 왜 이런 일 한 번이 없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는, 만들어온 간식거리들을 마루에 내려놓고 세나와 인사를 하였다. 세나는 내 무릎 위로 올라와 몇 번 몸을 움직이고는 자리를 잡았다. 이모는 부엌으로 가 엄마와 나에게 얼음이 가득 담긴 커피를 내왔다. 다행히 요즘 세나에게 달리 특별한 일은 없다고 말해주었는데 이제는 아픈 개가 되었기 때문에 아프다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설명이 따랐다.

이제는 이렇게 된 거지.

조금 다른 마음으로 또 살아봐야지.

이모와 엄마가 한마디씩 하였고 유리컵 안에선 얼음들이 짧게 맑은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새삼 엄마와 이모는 살면서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해왔을까 하였다. 살아야지, 가 아니라 살아봐야지,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란.

그런 마음을 갖는 건.

그 둘은 아주 가까이 있지만 동시에 아주 멀리에 있는 것 같다 생각하면서 커피를 마셨다. 주변에서 날아온 나무의 씨털들이 마당이며 마루 위를 떠다니고 있었고 세나의 숨이 고요한 것이, 잠이 든 것 같았다. 떠다니는 씨털들을 좇고 있자면 곧 잠이 들 것만 같은 한낮이었다.

그 한낮의 풍경 속으로 기하네 가족이 도착했다. 기하와는 내가 돌아온 뒤로 종종 마주치는 적이 있었지만 유진씨와는 결혼식 때 인사를 나눈 뒤로 본 적이 없어 거의 초면이라 할 만했다. 유진씨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관계는 아닐 텐데 편안하게 우리를 대해주었다. 부부의 아이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세나를 좋아했으나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다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세나가 다가가면 뒤로 물러나며 자기들끼리 웃곤 했는데 음식 준비를 하는 사이사이 돌아보면 어느새 세나에게 조금 다가가고는 또 자기들끼리 웃었다.

좋은데 무서워요.

지아가 말했고 기하와 나는 여덟 사람이 앉으면 알맞은 교자상을 작은 방에서 마루로 옮겼다. 조금씩 붙여 깔면 방석 아홉 개를 깔 수 있었다. 세나는 방석과 자기 집을 오갈 것이다. 엄마가 허리를 숙여 행주로 상을 돌며 닦았다. 그 위로 음식들이 올랐다. 어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 지아와 지수까지 부엌을 오가며 수저를 놓았다. 지아가 태어나고 딱 한 번, 지아를 안아본 적이 있었다. 이름도 짓기 전이었을까? 이 집의 마루에 앉아 기하가 잠든 지아를 안고 있는 것을 골똘히 보고 있던 때였다.

사람이 태어난 거야

기하가 말했고

잠을 자는 거고.

.

살아 있는 거야.

조금씩 움직이는 지아의 속눈썹을, 그전까지는 전혀 느껴본 적 없는 묘한 기분으로 한동안 지아와 기하를 바라보았다. 나는 문득 그날을 떠올리며 유진씨와 두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고 그러던 중에 준섭이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