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가만히 그런 상상을 해볼 때엔 영 자신이 없지만 이곳에서는 누구도 내게 뭐라 하지 않는다. 나만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요즘엔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내가 가진 많은 것들 중에 이런 마음도 있는 것뿐이다. 나는 무엇도 잊으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어릴 적에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녔다. 어느 날엔 크레파스로 색칠을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지우개로 지웠다. 분명 쓰지 말라고 했지만 선생님의 눈을 피해 몰래 지우개를 썼다. 잘못된 것을 고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는데 지우면 지울수록 번져가서 혼자 진땀을 빼고 있었다

지우개를 썼구나. 어렵겠지만 수습을 해보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고

다른 색으로 덮어보자.

선생님이 말했다. 내가 파랗게 번진 도화지를 덮겠다고 고른 색은 노란색이었다.

노란색으로 덮어지려나 모르겠는데.

하지만 나는 손에서 노란색 크레파스를 놓지 않았고 선생님은 잠시만, 이라고 말하더니 새 종이에 파란색 크레파스를 칠한 뒤 지우개로 지워 보였다. 꾸덕하고 미끌미끌하게 번지는 걸 바라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얼른 노란색으로 칠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주변의 친구들이 그림을 그리던 손을 멈추고 모두 몸을 돌려 나와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내게 이제 칠해보라고 말했다. 파란색은 노란색으로 덮어지지 않았다. 나는 노란색 크레파스를 내려놓았다.

어떤 색으로 해야 덮어질까.

남색을 골라 꼼꼼하게 번진 부분을 칠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새로 그려도 돼. 마음에 드니?

……

괴로움이라는 단어에 다른 단어를 입혀볼까 했던 적도 있지만 그대로 부르기로 했다. 괴로움은 괴로움으로, 이런 나는 이런 나로. 하지만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나요. 누군가가 말했고 그렇더라도 다만 미워하지만 않기를 속으로 바랐던 적이 있었다. 미워하는 일은 괴롭지만 나름의 재미가 있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러고 있던 적이 많았으므로.

 

파마를 마친 할머니가 아이고 십 년은 젊어졌다, 하며 파마비를 계산했다. 그러곤 한쪽에 놓여 있던 모종들을 보고는 하나에 오백원이냐고 물었다. 나는 네, 하고 대답을 했다.

얼른 옮겨 심어요.

좀 시들어서요?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더워 힘이 빠진 것인지 사온 모종들의 잎이 시들시들했다. 얼른 땅에 심고 물을 주어야겠다며 이모가 정리를 서두르기에 나도 하던 청소를 마무리했다. 가는 길에 이모가 기하네와 같이 식사를 해도 괜찮겠느냐고 해서 준섭에게 물어보았더니 좋다고 대답하였다. 토요일 점심을 먹자고 얘기가 되었다.

이모네로 가는 길엔 골목을 지나면 또 골목이 있고 갈림길을 지나면 또 갈림길이 있다. 큰길만 벗어나면 모두 흙길이다. 복잡할 것 같지만 집이 다 다르니 길 찾기가 더 쉬워 이제는 이모네 말고도 이 집엔 누가 살고 저 집엔 누가 사는지도 대충 알게 되었다. 나는 네모반듯하게 구획된 도시에서 오히려 같은 길을 빙빙 돌거나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도 다음 블록인가 하여 못 찾는 경우가 많았다. 새 주소가 떡하니 쓰여 있어도 그랬다.

여기는 집마다 다 텃밭이 있네.

집이 크든 작든 텃밭은 다 있다.

삼월이 온 뒤로 그 길을 걸으면 집마다 딸린 작은 텃밭에 몇 가지 채소들이 심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엄마와 내가 사는 동네의 연립들에도 입구나 옥상에 직사각형 플라스틱 화분이나 스티로폼 박스, 둥그렇고 깊이가 있는 붉은색 고무통들을 모아두고 무엇이든 길러 먹는 집들이 있는데 엄마는 길이나 텔레비전에서 그런 풍경을 볼 때마다 텃밭이 있는 작은 집에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도 저렇게 해볼까 물었을 땐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직접 땅에 채소를 길러보고 싶어. 면적은 좁아도 그 아래는 한없이 깊을 거잖아. 그런 땅에 채소를 기르고 싶거든.

그런 깊은 땅에.

. 넓은 것도 싫고. 그래, 집은 없어도 되는데 한 평짜리 텃밭만 있었으면 좋겠네. 그게 꿈이네, 하였다.

아이고. 하여간 소박하기로는 따라올 자가 없네. 일등이야.

언니가 한 마디로는 안 되겠는지 두 마디를 보탰다.

대문 앞에 단단히 놓인 맷돌석에 앉아 이모와 엄마가 흙을 고르고 모종을 옮겨 심는 것을 보았다. 엄마는 모종삽을 꼭 쥐고 작고 굵은 손으로 마지막까지 열심이었다. 다 된 것 같은데 그러고 있었다. 엄마의 옆얼굴과 작은 삽을 쥔 손과 무릎을 골똘히 보았다. 나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옆얼굴과 손과 무릎 덕에 자라났겠다, 생각하며 그냥 계속 엄마를 보았다. 이모는 이래 심으나 저래 심으나 이 정도면 됐다고 손을 털었는데 엄마는 그 작은 땅을 고르고 또 다지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고추는.

안 매운 거랑 매운 거랑 다 샀어.

잘했다.

뭐가 매운 건지는 모르고.

그건 모르고.

자라봐야 알겠다.

.

자라봐야 알 수 있다.

어디선가 자꾸만 좋은 향이 날아와 어떻게 된 일인가 물었더니 이모가 얕은 담 너머 옆집에 라일락이 몇 그루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 집에 세들었던 사람들이 심어놓고 떠났는데 아마 저 집까지도 향이 날걸, 하면서 건넛집을 가리켰다.  

 

집까지는 걸어서 이동하기로 했다. 묘지공원 진입로와 이어진 야트막한 산에 라일락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거길 가보려는 것이었다. 손에 든 것이 없어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후 햇살이 구도심의 골목들을 데우고 있었다. 이곳은 정말이지 예전 그대로다, 라고 생각하였다. 이곳에 살지는 않았지만 학창시절은 이곳에서 보냈다. 학교며 학원이며 문방구며 분식집이 모두 여기 있었다. 차비를 아껴 스티커를 사거나 떡꼬치를 사먹으려고 집까지 한 시간씩 걸어다녔다. 학원 원장선생님은 내게 원비를 받지 않고 공부를 가르쳐주었는데 그저 학원에 와서 전과 다름없이 공부를 하라고 하였다.

전과 다름없이.

몇 달 원비를 밀린 후였을 것이다. 엄마는 학교나 학원에 온 적이 한 번도 없다. 오학년 때 학원에 가서 상담을 하고 등록을 한 것은 나였다. 그날 학교에서 수학 쪽지시험을 보았는데 0점을 맞았다. 나는 수업을 마치고 수백 개의 계단을 터덜터덜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엄마와 상의도 없이 혼자서 학원으로 들어갔다. 친구들이 가장 많이 다니던 학원이었다. 학원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엄마는 일주일 내내 일을 하느라 너무도 바빴다. 언니가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 방이 두 개인 집으로 이사가야 한다며 일요일도 일을 하던 때였다. 반쯤만 언니와 내 몫이었던 청소나 식사 준비 등의 집안일은 그즈음 방과 후 우리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0점이었다. 나는 0점인 것은 싫었다. 혼자서 원장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가 상담을 하고서 하늘색 원비 봉투를 받아들고 학원을 나왔다. 그날 저녁, 빨간 불 아래서 엄마에게 뭐라고 말을 꺼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칸방 살림 중에도 엄마는 꼬박꼬박 학원비를 내주었는데 중학생이 되고 난 후부터는 밀리기 시작했다. 원비가 비싸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닐 수가 없구나. 여기까지구나. 나는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얌전히 받아들였으며 다시 엄마와 상의 없이 원장실에 들어가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정인아, 다른 아이들에겐 말하지 말고 계속 다니렴.

원장선생님이 말했고

우린 괜찮으니 비밀만 지켜주렴, 하였다. 원장실은 아주 좁았고 둥그런 식탁이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원목으로 된 식탁이었다. 색이 바랜 꽃무늬 식탁보가 씌워져 있었고 그 위에 두꺼운 유리가 깔려 있었다. 책상은 가장 구석에 있었는데 원장실 문을 노크하면 무언가에 열중해 있던 원장님이 일어나 식탁에 나를 앉히고는 둥굴레차와 함께 쌀과자나 누룽지 사탕을 내어주곤 했다. 거기서 처음 둥굴레차를 마셔보았다. 당시엔 그 맛을 알지 못해 입만 대보았을 뿐, 다 먹은 적은 없었다. 아무튼 나는 원장님의 말대로 친구들에게 비밀로 하고 계속 학원을 다녔으나 석 달 뒤에 학원차 운전기사 아저씨로부터 도둑이란 누명을 쓰고 학원을 그만두었다. 어떤 아이가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내가 범인으로 몰려 아이들로 가득찬 학원차 안에서 추궁을 당했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기다란 막대기를 내 코앞에 대고 흔들었다. 정말 아니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내가 빨리 잘못을 인정해야 차가 출발할 수 있다고, 다른 아이들이 기다리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며 손바닥을 들어 때릴 듯이 위협하였다. 잠시 후 나의 가방은 그 아저씨에 의해 뒤집어졌고 문제집과 공책과 필통과 불량식품과 쓰레기 들, 그러니까 당시 나의 모든 것이 쏟아져 학원차 바닥을 뒹굴었다

저는 이제 2등이니까 혼자서 공부를 해도 되겠어요.

원장선생님은 내게 언제든 돌아오라고 말해주었고 나는 왜인지 그동안 감사했다고 말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 1등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면서, 차비로 떡꼬치를 사먹으며 집까지 걸었다. 친구들이 학원을 그만둔 이유를 물었을 땐 무조건 그냥, 그냥이라고만 대답했다. 며칠 후엔 원장님이 전화를 걸어와 그 물건이 차의 구석에서 발견되었다며 미안하다고 어서 돌아오라고 하였지만 왜인지 나는 다시 학원에 가지 않았다. 최근에 나는 이런 사소한 경험들이 누군가에겐 겪을 일이 없는 일 또는 있을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조금 놀랐다. 너무도 사소해서 다들 겪는 일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곤 했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겪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은 흔한 일. 그것은 별거 아닌 일. 너무 많이 들었거든, 그런 이야기는. 그러므로 사소한 일이라는 얘길 들었고 학원이 있던 자리엔 지금은 요양원이 들어서 있다.

엄마, 왜 걸음이 느려졌어?

내 걸음도 빠른 편이 아닌데 곁에서 엄마가 자꾸만 멀어져 물었더니

너 배 안 고프니?

엄마가 물었다. 나는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하였다. 고구마를 먹었더니 매콤한 것이 당긴다고 하여 근처 짬뽕집에 들어갔다.

사실은 말이야.

.

고구마를 먹지 않았어도 매콤한 것은 당겼을 거거든.

언제부터였는데?

그제부터였고.

.

만약 혼자였으면 안 먹고 집에 갔을 터인데.

.

혼자선 국수를 비비기도 귀찮으니 맨밥에 김치나 먹었을 것 같고.

.

네가 같이 있으니 이런 점이 좋구나.

이제 메뉴를 골랐으면 해.

짬뽕집의 메뉴판이 몹시 화려해 아직 먹기 전인데도 입안이며 식도가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메뉴판을 골똘히 보는 엄마의 정수리와 앞으로 쏟아진 앞머리를 보았다. 흰머리가 일 센티미터쯤 올라와 있었다. 얼마간마다 염색을 하지 않는다면 백발일 것이다. 육십이 넘으면 염색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적도 있었지만 얼마 전 염색을 할 땐 그건 또 그때 가봐야 알겠다고 하였다. 왜인지 바빴고 몸도 아파 염색 시기를 놓쳤을 때였는데 아무래도 백발은 좀 그럴 것 같네, 했다. 우리는 길이나 텔레비전에서 우리가 보기에 백발이 어울리는 사람을 보면 와, 하고 감탄하였다. 영 남의 일만은 아닌 것이 나로서도 작년부터 하나둘 새치가 나기 시작했다.

나를 닮았나보다. 하필 이런 걸 닮았네.

다른 거 뭐 좋은 거, 닮을 거 있나.

많지.

뭐가 있나.

나는 서른 넘어서부터 나기 시작했으니 그래도 너는 양호한 편.

엄마가 그렇게 말하며 새치를 뽑아주었다.

나는 백발 되어도 상관없어.

내가 말했고

그래도 나보다는 네가 나았으면 좋겠는데.

엄마가 말했다. 다섯 개까지는 뽑다가 그 후로는 내버려두었다. 머리카락이 길어서 뽑은 새치도 길었다.

엄마는 낙지 한 마리가 통으로 올라간 짬뽕을 골랐고 나는 커다란 갈빗대 하나가 올라간 짬뽕을 골랐다. 짬뽕은 뜨거운 김을 뿜으며 항아리처럼 생긴 뚝배기에 가득 담겨 나왔는데 금방이라도 넘칠 듯한 모양새였다.

아유, 이렇게 많이 주면. 이렇게 많이 주면 이걸 누가 다 먹는담.

엄마가.

내가 집게와 가위를 들어 엄마의 그릇에 올려진 낙지를 자른 다음 갈빗대의 살을 발라 엄마의 그릇 위에 놓아주었을 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그 후로는 말없이 먹기만 하였다. 식사 때와 식사 때 사이였는데도 간간이 손님들이 드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