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정인씨, 무슨 생각 하나요.

아무 생각도요.

그러니까 제 말은 같은 벚나무여도 올해 핀 꽃과 내년에 필 꽃은 다르다는 거거든요.

.

실은 모든 순간순간이 다 그렇고요.

그렇다는 건 알지만.

알지만.

힘들던데요.

.

힘힘, 하며 찬미 언니는 작은 잔에 담긴 고량주를 마시고 젓가락을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투명하고 찐득한 소스가 뿌려진 당근을 동시에 집었다. 사선으로 썰린 얇고 납작한 당근이었다. 나는 당근을 내려놓으며 가만 보니 아는데 힘든 게 아니라 잘 모르겠더라고 말하고는 입을 다물고 짜장면을 먹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젓가락으로 돌돌 말아 한 입에 넣어 꼭꼭 씹었다.

도망을 오고 싶어서 도망을 왔습니다.

, 정인씨, 이리로 도망을 왔나요.

왔어요.

푸핫. 도망을 친 것도 아니고 간 것도 아니고 왔나요.

왔어요.

어디서요.

거기가 어디냐면요.

.

지옥.

푸핫.

진짠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

그런 마음을 먹고서 바로 왔나요.

아니요.

얼마나 고민했나요.

…… 삼 년.

삼 년이나요.

.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요.

어쩌다보니 삼 년이 지나 있었어요.

어쩌다라니.

, 삼 년 반.

어느 정도 미지근해진 고량주를 마셨더니 취기가 올라오는 듯하였다. 직원이 짬뽕 국물과 숟가락을 하나씩 가져다주었는데 국물을 떠먹으려고 보니 숟가락 끝이 찌그러져 있었다. 바꿔줄까요, 언니가 묻기에 고개를 저었다. 그릇 가장자리에 기름이 떠 있는 빨간 국물을, 입술로 숟가락 끝을 가만히 느껴보면서 맛있게 먹었다. 평일엔 한갓진 모습이지만 장날이어서 식당 안으로 끊임없이 사람들이 오갔다.

음식과 술을 다 먹어갈 때쯤 엄마가 채소 모종을 이것저것 사서 이모네 가게로 오라고 하여 장이 서는 곳으로 갔다. 장돌림 장사를 하는 상인들이 여성복을 파는 매장 골목부터 주차장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나는 두 종류의 상추와 고추와 방울토마토와 치커리와 가지 모종을 샀고 가만히 서 있던 찬미 언니도 작은 치자나무를 샀다. 오천원이었다.

이것도 주세요.

하얀 꽃잎을 보니 좋네요, 하면서 줄기와 잎의 모양이 쑥갓과 비슷한 화분을 또 샀다. 천원이라는 말에 놀라 이름도 묻지 않고 샀는데 시장을 빠져나오다가 궁금해졌다. 다시 돌아가 물어볼까 했는데 언니가 휴대전화 카메라 렌즈를 대보았다. 중심부가 노랗고 꽃잎이 하얀 것이 옥스아이데이지거나 마거리트, 둘 중 하나인데 지금 핀 것을 보니 마거리트 같다고 둘이서 결론을 냈다. 화분은 있는지 물었더니 베란다에 빈 화분이 셀 수 없이 많다고 말해주었다.

모두 아버지 것이에요. 그리고.

.

지금 저는 태어나서 화분이란 것을 처음 사보았네요.

.

대단한 일도 아닌데 좋으네요.

좋다고 말하고는 그런데 천원이라니 마거리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표정이 밝기에 미안하지만 좋으냐고 물었더니 미안하지만 역시 좋다는 것이었다. 치자나무와 마거리트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그러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봐서 잘 키워보련다고 언니가 말했다.

지옥에서 살게 할 순 없으니까요.

. 파이팅.

나는 언니와 헤어지고 영애 이모의 미용실로 갔다.

 

열 평 남짓한 이모의 가게에는 이모와 엄마를 포함해 여섯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거울을 마주보고 앉아 이모에게 파마용 습지를 하나씩 건네고 있었고 나머지는 긴 가죽소파에 나란히 앉아 찐 고구마를 먹고 있었다. 끓고 있던 전기주전자에서 가열이 완료되었다는 표시로 탁 소리가 났다. 엄마는 티백 옥수수차를 하나씩 까서 종이컵에 넣고 물을 부었다. 엄마 주변으로 가볍고 구수한 향이 퍼졌다. 화려하지만 빛이 바랜 보자기를 머리에 두른 할머니의 품에 안겨 있던 세나가 내게 아는 척을 하였다. 나는 미용실 한쪽에 모종을 내려두고는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를 꺼내와 구석에 앉았다.

다음 차례는 주머니가 많이 달린 등산조끼를 입은 남자였다. 남자는 쥐고 있던 고구마를 급히 입안에 넣고는 차를 마시다 앗 뜨거워, 하였다. 두 발을 동동 구르는 바람에 미용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고 그러자 문득 나도 웃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오가는 얘기로 그가 파프리카 하우스 다섯 동을 하고 있으며 세나를 이모에게 데려다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에 혼자 있던 세나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얼마간 주인을 찾아주려 노력했지만 그럴 수 없었고 그즈음 이모부를 먼저 보내고 상심해 있던 이모가 세나를 반겼다고 했다.

고맙지. 삼촌 덕에 세나를 만났으니.

나도 너무 좋지. 이렇게 잘 지낼 줄은 몰랐어 정말.

서로에게 좋았네.

그러니 오래 산다.

세나가 운이 좋았다.

여기도 운이 좋았지.

사는 건 다 운이야.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였고 세나는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을 아는지 이모와 남자 쪽으로 관심을 두었다. 나는 어쩐지 약간 멋쩍은 상태가 되어 차를 마시려고 하였으나 종이컵이 똑 떨어지고 없었다. 비품을 모아두는 찬장을 열어보았으나 종이컵은 없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이 있는지 확인하고 이삼 분 거리에 있는 문구점을 향해 걸었다. 날씨가 좋다고, 점심은 무엇을 먹었느냐고 준섭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그러냐며 자기는 지금 거래처 때문에 부아가 나 있고 점심으로는 역시 돈가스를 먹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화를 걸어와서는,

예를 들면 말이야.

.

빨간 단추를 만드는데 빨강도 하나가 아니잖아. 여러 빨강이 있잖아?

.

그런데 우리가 샘플로 준 빨강으로 안 하고 다른 빨강으로 만든 거야. 그래서 그 빨강이 아니다, 샘플을 주지 않았냐, 제대로 다시 그때까지 해줄 수 있느냐고 해.

.

그러면, 만약에 안 되면 아니다 이 빨강이 맞다 우기거나, 날짜가 늦을 것 같으면 그때는 안 되고 언제까지는 된다, 이렇게 말을 해줘야 하잖아.

.

근데 안 된다, 이렇게만 말하는 거야.

?

그러면 다시 물어야 하거든. 질문을 세 개 하면 그 중에 하나만 대답을 하는 거야. 누구라도 부아가 나겠지?

말만 들어도 부아가 난다.

답답하겠지?

답답하겠어.

사정을 잘 설명해주면 늦는 건 조절할 수 있는데 전혀 미안해하질 않더라고 말하며 준섭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준섭은 예전에 똑같은 이유로 우리가 백 번쯤 다퉜던 것은 다 잊은 모양이었다. 지금 기분이 상해 있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하지 않았는데 참느라 혼났다.

문구점에서 종이컵을 사고 맞은편 계단에 앉아 햇볕을 쬐었다. 문구점 옆 건물에 있는 학원과 교습소로 아이들이 간간이 드나드는 모습을 보았다. 문구점과 학원 모두 내가 초등학교 시절 다니던 곳인데 학생 수는 십분의 일쯤으로 줄어들었다는 소식을 예전에 들었다.

하나, , , ,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 문구점 앞에 열 개의 뽑기 기계가 나란히 서 있었다. 어떤 것들은 두 개씩 쌓아 이층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랜덤뽑기를 해보기로 하였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것도 있었는데 뭔지 몰라 흥미가 없었고 주무르면서 노는 과일 모양의 장난감을 뽑으려면 천원이어서 오백원짜리를 두 번 하기로 하였다. 모두 꽝 없는 기계들만 있었다. 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렸더니 병아리 모양의 무드등이 나왔다. 허허, 이것 참…… 나는 자리를 옮겨 가장 끝에 있던 곤충 모형 뽑기를 하였다. 메뚜기가 나왔고,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어느새 뒤에 와 있던 아이 하나가 뭐가 나왔느냐고 물었다.

메뚜기.

, 난 잠자리 나왔으면 좋겠다.

나는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무튼 지네만 안 나오면 돼요.

. 아무래도 꽝은 없으니까.

빨간 체크무늬 가방을 맨 아이가 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렸다.

전 무당벌레예요.

그래.

아이가 자리를 뜨고 다른 아이들 몇이 다가와 게임 캐릭터를 뽑는 기계에 동전을 넣었다. 나는 독서실로 돌아가 종이컵을 비품함에 넣은 뒤 찬미 언니에게 종이컵을 사다두었노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사장님이 영수증을 받아 금액을 계산해주었다.

다시 미용실로 돌아왔을 때는 파마를 하던 할머니 한 분만 남아 있었다. 편안한 표정으로 이모 곁에 있던 세나는 역시 내게 다시 아는 체를 해주었다. 어릴 적엔 우리집에도 개가 있었다. 나는 세나와 인사를 하고 새로 사온 종이컵의 포장을 풀러 컵을 꺼낸 다음 커피믹스 한 봉지를 뜯어 넣었다. 종이컵 바닥에 설탕이 닿는 소리가 좋았다. 커피를 마시며 몇 시인가 하고 시계를 보았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잘못 보았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시계를 보았다.

이모,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어요.

?

엄마와 파마중인 할머니까지 시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네.

진짜 그러네.

엄마야, 별일이 다 있네.

젊어지고 좋지 뭘 그래.

할머니가 말하였다.

젊은 게 뭐가 좋아요.

요즘엔 그렇지도 않아요.

정인이 너 들으라는 소리는 아니다.

정인아, 나가서 꽃구경이나 해라.

그래라.

지금 아니면 못 본다.

근데 할매는 올해로 몇 살 잡수셨어.

이모가 말았던 롯드를 빼내며 묻자 할머니가 이백 살이라고 말하였다.

이백 살.

이백 살까지 살 수 있다면. 이백 년만큼이나 오래 살 수 있다면 나는 괴로움에 익숙해졌을까, 더 오랜 시간을 괴로워했을까, 생각을 하며 아까 꺼냈던 플라스틱 의자를 제자리로 밀어넣었다. 구석에 비스듬히 서 있던 빗자루로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슬슬 쓸었다. 여러 사람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한곳으로 모이는 것이 좋아서 구석까지 다 쓴 뒤에도 얼른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이리저리 조금씩 위치를 이동하며 모으기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끊임없이 반복되었겠지 생각하니 영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