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우리는 서로에게 절대 쿨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이 소중하고 특별하다고 여기는 대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산책을 하다 발견한 장소, 꽃과 이끼와 자갈이 황금비율을 이룬 채 고요히 흐르는 냇가에 적당한 휴식처로 펼쳐진 그 장소를 당신만의 비밀로 삼아 누구도 그곳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하겠는가? 혹은 많은 이들에게 그 아름다움을 알려 그곳이 더 잘 관리되고 유지되도록 하겠는가? 

우리는 이 질문 속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꿔 물어볼 수 있다. 음식점, 영화, 책, 심지어 사람까지, 너무나 아끼기에 타인과 자신의 애정을 나눠야 할지 말지, 나눈다면 어디까지 그래야 할지 확실치 않은 대상들의 목록을 떠올려보자. 어떤 사물과 사람은 너무나 소중한 나머지 자아의 분신이 된다. 혹은 그들은 나의 성향과 너무나 맞아 자아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냐고?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 영화, 책, 작가들을 말해줄게. 그런데 잘 모르겠다. 누구한테? 어디까지?

자신이 아끼는 사물과 사람을 타인과 나누는 것은 결국 자아의 일부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와 긍정적인 평가가 공존한다.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런은 생계를 위한 노동에 종사할 필요가 없는 ‘유한계급’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사치품이나 예술품을 구매하고 전시하는 속물적 과시소비의 양태를 보인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같은 과시소비는 현대의 온라인 환경에서 극대화되고 있는지 모른다. 그 대상도 값비싼 명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과시소비의 논리에 따르자면, 소셜미디어에 자신이 읽은 시집과 독후감을 올리는 행동도 사실은 ‘당신들은 몰랐지? 내 취향이 이렇게 고급이라는 사실을?’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16~17세기 유럽의 귀족과 호사가들이 자신의 저택에 마련하고 사람들을 초대하여 공개했던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y)’이 인터넷으로 옮아간 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시 행위 이면에는 순수한 애정과 나눔에의 동기가 포함될 수 있다. 영화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에는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예술작품을 미술관에서 훔친 후, 얼마간 자신의 저택에서 홀로 만끽한 뒤 다시금 미술관에 돌려놓는 별난 도둑 이야기가 나온다. 철저한 계획하에 수행한 완전 범죄였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그는 그 작품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작품을 대중에게 되돌려준다. 작품의 예술적 가치가 너무나 크기에 그것을 혼자서만 누려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판단을 내린 것이다. 

자신이 어떤 예술작품을 너무나 사랑한다면 그저 잠깐만 그것을 홀로 누려야 한다. 미술관을 방문하여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 앞에서 혼자만의 감상 시간을 갖고 싶지만 그 자리를 영원히 독점할 수는 없다. 나는 다른 이에게 그 자리를 양보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자리를 양도받아 작품을 감상하는 낯선 이의 얼굴에 번지는 행복감을 확인하며 나는 한번 더 행복감을 느낀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개인적 취향의 나눔을 통한 공동체의 형성이 가능하며 또 더욱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형성된 공동체는 이익과 권력에 따른 집단보다 더 공적이고 호혜적이라는 것이다. 칸트의 취향 공동체에 대해 정치학자 파트리스 카니베즈는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이들은 수학자들처럼 계산을 통해 의견 일치를 보려고 논쟁하는 게 아니라 입증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논쟁한다. 즉 이들은 증거를 소통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감성 형태를 소통하려고 하기 때문에 논쟁하는 것이다. 결코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러한 감성에 의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것은 취미 공동체의 가능성을 단언하기 때문이다. ─『시민교육』, 박주원 옮김, 동문선, 155쪽


우리는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을 때, 아무에게나 권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좋아할 만한 사람에게, 혹은 그것들을 나처럼 좋아했으면 하는 사람에게 권한다. 나와 비슷한 영혼을 가졌다고 믿거나 혹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사람에게만 그것들을 조심스레 권한다. 

이는 앞서 베블런이 언급한 ‘과시소비’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과시소비가 불특정 다수에 자신의 소유물을 과시함으로써 선망을 유발하려 한다면, 자신이 신뢰하는, 혹은 신뢰하고픈 사람들에게 자신의 애호물을 권하는 것은 선망보다는 소망을,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당신도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조금 더 나아간다면 ‘당신의 영혼과 나의 영혼이 눈앞에 놓인 이 경이로운 사물을 통해 잠시나마 일치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사 근처의 공원을 산책하다 아주 특별한 벤치를 발견했다 치자. 그 자리에 앉으면 눈앞에 펼쳐진 평화로운 풍경에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녹아들어 고요와 소요가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그 벤치에 누구를 데리고 갈 것인가? 업무상 처음 만난 사람에게 “제가 좋아하는 벤치가 하나 있는데 시간 되시면 거기 가보실래요?”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하는 이는 둘 중 하나다. 아주 엉뚱한 정신세계를 가졌거나 혹은 그날 만난 사람에게 매혹됐거나.

그러나 내가 아끼는 음식과 영화와 책과 음악과 공원의 벤치를 타인들이 나만큼 좋아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심지어 그들은 이렇게 반응할 수 있다. “별로인데. 그게 그렇게 좋아?” 이 반응에 우리는 낙심하고 심지어 상처받기까지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영화를 보고 감동에 젖어 극장 밖으로 나와 ‘아, 영화 정말 좋지 않아?’라고 말하려던 차에, 그 사람이 “아, 이 영화 정말 별로네”라고 하면 나는 크게 실망할 것이다. 왜 그런가? 아마도 서로의 영혼이 일치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서 오는 실망감이리라.

이러한 간절한 소망을 가진 이는 절대로 쿨할 수 없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좋아하는 영화를 보거나 음식을 먹거나 특별한 곳에 가면 ‘눈치’를 살핀다. 그 사람의 반응, 표정, 시선의 움직임과 진동, 그 모든 미세한 변화를 살피고 또 살핀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이 사람도 좋아했으면. 만약 그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겉으로는 “응,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고 쿨하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심 그렇지 않다. 눈앞에 놓인 그 대상을 왜 그토록 좋아하는지 설명하고 싶고 또 설득하고 싶다. 결국 나는 말한다. “그런데 말이지, 한번 내 말 좀 들어봐. 그게 왜 괜찮냐면 말이지.”

앞서 카니베즈가 언급한 것처럼, 언쟁을 통해서라도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내가 느끼는 ‘감성 형태’이다. 답이 명확한 이데올로기나 논리와 달리 내가 무언가에 매료되어 느끼는 감정은 일치의 가능성이 낮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적은 만큼 감정의 일치가 이루어졌을 때 감동은 배가된다. 이는 마치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라고 말했을 때, “나도 당신을 좋아해요”라는 응답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나의 영혼이, 무수한 마음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이 삐뚤빼뚤한 영혼이 당신의 삐뚤빼뚤한 영혼과 일치하다니!

물론 실망의 가능성을 낮추는 쉬운 방법이 있다. 누구나 다 좋아하는 대상을 좋아하는 것이다. 평점이 높은 영화를 보러 가고, 베스트셀러 책을 읽고, TV에 소개된 맛집을 찾아가고, 잘 알려진 관광 명소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상호 합의의 가능성을 높이고 실망과 언쟁의 가능성 또한 낮춘다.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맘에 안 든다 해도,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지나친 마케팅과 왜곡된 데이터의 잘못이다.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이 좋아하는 것은 결국 확률의 문제이지 영혼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실망할 이유도, 반대로 경탄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그만인 것이다.

취향을 둘러싼 기대와 실망과 감동과 언쟁과 합의의 드라마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데이터 시대의 실상이다. 우리의 반응은 이제 이렇게 갈린다. 아, 이래서 다들 좋다고 하는구나. 혹은 아니 이게 왜 다들 좋다는 거야? 모든 것이 데이터화하고 모든 것이 검색으로 발견되고 모든 것에 평점이 붙는 이 시대에 ‘산책길에 우연히 발견한 경이로운 벤치’와 그 벤치를 나와 타인의 영혼과 결부시키는 이야기는 하나의 판타지에 불과한 것처럼 들린다. 마치 ‘안드로이드가 꾸는 전기양의 꿈’(필립 K. 딕의 소설 제목 변용)처럼 나의 판타지 또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솟아오르고 가라앉는 한 조각 파도처럼 나타났다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 판타지조차 없다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취향 공동체에 대한 소망으로 인해 우리는 여전히 가까스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나는, 우리는 무엇을 서로 바라보고 무엇을 통해 소통하는가? 이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짐짓 댓글과 조회수 같은 숫자들을 외면한다. 그것들이 높건 낮건 상관없다. 나는 내가 발견한 이것을 열렬히 사랑하며 당신 또한 그러했으면 좋겠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에게 쿨할 수 없다. 서로의 영혼에 관한 한, 우리는 간절하고 또 간절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