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똥과 요리

팬데믹 이후 사회적 삶의 질은 떨어지고 있다. 나처럼 가뜩이나 비사교적인 이들은 더더욱 외출을 삼가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최대한 빨리 빠져나오고 싶어한다. 친구나 동료들과의 친교는 확연히 줄었다. 새로운 소식과 지식을 나누고, 몰랐던 책, 공연, 전시를 권하고, 쓸데없는 농담을 건네고, 진지한 토론을 하며 서로를 ‘다차원적’으로 자극하다 간혹 “그래, 한번 뭐든 해보자!”라며 함께 일을 도모하는 일은 이제 거의 없다. 

팬데믹은 사회적인 교류가 삶에 미치는 중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사람과의 만남은 일 때문이 아니라면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만나야 하기 때문에 만나는 식이 되어버렸다. 회사에 속하지 않은 프리랜서나 고용 기반이 불안정한 비정규직들에게 사람과의 만남은 더욱 희소해지고(“구글 드라이브에 올렸습니다”) 간결해진다(“문 앞에 놓고 가세요”).

사람의 자아는 신경에 가해진 자극을 정보로 전환시키고 축적하고 조직하여 만들어낸 자기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한편으로는 매우 역동적이다. 새로운 정보를 수용하면서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는 변경되며, 그에 따라 자기 표상 또한 변화한다. 다른 한편, 사람의 두뇌는 일단 만들어진 자기 표상을 보전하려 한다. 자극의 원천과 종류가 변화하고 정보의 데이터베이스가 바뀌는데도 사람은 자신의 자아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사람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정보를 유사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알고리즘을 두뇌에 장착하고는 그것이 자신의 일관된 성향이라 여긴다. 

자아는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사람은 변하기도 하고 변하지 않기도 한다. 나는 ‘고수’를 싫어했을 때의 나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분명히 싫어했을 때가 있었는데, 언제 어떻게 고수를 좋아하게 됐는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 언제부턴가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고, 자연스러운 취향으로 자리 잡힌 것이다.

하지만 잘 따져보면 이런 과정이 있었을 터이다. 내 주변에 고수 예찬자들이 늘어난다. 고수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흥을 깰까봐 고수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는다. 그러다 마지못해 조금씩 고수를 시도해본다. 어느 날 고수를 먹는 나를 보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고수 너무 중독적이지 않아?”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그치, 그치, 맞아, 맞아.”   

역동적인 항상성, 이것이 자아에 내재하는 알고리즘의 모순이자 특이성이라 할 때, 사회적 교류는 이 알고리즘의 유지와 수정에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아의 표상을 조금씩 조정해간다. ‘타인이 보기에 바람직한 나’와 ‘나다운 나’ 사이에 균형을 잡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많은 생각과 선택을 하고 이를 통해 개인으로서, 크고 작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적응하고 성장해간다.

사회적 자극이 줄어들고 정체될 때 일어나는 사태는 문제적이다. 자아의 껍데기는 견고해지지만 그 내부는 속 빈 강정처럼 빈약해질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맞나?’라는 의문이 사라질 테고 주저하다 감행하는 크고 작은 모험도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대로 계속된다면, 새로운 정보의 입력과 처리 없이, 혹은 몇몇 정보원(미디어와 폐쇄적 인간관계)에 의존하여 자신의 생각을 무한 반복하는 타성에 젖는다면, 진실과 직면하는 ‘에피파니’ 같은 고상한 깨달음은커녕, ‘내가 지금 뭐하고 사는 거야?’라는 ‘현타’의 순간조차 귀해질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사람이란 게으른 만큼이나 창조적이라는 점이다. 사람은 반복과 권태에 짓눌려 살다 결국엔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자극하는 놀이를 개발할 때가 있다. 소위 혼자 하는 놀이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상의 「권태」에는 아이들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똥 누기 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상은 ‘오죽 지루했으면 똥 누기 놀이까지 하느냐’며 한탄했지만 나로서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나라면 이렇게 썼을 것 같다. “똥 누기 놀이라니, 지니어스!” 

이 ‘똥 누기 놀이’는 식민지 시기 가난한 조선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16세기에 활동했던 네덜란드 화가 피에터 브뤼헐의 회화 작품, <아이들의 놀이>는 제목 그대로 아이들의 온갖 놀이들을 화폭에 담고 있는데, 거기에도 똥과 오줌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나는 브뤼헐의 그림을 보고 생각한다. 아하, 오줌 누기 놀이도 가능하군!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반복된 일상에 갇힌 상태에서도 사람은 자체적으로 자극을 만들어 스스로에게 부여하며 자아를 회복하고 갱신한다. 

팬데믹 이후 나는 하나의 놀이에 빠졌는데, 그것은 바로 요리이다. 예전에도 간혹 요리를 하곤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메뉴를 먼저 생각하고 식재료를 구하여 음식을 만드는 경우가 늘고 있다. 대단한 고급 요리를 만들지는 않는다. 짬뽕, 고추 잡채, 육개장 등이다. 야채와 고기가 어울리고 다양한 재료의 풍미를 느낄 수 있는 메뉴를 선호하는 편이다. 최근에는 수제 버거를 만들어 한입을 씹어먹곤 입안 가득한 육질과 육즙을 느끼며 “이제 이태원 안 가도 되겠네!”라고 선포하기도 했다.

십 년 동안 후각을 상실한 이력 때문에 나는 식도락에는 관심도 없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나에게 요리는 놀이이다. 나에게 요리는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최대치의 효과를 발휘하기 위한 유희와 창조의 과정이다. 물론 오십대 중산층인 나에게 요리가 ‘똥 누기 놀이’만큼 처절할 리 없다. 하지만 내게는 계량컵, 저울, 타이머, 거품기, 채칼, 홍두깨, 거품기, 오븐 따위는 없다. 다 눈대중이고, 재료와 도구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활용한다. 그래도 할 때만큼은 집중하고 또 집중한다. 좁은 부엌에서 나의 손과 눈과 입과 코는 때로는 정지한 듯, 때로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재료와 도구를 다룬다. 

인터넷의 레시피를 참조하지만 매뉴얼처럼 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터넷의 레시피는 너무나 간단해서 불만족스럽다. 복잡하고 난해한 레시피는 왜 없는 건가, 나로 하여금 상상하고 궁리하고 망설이고 결단케 하는 레시피는 왜 없는 건가 싶다. 내가 인생 최초로 시도했던 요리는 ‘감자 크로켓’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집에 꽤 두꺼운 요리책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만들기 불가능한 메뉴들이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다. 재료들은 외래어로 된 것이 많았고 동네 시장에서 구하기조차 힘든 것들이었다. 어느 날 요리책을 뒤적이는데 얼추 흉내를 내볼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 감자 크로켓이었다. 레시피를 제멋대로 짐작하고 적용해보았다. 집에 있는 재료들을 대충 볶고 으깨고 뭉치고 튀기니 제법 맛있는 크로켓이 나왔다. 그렇게 감자 크로켓은 꽤 오랜 시간 나의 대표 요리 메뉴가 되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동파육이 대표 메뉴가 되었다. 동파육의 레시피는 한 번 보고 두 번 다시 보지 않았다. 나중에 중국집에서 동파육을 시켜 먹어보니 내가 만든 동파육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동파육은 중국 시인 소동파가 순전히 자기 식대로 만든 요리라고 하는데, 나는 동파육을 또 내 멋대로의 버전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내가 동파육을 좋아했던 이유는 시인이 만든 요리여서가 아니었다. 그것을 만드는 데 드는 시간, 고기가 익어가고 국물이 졸아드는 내내 부엌을 들락날락, 불 앞을 서성이는 그 정중동의 시간을 나는 사랑했다.

나는 예전의 일천한 요리 경험과 최근 요리에 새롭게 빠져들어가는 경험을 떠올리며, 요리란 일종의 자아 생성 과정이라고 정의해본다. 내가 만든 음식은 주어진 재료와 도구와 나의 몸과 마음이 연금술적으로 결합하여 탄생한 자아의 분신이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요리를 신성한 임무로 대하는 어느 셰프의 레시피(그 셰프는 한 번도 자신의 레시피를 문서화한 적이 없다)를 아래와 같이 옮겨 적었다.


“네 아이가 여기 죽어 있다[닭을 가리킴]. 그 아이를 새 생명으로 준비시킨다[뼈를 발라냄]. 흙으로 그를 채운다[재료를 채워넣음]. 조심하라! 그 아이가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된다[재료를 가볍게 넣음]. 금빛 외투를 입힌다[익히기 전 노릇하게 그을림]. 목욕을 시킨다[삶을 국물을 준비함]. 이제 아이를 데우는데, 주의해야 한다! 어린아이는 햇볕을 너무 많이 쐬면 죽는다[가열온도는 섭씨 130도]. 아이에게 보석을 달아준다[조리가 끝나면 부드러운 후추 소스를 뿌림]. 이게 내 조리법이다.”(리처드 세넷, 『장인』, 김홍식 옮김, 2010, 21세기북스, 308~309쪽) 


죽은 아이를 되살리는 신묘한 마술로 요리 과정을 정의한 위의 레시피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간단명료한 레시피들과 다르다. 그것은 그로테스크한 문학적 은유로 가득하지만 그렇다고 복잡하고 난해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세넷에 따르면, “금빛 외투”나 “보석” 같은 은유는 요리 과정의 절차와 목적을 분명히 함으로써 실제로 맛난 음식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다. 요컨대 자신의 분신을 가꾸고 되살리려는 치밀한 장인적 노력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좋은 작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음식은, 고상한 버전의 똥 누기 놀이가 아니다. 아무리 혼자 하는 절박한 놀이라 하더라도 요리는 결국 함께 음식맛을 보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가 당장 내 곁에 있건 없건 나의 크로켓과 동파육은 타인의 입속에서 다시 한번 부활해야 한다. 그 때문에 나는 늘 자존심에 금이 갈 위험을 감수하며 묻는다. “어때? 맛있어? 잘된 거 같아? 나중에 또 해볼까?” 그렇게 나의 자아감이 타인의 행복감에 기여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무인도에서 혼자 하는 놀이에 골몰하는 표류자는 얼마나 간절히 탈출과 구출을, 세계로의 복귀를 소망하고 있는 것인가. 지금의 우리가 그러하듯 말이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