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미리 궁리하는 비참

나는 지면에 발표하는 글에 내 자신의 삶을 백 퍼센트 솔직하게 담아본 적이 없다. 자신의 삶을 백 퍼센트 솔직하게 글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타인에게 고백할 때, 그 고백 속에서 표현되는 것들은 정말 나의 참된 모습일까? 나는 철학적으로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인간이 자신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과 언어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은 나를 포함하여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글을 통해 드러내는 ‘자아’의 정체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 이 질문은 철학적이라기보다 기술적이고 직업적인, 그리고 어느 정도는 사적인 종류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글로 표현된 자신의 모습이란 일부에 불과하며 그것도 가공된 쪽에 가깝다. 독자들이 읽는 글을 쓸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작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문법을 포함하여 도덕적 규범, 문체, 논리 등을 고려하면서 타인의 마음을 건드리고 움직이는 글을 써야 한다. 작가는 여러 가지 제약에 얽매이는 동시에 그 제약을 극복하려는 노력 속에서 자신만의 글을 쓰는 사람이다.

모든 작가가 세련되고 올바르고 단정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많다. 소심하고 위악적이고 한심한 자신의 모습을 가감 없이 노출하는 작가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무릇 훌륭한 작가라면 그러한 모습을 더 넓은 사람살이의 지평 위에 자리매김한다.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드러냄이 보편적 울림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이러한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서 “예술가는 되도록 비참하게 나와야 한다. 되도록 굵고 억세고 날카롭고 모진 가시면류관을 쓰고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김수영, 「문단추천제 폐지론」,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08, 190쪽). 김수영에 따르면 예술가는 자신의 비참을 통해 인류의 비참을 대변하고자 하는 소명의식을 지닌 ‘직업인’이다. 

이러한 직업적 활동 속에서 솔직함이란 최우선의 직업윤리가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비참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지 않는다. 예컨대 뭉크의 그림 <절규>는 작가가 선택한 ‘적절한’ 양식을 통해 절규를 ‘표현’한다. 여기서 표출과 표현의 차이는 중요하다. 뭉크의 그림을 사랑하는 관객은 그가 표현한 절규 속에서 자신의 절규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타인의 절규와 연결시킨다. 

나는 가시면류관을 운운하는 김수영의 예술가론이 다소 과하다고 생각하지만 소명의식이 없는 예술가에 대해서는 기꺼이 비판할 준비가 돼 있는 편이다. 나는 아아아, 괴로워, 괴로워 미치겠어! 라고 자신의 고통을 표출하는 예술가에게 냉정하게 말한다. 안타깝지만 그런 이야기는 독자나 관객이 아니라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 혹은 심리상담사에게 하세요. 당신의 절규는 노래나 시나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목청의 발악으로만 들린다고요!      

그럼에도 예술가라는 ‘직업인’은 좀 별난 존재이긴 하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고객의 요구를 받들어가며 작업을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주문제작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다(최근 문화산업과 문화정책의 경향상 그런 일들이 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추종하는 직업윤리는 고객의 요구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재생산되고 갱신되어온 오래된 믿음에서 나온다. 바로 ‘예술가들이여, 남들과 다른 당신만의 개성을 보여줘라’라는 진술로 요약되는 믿음이다. 예술가들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줘야 하지만 그 감동은 반드시 ‘독창적’인 방식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자신의 절규를 가감 없이 표출하는 것 못지않게, 누구나 할 수 있는 빤한 절규의 클리셰―‘아아, 인생은 고통 그 자체로구나!’―를 반복하는 예술 또한 실패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예술가들은 늘 딜레마, 혹은 고민에 처하게 된다. 나는 지극히 별 볼 일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하면 특별한 상상력을 드러낼 수 있지? 어떻게 평범한 나로부터 비범한 표현을 끌어낼 수 있지? 어떻게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참된 나를 구현할 수 있지?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며, 나 또한 이런저런 글에서 이런저런 답변을 제시한 적이 있다. 나는 “솔직함이 아니라 진실됨이 더 중요하다”라는 명제를 제시했는데, 이 또한 여전히 모호하며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 말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나의 비루함, 궁색함, 나약함의 전모를 드러낸 적이 없다. 굳이 그럴 필요도 가치도 없다. 오로지 특정한 면모를 선택하고 그것을 산문 혹은 시라는 형태 속에서 가공하고 그것으로부터 진실을, 나의 작은 생각과 상상이 더 큰 의미와 감각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할 뿐이다. 내가 여태껏 말하지 않은 내 삶의 수많은 면모들 속에 그러한 진실의 가능성이 숨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찾아 궁리하고 글로 쓰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바에 비추어, 나는 이제부터 지금껏 표현하지 않았던 어떤 것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나이듦’에 관한 것이다. 나이듦을 하나의 주제로 생각하고 글을 쓴 적은 있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의 나이듦과 그 상세한 면모에 대해서는 글로 써본 적이 없다. 만약 나뿐만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나이듦이라는 주제를 자신의 문제로 삼아 글을 쓰는 데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첫째, 예술가들에게는 자신의 작품이 ‘젊음’의 소산이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낡았다, 라는 부정적 반응을 접하면, 그들은 거의 무너진다. 더구나 세상은 예술가의 나이에 대해 관대하다. 나는 사십대 초중반까지 ‘젊은 작가’라는 말을 들었다. 만약 계속해서 글을 쓴다면 나는 언젠가 ‘원로’ 작가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꽤 오랫동안 ‘젊은 작가’라는 말을 들으며 스포일되었던 내가 그 말을 과연 반겨할지 의심스럽다. 

둘째, 인간의 두뇌란 녀석은 기억과 연속성에 집착하여 변화를 거부하곤 한다. 변화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할 때도 건성으로 그럴 뿐이다. 두뇌는 신체의 기능 저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젊다는 망상을 고집한다. 외부의 시선이 자신의 ‘나이듦’을 지적할 때, 인간의 두뇌는 거의 방어적으로 ‘나 아직 늙지 않았어!’라고 반응한다. 내가 이대로 나이가 들어간다면 버스나 지하철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리 양보를 받는 날이 올 것이다. 과연 내가 그 누군가에게 흔쾌히 “고마워요, 젊은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얼마 전, TV를 보다 한 젊은 연예인을 보고 나도 모르게 “거 참, 요새 보기 드문 젊은이네”라고 말을 하곤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거 참, 요새 보기 드문 젊은이네”라는 말을 하다니!’ 나의 신체는 이미 늙어가고 있는데 내 두뇌는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잡아당겨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늘어져 있는 살을 보고 ‘오, 신기하네. 살이 마른 가죽 같네’ 하고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일상을 이어가는 게 내 두뇌다. 그런데 “거 참, 요새 보기 드문 젊은이네”라고 말하는 순간 내 두뇌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노화를 자백하고 만 것이다.

내 글들을 보면, ‘오래전에’ ‘어릴 적에’ ‘대학시절에’라는 구절들이 자주 발견된다. 오십이 넘었는데, 정작 오십대의 삶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자백하건대 나는 나의 나이듦에 대해 침묵해왔다. 나는 철부지 어른처럼 행세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런 기만을 멈춰야 할 때가 왔다. 그러니 이제부터 나는 입을 조금씩 열어 오십대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런데 솔직히(백 퍼센트 가감 없이)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인터넷에 ‘오십대’를 검색해보니 “50대 7월부터 백신 접종”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온다. 예약을 하고 예방접종센터에 가면 나와 같은 오십대의 사람들이 한군데 모여 있을 것이다. 나랑 나이대가 비슷한 사람들과 한군데 섞여 있는 경험은 예비군 훈련 이후 처음일 것이다. 그래, 오십대에 관한 첫번째 글은 백신 접종에 대한 글로 해보자. 접종을 기다리며 서로를 마주하며 ‘당신 오십대? 나도 오십대’, 이러며, 그동안 외면해왔던 ‘오십대 정체성’을 자각하고 있는 군상의 이야기를 해보자. 아아, 그러나 아직도 모르겠다. 오십대에 관한 글이라니, 그것도 오십대의 진실을 담은 글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써야 한단 말인가? 

육십대, 칠십대, 그리고 혹여 더 살게 된다면 그 이후의 글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르겠다. 필립 로스처럼 쓰는 소설마다 전립선 환자를 등장시키며 몰락해가는 남성성에 연연하는 글을 쓸지, 헤밍웨이처럼 바다와 상어에 맞서며 부활하는 불굴의 남성성을 묘사하는 글을 쓸지,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장호연 옮김, 마티, 2008)에 소개된 어느 시인의 시처럼 희망 없는 말년을 노래할지 잘 모르겠다.   


자네는 새로운 나라를, 또다른 고향을 결코 발견하지 못할 거네.

이 도시가 항상 자네를 따라다닐 테니까.

자네는 같은 거리를 걷고 같은 동네에 살다가 나이를 먹고,

결국은 같은 집에서 늙어갈 테지.

자네는 이 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하네.

그러니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펼칠 희망은 버리게.

자네를 실어다줄 배는 없네, 자네에게 열린 길은 없어.

여기 이 좁은 모퉁이에서 이제까지 삶을 낭비했듯이,

세상 어디에 가든 마찬가지로 삶을 망칠 것이네.

―그리스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의 「도시」 일부


자기연민이건, 자기부정이건, 혹은 자포자기이건 나는 나이듦의 비참함에 대한 진실된 글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심각하다. 내 두뇌는 나이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이것은 심각한 결함이다. 이 결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어떻게 내 두뇌를 ‘나이듦’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성능 좋은 기계로 만들 수 있는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이가 들어갈수록 두뇌 능력은 감퇴할 것이고 신체적 피로는 더 할 것이고 회복은 더딜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나이듦의 비참함에 대한 진실된 글을 쓸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살면 사는 대로 죽으면 죽는 대로 시간이 모자라다. 여러 가지로 큰일이다. 하지만 해결책은 늘 그랬듯이 하나다. 일단 쓰는 것이다. 쓰고 또 쓰는 것이다. 내 나이 오십대, 지금부터 열심히 써야 한다. 지금부터, 육십대와 칠십대와 팔십대와 구십대의 비참과 그 진실에 대해 미리미리 써야 한다. 쉰, 비참의 글잔치를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