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환멸과 희망의 그로테스크

첫 시집을 냈을 때, 누군가 내 시를 보고 “웃기다”고 평했다. 칭찬이었지만 탐탁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진지한 사람인지 몰라주는 것 같아 서운했다. 그러나 그후로 시를 쓰면 쓸수록, 내가 유머를 구사하려고 무척 애쓴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다. 때로는 웃긴 구절을 쓰고는 혼자 키득거리며 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 나는 내 시에 지독한 환멸의 감정을 담아내려고 했다. 환멸이라는 단어를 노골적으로 구사하기도 했다. 남들이 희망을 말하는데, 나까지 희망을 말하고 싶진 않다. 더구나 내가 그리 낙관적인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고집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니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환멸과 유머는 어떻게 공존하는가? 

환멸이란 무엇인가? 한자로는 幻滅, 환상이 소멸하는 것이다. 영어로는 disillusion, 비슷한 뜻이다. 환멸이란 뜻에는 이미 어느 정도의 냉소주의가 깃들어 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애초에 환상이었고 산산이 박살난 것은 바로 그 거짓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환멸에 젖은 사람은 여전히 상처를 받는 사람이다. 환멸에 가득한 사람은 계속 주변을 둘러보고 실망에 젖어 고개를 젓는 사람이다. 반면 기대가 완전히 깨졌다면 일말의 환상도 가지지 않을 테고 더이상 환멸이란 말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늘 상처받는다. 그것도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혹은 마음을 주는 사람들에게서. 왜 상처받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들에게 기대를 걸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좋은 이다. 좋은 이였으면 좋겠다. 나와 타인을 친절하고 온화하게 대했으면 좋겠다. 최소한 존중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종종 배반당한다. 

조심스럽게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느냐고 그에게 물으면 대답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번째 대답은, 자신은 상처를 줄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자신은 타인을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기본적으로 예의바른 사람이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반응은 그 사람이 얼마나 무심한 사람인지 드러낼 뿐이다. 그 사람에게 도덕이란 자신의 좁은 세계에서만 발휘되는 최소한의 준칙에 불과하다.

또다른 대답은 자신 또한 상처를 받았기에 그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한 것은 인정하지만, 이는 결국 자신이 타인에게서 받은 상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저들이 내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면 나 또한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이 반응은 누가 먼저 상처를 줬느냐의 데로 문제의 초점을 옮기면서 ‘원초적 잘못’을 발견하려는 무한의 논쟁을 촉발할 뿐이다.

결국 해결책은 잘못의 인정과 사과이다. 내가 무심했다. 내가 상처를 줬다. 나에 대한 당신의 기대가 훼손됐음을 인정하고 내 사과를 통해서 상처받은 당신의 마음이 치유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가 해결될 즈음, 나는 말한다. 그런데 나도 상처를 받았으니 당신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하지 않나? 만약 상대방이 그 요구를 거절한다면, 혹은 성의 없이 그 요구를 수용하면서 “미안해요. 됐어요?”라고 말한다면 나는 더 큰 상처를 받는다. 내 진심이 또다시 배반당한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우리는 결국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이는 환멸로 이어진다. 이제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자신이 일생 동안 학습해온 배반과 상처의 경험을 떠올리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발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원래 사람들은 그렇다. 타인의 상처에 무심하거나 자신의 상처에만 골몰한다. 뭘 기대한단 말인가? 그나마 나에게는 몇몇 소중한 친구와 가족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윽고 더 나쁜 사태가 엄습한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마저 그토록 무심하고 이기적이며 심지어 나를 원초적 잘못의 책임자로 지목한다. 그런데 놀라워라. 환멸에 젖은 사람은 또다시 사람들에게 기대한다. 그 기대가 빈번히 깨짐에도 불구하고, 부디 이번만은 그 기대가 충족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그리고 혹여 그 기대가 충족되면 – 열에 하나 정도 – 우리는 다시금 곧바로 사람에 대한 환상을 복구한다. 그래, 정말 끝까지 나쁜 사람은 없어. 이처럼 소멸되지 않는 환상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도 환멸과 희망을 반복적으로 적용한다. 모르는 타인들에게, 유명 인사에게, 정치인에게, 기업에, 정부에, 미디어에 기대를 하고 상처를 받고 또 희망을 갖는다. 그토록 숱한 범죄와 부패와 거짓말과 부정의를 경험하면서도 우리는 좋은 세상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좋은 세상, 즉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은 역사적으로 소멸과 생성을 반복해왔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는 선거 때만 등장하지 않는다. 집권당과 대통령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환멸과 희망이 얼마나 자주 교차하는가를 보여준다. 이 정치인이 아니면 저 정치인, 이 정당이 아니면 저 정당, 신문이나 TV가 아니면 유튜브, 이런 식이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우리가 거리로 나선다. 직접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좋은 세상을 스스로 만들려 한다. 우리의 최종 희망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사람과 세상에 대해 왜 끝까지 환멸을 이어가지 못하고, 기대를 완전히 접지 않고, 희망을 갖는지에 대한 답변 또한 우리가 사람과 세상에 상처를 받는 이유만큼 단순하다. 모든 기대를 접고 일말의 희망도 갖지 않은 삶과 세상을 생각해보라. 그러한 삶과 세계는 지옥이다.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지옥에 살고 있다. 

그런데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인정할 수 있는가? 우리가 지금 지옥에 살고 있다는 것을? 그 지옥에서 빠져나갈 아무런 출구도 없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이어지는 질문은 우리가 지옥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끔찍한 질문을 던지기 전에 사람들은 다시금 버려진 희망을 주섬주섬 챙겨든다. 지옥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우리는 다시금 환상을 회복시킨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생존 본능에 가깝다. 

나로서는 또다른 생존 전략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웃음이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희망을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웃는다. 이 웃음은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 나오는 구절, “왜 사냐건 웃지요”식의 초연한 웃음이 아니다. 이 웃음을 짓는 이의 표정은 초연하기는커녕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다. 사방이 온통 막혀 있고 어느 쪽으로도 창을 낼 수 없을 때에도, 우리는 웃는다. 그렇게 계속 웃으면 동서남북, 어딘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창이 나고 햇빛인지 별빛인지 달빛인지 알 수 없는 빛이 흘러들어 어두운 방을 비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나보고 앞에 나와서 발표를 하라고 했을 때,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실패할 것이다. 나는 망신을 당할 것이다. 그때 나는 친구들 앞에서 웃는 표정과 곤혹스러운 표정을 함께 지어 보였는데, 친구들의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었다. 그 열광이 우호적이었는지, 혹은 적대적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들은 내 발표는 잊고 내 표정에만 집중했고 선생님은 지금 뭐하는 거냐며 당황스러워하다가 그냥 자리로 돌아가라고 내게 말했다. 어쨌든 그때의 그 표정을 나는 지금도 거울 앞에서 지어 보일 수 있다. 말 그대로 기괴한 표정이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혹은 마음은 우는데 얼굴은 웃는 그런 표정이다. 얼굴의 근육은 일그러졌는데 눈빛은 또렷하고, 악의는 없지만 강퍅함이 배어 있다.  

나는 내 기괴한 표정과 웃음의 의미를 성인이 되어 우연찮게 접한 몇몇 글과 그림을 통해 풀이해볼 수 있었다. 그로테스크Grotesque에 관한 것들이었다. 보들레르는 「웃음의 정수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그로테스크를 “끔찍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발작적 웃음”이라고 표현하면서 그것이 삶의 고통과 쾌락을 동시에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 비슷한 표정을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도 발견한 적이 있다. 그 그림은 <최후의 심판>이나 <천지창조>처럼 웅장하고 조화로운 모습이 아니다. 그림의 제목은 <그로테스크에 관하여>인데, 거기에는 악마적 미소를 띤 동물의 얼굴이 거칠고도 유려한 필치의 소묘로 그려져 있다. 교회와 귀족의 구미에 맞는 모범적 그림만 그렸던 미켈란젤로조차 그로테스크가 “사람의 감각을 이완시키고 변화시키는” 순기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로테스크에 관한 이런저런 글과 그림에서 나는 기괴한 웃음을 통해 삶의 고통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나는 내가 글에서 시도하는 웃음이 미켈란젤로나 보들레르가 이야기한 정도의 그로테스크를 성취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내 유머는 기껏해야 블랙코미디에 가깝고 그것도 피식 실소를 자아내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 내 글과 시를 읽고 파안대소를 터뜨렸다면 나는 그 독자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지 의식과 특별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하지만 이 모든 웃음과 유머의 기원, 내 그로테스크의 이정표, 나의 그 표정에 대해서는 자신한다. 그것은 참으로 기괴하다. 아마 언젠가 독자와의 만남 같은 행사에서 그 표정을 지을 기회가 올지도 모르겠다. 혹여 이 글을 읽은 독자 중 한 명이 그 자리에서 “글에서 쓴 기괴한 표정 부탁합니다”라고 요청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표정을 짓지 않을 것이다. 그 자리에 온 독자들이 “아아, 내 눈!” 하며 괴로워하면서 자리를 뜨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기괴한 표정을 보더라도 그것을 혐오하지 않으며 소셜미디어에 사진을 올리거나 악플을 달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나는 내 표정을 나만 보고 즐길 것이다. 

다만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제 얼굴의 기괴한 표정을 보여줄 순 없습니다.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계속해서 환멸하고 웃고 환멸하고 웃겠습니다. 저와 함께 환멸합시다. 사람과 세상에 대해 환상을 갖지 맙시다. 그러나 그로테스크하게 웃어봅시다. 고통을 표현하면서도 그로부터 벗어나는 그 표정을 향해 함께 정진합시다. 그것이 우리의 절망이고 희망이라 믿사옵고 또 믿사옵나니.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