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고귀한 우리

얼마 전에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그는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 등의 책을 썼으며 그의 글들은 학계와 사회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쳐왔다. 그러던 그가 가족과 여행중에 호텔에서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육십 세도 채 안 된 젊은 나이였다. 

그레이버의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내가 그에 대해 갖는 특별한 기억 때문이었다. 2009년 여름, 그가 한국에 강연 차 방문했을 때 나는 우연한 기회로 그의 통역을 맡게 됐다. 내 형편없는 통역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친절히 대했고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알고 보니 그는 학교에서 나와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과 같은 무정부주의 단체에 속해 있었다(그 친구들은 내 시에도 등장한다). 그 단체는 나중에 2011년 뉴욕에서 시작한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비슷한 시기 나 또한 한국의 거리에서 행진을 하고 구호를 외치고 밤을 지새운 적이 많았다. 당시는 지구촌 곳곳에서 ‘직접행동’이 활발하던 때였다.  

한국에 머물며 강연을 하는 동안 그레이버는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특히 미국의 민주당 지지자들의 오만에 대한 논평이 기억에 남는다. 고학력에 고수입인 미국의 리버럴들은 자신들이 가치 있는 삶, 즉 사회의 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이타적인 삶을 산다고 굳게 믿으면서, 나머지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져 소비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폄하한다는 것이다. 

그때 그레이버는 가난한 젊은이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중동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를 ‘가치’ 개념으로 설명했었다. 미국의 좌파 엘리트들은 대학과 언론을 중심으로 가치를 독점하고 자신의 자식들에게 물려준다. 반면 가난한 이들은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구조적으로 박탈당한다. 이때 ‘참전’은 가난한 이들에게 고귀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하나이다. 그들은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나는 그레이버의 강연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누구나 고귀한 사람이 되려 한다. 하지만 고귀한 사람이 되는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귀함의 가면을 손쉽게 거머쥘 수 있게 하는 자원―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이들일수록 고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에 갈급하다. 이 절박함에서 사람의 다양한 면모가 나온다. 분노, 영웅주의, 속물성, 친절함…… 사람은 이 모든 면모를 다 가지고 있다. 그 면모의 비율과 구체적 형상은 그가 어디서 어떻게 어떤 사람들과 함께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것이냐에 달려 있다. 심지어 그것은 누구 곁에서 어떻게 죽을 것이냐에도 달려 있다(나는 누구의 눈을 마지막으로 보고 누구의 손을 마지막으로 잡을 것인가).

나는 광화문 거리를 걷다가 참으로 다정해 보이는 모자를 본 적이 있다. 오랜만에 외출을 한 것처럼 어머니와 아들은 행복해 보였고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었다. 속으로 ‘참 좋아 보이네’라고 생각하던 찰나, 둘은 태극기를 꺼내 들고 문재인 정권 타도를 외치는 보수 집회의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 순간 나는 그레이버의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모자는 태극기 집회에 참여함으로써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둘이 그토록 행복해 보였던 이유는 바로 자신들이 선인들의 대오에 동참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쟁에 참여하고 ‘태극기 부대’의 행렬에 동참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믿음을 단순한 허위의식이라고 치부해야 할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우리는 전쟁을 독려하고 혐오를 장려하는 지도자들의 선동이 파시즘으로 이어진 역사적 사례들을 잘 알고 있다. 섬뜩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극우 집단의 집회에도 ‘빵과 장미’는 있다. 그들도 빵을 나눠 먹고 장미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고귀한 존재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소위 지도자의 명령과 권위가 작동하는 순간, 내부의 빵과 장미는 외부를 향한 칼과 총으로 바뀐다. 그들은 논쟁을 허락하지 않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은 불평등하며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빵과 장미는 선택된 자들만 누려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권위주의와 불평등주의는 진보 진영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적 실천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을 “동료와 함께하며, 같이 행동하고 공적으로 등장하며, 말과 행위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세계에 관여하여 우리의 개인의 정체성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무언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기쁨과 희열”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한나 아렌트, 「권위란 무엇인가?」 『과거와 미래 사이』, 푸른숲, 2005, 136~137쪽). 그러나 진보 정치에서도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는” 말과 행동의 교환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정치는 이미 주어진 목표와 프로그램의 실행이다. 정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다. 그 답에 동의하는 편에 대한 감싸기와 그러지 않는 편에 대한 혐오가 진보 정치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건, 촛불집회에 참여하건 그 동기는 비슷하다. 그들은 고귀한 대의에 참여하여 고귀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비슷한 동기를 가진 이들이 그토록 서로를 적대할 때 그것은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까? 내가 접한 가장 아름다운 정치적 일화는 마거릿 콘의 『래디컬 스페이스』에 소개돼 있다. 1919년 겨울 토리노의 전투적인 노동운동가들과 그 노동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병사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들은 바리케이드가 아니라 거리에서, 카페에서, 동네 축제에서 만나 대화를 나눴다. 노동자들은 병사들에게 포도주를 권하며 민중의 삶과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몇 주 지나자 병사들은 장교들에 대한 복종을 거두었다. 병사들은 노동자의 편이 되었고 결국 진압군은 진압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채 토리노에서 철수해야 했다. 지도자가 없는 곳에서, 평범한 병사와 노동자들이 포도주를 건네며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어떤 삶이 더 고귀한지 입증되었던 것이다.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은 실패하는 경우가 더 잦지만, 자신의 정체성과 타인의 정체성을 조율하며 적대를 극복하고 함께 고귀함을 모색하는 방법은 대화에서 시작한다.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법적이고 강압적인 절차로부터 명문화된 고귀함을 빌려와 타인에게 강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절차의 정당성 또한 대화를 통해서만 납득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포기한 채 권위에 복종하는 오래된 습관을 또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법이 토론에 부쳐져 개정되거나 혹은 폐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고귀함으로 나아가는 대화의 기술과 능력은 광장과 법정에서만 학습되고 실험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일터와 일상에서 동료와 이웃과 가족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상처받고 억하심정이 생기는, 혹은 반대로 자신이 존중받고 있음을 확인하는 가장 원초적인 장소와 관계는 일터와 일상 안에 놓여 있다. ‘당신이라는 사람, 그리고 당신이 하는 일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고 우리의 삶이 좀더 나아지는 데 기여를 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주고받음으로써 사람은 일터와 일상에서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확인하곤 한다.      

얼마 전에 동네 시장에서 사십 년이 넘게 장사를 한 떡볶이집에 간 적이 있었다. 가게 주인에게 떡볶이집의 역사에 대해 질문을 하자 이야기보따리가 풀렸다. 자기 가게가 유명 방송에 나왔다는 사실과 다른 떡볶이집에 비해 얼마나 좋은 쌀떡을 사용하는지 한껏 자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손님을 대상으로 자기 자랑과 가게 홍보를 하는 판에 박힌 이야기구나 싶었다. 그러다 장사하면서 뭐가 제일 좋으냐 물었더니 주인은 이렇게 답을 했다. “이렇게 손님들하고 수다 떨며 웃는 얼굴 보는 거죠.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나도 웃는 얼굴 보여줘야 하는데 마스크 쓰니까 그러지도 못하고 답답해요.” 

그러면서 주인은 잠시 마스크를 내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내보이며 내게 말했다. “괜찮아요. 나는 사실 백신 맞았어요. 사람들이 염려할까봐 계속 마스크 쓰고 있는 거예요.” 그의 얼굴에서 자랑하고 싶은 욕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다른 욕망들이 그의 얼굴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주인은 사람들과 웃는 얼굴로 소통하고 싶은 욕망과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그 갈등이 장사를 하고 돈을 벌고 성공을 하고 싶은 바람에 비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주인이 얼마나 정이 많은 사람인지 내게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정’을 ‘다른 사람과 함께 생존하는 동시에 고귀해지는 능력’이라고 해석해본다. 정은 인류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선물경제의 사회심리학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정은 내가 당신에게 물질적 도움을 제공하는 것은 당신이 불쌍하거나 혹은 훌륭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나와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기에 그렇게 한다는 가정을 포함한다. 정이란 떡볶이를 파는 행위와 얼굴을 보여주거나 가리는 행위를 결합하는 윤리적 원칙이다. 나는 떡볶이집 사장의 정치적 입장을 알지 못한다. 그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사유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가 진보인지 보수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적 입장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그가 내게 보여준 다정함의 표식은 내가 그와의 대화를 쉽게 포기하지 않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