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아무개님과의 약속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다 누군가의 사인을 받고 환희에 젖은 경험은 딱 두 번이다. 그 두 사람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예술가들이다. 바로 『꺼벙이』를 그린 길창덕 화백과 <비정성시>를 만든 허우샤오시엔 감독이다. 이 두 작품에는 내가 한없이 사랑하는 두 인물이 있다. 머리 한편에 큰 땜빵이 있는 꺼벙이, 그리고 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바른 양조위(물론 양조위 머리칼에 바른 포마드 윤기의 극치는 <비정성시>가 아니라 <화양연화>에 나온다). 하지만 길창덕 화백이 꺼벙이 그림과 함께 사인을 해준 흰색 셔츠와,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사인을 해준 메모장은 모두 사라졌다. 큰 회한은 없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있다. 나는 간혹 꺼벙이와 양조위가 한없이 그립다.     

시를 쓰고 등단을 하고 시집을 냈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사인을 해줄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첫 시집이 나온 날 출판사에 갔더니, 편집자가 수십 권의 시집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일일이 사인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출판사 편집위원들, 편집자들, 동료 작가들에게 서명본 시집을 선물로 주는 것이 관행이라 했다.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소위 ‘작가 사인’, 그러니까 행정 서류에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닌, 나의 개성과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서체로 작성된 사인을 발명해야 했다. 그 자리에서 어색해하며 편집자에게 “이렇게 하면 되나요?” 물어보며 만든 그 사인이 이후에 조금씩 발전하여 오늘날 내가 ‘일필휘지’로 독자들에게 해주는 사인이 된 것이다.

책에 사인을 한다는 것, 그것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책에 시인이 직접 자신의 인격의 흔적을 새긴다는 것이다. 사인을 통해 대체 가능한 상품은 대체 불가능한 상징물로 바뀐다. 영화 <캔 유 에버 포기브 미?>에는 유명 작가의 사인을 위조하여 판매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무명작가의 일화가 소개돼 있다. 유명 작가의 사인이 들어간 편지를 소장 가치가 있는 귀중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소설가 고(故)이청준 선생을 인터뷰하기 위해 집에 방문했을 때, 선생은 나를 서재로 인도하더니 자신이 소장한 시집과 소설들의 초판들을 펼쳐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작가들의 사인이 책 속에 영원히 살고 있는 신비한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책에 사인을 해서 누군가에게 건네는 일이 나는 여전히 어색하다. 내가 일필휘지로 사인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아직 낯설다. 물론 독자에게 서명본을 건넬 때, 성의 있게 보기 좋은 사인을 하려고, 혹은 그리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보기에는 너무 공들이지 않는 듯하면서 자연스러운 일필휘지인 것처럼. 그리고 사인이 잘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기분이 좋다는 사실도 실은 어색하다. 내가 나에게 속으로 말한다. ‘사인 잘하네. 많이 컸네.’

사인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부끄러웠던 일이 있었다. 북토크가 끝나고 그후에 이어진 사인회도 끝난 후 행사를 마련한 단체의 직원이 “사인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했을 때, 환한 얼굴로 “아, 그럼요. 기꺼이 해드려야죠”라고 했더니, 그는 내게 인건비 지급 관련 서류를 내밀었다. 그때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을 터인데, 내가 긁적였던 머리는 마치 꺼벙이와 양조위의 헤어스타일을 합친 것 같았다. 포마드를 잔뜩 발랐지만 절대로 가릴 수 없는 땜빵, 그것이 내 머리라는, 아니 내 영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문집을 출간하기 직전 편집자가 책을 몇백 권이나 들고 나를 찾아왔다. 초판을 우선 구매하는 독자들에게 서명본을 제공하는 이벤트를 위해서였다. 미리 받은 면지 이천 장에 사인을 마찬 뒤라 손목의 시큰거림이 남아 있을 때였다. “이걸 또 언제 다 해요?”라며 난감해하던 나를 위해 편집자가 일손을 거들었다. 그가 책을 펼쳐서 건네주면 나는 책에 사인을 해서 옆에 쌓아놓는 식이었다. 하면 할수록 속도가 붙었다. 부드럽게 사인을 하면서도 뭔가 더 느낌을 주기 위해 만년필을 사용했다. 펜촉이 종이 위를 스치며 내는 소리와 느낌도 좋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수많은 사인을 하다 갑자기 일필휘지가 되지 않았다. 사인을 하다가 문득 ‘어떻게 하다 내가 똑같은 모양의 사인을 일필휘지로 그릴 수 있게 된 거지? 이제 나는 사인하는 기계가 된 것인가?’라는 식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는데, 그때부터 자꾸 같은 자리에서 실수를 범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 석 자가 보일 듯 말 듯 하나의 유려한 선으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선’의 ‘ㅓ’에서 ‘ㄴ’으로 넘어갈 때, 흐름이 끊기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인이 잘못 쓰였거나 이상하게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아챌 수 있었다. 아, 여기서 살짝 흐름이 끊겼구나. 

위의 일화는 내가 아는 오랜 우화를 연상시킨다. 다리가 백 개가 넘는 지네에게 다리가 여섯 개인 개미가 물었다. “너는 다리가 그렇게 많은데도 어떻게 나만큼 빨리 움직일 수 있니?” 그러자 유연하게 움직이던 지네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개미가 다시 물었다. “왜 그래?” 지네가 답했다. “네가 물어보니까 나도 생각해봤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자꾸 생각하니까 더이상 움직일 수가 없네.”

그렇게 수천 권의 서명본 작업을 마치고 어느 날 북토크 행사를 진행하였다. 행사가 끝나자 한 독자가 나에게 책을 가져와서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책을 펼치자 이미 나의 사인이 책 속에 있었다.

“어, 이미 사인이 돼 있는데요?” 

“그거 인쇄된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직접 펜으로 한 거예요.” 

“정말이요?” 

“네, 그 위에 침 발라보세요. 잉크 번져요.” 

독자는 내 말을 듣고 바로 손가락을 혀에 가져가 침을 묻힌 다음 사인 위에 발랐다. 그러고는 웃으며 말했다. “어, 진짜네요!”

위의 일화는 복제본이 범람하는 시대에 위태로워진 진품의 지위를 드러낸다. 내가 몇 시간 동안 손가락과 팔목을 아파하며, 일필휘지가 위기에 빠질 정도로 그토록 애써가며 사인을 했는데, 독자는 진짜 사인을 가짜 사인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독자들은 자기 눈으로 직접 봐야만 작가가 책에 직접 사인을 했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일까? 나는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물론 내가 예수가 아니고 사인이 성흔이 아니고 책이 성체가 아니기에 그 말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덜 피곤하도다.” 발터 벤야민이 말하지 않았던가. 기계복제 시대에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파괴되었다고. 아우라에 집착하면 사실 피곤한 일이 많이 생긴다. 작가를 봐야 하고, 사인을 받아야 하고, 그러다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면 실망하고, 심지어 좋아했던 그의 책들까지 외면하게 되고……  

하지만 어떤 독자들은 여전히 직접 봐야 믿고 또 행복감을 느낀다. 그들에게 사인이란 소장 가치가 있는 진품의 여부만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들이 서명본을 받고 느끼는 행복감이란, “오오, 득템!”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면지에 새겨진 사인이란 한 명의 작가와 한 명의 독자가 맺은 유일무이한 계약서(책) 위에 새겨진 약속의 증거라 할 수 있다. 내가 사인을 하는 일에 이토록 생각이 많은 것은 결국 나라는 사람의 인격이 별것 없다는 근본적인 자괴감 때문이다. 사인을 할 때마다, 아, 유명인 같아, 아, 이상해, 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자의식의 폐쇄회로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직도 모르는가? 사인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잘 읽겠습니다’와 ‘잘 쓰겠습니다’ 사이의 친밀하고도 진지한 교환인 것임을, 그것이 사인의 전부는 아니지만 분명 중요한 일부라는 것을.  

바로 그런 이유로 작가들은 헌책방에서 자신의 사인이 담긴 책을 발견하고 좌절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자신이 공들여 만든 사인이 자신의 소중한 책과 함께 버려졌다는 사실에만 낙담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작가는 아무데나 자신의 사인을 일필휘지로 갈겨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야말로 사인은 너무나 흔한 것이다. 작가에게 오히려 귀한 것은 자신의 서명 위에 쓴 ‘아무개님에게’이다. 작가는 자신의 이름은 수천 번 수만 번 쓰지만 독자의 이름은 단 한 번 쓴다. 그래서 작가는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개님,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아무개님, 나는 당신의 이름을 단 한 번 부르고 단 한 번 썼단 말입니다. 아무개님, 나의 유일무이한 독자여, 나를 버리시었나이까. 나 또한 당신처럼 봐야지 믿는 자,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는 자입니다. 내 시를 누가 어디서 읽는지 내가 어찌 압니까? 그런데 그날 당신은 내 눈앞에 나타났지요. 아무개님, 당신이 내 시를 읽는군요. 아, 바로 당신이군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나는 내가 직접 쓴 당신의 이름을 헌책방에서 발견했습니다. 아무개님, 정말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덜 피곤하군요. 당신이 내 시집을 읽는 것을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블라블라블라……

나는 아직도 책에 사인을 해서 독자에게 건네는 것이 어색하다. 사인을 할 때, 여전히 잡생각이 많다. 하지만 그 잡생각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도 한다. 오로지 사인을 해서 아무개님에게 책을 건네는 일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가끔 내가 낸 시집을 여러 권 가져와서 사인을 부탁하는 독자들이 있다. 그럴 때, 내가 얼마나 잡생각에 빠져 있는지 단번에 들통날 때가 있다. 첫번째 책에 사인을 할 때, 나는 독자의 이름을 묻는다. 그리고 아무개님에게, 라고 쓰고 사인을 한 후, 두번째 책을 펼친다. 그런데 잡생각에 빠져 있으면, 그새 독자의 이름을 잊어버리고는 다시 묻는다. 저, 성함이 어떻게 된다고요? 그런 일이 발생하면 너무나 부끄럽다. 그새 독자의 이름을 잊어버리다니. 나는 그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적어도 사인을 하는 순간, 책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하는 그 순간에는 독자의 이름을 되뇌며 ‘잘 쓰겠습니다’라고 속으로 말한다. 그러면 나에게 ‘잘 읽겠습니다’라는 말이 선명히 들려오는 것이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