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기묘한 이야기

어렸을 적 어린이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UFO, 유령, 시간여행 등에 대한 이야기들에 매혹되곤 했다. 놀라운 우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초자연적 현상…… 이 단조롭고 지루한 세상 어딘가에 경이와 신비가 숨어 있다고 알려주는 이야기들. 

생각해보면 내 삶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까지 경이롭거나 신비롭지는 않아도, 기묘하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내게도 있다. 그 이야기는 내 기억에 새겨진 독특한 문양의 문신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어떤 대목들에 우연히,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내가 ‘다친 새들과 인연이 있다’고 믿는다. 

다친 새와의 첫번째 만남이 생생히 기억난다. 사실 나는 그 새를 구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일 가능성이 크다. 그 새는 나 때문에 죽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참새 한 마리를 보았다. 그 새는 절뚝절뚝 다리를 절면서 날갯짓을 했지만 날아오르지 못했다. 나는 그 새를 잡아 치료해주고 싶었다. 다친 다리를 고쳐준 흥부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박씨를 떨군 제비가 연상됐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내가 구해주려 다가가니 오히려 녀석은 나로부터 도망쳤다. 나를 피해 이리저리 분주히 뛰어다니던 녀석은 어느 집 담벼락 아래에 난 작은 구멍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구멍의 입구는 새가 다시 나올 수 없을 만큼 작았고 안을 들여다봐도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빨리 나와. 내가 치료해줄게”라고 구멍 앞에서 외쳤지만 아무 기척도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날 이후 그 자리를 지날 때마다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구멍 안은 어둡고 고요했다. 언제부터인가 그 구멍을 외면했다. 죄책감 탓이었다. 나 때문에 그 새는 목숨을 구하기는커녕 구멍에 갇혀 죽었을 것이다. 나만 아는 구멍을 나만 외면하며 지냈다. 그 안에 새의 사체가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 나만 알고 있었다.

그 이후로 이어진 다친 새들과의 인연이란, 그때 마음속에 품게 된 죄책감을 극복하기 위해 사소한 사건들에 과하게 의미를 부여해서 생겨난 나만의 ‘기묘한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나중에는 죄책감을 어느 정도 덜게 된 일들도 있었다. 

고등학생 때였다. 어느 날 폭우가 내렸다. 우연히 학교 복도에 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봤는데 땅바닥에 새끼 새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창문 바로 옆 뜬금없이 튀어나온 석조 돌출물 위에 비둘기 둥지가 아슬아슬 걸쳐 있었다. 그리고 거기 또다른 새끼 새 한 마리가 보였다. 녀석은 솜털도 없는 맨몸으로 세차게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나는 건물 밖으로 나가 땅에 떨어진 새끼 비둘기를 확인하였다. 새끼 새는 이미 숨을 거두었기에 땅을 파서 묻어주는 일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었다. 나는 둥지에 남은 새끼 새의 생명은 지켜줘야겠다는 마음으로 다음날 종이 상자 하나를 가지고 학교에 왔다. 팔을 뻗어 둥지를 창 안으로 거둬들인 후, 새끼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곤 상자 안에 둥지를 통째로 넣었다. 작은 돌들을 상자 안에 넣어 바람에 날아가지 않을 만한 무게로 만든 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이제 새끼 새는 비바람에 시달릴 일이 없을 터였다. 상자 입구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 방향으로 놓아 새끼가 안에서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다만 어미 새가 들락날락하는 것을 보며 새끼 새가 잘 자라고 있나보다 짐작하고 안심할 따름이었다.

이 일은 학교 안에 제법 알려졌다. 새끼 비둘기를 구하는 과정에 친구들과 선생님이 도움과 조언을 주었다. 선생님은 나를 보면 “비둘기는 잘 있어?”라고 묻곤 했다. 나는 창을 지날 때마다 고개를 내밀어 상자를 살피고 또 혹시 새끼 새가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아래를 내려보곤 했다. 나는 그때 어디서 듣거나 읽은 비둘기 관련 정보를 떠올렸다. 비둘기 둥지와 새끼는 좀처럼 사람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비둘기뿐만 아니라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 많은 새들이 그 경우에 해당했다. 그중에 비둘기 같은 새들의 새끼는 날 수 있을 때까지 좀처럼 둥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처럼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상자 위에 올라앉아 있는 비둘기를 보았다.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정면을 응시하는 자세가 위풍당당은 아니더라도 제법 근사해 보였다. 바로 그 새끼 새였다. 군데군데 솜털이 삐져나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윤기나는 깃털이 몸을 뒤덮은 완연한 성체의 모습이었다. 나는 넋이 나간 채 새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새는 상자를 박차고 올라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그 이후로 그 새를 다시 보지 못했다. 별 근거는 없지만 나는 혼자서 확신했다. 바로 그 순간이 그 새가 둥지를 떠나던 때였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생각했다. 그 새는 자신이 잘 자랐다는 것을 내게 보여주고 떠나려고 상자 위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안녕을 고하고 날아갔다고.    

그 이후로도 다친 새들과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고등학생 때처럼 내가 새를 직접 구한 일은 없었다. 다친 새를 발견하면 동물을 구조하는 기관에 연락을 취하고 가던 길을 가곤 했다. 때로는 새가 구조됐다는 연락이 왔고 때로는 출동을 했지만 새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말도 들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안도했고 후자의 경우에는 내가 계속 그 자리에서 지켜줘야 했나, 라는 죄책감이 들었다. 

대학 연구소에 재직하던 때였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담배를 피우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연구소 앞 관목 숲 틈에서 날갯짓 소리가 나서 들여다보니 새 한 마리가 쭈그리고 있었다. 녀석은 도망가지는 못하고 날갯짓만 하다 결국 모로 쓰러져 발가락을 꼼지락댔다. 녀석을 잡아서 평지에 내려놓으니 눈만 껌뻑거렸다. 녀석이 쓰러져 있던 곳에 까만 토사물이 보였다. 버찌였다. 얼마 전 학교 직원들이 주변 나무에 농약을 쳤다고 옆에서 지켜보던 조교가 내게 말해줬다. “과학수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 녀석은 농약 묻은 버찌를 먹고 마비된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인터넷에 ‘텃새’로 검색을 해보니 여러 이미지가 나왔다. 그중 비슷한 걸 클릭하고 이름을 확인했다. ‘직박구리’라는 새였다. 동물구호 기관에 전화로 문의를 했다. 내가 있는 지역엔 자신들이 출동할 수 없으니 관할구청으로 연락을 하라고 했다. ‘푸른도시과’ 직원과 연결이 됐다. 어떤 새냐고 묻기에 또박또박 말했다. “직.빡.꾸.리.”

얼마 지나지 않아 연구소 앞에 중년 남자 두 사람이 흰 와이셔츠에 양복바지 차림으로 나타났다. TV에서 본 동물을 구조하는 ‘요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그냥 그렇게 오셨어요? 어떻게 새를 데려가시려고요?”라고 물으니, 도리어 나보고 “아니, 새를 어디 담아놓으셨어야죠”라고 했다. 그중 한 직원이 쓰레기통 주변에 있는 라면박스 하나를 들어올리더니 말했다. “여기에 넣어 데려갑시다.” 두 사람이 직박구리를 데리고 떠날 때 내가 물었다. “이제 그 새는 어떻게 되나요?” 그러자 한 명이 답했다. “용산으로 가요.” 내가 되물었다. “용산이요?” 그가 답했다. “네, 용산에 가면 센터가 있어요. 구조된 새들은 거기 다 모여요.” 그렇구나. 다친 새들은 용산에 가는구나.

나는 왜 이렇게 다친 새들을 자주 만나는 것인가? 다친 새들과의 인연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인가? 앞서 말한 것처럼, 첫번째 다친 새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이 만들어낸 나만의 ‘기묘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혹시 내게는 다친 새들을 불러모으는 모종의 기운 같은 것이 있는 건가?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아는 사실은, 다친 새들은, 전부는 아니어도 그중에 어떤 새들은 나를 만나면 다시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친 새들과의 인연’을 떠올리면 왠지 내가 나쁘지 않은 사람 같고 또 빤한 사람 같지 않다. 나는 이렇게 다친 새와 나와의 관계를 곱씹으며 나 스스로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를 갖게 된다. 나는 가끔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다친 새 이야기를 해준다. 그러면 그들도 자신들만의 기묘한 이야기를 해줄 때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기묘한 이야기들의 공동체가 되어가며 다 함께 기묘한 분위기에 젖어드는 것이다. 

요새는 다친 새를 만나거나 구조할 일이 거의 없다. 이유는 명백하다. 운전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차에서 내려 걸어갈 때도 다친 새를 본 적이 거의 없다. 이제 죄책감이 사라졌거나 다친 새를 부르는 내 영혼의 기운도 사라졌는지 모른다. 

다만 간혹 용산에 대해서 생각한다. 다친 새들이 모여서 치료를 받는다는 용산에 대해 말이다. 그곳에 가면 직박구리도 있고 비둘기도 있다. 까치, 까마귀, 꾀꼬리, 오리, 꿩, 백로, 왜가리, 가마우지도 있다. 어쩌면 딱따구리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도심 숲을 걸어가는데, 무언가 리드미컬하게 나무를 두들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만약 내가 마지막으로 새와 인연을 맺는다면 그 새는 딱따구리였으면 좋겠다. 그 새는 어디 다친 데가 없으면 좋겠다. 내가 숲을 지나가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모스부호로 딱 따다닥 딱딱 딱따닥 (안녕, 오랜만이네. 잘 지내?) 나무를 쪼아대는 그런 새였으면 좋겠다. 딱따구리, 이름도 사랑스럽다. 딱따구리여, 딱따구리여, 한없이 단조롭고 지루해지는 내 삶에 신비와 경이를 선사해줄 새 한 마리여, 너는 지금 어느 숲, 어느 나무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수백 번 불러도 질리지 않을 이름의 너, 딱따구리여.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