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스타벅스라는 세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재택근무와 칩거 생활을 하던 친구가 최근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완화된 후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제 드디어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나는 스타벅스로 간다. 그 어디보다도 나는 거기서 소속감을 느낀다. 그곳에 가면 내가 세상의 일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불안감을 떨치게 된다.

스타벅스는 커피를 마시거나 케이크를 먹으면서, 딱히 할일 없이, 혹은 노트북을 펼쳐 자기 일에 골몰하며, 혹은 지인들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다. 스타벅스가 여타 카페와 다른 점은 분명하다. 세계의 어디를 가도 스타벅스에는 비슷한 메뉴와 인테리어가 있어서, 여행중에 스타벅스를 마주치면 ‘이곳은 내가 너무나 잘 아는 공간!’이라고 느낄 수 있다. 

친구는 이어서 말했다. 해외여행중에 스타벅스를 발견하면, 그 주변의 동네가 최소한 우범 지역은 아니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친구 말에 따르면, 스타벅스는 최소한의 문명화를 지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실제로 스타벅스는 지리정보시스템(Geographical Information System)을 활용하여 인구, 수입, 상권, 교통 등의 정보를 수집하고 최적의 장소를 물색하여 점포를 열기로 결정한다. 

스타벅스는 어느새 익숙함, 안전함, 안락함의 세계적 표준을 제공하는 공간이 되었다. 한번은 스타벅스에서 한 중년 남성이 “아가씨, 여기 커피 한 잔 줘요!”라고 외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여기서는 그러는 거 아냐!” 하며 그를 말리던 친구들의 부끄러운 얼굴, 주변 사람들의 황당해하는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아, 우리는 스타벅스에서 소위 ‘매너’라는 것을 배우는구나. 그렇다면, 스타벅스는 ‘시민적 덕성’을 가르치는 평생교육기관 같은 곳인가?

코로나19로 인해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상실한 후, 새삼 깨닫게 된 것은, 우리가 소속되어 있다는 ‘세계’란 지극히 추상적인, 심지어 허구나 환상에 가까운 무언가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연결된 것은 사람밖에 없다. 세계를 채우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는 단지 몇 사람과만 대화와 경험과 기억을 나눈다. 축제에서, 거리에서, 공연장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거대한 공동체성을 확인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같은 경험의 대부분은 마치 간혹 꾸는 꿈처럼 강렬하게 피었다 사그라질 뿐이다. 우리가 영위하는 몇몇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조차 너무나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경구는 만고불변의 진실이다.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종국엔 눈앞에서 사라진다. 

얼마 전 아는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마음이 황망해졌다. 코로나19 전, 그것도 한국이 아닌 곳에서 장례식이 있었는데도 마치 코로나19 때문에 못 간 것 같았다. 모든 게 코로나19 탓으로 여겨졌다. 사실 우리의 관계는 진즉에 소원해졌는데도 말이다. 코로나19는 세상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이미 변화한 세상의 숨은 진실을 들춰내기도 한다. 세상은 촘촘해지고 이메일과 소셜미디어의 도움으로 원하면 언제든 서로 연락할 수 있지만,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제 메일에서 “I hope all”까지 쓰면 “is well with you”가 자동으로 완성된다. 내가 타이핑을 하면서 상대가 정말 잘 지내는지 궁금해하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 바람을 갖기도 전에 말이다.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철학적 해석은 다양할 수 있겠으나,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개념어는 한나 아렌트가 언급한 ‘무세계성(wordlessness)’이었다. 무세계성이란 사람이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그의 실존이 어떤 사물이나 타인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무세계성에 처한 사람은 심리적으로 외로움을 느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가 연인과 가족 안에만 머물러 있을 때에도, 온라인상에서 대화를 하고 회의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세계에 연루되어 사유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한 연루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하고 세계에 개입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섯 명 이하의 사적 관계와 온라인의 격자 속에 갇혀 있다.

아렌트가 제시한 무세계성이란 코로나19 사태와 무관했다. 하지만 나는 무세계성이란 키워드로 코로나19 전후의 세상을 헤아려본다. 우리는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면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우리가 돌아갈, 우리가 속해 있던 세계는 애초부터 없었다. 세계란, 그저 하나의 말에 불과했다. 돌아갈 곳이 있다면 그곳은 일상일 뿐이다. 그 한복판에 스타벅스가 있다. 그곳에 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매너를 갖추며)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타벅스는 마치 우리가 잃어버렸다 되찾은 정상적 세계의 표상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스타벅스에서 사람들은 적당히 떨어져 앉아 서로가 서로에게 익명인 채로 함께한다. 거기 앉아 있으면 반경 일 미터 정도의 공간을 임시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 간혹 누군가 접근해서 예의를 갖춰 “죄송한데 의자를 사용하지 않으시면 가져가도 괜찮을까요?”라고 정중히 허락을 구한다. 겉으로는 “아, 그럼요”라고 개의치 않는 것처럼 말하지만 우리는 잘 안다. 그 의자가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등 필요 없음에도, 그가 그 의자를 아무 말 없이 가져간다면 나는 마치 자기만의 공간이 침해당한 것처럼 불쾌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편히 앉아 노트북을 펼치고 인터넷을 통해 진보된 글로벌 월드를 유영하며 세계 시민-소비자로서의 자유를 만끽한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구체적인 것들이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을 때, 모든 물리적 근접성이 실질적 위험으로 간주될 때, 비상사태가 완화되자마자, 가장 익숙하고, 안전하고, 안락한 공간으로 사람들을 고향집처럼 맞아주는 곳이 바로 스타벅스이다. 사람들이 일 미터 이상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함에도 그 규모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곳. 여행길이 막힌 상황에서도, 세계 곳곳에서 배달된 희귀한 커피들을 “당신만을 위한 것이에요”라며 고객들에게 제공해주는 곳. 스타벅스는 브랜딩 알고리즘을 통해 공항 터미널, 광장, 동네 카페, 시애틀, 서울, 중남미, 아프리카로 스스로를 전시한다. “떨어져 교류하자”는 뉴노멀 시대의 사회적 규범은 이미 스타벅스가 만들고 유지해온 글로벌 준칙이었다.  

스타벅스가 문명의 위기를 예감하며 익숙함과 안정과 안락의 이미지로 자신을 브랜딩하고 운영방식을 정했을 리 없다. 애초에 스타벅스의 로고에 박힌 세이렌은 구시대적 상상력의 표현이었다. 매혹적인 노래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나리오. “아름다움이란 치명적이기 마련이어서,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사람들(시인)은 숭배를 받는 만큼 경계의 대상이 되었었지”로 요약되는 이야기. 하지만 이는 얼마나 식상해졌는가. 자신을 불온한 존재로 드러내는 시인, “내 시를 읽으면 당신 삶이 망가질 수 있어”라고 경고하는 시인을 상상해보라. 불쾌하기는커녕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이제 우리가 바람직하게 여기는 시인은 소셜미디어에서 독자와 친밀하게, 매너 있게, 북토크와 낭독회를 홍보하고 개설하는 시인이다. 

스타벅스의 브랜드 이미지가 불온함과 정반대라는 사실은, 스타벅스가 원래 로고에 있었던 다리를 벌린 세이렌의 하반신을 잘라내고 새로운 로고 이미지를 만들었을 때에 이미 확인되었다. 세상이 위험하고 불안할 때, 파도가 격랑으로 몰아칠 때, 사람들은 치명적인 노래가 아니라 평화로운 휴식에 유혹당한다. 이 시대의 시인에게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불온함이 아니라 ‘힐링’인 것처럼 말이다. 시인으로 문학 관련 행사에 섭외될 때, 나는 종종 ‘말랑말랑’이란 수식어를 듣곤 했다. 정치관련 집회에서도 부드러운 이미지가 필요하다며 섭외를 받은 적도 있었다. 나라는 사람의 성정이 애초에 불온함과는 거리가 멀기에 큰 상관은 없었지만 시인에 대한 그 같은 기대가 흥미롭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이제 코로나19 상황을 겪으며 알게 됐다. 이제 시인들의 목소리는 더욱 젠틀해지고 소프트해질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시인들이 스타벅스에서 시를 쓸 것이다. 

시인들은 스타벅스에서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생각할 것이다. 내가 모르는 나의 친구, 내가 모르는 나의 동지, 내가 모르는 나의 연인, 내가 모르는 세계의 동반자들, 우리는 떨어져 연대한다. 당신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도 나는 매장 마감 때까지 빈자리를 지키고 시를 쓰며 이 불안하고 비참한 세계를 홀로 항해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 분명히 하겠다. 나는 혼자 남아도 마스크를 벗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시인인 동시에 당신들과 같은 시민이자 소비자라는 사실의 표식이기에.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