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내겐 기댈 언덕이 있다

나는 오빠가 하나 있다. 내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들은 기억할 수밖에 없는 사람, 사고 당시에 자기 팔에 불이 옮겨붙는데도 나를 불 속에서 꺼내준 생명의 은인이다. 자신의 실수는 하나도 없었는데도, 그 시간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수년간 그날의 자기 자신을 미워했던 사람이다. 내가 다 낫기 전까지는 결혼도 안 한다고 말했을 만큼 동생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며 아파했던 사람이다.


이 사실만 보면 오빠와 내가 엄청 절절하고 애틋한 우애 있는 남매간일 듯하나 항상 그랬던 건 아니다. 사고 전에도 지금도 나는 오빠 휴대전화에 ‘하나뿐인 내 동생’으로 저장되어 있지만, 그 하나뿐인 동생은 오빠 차를 한번 얻어 타려면 버스비 정도는 내라는 잔소리를 열 번은 들어야 했다. 사고 나기 몇 개월 전엔 오빠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미처 문도 못 열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적이 있다. 그때 오빠가 내 등 쪽으로 쓱 손을 뻗길래 ‘오빠가 등을 두드려주나보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자기 차에 뭐라도 묻을까봐 나를 문 끝까지 쭉 민 것이었다. 사고 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구해주었지만 사실은 반전 있는 그런 오빠였다.


어릴 때부터 키도 크고 덩치도 있는 편이었던 오빠와 달리 나는 키도 작고 밥도 잘 먹지 않고 잔병치레도 꽤 잦았다. 그래서 세 살 터울이지만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항상 오빠는 알아서 밥도 잘 먹고 제 할일도 잘 하는 큰아이로, 나는 애지중지, 손이 많이 가는 막내로 대하셨다. 막내라면 막내답게 귀여움이나 받으면서 지낼 것이지 꼭 내 몸무게의 두 배는 되는 오빠를 이기겠다며 덤비고 약 올리다가 오빠와 싸우고 일방적으로 당하곤 했다.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세 살 아래 여동생과 노는 게 재밌을 리 없는데 오빠 친구들이라도 놀러오면 내가 더 신나서 오빠 방에 먼저 들어가 앉았다가 타박만 당하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어쩌다 오빠가 나와 놀아줄 때도 있었는데, 말이 놀이지 몸이 작은 나를 이용해서 좁은 공간에서 뭔가를 꺼내 오라고 하거나, 심부름을 시킨 것이었다.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였지…)에 들어가기 전, 우리 가족은 지금은 충청남도 보령시가 된 당시 대천에서 일층엔 작은 슈퍼마켓이 있는 이층집에 살았다. 연탄으로 난방을 하던 그 집에서 겨울이 되면 연탄재를 버리는 일이 오빠 담당이었는데 머리 좋은 오빠는 연탄재를 들고 일층까지 내려가지 않고, 이층 마당에서 바구니에 줄을 달아 연탄재를 내렸다. 그러면 내가 일층에서 그걸 하나씩 받아서 옮겨서 버리도록 했다. 유치원생인 나는 또 그게 놀이인 줄 알고 열심히 옮겼더랬다.


물론 잘해준 기억도 많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같이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오빠가 큰맘먹고 진짜 비싼 아이스크림콘을 사줬는데, 한 손엔 아이스크림을 들고서 다른 한손으로 자전거를 옮기다가 겨우 한입 먹은 콘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때 오빠가 콘을 길가 난간과 가로수 나무껍질에 쓱쓱 닦아서 이제 깨끗해졌으니까 먹어도 된다며 건네줬다. 깨끗하다는 오빠 말이 몹시 의심스러웠지만 결국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엄마 말씀에 의하면 어릴 때부터 오빠가 동생을 어찌나 아꼈는지, 어느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이 없자 동생이 비 맞을까봐 비닐봉투를 주워 내 얼굴에 씌워서 데려왔다고 한다. 동생이 숨막히면 어쩔 뻔했느냐며 오빠가 혼이 났다는 결말이지만 말이다. (쓰다보니 오빠 폭로 글처럼 되어가서 슬슬 수습을 해야겠다.)


우리 남매는 여느 평범한 남매와 다르지 않게 티격태격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그래도 동생을 지키려던 오빠의 마음은 남달랐고 결국 그 동생을 죽음에서 지켜주었다. 내 책을 읽은 독자들을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보면 오빠는 잘 지내느냐는 질문이 빠지지 않는다. 오빠는 13년 전 결혼을 했고, 현재 세 아이를 둔 가정의 가장이다. 하지만 여전히 동생과 멀리 떨어져 지내지 못하고(내가 미국에 있을 때에도 그렇고 지금도 내가 주로 포항에 살고 있어서 물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사고 후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꼼꼼하지도 못하고 준비성도 없는 동생을 일일이 챙겨주고 있다.


거의 매일 잘 있는지, 별일은 없는지 묻고, 내가 어디를 가야 할 때는 회사에 앉아서도 교통편이나 빠른 길 안내도 해주고, 자동차보험금이나 세금 내는 날짜까지도 챙겨준다. 거기에다가 이사 간 집의 오래된 샤워기나 현관키 교체까지 도맡아 해준다. 말하다보니 ‘오빠는 일을 안 하나’ ‘직업이 변변치 않나’ 싶을 수도 있지만, 다방면에 능력이 좋아서 세 아이와 아내, 부모님과 동생 일을 챙기면서 자기 일도 잘하며 아주 변변하게 살고 있다. (사실 이렇게 지내는 건 시댁 근처에 사는 걸 좋아하는, 요즘 같은 시대엔 조금 특이하고 착한 새언니 덕분이기도 하다.)


사고 후 꼭 10년이 되는 날, 오빠에게 물었다. “10년 된 소감이 어때?” 오빠는 “난 어제 일 같이 생생해”라고 했다. 그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오빠에겐 아직도 아프고 힘든 기억이구나’ 싶었다. 오빠는 사고가 있던 날인 나의 두번째 생일 아침마다 생일 축하한다고 연락을 해온다. 나는 잊고 살다가 오빠의 메시지를 받고 ‘아, 오늘이 그날이구나’ 하게 된다. 오빠는 나 대신 아픈 기억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이다.


오빠의 별명은 ‘오까’다. 일본어로 오해를 받기도 했었는데, 피부가 당겨서 입을 못 다물던 시절, 내가 ‘비읍’ 발음을 할 수 없어서 오빠를 ‘오까’라고 발음해서 생긴 별명이다.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는데 일본어로 ‘오까’는 ‘언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내가 오빠를 ‘오까’라고 부르던 때부터 지금까지 오빠는 내게 언덕과 같은 존재다. 나를 살뜰히 보살펴주고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미더운 언덕과 같은 사람이다. 죽을 뻔했던 나를 살려주고, 사는 동안 내내 기댈 언덕이 내게는 있다.


(사고 후 20년째가 되는 날 아침, 오빠는 “힘들고 아팠던 기억보다 기대하지 못했던 좋은 일들이 많았던 것과 행복한 기억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에 감사해. 스무 살 된 것 축하하고 훌륭하게 살고 있어줘서 고마워”라는 메시지와 함께 선물도 보내줬다. 그 덕에 늦잠 잔다고 엄마한테 혼나고 있던 나를 또 한번 구해주었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