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상처가 꽃이 되게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건 2005년 여름이었다. 열세 살인 아이는 또래보다 많이 왜소했다. 화상을 입은 나와 많이 닮은 아이였고 나보다 더 많이 아팠을 아이였다. 항상 자신을 아프게 하는 의료진과 미소보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늘 자신을 바라보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아이는 겁에 질려 있었다. 진찰이 끝나고 근처 카페에서 아이와 마주했다. 내가 아이에게 뭔가 희망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주기를 기대하는 그 상황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내 존재 자체가 아이의 희망을 꺾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되어 한참 동안 아이 앞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화상을 입고 1차 피부이식수술을 기다리며 입원해 있을 때, 엄마가 이식수술을 마치고 퇴원해서 참 씩씩하게 사는 사람이라며 어떤 언니를 병실에 초대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의도와는 다르게 언니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언니가 돌아간 뒤 많이 울었었다. 그때만 해도 수술받고 잘 참고 시간이 흐르면 예전처럼 될 줄 알았다. 언니는 수술한 지 꽤 시간이 됐다는데…… 이식한 피부 관리도 그렇게 열심히 한다던데…… 언니의 피부는 빨갛고 울퉁불퉁해서 딱딱한 고무 같았다. ‘내 미래가 저렇단 말이야?!’ 하고 절망했었기에 나 역시 아이에게 그런 충격을 주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치만 이미 아이를 만났고,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내내 어색해하며 겁먹은 아이의 눈을 보다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려나가 얼마나 예쁜 얼굴을 갖고 있는지 알아. 려나는 이쁜 아이야”라고 입을 뗐다. 그 말에 려나가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려나는 얼굴을 포함한 전신 95퍼센트 면적의 피부에 3도 화상을 입었다. 한때 화상 입고 살아남은 사람 중에 내가 제일 많이 다쳤다고 ‘화상 1등’이라고 했었는데 나는 화상 입은 면적이 (겨우) 55퍼센트니까 려나가 나보다 훨씬 윗길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살던 증조부님이 중국 지린성吉林省에 정착해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려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스 폭발 사고로 화상을 입었다. 새집으로 이사해 그 다음날, 가스 누출을 미처 감지하지 못한 엄마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려고 가스불을 켰을 때 바로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고 한다. 그날 이후 려나는 살 가망이 5퍼센트도 안 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1퍼센트의 가망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리겠다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희망 속에서 생존했다.


화상 치료는 한두 번 수술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중국에서 초기에 받은 수술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던 집도 팔았지만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약만 들고 퇴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어린아이라서 몸집은 점점 자라는데 이식받은 피부는 자라기는커녕 수축만 하니 나중에는 몸이 휘어 누워 있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런 려나의 안타까운 사정이 알려지자 톈진에서 작은 출판업을 하시는 어느 장로님께서 려나를 돕겠다고 나섰고, 후원금도 모아줘서 베이징에서 수술을 받았다. 전라도 광주의 한 성형외과에서도 수술을 해주겠다고 나서서 한국에 건너와서도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내가 려나를 만난 것은 한국의 어느 단체 덕분에 려나가 병원 진찰을 받으러 두번째로 한국을 찾은 때였다. 아이가 지나온 시간은 한때 ‘화상 1등’인 나 역시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이었다.


려나와 나는 닮은 점이 참 많다. 안면화상을 입은 것도, 아픈 와중에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잘 참아온 것도 닮았고, 심지어 연도는 다르지만 사고를 만난 날짜도 같다. 그리고 이제는 같은 의사 선생님께 수술을 받는 환자이자 지금은 둘 다 ‘이대 나온 여자’이기도 하다. 사고 후 쭉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려나는 어느 정도 회복을 한 뒤 어릴 적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됐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반갑기도 했지만 친구들은 곧 대학생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 부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려나는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학교 졸업장을 받아본 적 없는 려나는 수술을 받으면서 톈진에서는 교회 청년들에게서, 한국에서는 학교 밖 청소년들이 공부하는 가톨릭 소속의 단체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아 그야말로 ‘열공’을 했다. 결국 우수한 성적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한 려나는 이화여대 영문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신기하게도 나도 려나가 입학하던 해의 입학식에는 ‘만나고 싶은 선배’로 학교측의 초대를 받아서, 졸업식에는 축사를 하기 위해서 학교에 갔다. 두 번 모두 내겐 가문의 영광 같은 일이었는데 돌아보니 그 초대 시점이 기가 막혔다. 아무래도 려나를 축하해주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만 같았다.


려나가 졸업하는 날에야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려나 어머니의 성함이 ‘이화’셨단다. 사고 때 려나를 데리고 빠져나오면서 더 많이 다쳤던 어머님은 사고 후 사흘 뒤 돌아가셨다고 한다. 려나가 충격을 받을까봐 할머니는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려나는 사고 2년 뒤에야 자신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다가 그간 짐작만 해오던, 차마 입밖으로 꺼내 확인할 수 없었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일을 두고 려나는 “슬프기도 했지만 엄마는 저처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어요”라고 했다. 그 말에 눈물이 왈칵 났다. 오랫동안 엄마라는 존재는 려나에게 슬픔의 대상이자 원망의 대상이었을 것이고 좀처럼 흐려지지 않는 그리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엄마의 이름과 똑같은 이름의 학교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 려나는 꼭 엄마가 함께하는 것만 같아서 더 열심히 공부했고, 힘들 때마다 학교 이름을 되뇌면 엄마가 위로나 격려를 해주는 것만 같았다고 했다. 그렇게 려나는 이화인이 되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려나는 나와 공통점이 하나 더 생겼다. 바로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려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한림화상재단에서 화상을 입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름 캠프에 멘토로 봉사했다. 의기소침하고, 화상 상처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자꾸 가리려는 어린 시절의 자신과 같은 아이들에게 내가 그랬듯 려나도 마음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다 2016년 미국의 화상 생존자 모임인 피닉스 소사이어티Phoenix Society for Burn Survivors의 국제컨퍼런스에 참가했던 것이 려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곳에서 려나는 말 그대로 불사조(피닉스)처럼 화상을 경험하고 생존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화상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사람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무대에 올라와 노래하는 모습,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빛이 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다 같이 시가지 행진을 하면서, 화상이 더이상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우리니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어졌고, 다 같이 당당하게 걷는 것만으로도 동정과 호기심 어린 눈길만 보내는 세상을 향해 “화상 입고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를 따뜻하게 바라봐주세요”라고 외치는 기분도 들었다고 했다. 나 같으면 이 느낌을 글로 쓰고 주변에 이야기하는 데서 그쳤을 텐데, 려나는 나와 다르게 특별했다. 려나는 ‘한국에서도 이런 프로젝트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고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려나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썼던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닌 ‘함께’의 가치 추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또래 화상 경험자들과 위드어스With Us라는 커뮤니티를 조직했다. 공동대표가 된 려나는 사회공헌 플랫폼을 통해 프로젝트 자금 모집에 성공했다. 미국에서 경험했던 그 느낌을 다른 화상 경험자들에게도 전달해주려고, 또 세상을 향해서는 우리도 당신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라고 당당히 알리려고 캠페인을 진행하고, 사진전이나 토크콘서트를 열고 있다. 얼마나 멋진지 모른다. 과거엔 화상 환자였지만 이제는 환자가 아니라 화상 생존자인, 화상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화상 경험자들이 모여 청계천을 함께 걸었다. 우리는 더이상 가리거나 숨지 않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2005년에 나를 처음 만난 날, 려나는 여름에도 모자를 쓰고 마스크와 긴팔 옷으로 꽁꽁 싸맨 자기와 달리 많은 사람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반팔 옷을 입고 상처 난 손을 흔들며 자신에게 인사하던 내가 참 신기했다고 한다. ‘저렇게 살 수도 있는 거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사이 많은 일을 겪으며 려나는 자랐고 성숙해졌고 단단해졌다. 이제 려나는 마스크도 벗고, 예쁜 반팔 블라우스도 즐겨 입고, 자신의 모자뿐 아니라 또다른 화상 경험자가 자신을 가리기 위해 썼던 모자를 벗을 수 있도록 이끄는 존재가 되었다.


려나는 사고 후 2년 만에 눈썹 문신 시술을 받고 처음으로 거울을 보았다고 한다. “생각보다 괜찮네”라고 생각했단다. 많이 다친 다리와 팔은 거울 없이도 볼 수 있었기에 그간 짐작하며 걱정했던 것보다는 괜찮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단다. 4년 전 대학에서 내가 맡은 한 과목에 려나를 특강 강사로 초대해 위드어스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려나의 이야기 자체도 힘이 있었지만 어릴 때 아나운서가 꿈이었던 려나는 말도 똑소리나게 잘해서 학생들도 나도 참 많이 배우고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포항 구경을 시켜주면서 바다 배경이 예쁜 카페에서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자기 사진들을 보면서 “예쁘다”고 감탄하는 려나의 그 반응이 너무 진심이라 눈물 나게 좋았다. 그리고 그동안 려나가 왜 화장을 열심히 하지 않는지 궁금했었는데 그때 알게 되었다. 대학생이 될 때 이제 화장도 하라고 내가 쓰는, 커버가 잘 되는 화장품도 몇 번 사주고, 화장도 시켜주곤 했는데, 려나는 메이크업을 나만큼 즐겨 하지 않는 것을 보며 ‘왜일까, 피부톤만 더 맞춰줘도 더 예쁠 텐데……’ 했었는데 ‘이 아이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진심으로 예쁜 거구나!’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나를 보며 ‘이만하면 나름대로 귀엽게 생겼다, 어떤 때는 예뻐보이는 날도 있다’ 이러면서 살았는데…… 역시 려나는 나보다 윗길이었다. 려나는 진짜 예쁜 아이가 맞았다. 려나는 말한다. 화상火傷이 화상花像으로, 상처가 꽃이 되기까지 자신을 사랑할 거라고. 모든 화상 경험자들이 꽃을 닮은 모습으로 살면 좋겠다고. 모두가 손잡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비범한 꿈을 꾸는 려나 옆에서 나 역시 같은 꿈을 꾸며 함께 그 길을 가겠다고 약속한다.


(려나는 지금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복지전공 박사과정중이다. 똑똑하고 성실하고, 자신이 받았던 만큼 남도 돕고 싶어해서 그 방법을 연구하고 고민하는 데 열심이다. 나와 함께 현재 진행중인 연구 프로젝트만 몇 개인지. 이젠 내가 도움을 받는 쪽인 것 같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