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사고와 헤어진 사람

이십 년 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를 만났다. 친오빠가 옆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우리는 늘 같은 시간에 학교 후문에서 만나 늘 다니던 길로 함께 집에 가곤 했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았다.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어서 오빠는 차를 세웠고, 이제 곧 초록 불로 바뀌면 언제나처럼 엄마 아빠가 기다리시는 집으로 갈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차 한 대가 마구 밟으며 달려와 뒤에서 우리를 들이받았다. 소주를 다섯 병이나 마시고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었다. 얼마나 세게 받혔는지 작은 우리 차는 중앙선을 넘어갔다가 튕겨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해 일곱 대의 차와 충돌하다가 불이 났다. 그 불이 내 몸에 붙었고 정신을 잃은 나를 꺼내주다가 오빠도 팔에 화상을 입었다. 평소처럼 집으로 향하던 길은 지옥으로 변했고 나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얼굴과 피부를 가지고 칠 개월이 지나서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사고를 당했다. 그게 맞다. ‘당했다’는 표현에 대해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고, 사실이고 정확한 표현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당했다’는 말을 쓰기가 싫었다. 사고를 당했다고 말해버리면 내가 음주운전자가 낸 교통사고의 ‘피해자’로 규정되는 것 같아 싫었다. 이 세상에 피해자로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평범한 어느 날 밤, 예기치 않은 사고가 있었고 그로 인해 내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날 밤 이후의 시간을 지나온 나를 피해자로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말할 때마다 사고가 일어났던 그 자리로 그 시간으로, 나의 온 마음과 에너지가 쏠리는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의 나는 없고, 사고가 있었던 거기 그 시간에 머물러 사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그 시간을 가장 지우고 싶고 도려내고 싶으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 돌아보고 후회하기를 반복하면서 거기 그 시간만 곱씹으며 사는 사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누군가의 안타까운 사고 소식을 뉴스에서나 접하던 사람이었지 내가 뉴스 속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이 모씨가 될 수도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라고 원망하기보다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집중했다. 그렇게 살다보니 나쁜 일은 누구나에게 일어날 수 있고 그 일이 내게도 일어났을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되돌아보니 나는 더이상 나쁜 일이 일어난 그 자리, 그 시간에 머물러 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날 이후의 시간을 살았다. 살아남기 위해 고통을 견디었고, 조금 더 쓰기 편한 몸을 갖기 위해 수십 차례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다. 꿈을 꾸었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또 그 시간을 같이 버텨준 사람들을 사랑했고 사랑받으며 살았다. 


나는 나쁜 일을 만났지만 그 일과 헤어졌다. 이 글도 그렇지만 인터뷰나 강연을 하는 자리에서 내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고 이야기인데 다들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괴롭고 힘들지 않느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이제는 소화가 다 되었고, 그 이야기가 더는 아프지 않다고 대답한다. 사고와 헤어지는 시간은 길었고 과정은 더뎠으며 몸이 아픈 만큼이나 마음도 많이 아팠지만 나는 조금씩 조금씩 흘려보냈다. 더이상 그때 그 자리로 끌려가지 않았고, 매일 오늘을 살았다. 


한참 시간이 더 흐르자 그 일은 길을 가다 모르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힌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예상치 못해서 부딪혔고, 반갑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일이지만 내 어깨를 치고 간 사람의 뒤통수를 잠시 째려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툭툭 털면서 가던 길을 이어가는 것처럼, 사고와 나 역시 그렇게 부딪히고 툭툭 털고 헤어졌다. 그렇게 나는 내 시간을 살았다. 


그렇기에 ‘나는 사고를 만났다가 헤어진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스무 살 무렵, 『나는 누구인가』라는 아주 두꺼운 책을 사서 읽으며 내가 누구일까 고민했다. 그때 무슨 답을 얻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순간에서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내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한다고 생각한다. 


심리학 개념 중에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라는 게 있다. 사고로 신체적 손상을 입거나 정신적 충격이나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건을 겪고 심리적인 외상을 입은 뒤, 즉 트라우마 상황을 겪은 후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거나 서서히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긍정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회복 과정 중에 그전보다 더욱 성장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나거나 삶의 우선순위나 인생철학이 바뀌기도 한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또 어떤 때는 나의 실수로, 가까운 사람의 우연한 선택의 결과로 우리는 비극적인 상황을 겪게 된다. 지독한 현실이 우리를 상처 입히고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흔을 안기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다면, 회복 과정을 지나며 우리 마음속 어떤 부분은 키가 자라고, 또 어떤 부분은 성숙해지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는 점이다. ‘외상 후 성장’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내 삶과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가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외상 후 성장’을 다룬 책의 한국어판 역자 서문에서 내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외상 후 스트레스에 사로잡혀 살아가지 않는, 외상 후 성장에 이르는 여러 가지 방법을 소개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다시 쓰기’였다.*


나는 누구인가. 상처받은 희생자인가 시련을 극복해낸 사람인가. 외상 후 성장은 나를 새롭게 정의하는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기도 한다. 사고가 있었던 그 자리 그 시간에 머무르면서 ‘이게 다 그놈 때문이야’ 남을 탓하고 그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을 곱씹으며 쉽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지독히도 재수없는 그날을, 혹은 내 거지 같은 운명을 비관할 것인가. 아니면 그후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견디고 참아냈던 날들을 기억하고, 내게 남아 있는 것들을 세어보고 새로 얻은 것을 발견하면서 감사할 것인가. 나는 사고를 당한 사람인가, 사고를 만났지만 헤어진 사람인가. 스무 해가 지나도 여전히 지겹도록 수술을 받는 화상 환자인가, 수술을 받고 조금씩 나아진다는 기대를 안고 살아가는 생존자인가. 회복을 넘어 성장으로 가기 위해서 내게는 내가 누군지 정의하는 그 ‘다시 쓰기’가 필요했다. 


(그나저나, 그저 소소한 일상에 대해 쓴다더니 시작이 조금 진지하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