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알다가도 모르겠는 남궁인 선생님께

지난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우리의 연재를 담당하시는 이연실 편집자님과 함께 회의 겸 회식을 하는 자리였죠. 만남의 주제는 ‘이슬아와 남궁인의 서간문 연재, 이대로 괜찮은가’였습니다. 그 중대한 만남에 선생님은 대지각을 하셨습니다. 무려 한 시간 이십 분이나요. 선생님이 바쁘신 건 알지만 저나 이연실 편집자님도 그 못지않게 바쁩니다. 특히 이연실 편집자님께서는 요즘 저자로서도 활약하시느라 평소보다 두 배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신데 그 만남에 늦으시다니요. 선생님이 단톡방에 거듭해서 구구절절 써놓은 사죄 메시지에 편집자님은 너그러운 글투로 천천히 오시라고 두 번이나 답장하셨지만 제 입장은 달랐습니다.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천천히 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각이 한 시간 넘게 이어졌을 때 저는 한마디 카톡만을 남겼습니다. “여러모로 어리석으시네요.” 그러자 이연실 편집자님이 제게 말씀하시더군요. “남궁인 선생님께 좀 잘해주세요……” 그래서 덧붙였습니다. “조심히 오십쇼.” 

 

선생님은 그로부터 이십 분 뒤 정말로 조심히 그리고 조신히 등장하셨고 우리의 만남은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왜 늦었냐고 묻자 도배를 하다가 늦었다고 대답하셨어요. 풀 발린 도배지가 마르기 전에 다 바르고 나와야 할 것 같았다고, 하지만 오는 내내 후회했고 정말 죄송하다고 허리 숙여 사과하셨습니다. 너무나 공손히 사과하신 나머지 저는 불호령 의지를 잃었죠. “아니 도배를 왜 굳이 오늘……” 저의 중얼거림에 선생님은 “그러니까요……”라고 읊조리며 한번 더 자책하셨습니다. 그 순간 상상할 수 있었어요. 지지난 편지에 묘사하신, 간호사 선생님 눈치를 보며 복도를 빙 돌아가는 남궁인 선생님의 모습을요. 겸연쩍고 궁색한 자세로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바로 그 자세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의 마감에 늦고 있기 때문이죠. 선생님처럼 저녁 약속에 한 시간 이십 분이나 늦지는 않았어도 잦은 지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일간 이슬아> 원고를 매번 자정 넘어서 발송하고 친구와의 약속에 자주 늦습니다. 최근에도 늦어서 택시를 탔어요. 택시에서는 자책을 합니다. 나는 어째서 이 모양인가. 왜 진작 서두르지 않아서 돈과 기름을 길에다 쓰며 살아가는가. 며칠 전에도 그런 생각으로 택시에 실려가던 중 홍지문터널에 진입했습니다. 내부순환도로를 타던 중이었거든요. 터널은 평소라면 이 분 만에 빠져나올 수 있는 코스였지만 퇴근 시간이라 약간 정체되고 있었어요. 

 

선생님은 터널 따위 무심히 통과하실 듯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평소엔 그 사실을 잊고 있다가 터널에 진입하는 순간 알게 돼요. ‘×발 ×됐다’ 싶죠. 길고 어두운 2차로를 달리면 달릴수록 불길한 느낌이 듭니다. 삽시간에 호흡곤란이 오고요. 종종 이런다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원래는 엘리베이터에서만 이러는데 가끔은 기차나 터널로도 증상이 옮겨집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결국 열리지 않을 것이며 나는 몇 시간 뒤 변사체로 발견될 거라는 망상이나, 터널이 결국 끝나지 않을 것이며 나는 이 안에서 질식사할 거라는 망상은 폐소공포를 겪을 때면 확신으로 변합니다. 택시의 창문을 열고 숨을 쉬려 노력했습니다.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듯이요. 기사님이 왜 그러냐고 물으시더군요.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죠. 터널이 안 끝날 것 같아서 그런다고. 그러자 기사님은 허허 웃으셨어요. 


“거의 다 왔어요. 금방 끝나요.”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숨을 이상하게 쉬며 울었습니다. 죽을 것 같다는 공포에 비하면 눈물이 나는 건 아무것도 아니죠. 그 순간 통화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러질 못했습니다. 기사님 말대로 터널은 금방 끝났는데요. 빌어먹을 새로운 터널이 곧바로 시작되고 있었어요. 정릉터널이었습니다. 안도할 새도 없이 헥헥대는 저에게 기사님이 건넨 질문은 이것입니다. 


“트라우마……? 그런 거 있어요?”


저는 울면서 대답했습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진심이었습니다. 정말로 모르겠으니까요. 기사님은 평온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트라우마 비슷한 게 있었어요. 한쪽 다리를 절단했거든요.”


깜짝 놀라서 눈물이 뚝 그쳐버렸습니다.


“어쩌다가요?”


“트럭 운전 하다가 버스랑 정면충돌해서요. 스물여덟 살에.”


그 말을 하는 기사님의 나이는 우리 아빠랑 비슷해 보였습니다. 왼다리에 의족을 낀 채 오른다리로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으며 운전하고 있다고 설명해주셨죠. 저도 모르게 터널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까먹었습니다. 터널을 탈출할 수 없다는 망상에서,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는 상상으로 집중력이 옮겨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사님의 재활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숨이 쉬어졌어요. 정신이 얼마나 간사하게 몸을 가지고 노는지 저는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저에게 기사님은 하나도 새로울 것 없는 말을 해주셨습니다.


“무서워도 마음을 굳게 먹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때로는 그런 말이 도움이 됩니다. 무슨 의미인지 진짜로 이해하는 이가 말한다면요. 

 

터널을 빠져나온 뒤에도 기사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어요. IMF 3개월 전에 식당을 차렸다가 크게 망한 일, 의족을 끼고 1종 면허를 딴 일, 다시 택시 운전을 시작한 일, 어렵게 돈을 모아서 결혼한 일 등 사연은 많고 많았습니다. 결혼 상대로 인기가 있지는 않았다고, 아무래도 다리가 불편해서 그랬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제가 물었어요.


“그랬는데 아내분과는 어떻게 결혼하게 되셨어요?” 


행복한 한숨 소리가 뭔지, 선생님도 아시죠? 그런 소리를 내며 기사님이 말씀하셨어요. 


“지금 목적지가 1킬로미터 남았는데……”


그러고는 덧붙이셨습니다.


“이 얘기는 그 안에 다 할 수가 없어요. 도저히 짧게 말할 수가 없는 이야기예요.”

 

우리는 침묵 속에 있다가 서로 공손히 인사한 뒤 헤어졌습니다. 아마도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입니다. 택시에서 내리자 호흡곤란 같은 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기사님이 품은 사랑 이야기의 수만 가지 가능성만이 제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지의 영역이죠. 

 

미지라는 말은 좀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아직 알지 못함’이잖아요. 언젠가는 알게 될 테니 시간에 두둥실 실려가보라고, 계속 살아보라고 등을 툭툭 쳐주는 단어로 느껴집니다. 폐소공포증처럼 실체를 파헤치고 싶은 일이 있는가 하면 그냥 미지의 영역에 두고 싶은 일도 있죠. 묻거나 해석하지 않아도 좋을 경험들 말입니다. 미처 듣지 못한 기사님의 사랑 이야기처럼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고정되기도 해요. 저에게 그는 길고 긴 사랑을 품고 택시를 모는 운전자로, 그에게 저는 터널 안에서 창문을 열며 우는 승객으로 영영 남을 것입니다. 미지란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기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 글을 써왔습니다. 시간 안에 다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야기도 어떻게든 다듬어서 완성하곤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쓰지 않는 이야기 또한 있었습니다. 각별한 경험을 어디에도 발표하지 않을 때 보존되는 자유와 행복을 선생님도 아실 겁니다. 말을 아낀 택시 기사님도 분명 아실 테죠. 

 

하지만 오늘은 묻고 싶군요. 도저히 짧게 말할 수 없는 사랑 이야기에 관해서요. 선생님께서 굳이 할 필요 없는 도배를 왜 했는지 저는 아직도 몰라요. 도배하는 남궁인은 미지의 남궁인입니다. 다만 일부러 힘을 빼려던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에요. 지치고 싶어서 갑자기 대청소를 시작한 날들이 떠오릅니다. 선생님도 가끔은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육체를 지치게 만들지 않나요? 이를테면 저는 애인이 떠날 것 같을 때 혹은 떠났을 때마다 그랬습니다. 애인 없이도 이 집에서 쭉 살아가야 하니 말입니다. 혼자 있으면서도 외로움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구석구석 치우는 게 좋잖아요. 큰 가구도 번쩍번쩍 옮기고 서랍 정리도 다시 하고 이불은 햇볕에 소독하죠. 집 정리에 몰두하다보면 혼자라는 사실을 그냥저냥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청소는 제가 마음을 굳게 먹고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를 쓸고 닦으며 마음을 굳게 먹는 건 선생님도 비슷할 듯합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실지 궁금해요. 저는 엄청나게 고마웠다는 생각을 합니다. 뭐가 그렇게 고마웠냐면…… 


역시 짧게 말하기 어렵군요. 연인에 관해 쓰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에요. 독자들이 제 글에 가장 자주 남긴 말은 ‘솔직하다’는 감상평인데요. 그것은 저에 대한 루머에 가깝습니다. 아시다시피 에세이는 솔직함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죠. 하지만 사랑하는 상대로부터 커다란 배움을 얻으며 글을 쓰는 것만은 사실이에요. 때때로 연애는 엘리베이터와 터널에서의 망상도 가뿐히 극복하게 할 만큼 전지전능합니다. 바로 그 연인이 아니었다면 쓰이지 않았을 문장들이 제 책에는 수두룩해요. ‘하마’라는 가상 인물도 그렇게 탄생했죠. 제 글 속에서 하마는 빛나는 유머와 탄탄한 육체를 가진 오래된 연인입니다. 이슬아의 편집된 자아는 하마라는 축에 기대거나 부딪치며 활약하곤 했습니다. 실제의 연인은 하마보다 훨씬 훌륭하고 복잡한 인물인데요. 그를 몰랐다면 제 글에 하마 같은 사람도 결코 없었을 것이에요. 제 글에는 분명 연애와 함께 확장된 세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제 연인에게도 좋은 일이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택시 기사님처럼 말을 아끼는 게 나았을지도요. 

 

작가랑 사귀는 사람들의 특수한 피로에 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동종업계 종사자이니 여쭤봅니다. 연인들의 마음은 가능한 한 미지의 영역으로 두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2021년 3월 22일

아는 게 힘인지 모르는 게 약인지 헷갈리는 

이슬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