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고통을 공부하느라 고통스러운 남궁인 선생님께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답장이 늦었습니다. 우리는 2인조 계주 팀 같은 것이어서 제가 늦을수록 선생님의 마감 기한도 촉박해지는데요. 잘 알면서도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글을 얼마나 빨리 쓰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처럼 대부분의 원고를 마감 당일에 시작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어요. 바통을 늦게 전달받아도 거뜬하게 이어 달릴 위인이시잖아요. 달리기가 취미이시기도 하고요. 

 

저는 다시 <일간 이슬아>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새삼스럽지만 매일 한 편의 글을 마감합니다. 매일 쓰는 것은 딱히 어렵지 않습니다. 혼자서 매일 쓰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죠. 문제는 쓰기가 아니라 보여주기에 있습니다. 수많은 독자들에게 돈을 받고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글을 매일 완성한다는 게 도대체 가당키나 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2018년 2월에 <일간 이슬아>를 창간했으니 벌써 4년 차입니다. 잦은 휴재를 하며 띄엄띄엄 쓰다가 이번주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월요일에는 제가 이 짓을 또 시작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울면서 썼고, 화요일에는 아무렇지도 않아서 별생각 없이 뚝딱 썼고, 수요일에는 글쓰기가 축복이라는 생각에 헤헤헤 웃으면서 썼습니다. 드디어 미친 거냐고 엄마가 묻더군요. 목요일에는 친구 원고를 싣는 날이라 엄격한 편집자가 되어 친구를 족치고 글을 고쳤습니다. 금요일에는 흘러간 댄스가요를 틀어놓고 춤을 추며 글을 썼고요. 어제인 토요일에는 이미 데드라인을 넘긴 이 서간문 원고를 쓰려고 했지만 급한 잡무를 처리하고 나니 기력이 딸려 쓰러지듯 잠들었습니다. 지금은 일요일 아침입니다.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숙면했습니다. 마감을 안 하니까 이렇게 잠을 잘 잡니다. 새사람이 된 기분입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그래도 이 정도면 기복이 없는 편입니다. 

 

보통 자정 무렵에 마감을 하는데 저녁이 되기 전까지는 무슨 글을 쓸지 모릅니다. 저녁부터 시작될 고난에 관해서 낮에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리 스트레스받아봐야 좋을 거 없으니까요. 스트레스받지 말라는 말만큼 공허한 말이 없긴 합니다. 위경련을 진단한 내과 의사 선생님들이 자주 하는 말이죠. 누군들 받고 싶어서 받겠습니까. 스트레스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하지만 마감의 압박에 관해서라면 저는 점점 덜 짓눌리는 사람이 되어온 것 같습니다. 마감을 너무 많이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쓸 때 괴롭지 않은 건 아닙니다. 

 

늦어놓고 말이 많았습니다. 다음부터는 마감에 늦지 않겠습니다. 

 

insiders라는 아이디의 출처를 알려주셨는데요. 정말 별거 없군요. 사실 저는 선생님이 인싸인지 아싸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사회적 지위에서 아싸여봤자 얼마나 아싸일 수 있겠습니까.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선생님의 무심함입니다. 열네 살에 만든 아이디를 마흔 살 무렵까지 쓰고 있다니…… 그동안 딱히 바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거겠죠. 귀찮기도 했을 테고요. 그 결과 중학생 때의 아이디로 동료 작가에게 놀림을 받는 중년이 되셨습니다. 무심한 선생님을 위해 새로운 아이디 후보들을 제안해봅니다.

 

1. dr.wr.nk (의사 겸 작가 남궁)

2. chekhov21 (21세기의 안톤 체호프) 

3. southpalaceman (남궁인, 남쪽 궁전에 사는 사람)

4. sparebowman (남궁인, 남은 활을 쏘는 사람)

5. othersneedyman (남궁인, 남들을 몹시 필요로 하는 사람)

 

맘에 드시는 것이 있다면 별도의 허락 없이 사용하셔도 됩니다. 

 

선생님의 리액션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습니다. 선생님은 상냥한 의사입니다. 하지만 위로가 필요한 애인에게 교양 있는 현대 서울 말씨로 “참 좋지 않은 일이었겠구나”라고 리액션하는 선생님의 모습 또한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이상한 방식으로 고유한 그 어투를 ‘휴먼남궁체’라고 정의하고 싶군요. 

 

휴먼남궁체는 친절하고 정중하지만 일면 매우 태연합니다. 내 슬픔과 함께 흔들리는 어투가 아니죠. 진정성을 의심받는 건 당연합니다. 선생님은 응급실에서 험한 일들을 너무 많이 겪은 나머지 웬만한 좋지 않은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로 인해 상대가 놀라거나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걸 보며 얻는 커다란 만족감이 연애에는 있지 않습니까. 너무 태연한 상대의 얼굴을 보면 멱살을 잡고 싶어지죠. 좀 파괴적인 이 속성이 때때로 즐겁지 않으신가요. 파괴만큼이나 회복도 잘되는 곳이 연애의 시공간이잖아요. 

 

호기심에 관해 물어보셨지요. 제가 가장 궁금해하는 사람은 애인입니다. 이 사람을 더이상 궁금해하지 않는 미래를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궁금한 건 그의 늙은 모습입니다. 지금과는 또 다르게 멋질 것으로 짐작됩니다. 더 나이든 그와도 친구할 수 있는 행운이 저에게 주어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평생 한 사람을 깊게 탐구하는 행운이요. 

 

하지만 연애 말고도 다양한 만남이 있고 애인 말고도 궁금한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제가 모르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수두룩합니다. 그들이 왜 궁금하냐고 물어보시는 거라면 배우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배우지 않는 상태의 저는 너무나 시시합니다. 

 

아무래도 자신의 사연이 소진될 때가 글쓰기의 진정한 시작일 거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지요. 자신의 세계를 확장할 의무가 작가들에겐 있다고도 하셨고요. 물론입니다. 저는 저를 잘 궁금해해서 겨우 데뷔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저 아닌 것을 진심으로 궁금해하게 되어서 작가 생활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에 대한 궁금함만으로는 100편 이상의 글을 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장르를 이동하기도 어렵고요. 데뷔작 이후 인터뷰를 쓰기 시작한 건 저로서는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모릅니다. 잘 묻고 잘 듣는 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잘 쓸 수도 없다는 걸 알게 된, 스스로에게 별 밑천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의 움직임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궁금해하지 않으면 끝장입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품은 자들의 친구가 되는 것만이 저의 살길입니다. 그들에게 질문하고 보고 들은 뒤 또다른 좋은 이야기로 완성하는 작업을 잘해내고 싶습니다. 이런 저를 위해  호모 큐리어스(homo curious)라는 말을 만들어봤습니다. 호모 큐리어스는 좀 투명해야 하고 꼬이지 않아야 하고 체력도 좋아야 합니다. 물론 셋 다 잘 되지 않는 날들도 있는데요. 그런 날에도 좋은 이야기는 저를 바꿔놓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처럼 저도 우정과 함께 변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정의 범위는 갈수록 커다래지고 있습니다. 가까운 대상, 먼 대상, 만나본 대상,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자꾸 마음에 걸리는 대상, 오래 산 대상, 짧게 산 대상, 사람 아닌 대상, 이미 세상을 떠난 대상…… 이렇게 적고 나니 우정의 능력이야말로 작가들이 갈고닦아야 하는 무언가처럼 느껴집니다.

 

이 서간문을 통해서도 우리는 우정을 배우고 있군요. 선생님은 저의 유일한 의사 친구라 저는 의사만 보면 남궁인 선생님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하게 됩니다. 최근엔 미국 드라마 <하우스>를 다시 보고 있어요. ‘하우스’라는 이름의 의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인데요. 선생님은 메디컬 드라마를 전혀 보지 않는다고 하셨죠. 현실과 너무 달라서요. 저로선 그 갭을 잘 모르기 때문에 몰입하는 데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하우스>를 볼 수 있습니다. 하우스는 놀랍도록 탁월한 진단 능력을 가진 의사지만 남궁인 선생님과 달리 몹시 불친절하고 까칠합니다. 거의 괴팍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휴먼괴팍체’로 환자들을 응대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 죽을 뻔한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죽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고.

 

하지만 남궁인 선생님의 편지를 읽으면서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죽음으로도 바뀌지 않는 일들 또한 아주 많다고요.

 

텔레비전에서 선생님을 자주 본 요즘입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은 일에 관해 증언하셨지요. ‘피가 거꾸로 솟았다’는 표현과 함께요. 커다란 슬픔이나 분노 앞에서 우리는 신체를 은유로 쓰는 말들을 합니다. 목놓아 울었다거나, 비위가 상했다거나, 간담이 서늘했다거나, 숨통이 조여진다거나…… 그렇게 몸의 느낌을 최대한 동원해서 표현해도 다 전해지지 않을 만큼의 불행을 저는 선생님만큼 많이 알지 못합니다. 

 

다만 선생님의 말을 통해 선생님 앞에 놓였던 몸을 흐릿하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응달에 남겨진 사람들의 몸을요. 선생님은 그런 몸들을 날마다 수백 명씩 보실 텐데요. 의사란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불행의 양을 초과하는 직업일 거라고 문득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은 가혹하리만치 고통을 공부하는 자리에 서 계십니다. 응급실에서 겪은 일을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역시 그 공부의 연장선이겠지요. 

 

텔레비전에서 선생님을 보면 가끔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말을 많이 한 날, 특히 커다란 매체를 통해 내 말이 확대재생산된 날에 저는 잠이 안 오던데요. 선생님은 괜찮으신가요? 주워담고 싶은 말은 없으신가요? 후회로 뒤척이는 밤에,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궁금하면서도 알기 조금 두렵습니다. 

 

선생님은 저의 호기심이 빛난다고 말씀해주셨지만 저 역시 알고 싶은 만큼만 알며 살아갑니다. 사실 우정의 범위를 넓힌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우정에는 연민도 따르고 수고도 따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만큼 마음이 아플 테고요. 이전부터 고통스러웠던 이들이 더 고통스러워지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저의 체력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 앞에서는 그저 입을 다물 뿐입니다. 눈도 잘 안 마주치죠. 

 

그러나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 일이 세상엔 너무 많다는 걸 잘 알아서, 어떤 날에는 그다지 행복하고 싶지 않다는 남궁인 선생님에 대해서는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선생님을 만나 웃고 떠들다가 돌아선 뒤에도 무언가가 마음에 걸립니다. 선생님은 멀쩡하지만…… 멀쩡하지 않으니까요. 

 

너무 많은 고통과 가까이에 있는 선생님께 이수명 시인의 문장을 전하고 싶습니다. 

 

“한 고통에 묶여 다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여러 고통에 끊임없이 사로잡히는 동시에 이 고통에서 저 고통으로 옮겨가며 자유롭기도 하실 거라고 짐작합니다. 선생님이 하나의 고통을 벗어난 뒤 들려주시는 이야기로부터 늘 무언가를 배웁니다. 궁금하지 않았던 일들이 궁금해졌습니다. 죄다 만만치 않은 이야기들이지만,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것들입니다. 

 

선생님이 겪는 일들을 어깨너머로 바라보며, 쾌락도 고통도 정교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2021년 2월 7일

고통을 공부하느라 고통스러운 선생님과 친구여서 기쁜 

이슬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