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느끼하지만 고마운 남궁인 선생님께

어느 양복 화보에서 남궁인 선생님을 봤습니다. 화보 속 선생님은 역시나 옆을 보고 계시더군요. 이번 옆모습에는 부티가 흐른다는 점이 달랐지만 말입니다. 화보 속 선생님은 꼭 좋은 시계를 차고 좋은 차를 몰고 비싼 레스토랑에 다니고 자기 손으로 할 줄 아는 요리라곤 오일파스타밖에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가지나 호박이나 버섯도 없이 편마늘만 겨우 몇 개 썰어넣은 인색한 파스타 말이에요. 또는 창업을 했다가 망한 사람, 그래도 큰 타격이 없을 정도로 집에 돈이 많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좋은 정장의 효과라면 정장의 세계란 참으로 놀라운 것 같습니다. 


사실 남궁인 선생님의 평소 옷차림은 매우 수수하죠. 저에게 선생님은 평범한 티셔츠에 평범한 바지를 입은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옥상 텃밭에서 키운 깻잎으로 김치를 담그고 집밥을 살뜰히 해 드시는 것도 알고 있어요. 시계를 차고 계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차셨더라도 제가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차도 마찬가지고요. 명품 옷을 입은 채 외제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면 큽 하고 웃음이 납니다. 낯간지러워서겠죠. 물론 돈을 많이 준다면 저도 정장 화보나 차 광고를 찍을 의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들어오는 광고는 어쩐지 피임약, 유기농 생리대, 찌찌 브라, 사각팬티, 동물 실험 안 한 화장품 같은 종류입니다. 모두 의미 있고 소중한 제품들이지만 뭐랄까 너무 전형적인 비건-에코-페미니스트로 보여질 것 같아 도망치고 있습니다. 이미지 쇄신을 위해 분발하려 합니다. 언젠가 선생님처럼 부유해 보이는 광고를 찍을 수 있도록요. 한편 의사 가운을 입은 유능한 선생님은 다행히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만나지 않기 위해 건강을 관리하며 지내겠습니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답장은 잘 받았습니다. 저의 선제공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셨더군요. “정신 차려!” 정확히 알아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제가 선생님께 하고 싶었던 말을 네 글자(정신 차려)로 줄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치는 뒤통수는 간혹 느끼한 사랑 얘기를 쓰는 작가 남궁인의 뒤통수일 뿐, 의사 남궁인의 뒤통수는 결코 아닙니다. 거의 석 달 만에 답장을 쓰네요. 바빴습니다. 수십 번의 원고 마감과 강연과 행사와 인터뷰와 온라인 수업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여름이 끝났어요. 


하지만 이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겠죠. 선생님은 무려 코로나 시대의 응급실 의사니까요. 심지어 최근에는 의사들이 집단 휴진중인 병원에서 당직을 서는 응급실 의사가 되셨지요. 선생님을 비롯한 병원의 모든 노동자분들이 긴장하며 고생하고 계실 듯합니다. 과로로 몸과 마음이 축나실 것 같아 걱정입니다. 길어지는 코로나 사태 속에서 ‘몸을 갈아넣어서 일하고 있다’라고 쓰신 게 잊히지 않네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을 와중에 제 전화도 받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저희 아빠 웅이님의 증상은 호전되었어요. 담낭에 돌이 있고 림프샘이 부어 있었다고 해요. 직접 치료해주신 것은 아니지만 증상을 들어주시고 “상당히 아프셨을 거예요”라고 말씀해주신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만났다면 아마도 선생님은 팔자 눈썹을 하고 저희 아빠 이야기를 들어주셨겠죠. 의사의 숙명 중 하나는 ‘알아주기’인 것 같다고 새삼 생각했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뿐 아니라 얼마만큼 아픈지 알아주면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할 일을 하며 지내시겠지요. 생이 길어질수록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의 가짓수가 늘어간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어요. 세상 누구라도 그 이해력은 세월과 함께 깊어지고 넓어지겠지만 의사가 직업인 사람이라면 특히 더 그럴 것 같습니다. 힘드시더라도 가끔 문학계 주치의로서 전화를 받아주시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제 몸은 대체로 건강합니다. 유병장수有病長壽형 인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체력이 약하고 탈이 잘 난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뒤 조심조심 살아가는 젊은이. 그게 바로 접니다. 아프지 않으려고 꾸준히 운동해왔습니다. 장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집필 노동의 특성상 운동을 안 하면 몸이 고장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폐소공포증이 나날이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혹시 좋은 정신과 의사를 알고 계시다면 소개해주세요. 예전에는 엘리베이터나 공중화장실에서만 힘들었는데, 요즘엔 그보다 넓은 공간인 버스나 지하철이나 계단실에서도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집니다. 약을 처방받는 게 좋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항불안제를 복용해보았는데 너무 졸리고 늘어져서 글을 쓸 수가 없었거든요. 오히려 다른 커다란 충격 혹은 다른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느낌입니다. 폐소공포증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을 거 아니에요. 제 몸과 마음이 여유가 있으니까 이러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까, 무서워할 여유요. 


유독 바보 같아지고 약해지는 부분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불안에 취약하신 편일까요? 범불안장애가 기저질환이라는 말씀을 듣고 조금 놀랐습니다. 불안한 상황에 이골이 나서 마음이 일면 무뎌진 분일 거라고 짐작했거든요. 이 추측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겠지요. 온갖 사고와 죽음을 보아도 무뎌지지 않는 마음이 있을 텐데요. 그래서 퇴근 후에 글을 쓰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해봅니다. 새살처럼 약한 마음 때문에 시작된 글들이 있을 거라고. 


저는 공포영화를 전혀 보지 못합니다. 잔인한 것은 물론이고 약간의 서스펜스조차 버겁습니다. 누군가가 쫓기거나 다치거나 죽는 신scene이 나오면 고개를 숙여버립니다. 그래서인지 응급실에서 일하는 제 모습은 상상조차 안 됩니다. 감정 기복도 적고 우울하지도 않고 화도 없는데 겁은 많습니다. 500명 앞에서 말하는 건 무섭지 않아요. 일간 연재의 압박도 그럭저럭 괜찮고요.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혼자 탈 때면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이 안 쉬어지고 무섭습니다. 그건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의 공포감이지요. 우선 최대한 계단을 이용하며 살아가고 있는데요. 실체가 없는 공포에 이렇게까지 사로잡히는 게 이상합니다. 선생님의 정신에도 그런 부분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다루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양복 입은 모습이 멋지고 웃기다고 말하려던 것뿐인데 딴 얘기가 길었습니다. 선생님이 보내주신 다정스러운 답장 때문입니다. 문득 남을 생각하다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서간문의 본질이라고 하셨죠. 무섭고 위급하고 바쁘고 고통스러운 일터에서 근무하고 계실 선생님을 생각하다가, 아주 작은 공포에도 걸려 넘어지는 저를 생각했습니다. 


달라지고 싶어서인 것 같습니다. 지금보다 담대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선생님이 쓰신 것 중 “두려움과 두려움을 이길 힘을 동시에 주는 당신”이라는 문장을 가장 좋아한다고 제가 말씀드렸는데요. 선생님의 답장을 읽고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바치고 싶었습니다.

‘느끼함과 느끼함을 이겨낼 힘을 동시에 주는 당신’

저에게 선생님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편의상 그 힘을 느끼느끼력이라고 줄여 부르겠습니다. 느끼느끼력뿐 아니라 공포공포력도 배우고 싶습니다. 세상의 온갖 무서움을 이기는, 무서울 만큼 강한 내면의 힘을 상상합니다. 


선생님이라면 그 힘에 관해 조금이라도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2020년 9월 1일

힘을 탐구하는 이슬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