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시발 임신했나?’ 하는 건 저 혼자가 아닌 것 같더군요 _이랑

지금은 새벽 세시 반입니다. 집에서 누워 있다가 잠이 안 오는 시간을 더이상 견디기가 힘들어 좀전에 작업실에 왔습니다. 올해는 불면증도 불면증이지만 잠이 들어도 오래 자지 못해서 무척 괴롭습니다. 불면증과는 꽤 오랜 인연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자다 깨다 하는 건 새로운 증상이라 이걸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고민중입니다. (선잠증?)

 

가끔 새벽에 작업실에 옵니다. 파트너와 싸워서 답답할 때나 잠을 청하고 또 청해도 소용이 없어 화가 나면 이렇게 작업실로 오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답답한 마음에 나오게 되네요. 예전부터 답답하면 밤중에 집을 뛰쳐나오곤 했습니다. 어릴 땐 집을 나오면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었어요. 밤늦게 경비 아저씨가 순찰을 돌다 저를 발견하면 꾸짖어 집에 들여보낼 게 뻔했기 때문에, 순찰 시간이 되면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 숨었습니다. 경비 아저씨도 피할 겸, 혹시 저를 찾으러 나올지 모르는 엄마도 피할 겸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 가만히 숨죽이고 있으면 재미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동네 고양이들이 놀이터에 하나둘 모여드는 것이었지요. 그들에게 놀이터는 거대한 화장실이었을까요? 모래로 가득한 놀이터에 모여든 고양이들은 여유롭게 이곳저곳을 거닐기도 하고, 모래 위를 뒹굴며 무척 행복해 보이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밤의 놀이터는 고양이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날은 무척 슬픈 날이자 (슬퍼서 집을 나온 거라서요) 기쁜 날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생이 된 후 처음 제 이름으로 계약한 집은 월세 십오만 원짜리 옥탑방이었습니다. 너무나 작고, 춥고, 더운 곳이었지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만난 연인과 함께 살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지만, 그와 수백 수천 번 다툰 기억만 납니다. 연인과의 싸움이 길어지면 좁은 옥탑방을 뛰쳐나갔습니다. 어릴 땐 집을 나오면 놀이터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면 됐지만(거긴 생각보다 안전한 공간이었네요) 제가 살던 학교 앞 옥탑방 근처는 그리 안전하지 않은 공간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밤중 혹은 새벽에 집을 나와 골목을 걸으면 이런저런 남자들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제게 대기업 명함을 내밀며 ‘같이 모텔에 가고 싶다’고 하는 사람(미친놈)도 있었고요. 밤 외출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 이후로는 답답해도 밖을 거닐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자전거를 타고 오 분이면 도착하는 작업실에나 오지, 밤중에 거리를 걷거나 뛰는 건 여전히 무섭네요.

 

잠이 오지 않는 시간에 제 머리는 팽팽 돌아갑니다. 강제종료를 해도 도무지 전원이 꺼지지 않는 컴퓨터처럼 동시에 여러 생각들이 펼쳐져 잠이 찾아들 새가 없습니다. 최근 제 머리는 ‘낙태죄 폐지’ 건으로 팽팽 돌았습니다. 며칠 동안 관련 기사나 글을 찾아보다, 마음을 다잡고 제 임신중지 경험에 대한 짧은 글을 SNS에 올렸어요. 한 번도 공개적으로 말해본 적 없는 얘기였는데, 갑자기 ‘내가 왜 그동안 말을 안 했지?’ 아니, ‘내가 왜 숨겼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짧은 글을 올린 뒤, 그때의 기억을 찬찬히 글로 써볼까 하다 슬릭에게 보내는 편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다다랐습니다.

 

문득, 이 년 전 우리가 함께 참여했던 무대가 떠올랐거든요. 언제나 그렇듯 페미니즘 관련 행사였죠. (우리는 페미 행사 사대 천왕 중 두 명이잖아요.) 그때 처음 슬릭과 인사를 나눴네요. 대기실에서 슬릭은 비건 샌드위치를 먹었고 전 논비건 샌드위치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기실에서 나와 제 앞 순서였던 슬릭의 공연을 신나게 구경했습니다. 흰 멜빵바지를 입은 슬릭이 “이건 내 꺼야!” 하고 랩을 시작하자 관객들이 마구마구 뛰기 시작했어요. 그날 그 행사장에서는 웃통을 깐(이 표현 적절한가요?) 여성분들이 꽤 많았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무대에 섰을 때, 맞은편 객석에서 즐거운 표정으로 상의 탈의를 한(좀더 적절한 표현을 써봅니다) 관객들을 마주보며 노래하다 문득 저도 상의 탈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며 몇 곡을 부르다 결국 중간에 무대에서 상의를 탈의했죠. 그때 큰 환호를 받았던 게 무척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는 대학교 삼학년 단편영화 워크숍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촬영을 앞둔 터라 시기가 선명하게 기억나네요.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촬영 어떡하지?’였거든요. 십오 분짜리 짧은 단편영화지만 그 한 편을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시나리오를 쓰고, 수업을 들으며 글을 고치고, 없는 돈으로 제작비를 마련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연신 부탁해가며 스태프를 꾸려 겨우 준비한 촬영이 코앞이었지요.

 

당시 연인과는 성관계를 가질 때마다 콘돔을 사용했기 때문에 임신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생리 예정일이 지나고도 생리가 시작되지 않고, 가슴이 이상하게 팽팽하기에 불안해하며 임신테스트기를 샀습니다. 결과는 두 줄. 혹시 싸구려 테스트기가 거짓말하는 걸까봐 몇 번 더 테스트기를 써보아도 연달아 두 줄이 나오자 급히 산부인과를 찾았습니다. 규모가 꽤 큰 곳이어서 복도에 길게 늘어선 대기 의자에 무척 많은 산모들이 앉아 있던 기억이 납니다. 배가 잔뜩 부른 여성들로 가득한 공간에서 저는 왠지 부끄러운 감정을 느꼈습니다. 대기실이 아이를 낳을 사람, 낳지 않을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를 진찰한 여의사는 임신주수와 초음파사진을 간단히 확인해준 뒤 출산할 생각인지를 물었고, 전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임신중지수술 날짜를 잡고 병원을 나왔습니다.


난 죄를 짓는 걸까.

이렇게 하루 만에 결정하는 사람도 있을까.

아니 근데 당장 촬영이 있어서 생각할 시간이 없어.

어쩌면 이 일을 평생 후회할까.

이 일을 언젠가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을까.

별별 생각이 들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학교 동아리방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답답하면 학교 안을 산책하곤 했는데요, 그날도 학교 안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학교 안은 경비원도 있고 그나마 안전했어요.) 제게 연인이 있는지, 성 경험이 있는지 알 리 없는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기에 동기 중 가장 가까운 다섯 살 위 언니에게만 소식을 전했습니다.

 

수술 날짜가 되어 다시 병원을 찾았습니다. 여전히 배부른 산모들로 가득한 긴 복도를 걷는데, 그 누구도 제 걸음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망한 패션쇼 런웨이를 걷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는 문구와 파스텔톤 인테리어로 꽉 찬 산부인과는 제게 ‘분위기 파악하고, 알아서 눈에 띄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수술대에 오르니 간호사가 숫자 열부터 거꾸로 세라고 하더라고요. , 아홉, 여덟…… 그리고 아무 기억도 안 납니다.

 

마구 흔들어 깨우는 거친 손길에 눈을 떠보니 커다란 패드가 깔린 팬티가 입혀져 있기에 놀랐습니다. 수술 전 하의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그사이 누가 팬티를 입혀준 걸 텐데, 갑자기 그게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간호사가 일어나라고 하도 흔들어대서 수술 기억은 전혀 없는 채로 비틀대며 일어나 지정해준 침대로 가 누웠습니다. 한 두 시간 누워 있다 집에 가라고 하더군요. 마취가 풀리기 시작하자 심한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생리통과는 전혀 다른 복통에 진통제를 여러 번 맞고도 아파서 엉엉 울었습니다. 계속 심해지는 통증에 정신없이 울면서도 드라마에서 봤던 한 장면을 내내 머릿속에 떠올렸습니다. 혼자 임신중지수술을 받고 비틀거리며 병원을 나오는 어느 여주인공의 모습이요.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고, 전 미디어에 큰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혼자 걸어서 나갈 수가 있냐고요. 병원에서는 진통제를 줄 만큼 줬다며 아프다고 울면서 소리치는 제게 조치를 더 취해주진 않았습니다. 수술이 막 끝난 직후였지만 ‘앞으로 또 임신하면 이 아픈 걸 또 겪어야 하는 건가?’ 싶어 언젠가 찾아올 두번째 수술을 미리 상상하며 공포에 떨었습니다. 한두 시간 후 병원을 나설 때는 연인이 집에서 빌려온 차에 기다시피 겨우 들어가 앉았습니다. 학교 작업실에 도착해 동기 언니가 보온병에 담아온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었습니다.

 

이후로도 몇 주간은 계속 배가 아파서 힘을 주지도, 웃지도 못했습니다. 올해 암으로 사망한 제 친구가 한바탕 웃고 나면 다음날 몸이 너무 아프다고 했는데, 그 기억이랑 겹치네요. 웃는 행위가 이렇게나 몸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이라는 게 새삼 신기합니다. 어쨌든 수술이 끝나고 곧 시작될 영화 촬영을 준비해야 했기에 가끔 터지는 웃음을 참아가며 열심히 견뎠습니다. 웃을 수 없던 것과는 별개로 우울감이 슬금슬금 찾아왔고, 그 우울감은 아주 오랫동안 제 곁에 머물렀습니다. 실은 이 시기에 당시 연인의 누나가 출산을 했기에 그는 조카의 탄생을 기뻐하며 아기를 보러 자주 집에 갔습니다. 그럴 때마다 왠지 제 우울감은 더 심해졌고요. 어느 날 수술이 끝나고 몇 개월이 지났는데도 우울감이 너무 오래간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그와 심하게 다투었고, 그 직후는 아니지만 곧 그와 이별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임신 공포에 시달립니다. #낙태죄폐지’ 해시태그를 검색해 사람들의 글을 읽다보니 성관계를 하지 않은 달에도 생리가 늦어지면 ‘시발 임신했나?’ 하는 건 저 혼자가 아닌 것 같더군요. 언젠가 찾아올지 모를 두번째 수술의 통증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배가 아픕니다.

 

이 짧은 이야기를 십 년 넘게 품고 있으면서 한 번도 글로 써본 적이 없는데, 슬릭에게 보내는 편지에 처음으로 쓰네요. 오늘도 많은 것들이 답답하고 밤 산책은 할 수 없지만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어 다행입니다. 쓰다보니 어느새 오전 여섯시가 되었네요. 잠은 여전히 올 기미도 없지만 집에 들어가기 전 “이건 내 꺼야!” 하고 시작하는 슬릭의 노래 <내 꺼야>를 들으려고 사운드클라우드를 틀었습니다.

 

이건 내 꺼야

니가 뭔데 언제부터 관심 있는 척을 하고 자꾸 나대는 거야

위로 올라가면 나의 과거를 죽이다가 급히 발 빼는 모양

너는 날 죽인 거야

감히 누가 누굴 탓하는 거야

손가락 펴는 거야

모두 다 아는 거야

모두 다 알아


내가 나의 새끼를 가질 권리는 내게 있어

나의 생리를 말할 권리는 내게 있어

어떤 새끼도 나의 몸짓과 말에 있어

뭘 대신할 수 없어

 

제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던,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슬릭이 이 노래 속에서 빠르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그나저나 랩은 이렇게 가사가 많고 빠른데 대체 어떻게 외워서 공연을 하나요? 전 보면대에 가사집을 올려놓고 보면서 노래하는데…… 래퍼에게는 보면대가 허락되지 않나요? 갑자기 궁금하네요.

 

 

2020 10 15

이랑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