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예측 불가하고 우아한 세계, 이달의 소녀

‘이달의 소녀’라는 이름은 그저 낯설게만 느껴졌다. ‘구독’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순차적인 월간 멤버 소개, 그리고 걸그룹을 상징하는 ‘소녀’라는 단어의 심플하고도 직관적인 조합이라니. 하지만 어쩐지 키치적으로만 다가온 그 첫인상이 놀라운 반전을 이뤄내기까지는 단 몇 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2017년 나와 이들을 처음으로 조우하게 해주었고, 내가 품고 있던 이들에 대한 편견을 지우게 만들어준 그 곡은 바로 이달의 소녀 프로젝트의 여섯번째 멤버로 소개된 김립의 솔로 싱글 <Eclipse>였다. 극도의 세련미, 우아하기 그지없는 매혹적인 R&B 스타일의 곡인 <Eclipse>는 케이팝에 흔한 ‘가요적’인 멜로디 한 줄 없는 심플한 세련미로 온통 휘감겨 있다. 이 곡은 한국 힙합의 명반으로 꼽히는 이센스E Sense의 《The Anecdote》를 프로듀스한 대니얼 오비 클라인이 작곡과 프로듀싱을 맡아, 대형 기획사가 아닌 마이너 기획사의 초기 작품으로서는 예외적인 퀄리티를 성취할 수 있었다. 솔로 곡일뿐더러 이달의 소녀의 디스코그래피를 통틀어 오히려 예외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곡이지만, 이 곡의 각별한 완성도는 이달의 소녀라는 그룹의 향후 행보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 것인지를 가늠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달의 소녀의 음악은 뒤에서 따로 언급할 세계관이나 설정과 같은 면모를 전혀 고려하지 않더라도, 기존의 메이저 기획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인력 및 축적해온 노하우가 만들어낸 그것들에 비해  결코 모자람이 없는 모양새와 만듦새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JYP와 울림엔터테인먼트를 거치며 아이돌 아티스트 제작에 남다른 경험을 축적한 A&R 정병기의 비전은 이달의 소녀의 음악과 세계관에 충실히 적용되어 이들의 프로페셔널한 음악과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바로 그 점에 있어서 ‘루나버스LOONAverse’라 불리는 이들의 복잡하고도 독창적인 세계관을 함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소년소녀 소설, RPG게임, 저패니메이션 등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아온 케이팝의 내러티브는 서구 팝 음악에서 통상적으로 해온 개념적인 앨범의 구성을 넘어서서 하나의 퍼스널리티, 아바타, 혹은 페르소나를 내세워 일관된 내러티브가 중심이 된 독립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 세계관이 음악을 즐기기 위해 반드시 숙지해야 하는 선행 요소라 말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시스템을 통해 쏟아지고 있는 케이팝 신 안에서 팀의 차별화된 정체성을 확보해주는 동시에 팬들로 하여금 보다 깊숙이 ‘관여’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기획사들, 특히 보편적인 대중보다는 마니악한 팬덤의 구축을 꾀하는 제작자들이 각별한 공을 들이는 요소기도 하다.


이달의 소녀가 가진 세계관에서 주목하게 된 부분은 이들의 세계관이 색상, 과일, 동물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설정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활동, 그리고 각각 다른 지향성을 가진 유닛들의 활동에 긴밀하고도 치밀하게 연결된다는 것이다. 한 그룹이 장르나 스타일 혹은 활동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유닛으로 활동해온 것은 케이팝의 역사에 늘 존재해왔던 것이지만, 이달의 소녀는 그 지점을 역으로 파고들어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 유닛이 되고, 여러 개의 유닛이 결국 하나의 그룹이 되어 만난다는 점, 무엇보다 그 과정을 몇 년에 걸쳐 차분히 보여줬다는 점에서(최초의 개인 솔로 곡에서 시작해 이들의 데뷔 앨범이 나오기까지는 무려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독특하다. 물론 이는 일반 대중에게, 심지어 팬들에게도 인내심을 요하는 집요한 구축의 과정일 수 있다. 그 세계관에 기꺼이 빠져들지 말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깊이로 파고들고 동참할지는 전적으로 대중의 관심 정도에 달린 것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경험은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쾌감을 반드시 선사해준다는 것이다(가령 이들의 노래 <Color>는 그들의 어떤 세계관을 나타내는 곡이라는 사실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세련되고 즐거운 곡이다. 물론 그 세계관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가는 곡이 된다). 


이달의 소녀가 이름부터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콘셉트와 서사를 강조하는 그룹으로 인식되지만, 그들의 음악은 케이팝이라는 사운드의 세련된 미학에 이미 익숙해진 리스너라면 누구나 그 매력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만큼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지극히 케이팝다운 댄스 넘버에서부터 실크같이 유려한 R&B, 미국과 유럽권에서 각광을 받는 각종 클럽튠과 드림팝  유의 장르들, 청량하고 아련한 제이팝 스타일의 곡들까지 넘나들며 넓은 폭을 자랑한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이들의 음악은 소위 ‘히트’의 여부와 무관하게 글로벌 케이팝 ‘덕후’들 사이에서 명곡으로 회자되는 경우가 많다. 진솔, 김립, 최리로 이루어진 이달의 소녀의 두번째 유닛인 ‘오드아이써클’의 <Sweet Crazy Love>는 대중적으로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지만 이달의 소녀의 대표적인 곡으로, 케이팝의 숨은 명곡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단출하면서 중독적인 그루브가 곡 전체를 흐르고, 간단한 비트의 변화만으로 곡이 가진 절제된 관능미를 마음껏 내뿜는다. 유려하게 엮여진 비트, 멜로디, 보컬과 랩의 조화는 이 유닛이 가진 걸크러시 콘셉트의 고혹적인 면모와 세련미를 매력적으로 부각시킨다. ‘소녀’의 성장과 만남을 내세운 걸그룹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아낸 이들의 ‘완전체’ 곡들 중에서 <Butterfly>는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싱커페이션이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비트와 그에 어울리는 팔세토의 보컬이 <Butterfly>라는 단어가 품은 우아한 몸짓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며 긴장감을 높여가는데, 곡은 뜻밖에도 예상된 절정으로 향하는 대신 심플하고 절제된 드롭drop으로 결론지어지며 “Fly like a butterfly”라는 구절만을 반복하며 그리움과 애수의 정서를 잔잔히 풍겨낸다. 


음악적으로 이달의 소녀가 갖는 강점 중 하나는, 걸그룹, 나아가서 아이돌 그룹들이 갖는 관습적 면모, 달리 표현하면 창법이나 음악 스타일 혹은 편곡 등에서 보이는 상투성이 상대적으로 적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달의 소녀의 모든 음악과 퍼포먼스가 케이팝의 평균적인 특성과 아주 먼 곳에 위치해 있는 아웃라이어적인 면모를 갖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음악이 가진 기본적인 특질들, 그러니까 세련미, 청량함, 아련함, 당당함 등의 요소들은 케이팝 걸그룹이 S.E.S와 핑클의 시대 이후로 블랙핑크와 트와이스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담금질해온 것들을 두루 소환하고 있다. 오히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이 요소들이 조합되고 표현되는 방식에 있다. 이달의 소녀는 메인 보컬이나 리드 댄서와 같은 포지션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팀으로 유명한데, 이 때문인지 이들의 음악은 특정한 음역대나 프레이즈 혹은 랩 퍼포먼스를 특정 멤버들이 독점하는 방식으로 편곡되지 않는 경향을 띤다. 이는 다른 그룹들에 비해 음악적인 예측 가능성을 줄여주고 매 곡마다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이달의 소녀에는 SM이나 YG가 그러하듯 그들 기획사의 음악들에 면면히 흐르는, 그러니까 ‘목소리’로서 회사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메인 보컬리스트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대중적 인기를 노리는 그룹들이 응당 그러하듯 파워풀한 보컬리스트 한 명을 중심으로 그룹을 구성하는 식의 전형적 포맷을 따르지 않는다. 이는 음악적으로 분명 큰 리스크를 안고 있는 구성이지만, 동시에 리스너 입장에서 레이블에서 내세우는 공식적인 스타일에 구애받지 않고 보다 음악이라는 콘텐츠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으로 작용한다. 가장 콘셉트에 충실한 그룹이면서 동시에 그 누구보다 음악에 집중하게 만드는 그룹이라는 점은 아마도 이달의 소녀가 가진 예상치 못한 매력인 것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이달의 소녀의 음악은 현재 국내외에서 케이팝 신을 이끄는 최고의 프로들의 솜씨와 수완이 모아진 결과물이다.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주체는 바로 작곡가 그룹인 모노트리MonoTree다.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케이팝 아이돌을, 그중에서도 걸그룹의 세계관과 정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톱클래스의 작곡가들로 이루어진 이 팀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세련되고 우아한, 동시에 청량하고 아련한 음악들을 쏟아내며 이달의 소녀의 디스코그래피를 풍족하게 채워왔다. 애틋하며 향수어린 감성적 선율의 마스터 황현을 필두로 한 모노트리의 음악은 이미 케이팝 신의 구석구석에서 그 매력과 상업성이 이미 충분히 검증되었지만, 이달의 소녀와의 어울림은 그중에서도 각별하다. 모노트리는 제이팝, 유럽의 댄스 음악, 미국의 흑인 음악을 자유롭게 해체 조합하면서 케이팝으로서 더 없이 적합한, 하지만 진부하지 않은 사운드의 스펙트럼을 구축했고, 이를 이달의 소녀가 가진 서사에 긴 호흡을 갖고 일관되게 적용시켜왔다. 통상 유기적이기보다는 기계적으로 느껴지는 케이팝의 작곡 시스템이지만, 이달의 소녀는 모노트리와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케이팝의 전성시대, 그리고 걸그룹의 홍수 속에서도 뚜렷한 색을 가진 그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최근 몇 년간 이달의 소녀에 대한 인식은 급변하고 있다. 특히 세계 시장, 특히 북미에서 오는 관심은 심상치 않다. 2019년에 있었던 케이콘을 통해 이들은 화려한 북미 쇼케이스를 마쳤고, 이미 구축된 현지 팬들의 뜨거운 환대를 받으며 미국 시장에서의 성공적인 행보를 예견케 했다. 그리고 불과 1년 뒤, 소녀시대, 블랙핑크, 트와이스 같은 대형기획사 걸그룹의 전유물이었던 빌보드 200에 새 앨범 《12:00》을 위치시키며 케이콘에서의 뜨거운 반응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중이다. 몇 가지 흐름의 변화가 눈에 띈다. SM의 음반 이외에서 좀처럼 그 이름을 찾기 어려운 이수만 프로듀서가 지난 앨범에 이어 전격적으로 총괄 프로듀서로 합류하면서 이달의 소녀는 기존의 밝고 청량한 이미지 대신에 조금 더 북미 친화적인 걸크러시 이미지에 강한 훅을 더했다. 걸그룹의 성장에 따른 필연적인 변화이면서 글로벌 그룹으로서의 위상 변화에 따른 능동적인 타겟팅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달의 소녀는 케이팝 매니아들의 우상에서 보다 대중 친화적인 그룹으로 영역을 맹렬히 확장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